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에니어그램'이란 제목으로 책의 마지막에 들어간 글의 원문입니다. 에니어그램의 역사와 더불어 에니어그램과 커피가 콜라보 된 이유 등을 밝혔습니다. 무엇보다 신앙인들 특히 개신교인들에게 에니어그램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에니어그램의 기원에 대한 의구심,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인 의심증 같은 것으로 에니어그램이 찜찜하신 분들께 드리는 글이기도 한데요. 필요하신 분들을 위해 블로그에 걸어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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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하는 설교와 눈에 띄도록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목사님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청년들이 있었다. 그 청년들을 위로하고 다독이기 위해 어느 선배가 이렇게 조언을 했다는 얘길 들었다. ‘목사님의 삶은 보지 마. 우린 설교만 들으면 돼. 설교에 은혜 받으면 되는 거지. 그분은 우리에게 설교하기 위해 계시는 분이야.’ 이 얘길 들었던 몇 년 전, 분노에 가까운 안타까움을 느꼈다. 설교만 듣고 삶은 보지 말라고 조언하는 선배. 과연 설교만 듣고 설교대로 살아서 좋은 신앙인이 될까? 그 선배의 조언을 듣는 후배들은? 이 말이 아프게 가슴에 남아 농익으면서 그 선배라는 친구의 두려움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설교와 상충하는 목사님의 삶을 보고 통합해낼 방법이 없음을 알기에 먼저 눈감아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목사님의 설교와 삶이 아니라 자신 안의 빛과 그림자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일 것이다. 주어진 신앙의 규율을 그대로 지키는 삶은 일차적으로는 안전하다. 그런데 우리의 영적성장은 반드시 내면의 삶으로부터 시작되고, 어느 시점이든 우리는 그 삶으로 초대받게 되어있다. 그 초대는 피하고 싶은 고난을 통해서 갑자기 들이닥치듯 올 수도, 얻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하는 목마름의 모양으로 올 수도 있겠지만 분명 내면으로 오라는 초대장이다.
설교는 좋은데 설교에 역행하는 삶을 사는 목사님, 신앙은 좋은데 비도덕적이고 편협한 인격을 가진 신자를 찾는 일은 서울 야경에서 십자가를 찾는 것만큼 쉬운 일이다. 신앙의 열심과 인격적 건강함의 부조화는 ‘목사님도 인간인데, 우리가 다 이렇게 연약하지’ 하는 말로 쉽게 면죄부를 받곤 한다. 높다란 강단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영적인 지도자들이 세속의 범부조차도 죄라고 생각하여 하지 않을 일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며, 그것이 드러나는 경우에도 당당한 태도를 보일 때 우리는 당황한다. 그러나 마냥 비난하고 비아냥거릴 수만은 없는 것은‘기’자가 ‘개’자로 바뀐 기독교인이란 이름으로 우리는 하나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나, 당신, 설교가 유창한 목사님, 누구보다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키는 시어머니 권사님, 탈세한 돈으로 건축과 선교에 공헌하는 장로님. 우리 모두 말이다. 전대미문의 부흥을 경험한 한국교회, 그리하여 눈에 띄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한 한국교회를 향해서 감히 안티 크리스천들이 입에 담기도 민망한 말들로 조롱을 해댄다. 그 야유와 비난 속에 담긴 초대를 읽어내야 하지 않을까. 채움이 아니라 비움으로 고지가 아니라 낮은 곳으로, 뼈아픈 성찰의 자리로 나오라는 주님의 초대로 읽을 수는 없을까.
연금술에서 ‘바스 헤르메티스’(‘vas hermetis’ 라틴어로 ‘헤르메스의 그릇’)라고 불리는 금을 만들 때 사용하는 그릇이 있다. 그 안에 납을 담고 그릇을 밀봉한 뒤 열을 가하면 변화가 일어나는데 행여 그릇이 깨지거나 금이 가서 열기가 새어나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그릇을 ‘테메노스’(Temenos) 즉 심리적 그릇이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새어나가지 않는 나만의 비밀이 있는 장소이다. 새어나가는 비밀이 없이 고요히 침잠한 심리적 에너지가 쌓일 때 납이 금이 되듯 심리적으로 성숙하고 통합된 인간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신앙의 여정에서 이 테메노스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비밀스런 장소이며 그 안에 담긴 은밀한 이야기일 것이다. 다름 아닌 우리의 중심, 속사람.
한국 개신교와 더불어 우리들 자신의 영적인 위기는 속사람으로 향하는 길을 잃어버림이 아닐까. 목사님은 설교만 잘 하면 되고, 성도들은 주일 성수나 십일조 여러 가지 봉사를 통해서 믿음을 입증해내면 되는 삶을 너무 오래 살아온 탓일 것이다. 우리는 자기 성찰을 위해 골방으로 들어가는 방법,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길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이 책은 내면의 삶을 돌아보기로 결심하고 그 방법을 찾는 사람에게 소개하는 지도 한 장과 같다. 에니어그램은 인간의 내면, 즉 자신의 속사람을 찾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좋은 지도이다.내가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의 동기, 나조차도 속고 있었던 왜곡된 동기를 알려주는 ‘아홉 개의 성격유형’은 영적인 의미로는 아홉 개의 ‘옛 자아’ 또는 ‘거짓자아’(엡 4:22)이다. 구원과 회개, 성화의 과정에서 꼭 필요한 ‘자아성찰’은 이러한 거짓된 자아를 날것으로 들여다보고 그에 직면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에니어그램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두려운 작업을 수행하는데 더없이 적합한 도구이다.
지금 여기서 에니어그램을 만나기까지
에니어그램의 기원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고, 사막의 교부들로부터라고도 하지만 직접적인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스승과 제자사이에서 일대일로만 비밀스럽게 전해졌다고 하니 기원을 정확하게 추측할 방법은 없다. 현대에 이르러 구르지예프(Geargei Ivanovitch Gurdjieff)를 통해서 서방세계에 알려진 에니어그램은 1970년대, 깊은 연구와 분별을 통해 미국 가톨릭의 예수회 신부회 영성수련의 도구로 채택되었다. 국내에는 역시 가톨릭의 성심수녀회 박정자 수녀를 통해서 소개되었다. 가톨릭 서울대교구 소속 한국에니어그램 연구소를 통해서 수도자 뿐 아니라 평신도들의 기도와 성찰을 돕기 위한 성찰의 도구로 가르쳐지고 있다.
개신교 신자인 내가 인생의 오후가 시작되는 중년 즈음에 가톨릭 영성의 에니어그램을 만난 것은 큰 은총이었다. 철이 들기 시작한 어느 시점부터 ‘성화’는 내게 풀지는 못하지만 꼭 해야 하는 숙제 같은 것이었다. 믿음과 더불어 인격이 성숙해지기를 바라는 갈망이 컸지만 그럴수록 그 간극이 더 커져가는 것만 같아 좌절할 뿐이었다. 나 자신을 돌아보아도, 믿음이 좋다는 주변의 사람을 둘러보아도 ‘성화’는 애초부터 도달하지 못할 목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내가 나고 자란 개신교의 화려한 교회당 뒤에 무너져버린 도덕성, 뒤틀려버린 성품과 인격에 깊은 좌절에 빠져있을 때 에니어그램을 만났고 성화의 길은 ‘내면의 여정’임을 비로소 마음으로 알아듣게 되었다. 에니어그램이 나를 직접 그리스도의 인격을 향해 견인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막혀있는 것 같은 벽에서 내면으로 가는 문이 되어준 것이다. 이걸 발견한 게 어딘가! 그러나 가톨릭 영성의 전통 안에서 배우는 에니어그램은 쉽지 않았다. 문화적 이질감으로 인해서 쉬운 얘기도 더욱 어렵게 들렸고 무엇보다 보수적인 개신교인인 나로서는 담을 넘나들며 배움을 갖는다는 것이 늘 두려운 일이었다. ‘우리 교회에는 왜 이런 자기성찰을 안내하고 돕는 것들이 없을까? 심리학을 빌어 신앙의 이름으로 자기계발을 권하든가 아니면 심리학 자체를 악한 것으로 여겨 배척하는 입장들만 난무하는 것 같은 우리 교회, 우리 개신교’하는 생각으로 열등감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심리학과 영성 사이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외롭게 때로 모험적으로 수년의 시간을 보냈다. 이 책은 가톨릭 영성의 에니어그램에 개신교 신학의 옷을 입혀보자는 바람으로 개신교 목회자인 남편의 도움을 받아가며 걸음마 하듯 시작한 연재 글(<QTzine> 2011년 1월 ~ 2012년 12월)의 산물이다.
에두르지 않는 ‘죄’의 고발
에니어그램에 접근하는 방식이 여럿 있다. 크게는 뉴에이지적인 접근, 심리유형론적인 접근, 그리고 영성적 접근이다. ‘거짓 나’를 알고 벗어버리면 ‘참 나’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뉴에이지적인 접근이고, 내 유형을 발견하고 옆 번호인 날개를 펼쳐 잠재력을 극대화하라는 것은 심리유형론적 접근이다. 이 책의 에니어그램은 기독교 영성적 접근임을 밝혀둔다. 앞에서 언급한 성심수녀회의 박정자 수녀와 한국에니어그램 연구소를 통해 보급된 에니어그램을 말한다. 유형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자기계발의 도구로 에니어그램을 사용하는 것도 유익이 있을 것이다. 다만, 신앙의 여정에서 에니어그램을 심리유형론으로만 사용하는 것은 치명적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에 진통제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단지 진통제로만 그 약을 다 소비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영성적 에니어그램이 가진 최대의 강점은 ‘죄’에 대한 에두르지 않는 진단이다. 위로받고, 받아들여지는 말랑말랑한 내적치유를 바라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이유이며 심리학과 영성의 다리를 놓는 지점이기도 하다.
에니어그램에서는 아홉 가지 성격유형이 가지는 타고난 재능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뒤집으면 동전의 양면처럼 ‘근원적인 죄’라 이름 하는 그림자가 된다. 우리의 강점과 약점, 달란트와 죄 짓는 지점은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다. 죄를 가리키는 헬라어 ‘하마르티아’(hamartia)는 궁술에서 온 말로 ‘표식을 놓치다.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뜻이다. 죄란, 하나님이라는 과녁에서 빗나간 것이다. 열정적인 봉사, 섬김... 이런 것들이 좋은 것이되 하나님이라는 과녁을 빗나가면 죄가 된다. 선물로 주신 재능에 과도하게 몰입하여 오직 그것으로만 살아보고자 할 때, 바로 하나님 사랑이라는 과녁에서 빗나가는 것이다. 분노, 교만, 거짓, 질투, 탐욕, 공포, 방종, 파렴치, 게으름. 이것은 에니어그램의 아홉 가지 유형이 각각 지고 있는 근원적인 죄이다.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
기독교 전통에서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 또는 ‘칠죄종(七罪宗)’이라 불리는 것이 있다. 이 목록과 에니어그램의 근원적인 죄가 일치한다는 것이 매우 신비롭다. 일곱 가지 죄에 거짓과 공포를 포함시키면 에니어그램의 아홉 가지 근원적인 죄가 된다. 오랜 전통을 가진 이 ‘7대죄’ 목록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4세기 사막의 교부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에바그리우스에 의해서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원 생활을 하는 수도사들이 가장 벗어나기 힘들어하는 여덟 가지의 죄를 구별하여 ‘8가지 악한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목록을 만들었다. 에니어그램의 기원을 사막의 교부들로까지 올라가 추측하는 것은 바로 이 에바그리우스의 죄 목록 때문이다.
그 기원이 어떠하든지 구원의 여정에서 ‘죄’의 문제를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기독교 영성이다.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를 지은 신원하 교수는 ‘진정한 의미의 영적인 삶이란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본래 지음 받은 모습으로 회복되어 가는 삶이기에, 깊은 영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죄의 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에게 ‘거저 받은 구원’이나 ‘성화’가 관념적으로 들린다. 그러다보니 무감동의 식상한 교리 용어가 된 것처럼 ‘죄’ 역시 관념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 같다. 기도를 시작할 때 인사말처럼 회개의 말이 나열되지만, 말이 화려할수록 내용이 공허함을 누구보다 우리 자신이 잘 안다. 도둑질이나 살인 같은 윤리적인 죄,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열심히 읽지 않은 죄, 누군가를 미워한 죄.... 등을 제외하면 지금 당장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가 있을 것 같지 않고, 떠오르지도 않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뭐 그렇게 죽을죄를 졌다고!’ 늘 속에서 맴도는 억울한 중얼거림 아닌가. 에니어그램의 근원적인 죄는 우리 인격에 새겨진, 뼈 속까지 하나님이라는 과녁을 벗어나 있는 죄를 드러내고 보여준다. 말하자면 내가 원래 나라고 알고 있는 성격 자체가 죄 된 모습이라고 하니 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인가. 흔히 성격이라 불리는 우리의 내적인 ‘페르조나’(perzona)가 우리 자신인 줄 알고 살 때 어떻게 치명적으로 하나님이라는 과녁을 벗어나는지를 에니어그램 아홉 가지 유형이 보여준다.
당신은 유형이 아니라 인격 : 대화로 푸는 에니어그램
죄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에니어그램은 위험한 도구이다.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마음의 역동, 동기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부정적인 접근방식은 듣는 사람을 당황케 할 것이다. 에니어그램은 이제껏 살아온 방식에 대해서 잘했다고 박수쳐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거짓자아라고 말하기 때문에 들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더욱 당혹스러운 경험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에니어그램을 타인을 향해 적용하려 할 때는 치명적인 독이 될 것이다. ‘네가 몇 유형인지 알겠어.’라고 말하는 것은 ‘네가 어떤 가면을 쓰고 어떤 치명적인 죄를 일삼는지 알고 있어.’라는 말과 다르지 않으니. 뉘라서 감히 타인의 동기를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에니어그램은 철저하게 나 자신을 보는 도구로 사용해야한다. 사람을 번호의 틀에 가두고, 그들의 동기를 다 안다고 하는 순간 그 좋은 에니어그램은 나와 이웃을 살상하는 무기가 된다.
하물며 에니어그램을 가르치는 일은 얼마나 위험한 일이겠는가. 에니어그램을 알고 가르친다고 하는 순간 내가 모든 사람의 동기를 다 꿰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지옥을 헤맨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고심 끝에 이 책에서 유형설명을 대화체로 구성한 이유 중 하나이다. 아끼는 제자 하나와 우리 집 거실에서 마주앉아 유형이야기를 하는 설정은 유형이 아니라 인격임을 잊지 말고 글을 쓰자는 마음이 담긴 장치였다. 어려운 에니어그램을 어떻게든 재밌고 쉽게 전달해보자는, ‘재미’에 집착하고 ‘지루함’을 악덕으로 여기는 7유형적 집착이기도 하다. 각 유형과의 대화에서는 그들이 내는 감탄사 하나에도 느낌을 담으려고 노력했는데 독자들께 하나하나 다 감지되지는 않겠지만 직관적으로라도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실 에니어그램의 깊이와 넓이는 무궁무진한데가 우리 모두 자기 유형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일정 정도는 장님 코끼리 다리만지는 식일 것이다. 7유형이 전달하는 아홉 가지 유형 이야기가 독자들께 어떤 식으로든 유형 이해의 한 측면을 열어 드렸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나 자신의 에니어그램을 통한 내적여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자 하였다. 유형이야기 사이사이에 내적 여정에서 들 수 있는 의문과 답도 끼워 넣었다. 물론 필자의 개인적 경험에서 길어 올려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방식의 접근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직접적인 설명이 필요한 독자들은 리처드 로어, 안드레아스 에베르트 공저의 <내 안에 접힌 날개>를 읽어보길 권한다. 영성적 에니어그램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모님의 커피와 에니어그램
햇살이 들어 따스한 거실에서 제자와 마주 앉아 커피 한 잔과 함께 에니어그램 이야기를 나누는 설정. 글을 위한 설정이라기보다는 사실 내게는 흔한 일상이었다. 나의 제자들은 ‘사모님’이는 호칭 대신 ‘모님’이라는 고유명사 같은 호칭으로 부르며 찾아와 커피를 마시며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주곤 했다. 커피를 볶고 핸드드립을 하여 함께 나누는 것이 내게는 큰 기쁨이었다. 커피와 함께 에니어그램을 통해 내적여정을 나누는 일은 더더욱 그러하였다. 에니어그램이 오랜 시간 스승과 제자 간에 일대일로만, 비밀스럽게 전해졌다고 하는데 이런 느낌이었을까. 여하튼 나는 커피를 마시며 에니어그램과을 도구로 삼아 두려움 없이 마음을 열어 보이는 대화가 좋다. 커피, 에니어그램, 대화는 궁합이 딱 잘 어울리는 삼합이다.
커피, 특히 핸드드립 커피와 에니어그램은 의외의 공통점이 많다. 커피와 에니어그램은 정확한 기원을 알 수 없다는 것도 같다. 또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슬람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도 같다. 커피의 기원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커피 열매를 따먹은 염소이야기’이다. 에디오피아의 아바시니아에 사는 칼디라는 목동은 자신이 치던 염소들이 빨간색 열매를 따 먹은 후에 잠을 자지 않고, 벌게진 눈으로 뛰어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 빨간 열매를 근처 수도원의 수도승들에게 가져갔고 수도사들은 이것을 악마의 열매라 여겨 불에 던졌는데 매혹적이고 좋은 향을 내더라는 것이다. 이후 커피의 각성 효과를 알게 되었고 수도 중에 졸음을 이길 수 없을 때 음용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예멘의 이슬람교도들을 통해서 커피가 아라비아의 전 지역으로 전파된 것은 분명하다고 한다. 이슬람의 와인이라 불리는 커피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이다. 유럽으로 전해진 커피는 특유의 각성성분으로 인해 탄압과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1605년에는 커피는 ‘사단의 음료’라며 음용 금지청원서가 교황에게 올라가게 되었다. 당시 교황 클레멘트 8세는 직접 마셔보고는 홀딱 반하여 커피에 세례를 준 후 가톨릭의 음료로 허용하는 칙령을 발표한다. 그랬던 커피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국민음료가 되었을 뿐 아니라 큰 교회마다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가 하면 카페교회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수피교의 수도자들에 의해 전해 내려온 에니어그램이 우리의 영적 여정에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며 커피와 에니어그램을 엮어 넣은 본문 속 비유를 찾아보는 즐거움도 누리시기 바란다.
두렵고 떨리는 마무리
커피 한 잔과 함께 이 책을 천천히 읽어 내려갈 때 독자들의 영혼이 사랑에 각성되는 은총이 있기를 기도한다. 이 글을 쓰는 거실의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과 열 너댓 권의 참고도서가 쌓여있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 나의 ‘내면 성찰’과 ‘꿈’이 기록되어 있는 일기장이 놓여 있다. 여러 권의 책을 다시 펼쳐 읽고, 일기장을 뒤적이며 지난 몇 년의 마음의 여정을 반추하며 느린 속도로 썼다. 일기장 옆에는 메시지 신약성경이 요한복음에 책갈피를 끼운 채로 어느 책보다 무게감을 가지고 놓여있다. 영적인 여정에서 길을 잃을 때나, 거짓자아인 내 유형을 벗고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의문이 들 때는 요한복음의 예수님께로 가곤 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머리도 마음도 막혀 글이 나오지 않을 때는 메시지를 펼쳐 예수님의 마음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분은 자의(自意)로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전하시는 분이다.(요 12:49-50) 거짓자아를 벗고 만나는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나’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분은 성육신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노트북을 마주 하고 앉은 정면 왼편에 내가 자주 들여다보는 렘브란트의 그림 <탕자의 귀향>이 놓여 있다. 그 그림 속에서 탕자의 맨발과 벗겨진 신발을 본다. 그리고 아들의 더럽고 부끄러운 등에 따스하게 얹어진 아버지의 손을 바라본다. 이 영적 여정은 바로 사랑의 아버지 그분께로 가는 여정이다. 이 길의 끝에서 나를 맞으시는 저 따스한 품에 안기게 될 것이다. 신학자도 영성가도 아닌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주제 넘는 일이 아닌지 우려가 들기도 한다. 이 생각에 압도될 때는 ‘너 따위가 무슨 내면에 관한 글을 쓰냐. 너 자신이나 잘 해라. 심리학도 신학도 아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네가 자격이 있는가.’는 목소리가 거세진다. 그럴 때는 내 안에 예수의 음성으로 살아계시는 성령님을 다시 초청한다. 그러면 그분의 목소리가 내 마음을 적시며 한 자 한 자 다시 써내려 갈 힘을 주셨다. 이렇게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은혜가 있었음에도, 부족한 필력과 알량한 지식이 장애가 되어 아쉬운 글이 되고 말았다. 좀 더 좋은 글을 쓸 수는 없을까 하는 마음은 욕심인 것 같으니, 이제 여러 날 작업으로 뜨거워진 노트북을 덮기로 한다. 그저 이 책을 읽는 분들의 테메노스가 은총으로 달구어지기를, 그 거룩한 온기가 새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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