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선생, 나쁜 선생?
영화 끝나고 불이 들어오자 연주의 감흥을 추스를 새 없이 옆에 앉은 영 아티스트 채윤이의 표정을 살폈다. 뿌한 얼굴로 말이 없다. 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피아노 전공의 예술중 3학년의 딸내미이다. 엄마한테 같이 보자, 아빠한테 같이 보자, 갈 사람 없으면 혼자 가서 보겠다 난리를 치다 가족 총동원 관람이 된 것이다. 이제 막 재즈와 사랑에 빠진 터이다.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와 골목에 들어설 때 쯤 영 아티스트가 말했다. 화가 단단히 난 말투다. '그러니까 영화가 뭐라는 거야? 그 선생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일부러 나쁘게 한 거야? 결국 잘하게 만들었으니까 좋은 선생님인 거야? 아, 뭐야?' 복잡한 건 딱 질색인 채윤이다운 일침이다. 일단 복잡하게 생각하고 어렵게 말해야 멋진 건 줄 아는 엄마는 머릿속 회로를 이쪽 저쪽으로 꼬아대고 있는 참이었다. 마구 엉켜가는 생각의 회로를 싹둑 잘라내는 딸내미 표 가위손. 그러니까 좋은 선생이냐, 나쁜 선생이냐! 영화의 본질 하나를 꿰뚫는다. 학생의 자존심을 짓밟아 피나는(말 그대로 손에서 피가 줄줄 나도록) 연습을 하게 만드는 선생님은 좋은 선생님일까, 나쁜 선생님일까? 거두절미 채윤이의 관심은 그거 하나이고, 사실 있어 보이고 싶은 평론가나 관객들도 그 질문은 피해갈 수 없을 것 같다.
* 그러니까 연습을 열심해 해, 말어?
이제 중3밖에 되지 않는 음악 하는 딸을 보면서 경험적으로 확신하는 바가 있다. 음악가의 탁월성이란 타고난 음악성 플러스 피나는 연습이다. 채윤이 친구 중 실기 우수자가 되는 아이들 뒤에는 꼭 무시무시한 레슨 선생님이 있다고 한다. 시험이 끝난 날에도 놀지 못하고 연습실로 가야 하는 이유는 엄마도 무섭지만 레슨 선생님이 허락하질 않아서라고. (중간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은 놀다 죽는 날 아니던가) 어쨌든 그런 아이들이 실기 우수자라는 영예를 얻는다. 플레처 선생의 말처럼 '그만하면 잘했어(Good job!)'가 쓸데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 해야지. 시험 끝났다고 놀고, 연주회 마쳤다고 놀고, 날씨 좋다고 놀면 소는 누가 키워? 이런 마인드로 채찍질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아니, 내가 채윤이 연습을 시켜봐도 그렇다. 당근 당근 당근.... 주고 연습을 시키는 것은 시간도 에너지도 많이 들고 눈에 보이는 효과도 훨 약하다. 채찍을 쓰면 단 한 번만으로도 폭풍연습을 끌어낼 수 있다. 채찍 끝에 자존심 뭉개는 갈코리까지 하나 장착한다면 그때부터 연습은 분노의 질주가 되어 웬만해서 멈추게 할 수 없다. 피아노가 뽀개지든지 제 손가락이 부러지든지 둘 중의 하나다. 이런 연습을 끌어내려면 칭찬과 격려 보다는 윽박지름과 자존심 깔아뭉개줌이 직방이다.
* Education, 끌어낸 열정
앤드류는 원래가 연습을 열심히 하는 드러머였다. 플레처 선생을 만난 것도 혼자 연습에 매진하던 순간 아니었나. 열정의 활화산 플렛처 선생을 만나자 연습 좀 하던 앤드류의 열정에 불길이 당겨졌다. 단지 선생이 무서워서, 자존심이 상해서 그렇게 미치도록 연습할 수 있겠는가. Education(교육)의 어원이 '밖으로 끄집어낸다'라고 배웠던 것 같다. 그런 의미라면 열심히는 했지만 조금은 소심했던 앤드류의 열정을 꺼내주었단 의미로 교수 플레처는 (채윤이가 그렇게나 궁금해하는 방식으로 보자면) 좋은 선생이다. 예술가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정은 필요하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가 그런 말을 했다. '그렇소! 열정이란 그런 것이오. 다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거지. 그게 열정이란 말이요.' 내가 원하는 그것, 그것 외에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이 열정이라면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고, 한 번쯤은 있어야 한다.
말로만 하고 듣던 '피나는 연습'을 우리는 보았다. 강렬한 이미지였다. 스틱을 잡은 앤드류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피가 흐르고 흐른다. 얼음물에 그 손을 집어 넣는다. 투명했던 얼음물이 핏빛으로 물들어간다. 순간 카메라 앵글이 90도 회전, 얼음 그릇이 세로가 아닌 가로로 잡힌다. 집어 넣은 손이 위가 아니라 왼쪽으로 가는 것이다. 투명한 얼음물을 핏빛으로 물들이는 것은 중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당기는 힘의 법칙으로 인한 자연스런 이동이 아니라 피의 힘, 열정의 힘 자체로 침투해가고 있다는 것. 이것을 보라는 듯. 핏물은 옆으로 흘러 그야말로 맹탕 맹물을 잠식하고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을 풀 수 없었던 것은 단지 음악, 연기, 구성이 아니었을 것. 이면에 흐르는 그 핏빛 열정이 상체를 스크린 쪽으로 끌어갔고 침을 꼴깍거리게 만든 것이다.
* 열정, 뒷 마당의 말 다섯 마리
스캇펙은 열정을 일컬어 '뒷마당에서 날뛰는 말 다섯 마리'라 비유했다. 말 다섯 마리의 힘, 마력이라는 대단한 힘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섯 마리의 말은 길들여져야만 진정한 힘이 된다. 길들여지지 않은 말은 먼저 내 뒷마당의 텃밭을 망쳐놓을 것이다. 그리고 어디에 풀어놓든 일단 망치고 볼 놈들이다. 열정이 진정한 힘이 되기 위해서는 길들여져야 한다. '앞마당'이 아니라 '뒷마당'이라 함은 열정이 꼭 필요한 것이로되 그 이면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적절하게 잘 쓸 수 있는(나와 타인에게 진정으로 유용한) 힘이 되기 위해서 뒷마당을 망치는 시기를 지내야 할 수도 있다. 그런 시절 없이 단번에 성숙한 열정을 가질 수는 없다. 앤드류가 플레처 선생의 스튜디오 밴드에 발탁된 후 활활 타오르는 열정으로 연습에 매진할 때 마구 망치는 것들이 속출한다. 친척들과 함께 하는 식탁에서 오만한 막말 드립으로 분위기를 망치고, 예쁜 여자 친구와의 로맨스를 망친다. 조르바의 말이 맞다. 열정은 다른 것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 열정의 연습을 통해 우리는 신 들린 드럼연주를 본다. 아마도 우리가 감탄해 마지 않는 연주가 있기까지 연주자의 주변에는 무수한 망침(희생)이 있었을 것이다. 연주자 자신의 인간적인 삶일 수도 있고, 빚을 내서 레슨비를 감당한 부모일 수도 있고(눙물나는 공감), 내쳐지고 배신당하는 애인이나 친구, 동료 음악가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음악도 잘하고 인간성도 된 음악가, 가르치기도 잘 하고 따뜻하기도 한 선생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 완벽하게 두 개를 다 가셨다면 인간의 조건을 비켜가는 것이다. 여차저차 열정의 선생과 열정의 제자는 둘 다 일단 추락하고 만다. 앤드류는 제적을 당하고 그의 증언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 플레처 선생 역시 학교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리고 클럽에서 우연한 재회. 그 장면의 대화에서 채윤이는 결정적으로 혼란스러워졌고 있어 보이는 리뷰를 쓰고 싶은 관객은 숙제를 받는다. 플레처 선생이 나긋나긋하게 진술한다. 최고의 음악을 끌어내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단다. 잘했다고 우쭈쭈쭈하는 것은 선생으로서 쓸데없는 짓이란다. 자신은 오직 찰스 파커 같은 드러머를 길러내고 싶었단다. 말하자면 '다 너를 위해서 그렇게 가혹했던 것이다' 이거다. 채윤이처럼 혼란스러워진 앤드류가 고작 할 수 있는 말을 '그....그래도 너무 심하셨잖아요' 였고 선생이 자조적으로 뱉은 말은 '그러나 찰스 파커 같은 제자가 하나도 없다' 였다.
* 그건 당신 템포고
플레처의 그럴 듯한 연기에 (채윤이는 많이, 엄마는) 살짝 흔들렸으나 앤딩을 장식하는 연주회 첫 곡에서 진실이 드러나고 만다. 앤드류가 배신을 했기로서니 풋내기 제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자기 연주를 망치는 어이없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완벽한 음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던 플레처 선생이 완벽한 복수를 위해 자기 음악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고 고소해 한다. 싸이코! 이쯤되면 그의 열정이 단지 음악이 아니라는 것을 버터구이 오징어 씹으며 관람하던 초딩도 알아챈다. 플레처 선생의 열정은 완벽한 음악이 아니라 자가도취, 자기중독을 향하는 것이었다. 앤드류와 제자들, 스튜디오 밴드의 단원들로 하여금 완벽한 연주를 하게하는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 아니고, 완벽한 음악 그 자체도 그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나'이다. 플레처의 어록 중 백미는 '그건 내 템포가 아니야. 이 개나리 십장생 신발끈 졸라매는 놈아!' 따귀 짝!짝!짝! 내 템포가 아니야. 따귀 짝! 앤드류는 물론 세 명의 드러머 모두 용을 써도 가닿을 수 없는 그 템포는 플레처라는 팽창된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미친 존재의 템포를 누가 어떻게 찾아? 영화의 마지막은 전율이라는 말도 부족한 그 무엇이다. 지휘자 플레처를 제끼고 드러머 앤드류가 음악을 이끌기 시작한다. 열받아 날뛰던 지휘자까지 결국 드럼의 리듬에 끌려가는 것이 절정 오브 절정이다. 이 순간 플레처는 여태껏 찰스 파커 같은 제자를 길러내지 못한 이유를 깨달아야 한다. 앤드류도 테너도 그만의 템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찾도록 길을 내주어야 했다.미친 피나는 연습과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해도 그 자신의 템포를 찾지 못하면 늘 삼류일 뿐이다. 앤드류의 신들린 연기는 말한다. 됐고! 그건 당신 템포고!!!!
* 아 그러니까 좋은 선생이야, 나쁜 선생이야
영 아티스트 채윤이는 다시 물을 것이다. 그러면 나쁜 선생이야? 나쁘네. 그런데 사실 나는 플레쳐 같은 선생이 좋다. 강압이 늘 나쁜 것은 아니다. 특히 교육자라면 엄하고도 매정한 태도를 보여줘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떡을 썰테니 너는 글을 써라. 불을 켜도록 해라. 어미의 떡과 너의 글을 보아라. 알겠느냐? 이대로 다시 돌아가거라' 피교육자를 자신과 같은 하나의 인간, 고유한 예술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없다는 것이 치명적일 뿐이다. 그렇다면 친절한 선생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차라리 오직 자기 템포 밖에 모르는 친절한 선생보다는 어차피 자아도취 선생이라면 강압하는 선생인 나은 건 아닐까 싶다. 나쁜 동기의 선한 행동이 나쁜 동기의 나쁜 행동보다 더 악마적이라고 생각한다. 친절한 이유가 아이의 템포를 인정하는 것과 무관하게 그저 자기 이미지 관리 차원이라면, 무정함에 무능하기까지 하여 더 골치 아픈 선생일 수도 있는 것. 플레처 같은 위악의 선생은 음악의 기술을 연마하게 만드는, 오기를 발동시키는 역할이라도 하니까 말이다. 자기 이미지나 지키려는 위선자의 미덕은 무얼까? 실력을 향상시키지도 못하는데다 '어 좋은 선생님인데 왜 뭔가가 싫지? 난 음악도 못하는데다 착하지도 않네' 죄책감까지 얹어줄 수도. 그러니까 좋은 선생 나쁜 선생은 난 모르겠고! 선생도 학생도 채윤이도 엄마도 자기 템포를 살아야 하고, 살기 위해선 찾아야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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