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누구보다 권위자에 매여 있는 사람이다.
최근 몇 년 잘 풀리지 않는 마음의 문제를 다루면서 또렷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쉽게 권위자를 믿고, 믿을 뿐 아니라 많은 판단들을 권위자의 판단에 무분별하게 의존한다.
그래서 어렸을 적부터 어느 공동체에서나 대체로 윗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는 그런 삶은 살았다(나꼼수 효과. 여러 표현들에 돌아가면서 꽂혀서 자꾸 쓰게 됨)


내 마음에 권위자로 모셔들이면 그 사람을 이상화 하기 일쑤다. 당연히 실망이 뒤따르는 경우가 많다. 권위자는 내가 내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씌워놓은 감투이기 때문에 혼자 기대를 높여놨다가 지나치게 실망하는 건 결국 나를 괴롭히는 일이 된다. 그게 싫어서 권위자의 부족함을 똑바로 보지 않으려고 애써 어리석은 자가 되어 생각을 차단하거나 눈을 감아 버린 적도 있다.


2.
나는 정치에 그닥 관심이 있는 편이 아니다. 애써 정치기사를 챙겨보지 않고 주로 남편을 통해서 정치에 관한 뉴스며 논평을 듣는다(이 면에서는 남편이 권위자 ㅠㅠ) 다만 분명한 정치색깔은 있다. 근현대사를 아우리는 조국의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공부한 적이 있고 그러면서 생긴 역사의식이 있다. 정치적 입장이라는 게 아주 똑같은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 지금은 그저 MB를 대척점에 두고 함께 분노하는 때라서 조금 명확하게 나눠지는 지점이 있기는 하지만. 얼굴 생김생김의 차이 만큼이나 정치적 입장도 다를 것이며, 다른 게 당연하며, 같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나는 설교에서 정치를 예화로 들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 한다. 제발.... 제발.... 
아, 나는 교회의 설교와 대표기도 속에서 개인의 정치적 입장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천명하는 일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던가. 쓰레기 언론이 전한 뉴스를 그대로 설교와 기도로 가져와서 인용될 때마다 나 자신이 비난받는 것처럼 얼마나 심장이 쿵쿵 뛰었던가.
그래서 민감하다. 정치적 입장이 다를 수 있지만 그 다름으로 인해서 설교자의 권위를 가지고 말도 안되는 강요를 당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니 그럴 수 있지 않겠는가.


3.
그런 나를 아는 남편이 '작은 표현 하나에 흔들리지 마' 라고 했고 '응'이라고 했지만.....마음을 다잡아 먹고 있었음에도 나는 오늘 도입부분의 사소한 예증에 걸려서 설교 내내 온전히 집중하질 못했다.
목사님의 예증은 상식적이었다. 거기 앉은 정치적 입장이 다른 누구를 비난하는 뉘앙스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눈 길 위의 자동차 발자국 처럼 선명한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상처받은 부족한 신앙인이 아닌가.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하자가 없는 말씀에도 흔들리는 감정을 어쩔 수 없었다.
전두환을 향해서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시험에 드는 믿음이 연약한 자이다. 전두환 이명박을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과 동급취급하는(그저 그 네 사람 모두 한 나라 최고의 권력자였다는 얘길 하기 위해서라도) 표현에 순간 이성을 잃기도 한다.
느낌으로 알고 있다. 목회자와 설교자로서 존경하는 우리 교회 목사님의 정치적 입장이 나와 다를 것이라는 걸. 그리고 같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 모든 전제 하에 설교를 들었어도 오늘은 도통 집중이 잘 되질 않았다.


4.
어떤 면에서 잘 된 일이다. 나는 주일에 평일에 목사님의 설교와 성경공부를 들으면서 내 마음의 권위자로 서서히 모시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내가 권위자로 모셔들이고, 그 권위자의 기대를 찾아 애쓰던 그 자리는 바로 하나님 자리였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껏 만난 어떤 목사님보다 정직하고, 세상의 길에서 유턴하여 그리스도의 길로 사는 모범을 보이고, 탁월한 통찰력으로 설교하고 가르쳐주시지만 그 분 역시 내게 참된 권위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참된 권위자는 내 안에 계시는 예수의 음성, '성령님' 그 분이어야 하니까.


5.
결국 오늘 설교의 결론으로 돌아가게 되는구나.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 합류한 실라는 무엇 때문에 그 고난의 자리에 콜링받아 기꺼이 따라갔는가? 바울이 줄 수 있는 것은 권력도 명예도 즐거움도 아니었을텐데....
실라는 '선지자'라고 하였다. 선지자는 말씀을 맡은 자이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다. 실라는 예수님을 품은 사람이다. 바울 역시 마찬가지다.
예수님 외에 다른 것으로 맺어진 관계들은 그 불완전한 것들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고마는 관계이다. 권력이든 돈이든 로맨틱한 사랑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함석헌 선생님이 말하는 '그 한 사람'은 사실 사람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맞다!
예수님을 배제한 채 사람이 내 마음의 권위자 될 수 없고, 사람이 내 마음의 참된 벗 될 수 없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참된 권위자, 참된 벗 되기 원한다면 예수님의 심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오늘도 설교를 통해 누린 은혜가 있는 거구나.(이것은 은혜의 깔대기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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