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해 들어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된다고 한다. 삶의 희망을 다 잃고 극단적인 선택 앞에 서있는 사람에게 말이다. 진심어린 경청은 말하는 이를 절망에서 일으키고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게 한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어차피 답은 없지만 이렇게 털어놓으니 그나마 살 것 같다.’ 언젠가 속으로 이랬던 적이 있는 것 같고.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런대? 어쩔 수 없는 것 아는데 속상하다고. 그러니까 그냥 좀 들어달라고.” 열폭했던 기억도 있다. 좋은 벗이란, 좋은 선생님이란, 좋은 상담자란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우리는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에겐 잘 들어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소위 걸어 다니는 고민상담소라 불리는, 상담의 은사가 있다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 짐 내려놓고

주 십자가 사랑을 믿어 죄사함을 너 받으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내 말을 가장 잘 들어주는 친구는 누구인가. 부끄럼 없이 나를 다 드러낼 수 있고, 어떤 경우에도 나를 판단하지 않을 것 같은 친구를 그대는 가졌는가. 그런 친구 한 분을 소개하며 만남을 주선하는 찬송이다. 기도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이 찬송에서 기도는 진실한 친구와 의 만남이다. 모든 것을 쏟아놓아도 좋을 진실한 친구, 예수님 말이다. ‘~어룩 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만유의 주, 전지하시고 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시는하나님. 주일 대예배 장로님의 대표기도 속 하나님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저 높은 곳에 멀리 계신 하나님, 어쩐지 내겐 어려운 하나님. 내 지질한 얘기는 다 넣어두고 오타 하나 없이 정리된 보고서 들고 찾아뵈어야할 것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친구로 오신 하나님, 예수님이신 하나님 말이다.

 

청년 시절 교회에서 24시간 릴레이 기도회를 한 적이 있다. 중대 사안을 놓고 온 교인이 함께 기도하자는 취지였다. 퇴근 후, 내 담당 시간이 되어 교회 기도실 마룻바닥에 가 앉았다. 릴레이에서 내가 달릴 분량이 한 시간. 준비된 공식 요구사항(기도제목)을 다 읊었는데 시간이 몇 분 지나지 않았다. 개인적인 현안과 기타 등등의 기도를 해봐도 남은 시간이 길다. 앞뒤, 옆으로 슬슬 몸을 흔들며 기도 리듬은 타고 있지만 마음은 천지사방을 헤매는 분심에 오락가락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삐그덕 기도실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삐걱삐걱 천천히 마룻바닥을 걷는 소리. 풀썩 방석이 놓이는 소리가 난다. 그 위로 퍽 하고 짐짝 하나가 패대기쳐지는 둔중한 소리와 느낌이 내 자리까지 전달되어 온다. 그리고 바로 한숨 가득한 한 마디 주님, 너무 힘들어요.’ 그 한 마디의 무게로 기도실 마룻바닥이 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청년부 후배였다. ‘주님, 너무 힘들어요이 한 마디에 그의 하루, 그의 고민, 마음의 짐이 멀뚱거리던 내게까지 온몸으로 전달되었으니. 주님의 마음은 저 한 마디에 얼마나 무너지셨을까.

 

작심하고 앉은 기도의 자리에서 냉랭한 기운 떨쳐버릴 수 없을 때, 그럴듯한 말로 또박또박 기도할 수 있지만 가슴은 도통 뜨거워지지 않을 때 떠올린다. 기도실 마룻바닥에 쿵하고 떨어지던 그 수고롭던 몸과 영혼의 무게감을. 기도의 자리에서 그분을 마주하는 것은 이렇듯 잔뜩 지고 있던 짐을 일단 내려놓는 일. 그리고는 짐 보따리 안에서 좋은 것, 고운 것 먼저 꺼내 보이며 이미지 관리할 것이 아니라 자루 째로 쏟아놓으라 한다.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감사와 함께 근심 걱정을, 기쁨과 함께 슬픔을, 사랑과 순종의 열매와 함께 단 한 사람 용서할 수 없어 메말라 갈라진 마음을 쏟아 놓으라고 말이다. 기실 정말 좋은 친구 앞에서는 그리 하지 않는가.

 

주 예수를 친구로 삼아 늘 네 곁에 모시어라.

그 영원한 생명샘물에 네 마른 목 축이어라

 

주님, 너무 힘들어요. 당신께 실망했어요. 내 기도 듣고 계신 것 맞아요? 당신이 안 계신 것만 같아요.’ 정직하게 풀어놓고 꺼내놓아 텅 빈 마음의 방은 예수님 외에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다. 공감의 여왕을 친구로 뒀다 해도 사람 친구가 주는 위로는 금세 다시 목마를 물이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명의 물을 가진 유일한 친구가 예수님임을 깨달을 때 기도는 다른 차원이 될 것이다. 이 좋은 만남으로 어느 새 사라진 슬픔은 이웃의 슬픔에 가닿을 것이다. 가만히 내 기도 들어주시는 예수님처럼 이웃의 아픔을 영혼으로 들을 수 있는 귀가 생길지 모르겠다. 이 찬송의 시작과 끝이 다르다. 기도의 공간으로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대신 그분이 주시는 쉽고 가벼운 멍에, 사랑의 짐을 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결국이 아니겠는가.

 

주 예수의 은혜를 입어 네 슬픔이 없어지리

네 이웃을 늘 사랑하여 너 받은 것 거저 주라

너 주님과 사귀어 살면 새 생명이 넘치리라

주 예수를 찾는 이 앞에 참 밝은 빛 비추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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