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딩 때부터 매 년 여름에는 수련회의 추억이 있습니다. 그 수련회의 기억은 나의 성장과 맞물려서 그 해마다 또렷한 빛깔로 분명한 이미지로 남아 있죠. 어느 해랄 것이 없습니다. 중1때부터 결혼하여 청년부를 떠날 때가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세월 동안 유독 수련회를 가지 않은 해가 있었습니다. 1991년 이었던가? 그 전 해 대학청년부 수련회를 다녀와서는 '내년에는 결코 가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었죠. 새로 바뀐 대학청년부 지도 목사님 때문이었고 그 목사님을 추종하는 청년부 임원들이 만드는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 목사님의 생각은 이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시사저널 같은 잡지를 보는 것은 영을 더럽히는 일이다' 그 때 나는 늘 시사저널을 끼고 다녔었는데 예배 설교 시간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암튼, 그 해 여름에 나는 수련회를 가지 않기로 결심했었습니다. 해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수련회 데려 갈려고 새벽기도를 하고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했던 정신실이 수련회를 가지 않는다고 하자.... 교회 안에서 여러 어른들이 '가당치도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저를 설득하셨드랬습니다. 그렇게 말씀 하시는 분들은 평소 내가 존경해마지 않았고 나를 너무도 아끼는 분들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더욱 어려웠습니다.
그 때, 유일하게 제 손을 들어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전까지 대학청년부 지도를 하셨던 전도사님. 아마도 지금 돌이켜보면 청년부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친다는 괘씸죄에 걸려서 고등부로 좌천되어 가셨던 것 같습니다. 유일하게 내가 왜 그리도 수련회에 가기 싫은 지 그 이유에 대해서 귀 기울여 들어주는 분이었습니다. 그 수련회에 가지 않았고 수련회 기간 동안에 집에서 수련회 하는 마음으로 두꺼운 책 한 권을 독파했습니다(물론 전도사님의 추천으로 말이죠)
이 일을 경험하고부터 나는 전도사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아무도 내 고통스런 외침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을 때 그 소리를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귀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분을 언제나 스.승.님. 이라고 소개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늦은 나이에 대학원 공부를 하게 된 것도 어쩌면 전도사님의 세뇌 때문이었는 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보고 싶은 책도 다 보지 못하시는 넉넉치 않은 살림에 항상 읽어야 할 책들을 선물해 주시고 '공부' 에 대한 끈을 놓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매주 주보에 쓰는 글을 보시면 '글이 살아있다. 물고기가 파다파닥 뛰어 노는 듯 하다' 라고 격려를 하시면 한 주 한 주 글 쓰는 일이 수월해지고 재미가 있어졌습니다. '어쩌면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일지도 몰라'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셨죠.
내가 인생의 시간을 돌려서 다시 한 번 과거로 날아갈 수 있다면 전도사님이 지휘하시는 성가대에서 다시 한 번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불러보는 것입니다. 나는 전도사님께 찬양도 배웠습니다. 찬양하는 사람이 어때야 한다는 것과, 찬양의 대상이 누군인 것도 분명해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휘도 배웠습니다. 찬양대 지휘자가 음악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배웠을 뿐 아니라 찬양 대원으로 하여금 음악 이상의 것을 드리도록 연습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도 배웠습니다.
'기독교 세계관' 이라는 낯선 단어를 전도사님이 소개하시는 책에서 처음 배우고 그 이후로 나는 그 '기독교 세계관'에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부부에게 모토가 되고 있는 '오늘 여기서 그 분을 위해'는 바로 그 때 배운 기독교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도사님과 함께 다니던 교회에서 보내 마지막 해에는(전도사님과 몇몇 친구들은 그 정들었던, 사랑하던 교회에서 우리 발로 걸어 나왔지만 사실은 쫓겨난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빡신 제자훈련을 받았습니다. 금요일 밤에 철야를 하면서 리더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밤을 거의 새면서 죤스토트를 비롯해서 많은 책들을 읽고 발제하고 나누고....또 큐티훈련을 받고, 한 사람을 어떻게 끝까지 붙들고 제자 삼는 지에 대해서 공부하고 배웠습니다. 결국 그 리더훈련은 끝도 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어디가 써 먹지도 못하고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다니고 있는 한영교회에 왔습니다.
요즘 목자부부가 되어 사람들을 섬기면서 새삼 그 때 받은 리더훈련은 오늘을 위한 준비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한 분께 배웠습니다. 지유철 전도사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의 정신실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세월 동안 유독 수련회를 가지 않은 해가 있었습니다. 1991년 이었던가? 그 전 해 대학청년부 수련회를 다녀와서는 '내년에는 결코 가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었죠. 새로 바뀐 대학청년부 지도 목사님 때문이었고 그 목사님을 추종하는 청년부 임원들이 만드는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 목사님의 생각은 이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시사저널 같은 잡지를 보는 것은 영을 더럽히는 일이다' 그 때 나는 늘 시사저널을 끼고 다녔었는데 예배 설교 시간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암튼, 그 해 여름에 나는 수련회를 가지 않기로 결심했었습니다. 해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수련회 데려 갈려고 새벽기도를 하고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했던 정신실이 수련회를 가지 않는다고 하자.... 교회 안에서 여러 어른들이 '가당치도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저를 설득하셨드랬습니다. 그렇게 말씀 하시는 분들은 평소 내가 존경해마지 않았고 나를 너무도 아끼는 분들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더욱 어려웠습니다.
그 때, 유일하게 제 손을 들어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전까지 대학청년부 지도를 하셨던 전도사님. 아마도 지금 돌이켜보면 청년부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친다는 괘씸죄에 걸려서 고등부로 좌천되어 가셨던 것 같습니다. 유일하게 내가 왜 그리도 수련회에 가기 싫은 지 그 이유에 대해서 귀 기울여 들어주는 분이었습니다. 그 수련회에 가지 않았고 수련회 기간 동안에 집에서 수련회 하는 마음으로 두꺼운 책 한 권을 독파했습니다(물론 전도사님의 추천으로 말이죠)
이 일을 경험하고부터 나는 전도사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아무도 내 고통스런 외침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을 때 그 소리를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귀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분을 언제나 스.승.님. 이라고 소개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늦은 나이에 대학원 공부를 하게 된 것도 어쩌면 전도사님의 세뇌 때문이었는 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보고 싶은 책도 다 보지 못하시는 넉넉치 않은 살림에 항상 읽어야 할 책들을 선물해 주시고 '공부' 에 대한 끈을 놓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매주 주보에 쓰는 글을 보시면 '글이 살아있다. 물고기가 파다파닥 뛰어 노는 듯 하다' 라고 격려를 하시면 한 주 한 주 글 쓰는 일이 수월해지고 재미가 있어졌습니다. '어쩌면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일지도 몰라'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셨죠.
내가 인생의 시간을 돌려서 다시 한 번 과거로 날아갈 수 있다면 전도사님이 지휘하시는 성가대에서 다시 한 번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불러보는 것입니다. 나는 전도사님께 찬양도 배웠습니다. 찬양하는 사람이 어때야 한다는 것과, 찬양의 대상이 누군인 것도 분명해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휘도 배웠습니다. 찬양대 지휘자가 음악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배웠을 뿐 아니라 찬양 대원으로 하여금 음악 이상의 것을 드리도록 연습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도 배웠습니다.
'기독교 세계관' 이라는 낯선 단어를 전도사님이 소개하시는 책에서 처음 배우고 그 이후로 나는 그 '기독교 세계관'에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부부에게 모토가 되고 있는 '오늘 여기서 그 분을 위해'는 바로 그 때 배운 기독교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도사님과 함께 다니던 교회에서 보내 마지막 해에는(전도사님과 몇몇 친구들은 그 정들었던, 사랑하던 교회에서 우리 발로 걸어 나왔지만 사실은 쫓겨난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빡신 제자훈련을 받았습니다. 금요일 밤에 철야를 하면서 리더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밤을 거의 새면서 죤스토트를 비롯해서 많은 책들을 읽고 발제하고 나누고....또 큐티훈련을 받고, 한 사람을 어떻게 끝까지 붙들고 제자 삼는 지에 대해서 공부하고 배웠습니다. 결국 그 리더훈련은 끝도 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어디가 써 먹지도 못하고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다니고 있는 한영교회에 왔습니다.
요즘 목자부부가 되어 사람들을 섬기면서 새삼 그 때 받은 리더훈련은 오늘을 위한 준비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한 분께 배웠습니다. 지유철 전도사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의 정신실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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