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관절 골절 후 수술, 재활을 기적처럼 극복하신 엄마.
행여 또 넘어질세라 고이고이 다니시며 1년 넘게 잘 지내셨는데 오늘 1년 반 전 그날의 데자뷰입니다.
아침에 집에서 넘어지셔서 나머지 한 쪽 고관절이 골절되어 입원하고 수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처럼 당황하거나 두려움에 휩싸이진 않았지만 엄마의 침상을 지키는 밤. 밀려드는 슬픔과 복잡한 심경은 다시 새롭습니다. 그때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 해피앤딩으로 끝났다고 느꼈던 엄마의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회귀한 것 같군요. 우리 모두의 이 기적없는 일상의 고통, 언제까지 일까요?
<엄마의 미안한 육체>
* 2012년 9월 17일 <크로스로>에 썼던 글.
아흔을 바라보시는 친정엄마가 고관절 골절로 병상에 누우셨다. 이미 수년 전부터 골다공증이 심해 걸음걸이며 앉고 일어서는 일이 늘 위태위태했었다. 엄마의 조심스런 걸음걸이를 바라보면서 유리로 된 등뼈를 생각했다. 칼슘이 빠져나간 엄마의 뼈는 유리처럼 투명하고 금방이라도 부서지고 깨질 것만 같아 불안했다. 45세의 늦은 나이에 늦둥이로 나를 낳으시고 연이어 동생을 낳으셨다. 늦은 출산으로 인해서 이미 몸속의 칼슘은 충분히 고갈되었을 것이다. 목사였던 남편이 일찍 부르심을 받으면서 어린 남매와 덩그러니 세상에 남겨지셨다. 남매를 기르는데 노년을 바친 엄마는 칼슘은 물론이고 몸과 마음의 마지막 남은 양분이란 양분은 다 쏟아 부으셨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나마 삶을 구축하고 채우며 살고 있는 것은 텅 비어가는 엄마의 생명의 이면이 아니겠나.
침대에 누워 꼼짝 못하시는 엄마 곁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먹고 화장실 가는 기본적인 욕구의 해결은 물론 옆에 있는 손수건 하나도 남의 도움 없이 손에 쥘 수 없는 엄마를 지켜보아야 했다.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지만 그 정도는 ‘사치스런’ 고통이다. 그 모든 것 혼자 할 수 없는 엄마를 간호하는 것은 처절한 일이다. 조금이라도 몸을 이동할라 치면 엄마의 작은 몸이 그렇게나 육중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몇 시간 만에 손목이 시큰거리고 손가락이 벌벌 떨렸다. 그 와중에 들리는 “아이구, 어쩐댜. 미안혀서 어쩐댜. 너도 약헌 몸인디……. 미안허다. 미안허다”는 엄마의 목소리는 귀로 들어와 가슴을 후벼 판다. 엄마가 내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자발적 행동이 ‘말’이라는 듯, 엄마가 고통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근육이 성대인 것처럼 끊임없이 “미안허다. 미안허다” 했다. 늘 나보다 힘이 셌고, 더 강했던 엄마가 어쩌다 이렇게 미안한 존재가 되었을까? 이제 다시 돌이킬 수도 없는 ‘미안한 육체’가 된 엄마 몰래 소리 없는 눈물이 자꾸 흘렀다. 바위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엄마의 몸은 막상 만져보면 전혀 다르다. 오랫만에 만져보는 엄마의 살들은 긴장이라곤 없는 근육들로 바람에도 흔들릴 것 같다.
병원을 나와 주일 마지막 예배인 청년 예배에 참석했다. 청년 성가대의 맑은 소리가 유난히 생소하게 귀에 꽂혔다. 바이브레이션 없는 투명한 목소리를 듣자니 젊고 탱탱한 피부와 긴장감 넘치는 근육으로 덮인 저들의 육체가 느껴진다. 아, 늘어질 대로 늘어진 엄마의 살들이 오버랩 되었다. 저런 탱탱한 긴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엄마의 ‘미안한 육체’에 사로잡힌 탓이었나 보다. 젊음과 생명력이 생소하고 낯설어짐이었다. 우리 엄마도 젊어서 노래를 잘했다고 했다. 성가대에서 찬송을 부르면 “목청 좋다고 칭찬이 늘어섰었어” 라고 말하곤 했는데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찬송은 항상 바이브레이션 그 자체다. 엄마도 저 청년들처럼 흔들림 없는 직선 같은 소리로 노래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처럼 늙지도 젊지도 않은 어정쩡하게 맑거나 투박한 소리로 찬송하던 시기를 지나 어느 덧 지금의 노인네가 되었을 것이다.
청년 성가대의 찬양 소리는 좋다. 음악적 완성도는 상관없이 듣기에 좋은 구석이 있다.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농담 따먹기를 할 때는 평소보다 시계가 빨리 돌아가는 느낌이다. 늘씬한 종아리에 짧은 반바지를 입은 무리가 지나가면 그들로부터 눈길을 거두기가 쉽지 않다. 젊음과 생명력은 그렇게 매력적이고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반면 쇠잔해가는 엄마의 몸, ‘미안한 육체’는 직면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생명력이 빠져 나가 흔들거리고 너덜너덜해진 노인의 피부는 죽음, 곧 바로 죽음을 연상시킨다. ‘이러다 엄마가 돌아가시는 것 아닐까?’ 병원에서의 하룻밤이 그리도 힘겨운 이유가 여기 있다. 어찌 됐든 엄마의 육체는 말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이 가고 있다고. 어디 엄마의 육체뿐인가? 나는 그렇지 않은가? 투명하고 싱그러운 소리로 노래하던 청년들은 또 어떤가? 우리 모두 하루 씩 삶을 지우고 죽음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내 안의 근본적인 두려움, 죽음 그 자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나 자신’ 을 맞닥뜨리는 일은 두렵고 거북하고 회피하고 싶은 일이다. 쇠잔해가는 엄마의 몸은 ‘죽음’으로 인한 온갖 두려움에 대한 나의 감각을 일깨운다. 환자보다 보호자가 먼저 쓰러진다는 말은 두려움에 눌려 지레 지쳐버리는 나 같은 경우를 말하는 것 아닐까.
인간의 처음과 끝은 어찌 이렇게도 닮았단 말인가? 엄마의 아기로 처음 이 땅에 왔던 나는 철저하게 의존적인 존재였다. 엄마가 젖을 물려줘야 배를 채울 수 있었고, 엄마의 손길이 있어야만 내가 내놓은 배설물로부터 청결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엄마가 그렇게 전적으로 나를 돌볼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성대를 울려 ‘응애응애’ 우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물론 엄마도 외할머니에게 처음 왔을 때 그러했을 것이다. 이제 엄마는 다시 철저하게 의존적인 존재로 앉고 일어섬조차 스스로 할 수 없는 존재로 약하디 약한 내 몸에 기대어 있다. 생각해보면 언젠들 우리가 독립적인 존재였던가? 젊음의 열정으로 생명력이 충만한 순간에도 과연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지켜낼 수 있었던가? 활력이 넘치는 몸, 틀림없는 기억력, 탱탱한 피부와 떨림 없는 목소리로 인해서 ‘내 삶은 내가 쥐락펴락 할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온 삶이 아니었나? 그렇다. 처음과 끝이 아니라 인간의 자리는 의존하는 존재, 내어맡기는 존재 그 곳이다.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인 것이다.
두려움으로 눈을 가리고 ‘안볼란다. 안볼라다’ 하며 회피하지 말아야지 싶다. 엄마의 미안한 육체가 누운 자리는 머잖아 나의 자리가 될 것이다. 사춘기 딸의 신경질을 받아내던 엄마가 저리 노쇠해지고, 엄마에게 대들고 신경질 부리던 딸이 어느 새 사춘기 딸의 엄마가 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듯. 아직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은 육체라 하여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함에서 깨어날 때다. 나와 가족들과 주변의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하나님 놀이가 하고 싶어 질 때마다 엄마의 미안한 육체를 떠올리려 한다. 한 때 금식기도와 철야기도로 인생의 역정을 돌파해내던 엄마가 배변까지도 간병인에게 내어맡기곤 묵묵히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슬픔과 두려움 때문에 회피하고만 싶은 병약한 엄마에게 더욱 내 삶을 밀착시켜야겠다. 엄마의 딸인 나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엄마에게 받은 상처, 믿음이란 이름으로 물려받은 바리새적인 신앙과 싸우느라 아픈 시간들을 보냈다. 이제 엄마의 미안한 육체와 화해하며, 나의 과거와도 더 깊이 화해할 시간이다.
내가 이 땅에 무력한 아기로 오던 그 순간부터 내게 생명줄이었던 엄마 대신 진정한 생명줄인 그 분께 온전히 내어맡기는 인생을 사는 것이 오늘 엄마가 몸으로 전해주는 마지막 지혜이고 훈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엄마를 뵐 때마다 지혜의 신비 가득한 ‘미안한 육체’를 만지고 쓰다듬으리라. 아름답지 않아 아름다운 엄마의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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