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8일, 연구소 카페에서 아침마다 나누는 '읽는 기도' 묵상이었다. 『리처드 로어 묵상 선집』을 읽고 아래와 같은 글을 붙였다. 다음 날 주일 예배의 설교 제목은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였다. 전날 넋두리 같은 글에 대한 답처럼 주어진 설교였다. 남편의 설교를 대문에 걸어두는 게 설교자 당사자 만큼이나 민망하지만, 이 민망한 짓을 하고 싶다. 힘을 내보려는, 허무를 극복해 보려는 노력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나는 죽어서 지옥 가지 않을 것이다, 정도를 부활 신앙으로 생각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묵상처럼 "부활이란 위대한 변형이며, 전혀 새로운 창조이고, 무엇보다 큰 '사랑'의 변형"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은총과 영광, 그 변형은 오늘도 일어나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야 할 아침입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기대가 없어서 무기력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은, 연구소는, 삶은, 신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지 않은 날들이 창밖의 하늘처럼 뿌옇기만 합니다. 과거와 현재, 눈에 보이는 것만이 내일을 예측할 수 있는 근거라 믿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숫자입니다. 통장의 잔고, 나이, 데드라인, 남은 시간, 인생의 등수, 내 모든 점수...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겠다는, 보지 않겠다는 무력감과 허무입니다.

부활 신앙은 진정한 의미의 낙관주의이고, 하나님 사랑이 해내실 일을 미리 사는 일인데 말입니다. 그 막막한 페스트 펜대믹 시대에, 죽어가는 몸을 하고서도 "All shall be well!"이라 하신 노르위치의 줄리안이 그 증인이겠지요.

"당신은 아직 부활 신앙에 미치지 못했군요! 지금 이 순간, 진정한 낙관주의를 다시 발견하세요."
오늘 묵상글은 경고로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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