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여 년 동안 에니어그램이 비전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1:1로만 전수 되었다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갈수록 더 그렇습니다. 미세한 표정 변화와 눈빛까지 느낄 수 있는 거리로 둘러앉아 주고받으며 나눌 때 에니어그램의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의 소중함을 존재로 느끼게 됩니다. 에니어그램 강의 때문이 아니라 앞에 앉은 우주 하나 같은 존재의 무게감으로 깨달음을 얻습니다.


행동유형별 분류(공격형, 의존형, 움츠리는형), 날개, 화살 통해 좀 더 다면적으로 유형을 이해하는 2단계 여정을 마쳤습니다.


난 아무 것도 한 게 없다고 생각해서 갈등이 생길 때마다 억울할 뿐이었는데 ‘수동적인 공격’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움츠리는 유형 9번의 울먹이는 고백이 마음에 남습니다.


상태가 안 좋아질 때 그 많은 긍정성 어디 가고 집게 손가락 들어 비판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린 7유형 선생님은 화살을 통해 자기이해의 폭이 넓어졌답니다.


혼자 뭐든 잘해서 누구와 함께 할 필요을 못느낀다는 공격형 8유형 선생님. 함께 한다는 것에 필요하고 좋다는 것을 경험하셨다는 말에 감동이 두 배네요.


더 많은 기쁨과 아픔의 영롱한 말들이 남아 있는데 가슴 속에 소중히 간직하며 한 분 한 분의 여정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 어릴 적 명절 아침 예배에선 늘 이 찬송을 불렀다. 앞집 친구네서는 제사가 한창인 시간이었을 테고. 목사인 아버지가 이 곡을 선택한 것은 참된 복의 근원을 천명하고자함이었을까. 조상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다! 하지만 어린 내게 이 찬송은 그저 떡국이나 세뱃돈, 명절에 모인 가족들의 분위기 같은 것을 연상시킬 뿐이다. 음악은 흔히 경험과 함께 기억창고에 저장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에는 바로 그 기억을 소환해내는 촉발제가 되기도 한다. 아직도 나는 찬송가 28장을 부르면 어렴풋이 설날 아침을 떠올린다. 내게는 가족의 노래, 명절의 노래이다. 결혼 하고 명절 노래 한 곡을 더 얻었다. 시댁의 명절 아침 찬송은 559사철의 봄바람 불어 잇고였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목회자 가정에서 자란 내게는 생소한 가정예배였다. 그야말로 예배를 보는분이 대부분인 예배였다. 거의 어머니 한 분이 대표로 드리는 것 같았고, 다른 친척들은 구경 내지 그저 비참여의 태도로 자리만 지키셨다. 어머니께 힘을 실어드리기 위해 힘을 내어 찬송을 불러보지만 어쩐지 민망하고 어색하다. 알고 보니 사연이 있었다. 장손 며느리인 어머님이 일찍이 홀로 신앙을 갖게 되셨다. 제사 문제로 내적 갈등을 겪으신 것은 당연한 일. 어떤 계기로 제사를 추도식으로 바꾸겠노라 선언 하시고, 이 일로 친척들과 풀리지 않는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내가 처음 그 자리에 합류한 시점은 오랜 갈등이 일상이 된 어느 명절이었다. 형식상 예배를 드리지만 대부분의 가족들은 앉아 있어주는 형식, 그것도 감지덕지인 분위기였다. 무언의 저항 속에서 고마워라 임마누엘힘주어 부르는 어머니의 찬송은 안타까움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불렀던 찬송의 가사를 보라. 부조화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이율배반이다.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즐거운 하루하루, 차라리 다른 찬송이면 어땠을까? 어쩌다 이 찬송이 명절 18번이 되었을까. ‘동기들 사랑에 뭉쳐 있고라는데 갈등에 휩싸인 동기들이 민망한 노래 속에 어정쩡하게 마주하고 있다. 조상의 복이냐, 하나님의 축복이냐 근본적 합의에 이르지 못한 가족들이 하나님 아버지 모셔서 믿음의 반석이 든든하다노래하고 있다. 어서 이 예배가 끝나 식사시간이 오길, 아니 이 불편한 명절 하루가 어서 지나가길. 한 발 물러 서 지켜보는 나의 심정조차 그러했다.

 

극단적인 예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찬송의 가사를 일말의 아픔 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부르던 나의 원가정 역시 말 못할 갈등과 사연을 배경처럼 깔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늘 예배를 인도하던 목사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이후, 명절 아침 복의 근원은 슬픔과 그리움의 노래가 되었다. ‘산에서 10마일쯤 떨어져 있을 때만 그 산이 푸르게 보이는 것처럼, 가정도 그 사정을 모를 때만 평..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C.S 루이스가 어느 편지에 썼다는 말이다. 친구가 정말 믿을 만 할 때, 충분히 친해졌다 싶을 때 보통 가족의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다. 실은 우리 부모님 이혼하셨어, 아픈 형제자매가 있어, 부모님이 힘드셔서 경제적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어, 부모님과 소통 자체를 포기한지 오래야. 백 사람이면 백 개의 크고 작은 아픈 가족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예쁜 접시에 담긴 과일 먹는 가족은, 그런 거실은 없다.

 

가정의 달이 되어 이 찬송을 부르게 될 때 뭔가 조금 불편한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스캇펙의 그 유명한 책 <아직도 가야 할 길>은 이렇게 시작한다. ‘삶은 고해(苦海). 이것은 삶의 진리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진리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받아들일 때 삶은 더 이상 고해가 아니다가정은 따스하고 그리운 곳이지만 동시에 아픔과 갈등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조금 다른 지점으로 옮겨갈 수 있다. 우리 가족의 문제가 특별하고, 우리 집만이 갈등과 어려움에 휩싸여 있다고 위축되거나 불평에 휩싸일 필요가 없다. 문제 많고 아픔 있는 우리 가정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이 현실감 없는 찬송은 소망의 노래가 된다. 비록 지금 믿지 않는 가족으로 가슴 아프고, 갈라진 마음으로 얼굴 마주하기 힘든 시절이라 할지라도. 예수만 섬기는, 예수만 닮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분은 사랑이며 소망이다. 우리 인생, 우리 가정의 현실은 사철 찬바람 부는 날이지만 사철 봄바람의 나날을 그린다. 이것은 고해와 같은 일상을 사는 우리의 소망이며 또한 소명이다.








그저 그런 사람인가 싶었는데 알수록 숨겨둔 매력이 솟아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 만남에서 자신이 가진 온갖 것을 다 드러내 찬사를 받아내곤 갈수록 바닥만 보여주는 사람도 있고요. 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전 <행복한 페미니즘>으로 만난 벨 훅스를 <올 어바웃 러브>로 만나며 놀라는 중! 벨에 빠져 전작에 도전할 기세입니다. 언젠가부터 피로감으로 손에 잡지 않았던 페미니즘 도서 목록에서 익숙했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행복한 페미니즘> 개정판이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습니다.  


스캇 펙, 에릭 프롬, 토마스 머튼까지 아우리는 벨 훅스의 <올 어바웃 러브>는 에릭 프롬 <사랑의 기술>을 잇는 21 세기 최고의 사랑의 고전이라는 평이 과장이 아닙니다. 이 책을 읽다 <행복한 페미니즘>을 다시 훑어보니 개인의 만족과 성장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는데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었더군요. 술술 읽혔던 내용들이 두려움이나 분노 아닌 사랑에 기반한 여성주의였다는 것을 뒤늦게 확인하게 됩니다. 사랑, 신성한 사랑, 결국 영성을 말하는 이 보석같은 책을 씹어 먹고 싶네요 :)    


오늘 읽은 챕터가 참으로 좋아 페북의 페이지, 개인 타임라인에도 올리고 내내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내적여정 세미나를 안내하고 있지만 그 결국은 ‘일상’입니다. 영적인 삶은 한적한 곳을 거닐며 좋은 글귀를 읽고 묵상하는 유유자적 한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내적인 여정은 허구헌날 자기분석과 성찰에 빠져 수염 덥수룩한 나날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에니어그램 번호, 날개 화살로 자기를 규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영성은 지금 여기 일상을 영적 존재로 사는 것이고 그것은 다름 아닌 있는 바로 그곳에서 사랑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올 어바웃 러브>의 한 부분입니다.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행동과 실천을 통해, 즉 일상적인 모습 속에서 자신의 영성을 발현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가 된다. 잭 콘필드는 다음과 같은 통찰력 있는 말을 했다. “우리가 사랑을 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영적인 스승이 많아도 무용지물이다. 아무리 고귀한 상태에 들고, 아무리 뛰어난 영적 업적을 이루더라도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방식으로 행복할 수 없다면, 또한 진심으로 다른 사람과 교류하고 주변 사람과 교감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특히 이 부분, 내적여정에서 놓치기 쉬운 부부입니다.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방식으로 행복할 수 없다면, 또한 진심으로 다른 사람과 교류하고 주변 사람과 교감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연애강의가 다 뭔 필요냐, 소개팅 한 번이라도 성사시키는 게 더 영양가 있지. 솔직한 심정입니다. 강의가 아니라 실제 도움이 되는 뭐든 하고 싶다는 바램과, 하게 되더라도 정장 입고 원탁 테이블 둘러앉아 ‘나를 찍어주시오’하는 매칭 프로그램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요. 많지 않은 인원이 2박3일 정도 캠핑 가서 바비큐도 하고, 마피야도 하고, 시대의 연애담론도 나누고. 마음이 편해지면 개인의 연애사도 나누는 오글거리지 않는 매칭프로그램을 꿈꿨지요.


청년들을 위해 뭐라도 해야지, 고민하는 교회와 목사님을 만나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꼭 매칭이 성사되지 않아도 좋을 캠핑이 될 것이고요. 마치고 나면 ‘연애人’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이 커지고, 자기 자신이 되어 연애할 힘을 얻어갈 수 있도록 도우려합니다. 


나를 찾는 길 위에서 너를 만나다!


장소, 식사, (특히) 강사가 특급입니다 :) 장소 답사 따라갔다 홀딱 반하고 말았습니다. 그곳에 2박3일 머무르는 것만으로 힐링이 되겠다 싶은 호텔입니다. 예, 특급 강사가 상주하며 밀착 상담도 합니다. 교회에서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의는 리플렛 안에 있는 안내로 하시고요.








"아이구, 오지마. 냉이 한 줌에 얼마 한다고 그거 사 먹으면 되지. 내가 그냥 먹을게 오지마라"


시어머님의 말씀입니다. 지나가다 읽는 여러분께는 '아무 말' 아니지만 제게는 엄청난 말입니다. 아니, 어머님 당신께는 어마어마한 말씀입니다. 소확행, 작고 확실한 행복을 살자는 게 유행이던데요. 저는 작고 확실한 변화가 확실한 행복을 보장한다 생각합니다. 아무튼 어머님 입에서 아무렇지 않은 저 말씀은 작고 확실한 변화입니다. 


어머님은 누구보다 상처가 많은 분입니다. 그런 분들이 흔히 그렇듯 '다시는 상처 받지 않겠다' 주먹 꽉 쥐고 살아가십니다. 자기방어를 위한 진이 견고하지요. 본인에겐 자기방어이지만 주변 사람에겐 '가시 옷'과 같습니다. 당신이 누구를 찌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십니다. 아니 조금 까칠하고 때로 무례한 것도 당신 안의 상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에 당당하기조차 하시지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함께 있고 싶다, 보고 싶다'는 표현도 서투릅니다. "목요일 날 여기 오냐?" (목요일은 어머니 계신 하남 쪽으로 일하러 가는 날입니다) 목요일에 맞춰 홍삼을 달여 놨다, 김치를 해놨다, 누가 뭘 줬는데 양이 많으니 나눠가라, 하시지요.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주먹 꽉 쥔 어머니는 동시에 늘 계산하고 반성하고, 또 다시 헤아리며 당신 자신을 괴롭히십니다. "그래? 바쁘면 오지 마라" 해놓으시곤 며칠 후에 전화로 이러시죠. "내가 잠이 안 와서 막걸리 한 잔을 마셨는데 취했나봐. 취한 김에 그랬다. 아니, 이 며느리 년이 김치를 해놨는데 가져가지를 않어. 하하하"


어머님이 뭘 나눠주시는 마음엔 자식 사랑도 있지만 '나 좀 봐줘라'도 있고 통제하려는 힘도 작용합니다. 그걸 세밀하게 느끼는 저는 늘 깍뚜기 한 보시기, 감자 몇 알 가져오면서 쌀 한 가마니 가져오는 부담입니다. 돌려치기로 욕을 먹으면 두고두고 기분이 나쁘기도 하고요. 언젠가부터 받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집에 있어요, 아직 많아요, 들를 시간이 없어요, 라고 하거나 피할 수 없을 때는 남편이 가서 받아오곤 했습니다.


단지 무엇을 주고 받는데 그치치 않고 어머님과는 작정하고 거리두기를 한 지 몇 년입니다. 아마 어머님 자서전 써드린 이후로 마음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생각했고, 아픈 어머니의 치유자가 되겠다는 구세주 콤플렉스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무엇보다 내 한계를 인정한 후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이후 어머님의 방황을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믿었던 막내 며느리, 상담자, 신앙의 동역자, 말이 통하는 유일한 사람에게 거절 당한 느낌이셨을 테니까요.


어머니가 느끼실 상실감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오기도 했지만 나를 지키는 것이 나를 내어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일 때가 있음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사람 참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어머님 가까이서 찔리고 피나는 지점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는데 뭔가를 느끼고 깨달으시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의 힘을 빼고, 무장해제 하고 지내니 어머니 또한 무기를 내려놓으시는 것입니다. 물론 편치 않은 몇 년의 시간이 걸렸지요. (여전히 그런 시간이기도 하고요)


시골에 계신 친구 분이 냉이를 보내셨다며 목요일에 가져가란 연락을 받았습니다. 냉이는 아주 사랑하는 거니까 알겠다고 답을 했지만, 목요일 당일 어머님과 연락이 되지 않아 그냥 집에 왔고 며칠 후 통화였습니다. 주일 저녁 안 막히는 시간에 잠시 갈까 한다고 했더니 하신 말씀이  "아이구, 오지마. 냉이 한 줌에 얼마 한다고 그거 사 먹으면 되지. 내가 그냥 먹을게 오지마라" 입니다. 냉이 한 줌으로 '나를 알아달라, 내 호의에 고마워 해라' 통제하던 어머님이 '냉이 한 줌에 얼마 한다고!' 라니요. 


내적여정, 마음공부, 영성수업의 끝은 작고 확실한 일상의 변화입니다. 끝없이 자기를 파고 성찰하고, 더 깊은 자아를 발견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장착하고 휘두르던 가시를 인식했을 때 찌르던 당장 그것을 내려놓는 작고 확실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에니어그램 유형에 자기를 비추고, 성찰 일기를 쓰고, 꿈을 분석하고, 향심기도 훈련을 하는 것은 작고 확실한 일상의 변화로 드러나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어머님은 내적여정, 마음과 영성을 공부하는 제게 치열한 실습지였습니다. 한때 꿈을 통한 마음 여정 안내를를 해주시던 선생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정 선생은 가시옷 입은 어머니를 왜 그렇게 포기하지 못하고 끌어 안고 찔리고 있어?" 질책이기도, 진정한 의미의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착한 크리스천 콤플렉스도 있겠고, 치유자 연(然) 하는 교만도 작용하겠지만 어머님에게서 제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머님의 작고 확실한 변화가 그러므로 저의 것이기도 합니다. 아니, 오늘도 조금씩 성장하고자 애쓰는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사람 징글징글하게 안 변하지만 사람, 신비롭게도 어느 순간 믿을 수 없게 자기를 초월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깊은 곳에 상주하시는 치유자, 보혜사 그분의 이끄심일 테지요.





나는 나가고 그는 들어오는 길에 마주쳤다.

저기 느릿느릿 걸어오는 기다란 그의 몸땡이가 보인다.

손에 든  늘 제 몸처럼 붙어 있는 한 두 권의 책, 그리고 검은 비닐봉지가 멋 없이 흔들린다.

검은 비닐봉지든, 반짝반짝 쇼핑백이든 손에 든 그것들은 약간 설레게 하는 것들이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작은 비닐봉지에 꽃 화분 세 개가 미어 터지게 들어 앉았다.

참말로 담긴 품새가 멋이라곤 없다.

나도 지나치면 봤는데 교회 앞에 꽃 파는 트럭이 서 있었다.

나도 좀 살까 했는데, 차를 세우기가 뭐해서 그냥 들어왔다.


밤늦게 들어와 친구가 만들어준 도자기 화분에 꽃 포트 세 개를 꽂으려 각이 나오질 않는다.

색이 조화롭거나, 크기가 알맞거나 해야 하는데 도통 어우러지질 않는다.

이렇게 막 고를 수도 있나, 부조화를 컨셉으로 선택한 것인가?

주일 아침 일어나 다시 한 번 이리 만지고 저리 만져보지만 안 되겠다.


글을 읽고 쓰고, 논리를 만들어 내고, 지식을 정돈하는 일에는 진화된 사람.

멋을 부리고, 폼을 잡고, 자기를 드러내는 일로 가면 다섯 살 아이 같다

공평함의 덕, 객관적 판단의 덕이 차고 넘치는 사람.

그것을 나는 얼마나 버거워 하고 차겁게 느꼈던가.

빈말로라도 편 한 번 들어주면 될 텐데, 그걸 못해서 내게 받은 구박과 설움은 말할 수 없다.


반면, 간섭하거나 강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그의 태도는 내게 너무 좋은 약이 되기도 했다. 

엄마의 폭풍 잔소리와 간섭으로 형성된 나의 아픈 그림자를 치유하는 힘이 되었으니.

그저 그의 마음 생김새가 내게는 선물이 되었다.


피차에 타고 난 모양으로 서로에게 선물이 된 지점이 있다.

MBTI든 에니어그램이든 어떤 성격유형을 갖다 대도 정반대 성향을 가진 한 쌍의 바퀴벌레.


애초 생겨먹은 모습과 태도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시도로 서로에게 다가갈 때가 되었다.

그것을 중년이라 부르고, 

인생 제 2막이라 부른다.

싸구려 꽃 화분을 구겨 넣은 검은 비닐봉지 든 손에 뭉클하다.

잘 다루는 글이 아니라, 평생 '객관성'에 사로잡혀 거리 두고 싶었던 것들에 다가가는 모습.


꽃을 든 이 남자, 이 남자의 서툰 몸짓,

자기를 넘어서는 미미하지만 큰 변화를 기리는 부활절 아침.


'JP&SS 영혼의 친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 시인의 편지  (2) 2018.06.01
Sabbath diary24_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2) 2018.05.29
JP&SS 결혼과 사랑 세미나  (2) 2018.01.28
광안리에서  (2) 2018.01.18
저자 남편의 자격  (2) 2017.10.1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