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란 모름지기 슬픈 여운을 너무 강하게 남기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내가 선택하는 영화의 미덕이다. 부끄럽게도 이것은 슬픔이나 고통을 온 몸으로 거부하는 내 고질병이라는 걸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부끄러움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일천하게도 나는 짜릿함고 경쾌함, 무겁지 않은 정도의 철학적 질문 등으로 런닝타임 동안 그저 온전히 몰입하게 해주면 그만이다. 다행히 가장 영화를 같이 많이 보는 남편의 취향이 그와 반대라 원하는 만큼 편식은 못하지만 말이다.
암튼, 그런 이유로 다큐멘타리류의 영화를 나 스스로는 선택해서 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지금 지절거리려고 하는 이 영화 <신과 인간>은 일단 영화는 누구와 봤는 지가 중요하다. 40이 넘어서 만난 친구 또는 여정의 동반자라 할 수 있는 K다. K는 MBTI로는 (내게 그렇게도 어려운) NF이고, 겉으로는 나랑 참으로 다른 사람같다. 그러나 깊은 속을 꺼내놓고 맞춰보면 이렇게도 나랑 비슷할 수가 있을까 싶은 사람이다. 2년 전 K를 만난 이후로 K랑 나누거나, 그녀가 찔러주는 말에 아프면서 나는 이제껏 넘지 못할거라 생각했던 큰 산을 넘은 느낌이다. 내게 선물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난 감히 아주 신선한 의미를 부여해서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의 초대로 영화를 보았다.
(내 말이 아님)
영화 <신과 인간>은 1996년 실제 있었던 알제리의 ‘프랑스인 수도사 살해사건’을 바탕에 둔 작품이다, 당시 알제리 정부군과 무장이슬람단체(GIA)와의 내전은 최정점에 치닫고 있었다. 무장이슬람단체(GIA)가 자국 내의 모든 외국인들에게 떠날 것을 최후 통첩하자 알제리 정부는 이슬람교 지역의 티브히린에서 수도원생활을 보내고 있던 7명의 프랑스인 수도사들에게 당장 떠날 것을 통보하지만 수도사들은 이를 거부한다. 죽음이 예견되는 극한의 위기 속에서 일곱 명의 수도사들이 왜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는지, 영화는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인물들의 내면에 주목하며 신의 종으로 살아온 이들이 죽음 앞에 섰을 때 종교인이자 인간으로서의 갈림길에서 겪게 되는 갈등과 고뇌를 드라마틱하고 깊이 있게 담고 있다.
(Daum 영화에서 줄거리 펌했음)
(다시 내 말)
포스터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읽은 말의 비장함 만큼 영화는 내게 비장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영화 자체가 잔잔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서 있던 지점이 생이냐 사냐? 하는 식으로 절체절명의 순간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영화에서 테러리스트들(결국 이들에 의해서 납치되고 살해되는 것이지만)은 오히려 수도원과 수도사들에게 우호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수도사들의 거룩한 삶터와 일터에 대한 경외심은 오히려 약을 뺏으러 온 테러리스트 대장에게서 느껴졌다. 반면, 수도원을 보호하겠다는 군의 독기어린 눈빛이 내겐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순찰을 하는 군의 헬리콥터가 낮게 비행하며 수도원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장면, 영화를 통틀어 내게 가장 섬뜩한 장면이었다. 수도사들의 얼굴에서 두려움과 공포의 그림자가 가장 짙게 드리웠던 시점도 여기였던 것 같다. 죽음의 위협은 적으로부터만이 아니라 나를 지켜주겠다는 사람들에게서 더 피부에 와닿게 전해졌다. 그렇다면 누가 적이고, 누가 정말 위협적인 존재일까?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도대체 어디로부터란 말인가?
일곱 명의 수도자들이 선택한 것은 '사(死)'가 아니라 그저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기로 함일 아닐까? 그런 의미로 돌려치자면 그저 어제처럼 사는 '생(生)'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이제껏 살아왔던 삶의 터전과 이제껏 감당해 왔던 소명이라고 했던 걸 유지하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선택한 이제껏의 그 소명의 자리는 '신의 부재만이 충만한 두려운' 곳이라는 것.
굳이 영화평을 장황하게 남기기로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신의 부재가 충만한 곳은 어디 알제리의 그 긴장감 감도는 수도원 뿐이겠는가? 조금만 정신을 차려서 둘러보아도 내 삶과 이웃의 삶은 신의 부재로 충만하다. 신을 찾는 갈망이 클수록 신의 부재는 두려움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고백하건데 늘 도망다녔고, 지금도 도망다니고 싶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고, 나쁜 사람이 여전히 자신의 배를 채우며 약한 사람을 짓밟고 있고,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고지를 점령하겠다는 사람들은 온 몸에 오물이 묻든 말든 결국 고지를 꿰차고 마는..... 이런 신의 부재 충만한 곳으로부터 도망다니고 싶었다. 가장 두려운 곳은 현실이다.
내 안에서 수 년 동안 울렸고 영화가 확인해준 목소리는 이것이다. '지금 여기는 고통이고 두렵고 지겹다. 어디든 도망가라. 도망갈 수 없으면 도망갈 계획이라도 세워라. 상상해라. 여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상상해라' 아주 희미한 부드러운 목소리는 그 반대의 메세지를 내게 들려주곤 했다.
어찌됐든 잔잔하지만 분명한 기승전결의 (주로 내면의)갈등과 해결을 통해서 7인의 신부는 수도원에 남기로 만장일치로 결정을 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내가 흠모하는 사람도, 나랑 닮았다고 느껴지는 사람도, 이래야 한다는 사람도 만난다. 이 영화에서 난 이것을 보았다.
(내가 흠모하는 사람)
주인공처럼 보이는 수도원의 대표신부인 크리스티앙은 처음부터 떠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고, 나이가 드신 두 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런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일상의 크고 작은 어려움과 두려움들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주인공을 보면서 사실 나는 남편을 떠올렸다. 깊은 곳에 보이지 않는 힘이나 신념같은 것을 타고난 듯 보이는 사람들 말이다. 실제 이들의 내면이 어떻든 이런 분들을 보면서 나는 도망가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배우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작아지는 느낌이 들고, 중요한 판단을 할 때 이들을 의지하여 묻어가고픈 어린이로 남고 싶어진다.
(나랑 닮은 사람)
영화 중 한 신부는 떠나는 게 맞다고 하면서 '나는.... 몸이 아픈 사람이니까... 어찌됐든 떠나야 할 것 같애' 라는 이유를 댄다. 약한 모습이다. 내가 자주 그러듯 진짜 이유를 직면하지 않은 채 둘러대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나와 많이 닮았다. 나는 대체로 이런다. 지금 여기의 고통스런 나와 현실을 직면하지 않기 위한 합리화로 말이 많아지고, 무분별한 글을 쓰게 되고, 더 많은 의견을 피력하려들기도 한다.
(이게 맞다 싶은 사람)
여운을 가장 많이 남기는 인물은 이 사람이다. 나는 '떠나야 한다. 나는 이렇게 죽으려고 수도자가 되지 않았다'며 반항하는 허우대 멀쩡한 (이름은 모르겠는) 젊은 신부에 주목한다. 신의 부재에 대해서 가장 인간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다. 모양은 빠지지만 정직하다. 내가 이 사람에 꽂히는 것은 아마도 최근의 경험들 때문일 것이다.
신에 대한 막연한 경외심만을 부추겨 두려움도 의심도 은폐시켜 겉으로는 믿음, 속으로는 참된 불신앙을 가르치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상처와 분노 때문일 것이다. 중간중간 내 생각에 빠져 놓친 장면과 대사들 때문에 이 신부 내면의 변화에 대한 걸 디테일하게 따라가질 못했다. 그러나, 결국 그 자리에 남기로 한 선택에서 선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의 부재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정직한 반응이라 생각한다. 신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는 인간 편에서는 두려움, 의심이 극에 달하는 지점이고 그 지점은 고뇌하는 인간에게는 반드시 '신의 부재'로 경험되는 것 아닐까?
가장 두려운 곳은 어디인가? 지금 여기의 현실이다. 영화에서 각각의 신부가 자신의 소임대로 밭을 갈고, 장작을 나르고, 음식을 준비하고, 환자들을 치료하는...그림처럼 조용한 일상이 내겐 두려움이 극치가 되는 순간이었다. 지금 여기가 두려워서 나는 과거로, 미래로 끝없이 보따리를 싸서 옮겨다니는 존재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바로 지금, 여기 현재이다. 너무 두려운데 가장 필요한 신의 위안이 없다고 도망가면 영영 신과 만날 순간은 잃게 된다는 것이다.
신의 부재가 충만한 곳이, 신이 보이지 않아 가장 어둡고 두려운 곳이 그를 독대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 아닐까? 수사들의 고뇌가 깊어질 때마다 깊게 울려퍼졌던 그레고리안 챤트에 내 마음 깊은 곳이 함께 울린다. 보이지 않지만 공간을 가득 채우며 내 마음의 깊은 곳까지 공명시키던 그 성스럽고 단조로운 소리가 말이다.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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