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통령 돌아가셨을 때 일주일 이상 밥을 거의 먹지 못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매운 쫄면을 사다가 집에서 혼자 먹으면서 미친 여자처럼 울며불며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그리고 거짓말 같이 입맛이 돌아왔다. 어제 저녁 이후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려 보내다가 점심때가 되어 집 옆의 국수집에 가서 잔치국수 하나를 사왔다. 뜨겁고 매운 걸 후룩후룩 가열차게 먹어댔다. 다 먹고 나니 희한하게 배에 힘이 들어가면서 글 한 줄이라도 쓸 힘이 생기는 것 같다. 국수를 먹으면서 몇 년 전 먹었던 쫄면 생각이 났는데 쫄면 생각과 더불어 그 때(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힘들었던 이유를 또렷하게 알게 되었다.'채무감'이다. '빚 진' 마음이다.
87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아니 그 이전을 이야기 해야 한다.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왔다. 그리고 3학년 때 총각 국어선생님, 아가씨였던 영어선생님을 엄청 좋아했다. 두 분 다 아마도 학교 졸업하고 첫 학교였던 것 같다. 그 중 국어선생님은 어린 내게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열어주셨다. '네 옆에 있는 친구는 친구지 경쟁자가 아니다. 친구를 경쟁자로 생각하고 공부를 인생의 전부로 생각하면......' 라고 시작하는 이야기는 이승만 정권과 미국과의 관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가끔 선생님을 찾아 갔고 무엇보다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때 사주신 시집이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이다. 편지에는 '너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예수란 분도 민중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를 희생한 분이다'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찍이 의식화 교육을 받은 것이다. 대학에 들어갔다. 87학번이다. 6월 항쟁이 있었던 그 87년 말이다. 1학년 1학기 꽈대가 되었다. 대의원 MT를 갔는데 거기서 들은 데모 곡들이 충격적으로 재밌었다. 워낙에 노래가사에 마음을 잘 여는 편이라 노래만 들어도 지금의 대학, 사회,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이 다 보이는 것 같았다. '영자야 내~애 딸년아 몸 성히 성히 성히 자~알 있느냐. 서울에 있는 이 오빠는 대학생이 아~아니란다.' 그리고 전두환 이순자가 들어가는 노래들은 정말 재밌어서 죽을 지경이었다. 자려고 누웠을 때 간부 언니들끼리 새벽까지 줄곧 담배를 피워대며 심각한 얘길 하는 것 같았다. 담배연기와 알 수 없는 얘기들의 무게감에 눌려 잠을 잘 못 잤다.
과선배 언니들이 소집한 '세미나'라 불리는 독서토론 모임에 들어갔다. 첫 책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이었고 충격적이었다. 세미나는 정해진 커리가 있었다. 책은 좋지만 언니들의 강압적인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언니가 1:1 로 교육을 하겠다며 따로 만났다. '남자 친구 있냐?'로 시작해서 이 공부의 의미 등을 얘기해 주는데 천성적으로 억압을 싫어하는 나는 감이 왔다. '조직'으로 들어가는 거구나! 거절했다. 그리고 혼자서 그 커리에 있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국 현대사>- 강만길, <해방 전후사의 인식>-송건호 외 등의 책으로 나는 비로소 '조국의 딸'로 살짝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 해 1월에 있었던 일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다. '턱'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그 일 말이다. 그리고 5월에 즈음하여 전시된 광주 민주화 항쟁 사진은 또 한 번의 충격이었다. 비록 선배들의 조직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6월에 혼자 조용히 데모 현장에 따라다녔다. 엄마가 알면 어떻게 대학 보낸 딸 빨갱이 됐다고 통곡을 하실까봐, 아니 사실 그 선배들에게 부끄럽기도 해서 조용히 시청으로 나가 최루탄 맞고 혼자 방황하다 지하철 타고 집에 오곤 했다. 그리고 어느 어머니에게 귀하지 않은 자식이 있을까? 누구는 '호헌철폐 독재타도' 전쟁의 최전방에서 몸으로 폭력을 받아내며 자신의 삶을 옳을 것을 위해서 내던지는데 '나는 뭐하는 것인가?' 이 고민에 대학 4년을 방황했다. 잔디밭에 누워 위의 그런 책들, 여성학, 사회학... 이런 책을 보다 자다 집으로 오곤 했었다.
'선봉에 서서 하늘을 본다. 고향 집 하늘 위엔 굴뚝 연기만.... 오, 어머니 당신의 아들 딸! 자랑스런 민주의 투사.....' 이 노래에서 '오 어머니 당신의 아들 딸!'을 외치며 눈가가 빨개지던 선배를 기억한다. 그 시절 운동을 하던 선배들에게 '어머니'라는 이름은 누구보다 가슴이 미어지는 말이었을 것이다. 박정희 시절은 물론 5, 6공 동안 자신들이 선택할 길은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안는' 머나먼 날을 위해서 박종철처럼, 이한열처럼 되는 것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말이다. 시골에서 소 팔고 논 팔아 대학 등록금 대는 부모님, 그 부모님의 주름진 얼굴과 거칠어진 손을 생각하면 이 얼마나 피눈물 나는 선택인가. 그런 선택을 한 친구, 선배들에게 나는 빚진 자다. 김근태 위원장이 고문을 받음으로 그나마 오늘 대통령 욕이라도 할 수 있는 세상을 살게 된 것이다.
목회자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대단한 희생을 하는 것 같은 눈길을 보내는 분위기가 있다. 더욱이 그 사람이 공부를 잘하고 잘나가는 직장을 다닌 전적이 있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이 찬양을 부르며 그 길을 가겠노라고 헌신한다. 남편이 목회자라서 아는데 참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그렇게 특별히 어려운 길도 아니다. 누구든 예수님의 제자로 이 세상을 살려고 하면 고난 받아야 하고, 참아야 하고, 감수할 것들이 많지 않은가. 교인들에게는 목회자를 향한, 목회자 가정을 향한 연민이나 채무감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목회자가 자기 자신이 아닌 교인들의 위해서 사는 삶으로 희생과 헌신의 삶을 선택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목회자가 된다고 신변의 위협을 받거나 가족을 위험에 빠뜨리거나, 고문의 위협을 당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따지면 이 시대 목회자는 그닥 큰 희생을 하는 것 같지도 않다. 희생 코스프레를 하면서 누리는 것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과 얼마 전 까지 이 나라는 자기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나라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옳은 말을 한 죄로 젊디젊은 꽃 같은 생명이 고문을 당하고, 고문당하다 죽어가곤 했었다. 박종철, 광주의 무수한 사람들, 이한열.... 이런 이름으로 대표되는 분들에게 대한 빚진 마음을 나는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다. 많은 사람들을 앞세우고 한 구석탱이에서 목소리를 좀 내다, 최루탄에 눈물 콧물 좀 흘리고, 우르르 쫓기다 구두 한 짝 잃어버리고, 뒷골목에서 콧물 추스르며 서성거리다 슬쩍 빠져나오던 그 날들 이후로 말이다. 그리고 호헌철폐가 되고 대통령 직선제가 되고, 한 10년 사람 같은 대통령을 가질 수 있었던 것에도 나는 누군가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에 많이 숙연해질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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