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음식 준비를 하다 손을 베었다. 상처가 크진 않은데 깊어서 피가 콸콸콸 솟아났다. 처음 있는 일인데 여러 번 겪었던 것 같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명절 음식 준비하는 어느 여인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고, 내 일인데 내 일만 같이 않고, 남 일 같은 내 일, 내 일 같은 남 일이라 여겨졌다. 피의 연대... 여성들의 연대는 피의 연대!
 

 

음식 준비라야, 바비큐 재료 장 보는 것, 월남쌈 재료 준비, 국 하나 끓이는 정도였다. 아이들 다 빠지고 어른 다섯이서 펜션으로 가는 명절이라 (평소보다) 가벼운 일이었다. 명절이 내게는 (아니 모든 여성에게) 단지 일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의 문제이기도 마음의 문제이기도. 과도한 책임감, 그보다는 죄책감, 혐오감을 마주하고 내려놓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20여 년 전 명절의 기억으로 올 추석을 살지 않겠다 결심하고 기도하니 더욱 가벼워진다. 펜션 명절 이튿날은 화담숲 산책이었다.  이전의 기억이 아니라 오늘 여기의 공기를 호흡하며 걸으니 살아서 걷는 느낌이었다. 40년 전 명절의 기억으로 오늘을 아프게 살아가시는 어머니. 그 어머니를 도울 수 있는 부분과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길었구나 싶다. 한계를 인정하며 숲을 걷는 시간, 무겁지만 가볍고 슬프지만 감사했다.
 

잠시 혼자 걷는 시간도 생겼는데... 생명력 한껏 머금고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꽃봉오리들을 만났다. 소국! 아, 얼마나 고운가!

아주 재밌는 일이 있었는데. 다친 손가락이 엄지이다. 지혈하느라 꽁꽁 싸매기도 했고, 아프기도 하니 자꾸 힘을 주게 되어 엄지 척이 되었다. 바비큐 저녁 식탁. JP는 저쪽에 서서 고기를 굽고 나는 어머니, 시누이, 아주버님과 마주 앉아 식사하고 얘기를 나누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 손가락으로 "쵝오!"를 외치고 있는 거다. 어머님이 말씀하셔도 쵝오! 평소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않는 아주버님 말에도 쵝오! 고기 맛있어요, 쵝오! 달이 참 예뻐요, 쵝오! 그걸 깨닫고 현타가 와서 혼자 빵 터졌는데, '시'님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이걸 나눌 수도 없고... 웃참 하느라 죽을 뻔한 나 진짜 쵝오! 큭큭큭.
 

 
남은 월남쌈 야채에 새우 한 봉지 다 데쳐서 편안한 저녁 식사, 쵝오! 어쨌든 쵝오! 누구든 쵝오! 당신도 쵝오!
 
 

'마음의 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책 42 년  (0) 2023.12.22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0) 2023.11.24
사랑이 한 일, 십자가가 한 일  (0) 2023.08.14
하늘을 품은 땅  (3) 2023.07.19
종강의 밤  (2) 2023.07.0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