첫째 날 : 교회를 울다(눅 19:37-42)
둘째 날 :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요 20:11-18)
셋째 날 :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사흘에 걸친 신년 사경회에서 말씀을 전했고, 위로와 감동(을 내가 받은 것)으로 시작하는 2023년 첫 주가 되었다. 마음의 벗인 P 목사님으로부터 조심스러운 제안, 초대가 왔을 때 "아이고, 사경회라뇨. 그것도 사흘이라니!" 가당치 않다고 했다. P 목사님이 나를 알고 나 역시 P 목사님을 알지만, 교회를 모르고, 담임목사님을 모르니까. 여기서 다시 소환되는(아니 내가 굳이 적극적으로 소환하고야 마는) '비목회자, 비남성' 강사 정체성이다. 사경회 사흘의 강단이 어느 비목회자 여성에게 주어졌다면, 박수를 치고 기뻐했겠으나, 나이고 싶진 않은 마음이다. 어떤 당연함, 당연히 '남성 목회자'의 자리라 여겨지는 곳에 여성이 선다면 그 자체가 기쁨이고 위로이겠으나... 나이기는 싫다. (이 기시감... 일 년에 한두 번 같은 말을 똑같이 하는 것 같아서 조금 민망하군.) 그러나 결국 갔다. 내가 거절하면 다시 남성 목회자의 자리가 될까 봐.

교회 올해 표어에 맞춰서 "울다"에 초점을 맞췄다. 둘째 날 말씀은 부담이 많이 됐다. 여성의 하나님, 가부장제 안에서 여성이 경험하는 하나님을 말해야 하는데, 연령층이 다양한 전통적(이라고 목사님은 소개하셨지만 알고 보니 '전통적'이기보단 차분하게 '진보적'인) 교회에서 여성주의적 관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염려가 되었다. 첫날 보니 연세 드신 어르신들도 꽤 계시고... 말씀 시작 전 연구소와 가족 단톡방에 절절한 기도부탁을 하고 강단에 섰다. 아주 편안하게, 준비할 때보다 더 아프고 뜨거운 가슴으로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소통된다는 느낌, 알아들어 주신다는 확신이 금방 생겼기 때문인 것 같다. 교회 얘기를 했던 첫날보다 더 깊이 연결된 느낌으로 집에 돌아왔다.

마지막 날 시작 전에 목사님께서 어느 80대 권사님께서 주신 것이라며 종이백 하나를 건네주셨다. 손편지와 함께 작은 냄비가 들어 있었다. 아, 정말 이렇게 뭉클한 편지와 선물이라니! 전날 "여성의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 유독 눈에 들어온 어르신 한두 분이 계시고, 누구이실지 짐작이 가기도 한다. 이 아름다운 편지와 예쁜 냄비. 이 여성적인 마음의 표현이라니! 말로 잘 형언되지 않는다. P 목사님은 "세대도 정치적인 입장과 신앙관도 다르신 권사님의 마음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궁금해졌어요. 아마도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오시며 겪은 무수한 차별과 억압에서 공감대를 경험하지 않으셨을까요." 했다. 그러셨다면... 아, 그러셨을 것이다. 이 편지가, 붉은색 냄비가 그리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지만, 알 수 없는 열정과 책무감으로 피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여성에게 결코 내주지 않는 마이크가 왔을 때, 피하면 안 된다는 누구도 부여하지 않은 사명감으로 서는 자리가 있다. 그런 자리일수록 부담이 크고 감수해야 할 것들이 있다. 내가 한 성경 해석에 대해 남편에게 묻고 또 물어서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다. 여성 스피커로서 흔히 겪는 일들이 있다. 기껏 설교(강의) 잘해서 성도들 마음 데우고 내려오면, 담임목사님이든, 부목사님이든 마이크를 이어받아 내가 한 설교를 다시 요약하는 일이 흔하다. 기도 제목으로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당신 생각 덧붙이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는 단련이 될 대로 되어 있다. 단련될 대로 되었지만 부담과 두려움은 항상 있다. 그리고 작년 어느 날, 늘 가졌던 두려움을 확인받는 일을 폭풍처럼 겪기도 하였다. 몇 안 되는 교계 여성 스피커로써 가지는 책무감과 타오르는 열정으로 부담 가득 안고 선 자리였고, 그 일로 많이 위축되었다.

이번 사경회는, 권사님의 저 편지와 냄비 선물은 아무래도 하나님의 작품 같다. 그분의 치유 프로젝트라는 심증이 강하게 온다. P 목사님의 조심스러운 비공식 초대를 받았을 때, 나는 어쩌자고 작년 그 일을 털어놓았다. 초대에 응할 수 없는 이유로. 특별한 말 없이 들어준 목사님의 반응에 어쩌자고 위로를 받았고. 그때 이미 하나님의 치유 프로젝트는 실행되고 있었다고 봐야겠다. 여성적인 것들이 치유되고 구원되어야 한다. 여성적인 것의 구원은 여성적인 것을 통해서 온다. 페미니즘 담은 설교를 하고, 80대 권사님께 공감을 얻는 일이 내게 일어났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내 등짝을 때리며 힘을 내고 어깨를 펴라고 해야겠다.

어릴 적 별명이 '우내미'였다. 우는 일에는 타고난 것 같다.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우시는 예수님을 따라 교회를 울고(교회를 위해서, 교회 때문에, 교회로 인해서, 교회를 고발하며, 교회를 희망하며.... 이 모든 말을 담아낼 적당한 조사가 없어서 문법을 파괴해야 했다.), 여성의 눈물을 보고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물어봐 주시는 예수님의 눈으로 여성의 삶을 다시 읽는다. 당신을 위해서 우는 여인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사랑하여 울고, 그 눈물로 내게 맡겨진 사람들과 연결되는 삶을 더욱 살아야 하겠나 보다. 나는 태생 '우내미'이니까.

여성적인 것이, 여성적인 것을 구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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