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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여 개의 포스팅 중에서 펌글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힙니다. 김기석 목사님의 글을 그대로 가져와 걸어둡니다. 요즘 남편과 마주앉으면 한숨 쉬며 나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기석 목사님의 글에서 질문도 답도 다 나와 있어서 읽고 또 읽게 됩니다.

김기석 목사님의 설교와 글에서는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몸으로 전해옵니다. 우리에게 생명 주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 그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배웁니다. 정직하고 용기있고 긍휼이 넘치는 글. 4월 16일 이후로 보이지 않았던 예수님과 예수님의 길이 이 글에서 보였습니다.

그림은 청파교회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바이블 시론_김기석] 영웅 말고 상식인


“우리 반 아이들 잘 있겠지요? 선상에 있는 애들이 무척이나 걱정됩니다. 진심입니다. 부디 한 명도 빠짐없이 안전하게 (수학여행) 갔다 올 수 있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세월호에서 죽어간 김시연양이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 드린 기도이다.


하나님은 왜 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을까. 40년 가까이 연마해 온 나의 신학은 이 기도 앞에서 작동되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말의 무기력함을 지금처럼 처절하게 느낀 때가 없었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가 가능한가를 물었다. 한스 요나스는 아우슈비츠 이후 절대적인 신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끝났다고 말했다. 그들을 절망케 한 시대의 어둠이 이 땅을 뒤덮고 있다. 든든한 줄 알았던 나의 신학은 세월호 참상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1940년대 오랑시,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진찰실을 나서다가 층계참 한복판에서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목격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그는 쥐를 발로 밀어 치우고 계단을 내려갔다. 며칠이 지나자 도시 도처에서 죽은 쥐들이 나타났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리유는 시청 공무원에게 전화를 해보지만 지시가 내려와야 뭐든 할 수 있다는 대답을 듣는다. 사람이 하나둘 죽어가자 오랑시 의사협회장 리샤르에게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해보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자기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까뮈의 ‘페스트’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사람들은 재앙이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재앙은 그런 무관심과 무책임 속에서 몸집을 불려가는 법이다. 사람들이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는데, 도시는 평화롭고 고즈넉하기까지 하다. 누군가 그 안일한 평온에 균열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균열은 그 병에 대해 정확하게 명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존재는 공포스럽다. 스멀스멀 틈입해 들어와 우리 삶을 뒤흔드는 낯설고도 음험한 현실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대상은 상대화된다.

조급함이 사회를 어둡게 한다

지금 우리 사회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됨의 길을 한사코 외면하도록 한 그것은 무엇일까. 물질주의다. 뱃사람들을 홀려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괴조 세이렌의 무기는 아름다운 노랫소리였다. 세상 도처에서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행복과 편리의 환상을 좇는 이들에게 동료 인간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다. 그들이 질주하는 벌판에는 해골만이 뒹굴 뿐이다. 이제는 우리 삶의 실상을 직시해야 한다. 세월호에서 죽어간 이들은 바로 그런 현실을 가리키는 깃발로 펄럭이고 있다. 그런데 유족들과 국민들의 가슴에 든 피멍을 보듬어주어야 할 대통령이 재를 쓰고 앉아 참회하기보다는 이런 애도의 분위기가 사회 혼란을 낳고, 사회 혼란이 소비심리를 위축시켜 경제를 어렵게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차마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을 기다린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것을 다시 회복할 가능성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이 느끼는 정서적 반응은 슬픔일 수밖에 없다. 터져 나오는 울음은 입을 가린다고 잦아드는 것이 아니다. 그 애도의 시간조차 기다려주지 않으려 하는 조급함이 우리 사회를 어둡게 한다. 신은 무고하게 죽임당한 아벨의 피가 땅에서부터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다. 억울한 이들의 피가 흐른 땅은 황무지로 변하게 마련이다.

지금 우리는 ‘페스트’와 맞서 싸우는 리유나 그랑 혹은 랑베르와 같은 영웅적 인물들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을 귀히 여기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울고 웃는 이들과 함께 웃는 상식적인 사람들, 깨어 있는 시민들을 기다릴 뿐이다. 저들의 희생을 망각의 강물 속에 떠내려 보내려 하는 이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과 맞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김기석 청파감리교회 담임목사



원글은 아래 링크 겁니다.

http://m.kukinews.com/view.asp?gCode=news&sCode=opi&arcid=0008312123&code=11171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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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바야 마이 로드 쿰바야
쿰바야 마이 로드 쿰바야
쿰바야 마이 로드 쿰바야
야 야 쿰바야


여기 오소서 내 주여

여기 오소서 내 주여
여기 오소서 내 주여
오 주여 오소서


우는 자에게 오소서

우는 자에게 오소서
우는 자에게 오소서
오 주여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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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타고>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을 타고

단풍나무 낙옆처럼

바람을 타고

슬픔 바다인 진도 앞바다

로 가고싶다.

 

 

 

<내 마음은>

 

소나기처럼 내리는 눈물

진도 앞바다로 당장

달려가고 싶다

우리는 모를 고통

 

 

 

집에 티브이가 없어서 현승이는 이 슬픔과 관련하여 사진도 동영상도 거의 접하지 못하고 며칠을 지냈다. 남편과 나도 휴대폰으로 뉴스를 조용히 끊임없이 들여다 볼 뿐 별 말을 하지 않았고 학교에서도 남자아이들이라 노는데 열중하느라 별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었다. 주일 저녁 런닝맨을 보려고 기대하고 있던 현승이가  결방소식에 사태의 심각성을 크게 감지했나보다. 뉴스 검색해서 봐도 되냐고 해서 잠깐만 보도록 했다. 말 없이 엎드려서 사진과 영상을 조금 보더니.....

"엄마, 그 엄마들 어떻게 해?" 하고 별 말이 없었다. 그리고 저렇게 시라고 지어놨는데, 마지막의 '우리는 모를 고통' 이 구절에 마음이 심지가 탁 꺾이고 말았다.

 


몇 년 전, 노무현 대통령 서거 소식이 알려졌을 때를 기억한다. 며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충격과 슬픔에 빠져있었다. 포&동님 부부가 그 뉴스 듣고는 '아이고, 실님 어쩌냐'하고 걱정하셨단 얘길 나중에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이 그렇게 위로가 될 수가 없었다. 그분들에게나 내게나 슬픔과 충격은 거기서 거기일 것이었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몫으로 아팠던(지금도 여전히 아픈) 일이다. 그런데 털끝 만 한 차이를 가지고 '실님 어쩌냐' 걱정하셨단 얘기는 적어도 내 아픔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전국민이 집단 우울감에 사로잡힌다 해도, 하루 종일 티브이 앞에서 눈물 흘린다 한들 저 엄마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까. 한 번도 엄마 아빠라 불려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이의 고통에 무력하게 바라만보고 가슴을 찢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니 세월호라는 총체적으로 부실한 배에 태워 내 아이를 떠나보내고 다시 안아보지 못하는 그 엄마 아빠가 아니라면 함부로 말하지 말 것. 제발. 인지상정도 모르는 미개한 짐승처럼 함부로 말하지 말 것. '시신 몇 구'가 아니라 '어떤 시계를 차고 어떤 옷을 입은 내 아이'의 싸늘한 몸으로 이 일을 겪는 가족의 고통이 어떤지 모르는 우리는 차라리 현승이처럼 '우리는 모를 고통'이라 말하며 '어쩌냐...' 하고 마는 게 낫다. 미지의 고통에 대해 차라리 숙연하게 바라보는 게. 우리는 모를 저 고통 속에서 몸과 영혼을 가누지 못하는 엄마들에게 거짓과 망언으로 거듭 고통을 안기는 일은 제발 그만.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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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주 울지 않는 사람이 있으며,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며, 몸서리치지 않는 엄마가 있을까요? 열어보고 또 열어보는 포털 사이트 초기화면에는 아까 그 뉴스, 몇 시간 전 그 뉴스뿐입니다. 열어보고 또 열어보고, 울고 또 분노하고 그렇게 며칠을 지내고 있습니다. 모두들 그렇겠지요. 한 기독교 언론으로부터 엄마의 심정으로 기도문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기도문은커녕 댓글 할 줄도 쓸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의 언어를 잃었는데 무슨 기도문을 쓸 수 있겠습니까.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기도를 잃은 가슴 속에서 그나마 기도에 가장 가까운 말은 이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하소서' 이 외에 다른 어떤 기도의 말은 길어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제 아침 일찍 채윤이 보내고 기사를 보다 말고 한글창을 열었습니다. 기도문이 써지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흐려져 보이지 않는 모니터를 향해 감정을 쏟아 붓듯 써내려갔습니다. 대략 써놓고 수영을 하러 갔습니다.

물 안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도 죄스러워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습니다. 코치는 '폼 생각하지 말고 걷다가 물에 뛰기' '수직으로 그대로 물에 떨어지기' 등을 시켰습니다. 평소 배우는 스타트 자세는 안 해도 되니까 자연스럽게 떨어지라고 했습니다. 그걸 시키는 선생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왜 모르겠습니까. 그걸 따라 하면서도 죄스럽고 자꾸 눈물이 나왔습니다. 마치고 샤워장에선 아줌마들의 큰 목소리가 쩌렁쩌렁합니다. 중고등 아이들을 키우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5, 60대도 계십니다. 이 상황에서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얘기들이지만 너무 듣기가 싫었습니다. '선장 XX 잡아 죽여야 한다' '그 엄마들은 앞으로 어떻게 사냐' '그거 봤냐. 이 와중에 보상금 뉴스가 나오더라. 미친 XX 지 애가 당했다고 생각해봐라' 그만 좀 하라고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난 또 왜 이러는 걸까요?

 

집에 와서 썼던 기도문을 모두 지웠습니다. 그 어떤 말을 내놓아도 아픈 사람들을 더 아프게 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들 자기 안의 슬픔을 이 사건에 빗대고, 자기 안의 분노를 이 사건에 빗대어 쏟아놓고 풀어놓는 것 같습니다. 기도문이라는 허울 좋은 형식을 빌어온다 해도, (아니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조차도) 그저 내 감정을 해소할 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쓰는 낙서조차도 조심스럽고 죄송스럽습니다. 

 

'쓸 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공부나 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공부나 해' '어른 말에 어디다 대고 말대꾸야. 어른이 말하면 들어' 이런 말을 주야장천 해댄게 누구란 말입니까. 그래서 자신이 하는 생각은 쓸데없다고 배운 아이들이 그 위급한 상황에서 어른 말 듣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어릴 적에 엄마의 강요에 등 떠밀려 수영을 배운 아이들이 허다할 것입니다. 접영도 하고 잠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라고 수영도 가르쳤을 것입니다. 반드시 움직여야 하고, 소신대로 뛰어들어야 하는 순간에, 가만히 있는 착한 아이로 만는 건..... 바로 저 자신, 엄마입니다.

 

구명보트가 턱없이 부족한 걸 알고 일빠로 타고 도망간 선장이 나쁜 놈이라구요? 하나밖에 없는 1등 자리에 목숨을 걸고 아이들을 전력질주 시키는 사람이 누구란 말입니까. '엄마, 나 시험 잘 봤어' 기분 좋게 들어오는 아이에게 '다른 애들은 몇 점인데' 하면서 친구를 이겨야 진정 시험을 잘 본 것이라늘 걸 아무렇지 않게 삶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저 자신입니다. 네, 지금 이 글을 쓰는 옆에서 우리 채윤이 몸을 비틀며 시험공부 하고 있습니다. 쉬고 싶고 자고 싶지만, 엄마가 무서워서 앉아 있습니다. 지금 여전히 이렇게 '말 듣는 아이'로, '시험 경쟁에서 어떻게든 앞에 서는 아이'로 기를 쓰고 만들고 있습니다.

 

엄마 말 딱딱 듣지 않았다고 얼굴 붉히고, 때로 냉랭하게 등교시키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수학여행 가는 아이와 따뜻하게 인사하지 못하고 보낸 엄마,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기다리면서 발을 동동 구를 엄마를 생각하면...... 그냥 돌아버릴 것만 같습니다. 이렇게 슬퍼하느라 곁에 있는 아이들에게 따스할 수 없습니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하면 좋단 말입니까. 슬픔에 합당한 열매, 반성에 합당한 열매 없이 단지 이 감정에만 사로잡혀 허우적대는 나를 어떻게 하면 좋단 말입니까.

 

져야 할 죄책의 짐이 있다면 이 땅의 엄마들이 함께 나눠서 져야 합니다. 일주일 고난주간 설교를 통해 인간이 느끼는 가장 처참한 감정을 다 느껴보신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모멸감, 수치심, 배신감, 그리고 그로 인한 자괴감과 우울증까지 다 겪으셨다고 배웠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묻습니다. 이 고통의 때에 그분이 어디 계신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이 처참한 심정을, 저 엄마들의 고통을 먼저 겪어 보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 곁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공포와 추위로 식어가는 아이들과 함께 배 안에 갇혀 계실지도 모릅니다. 울고 있는 엄마들 곁에서 함께 울고 계실 것입니다. (주님, 당신의 손길이 연약한 몸을 입은 우리에게 느껴지도록 임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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