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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커피를 마시다 충동적으로 화분 정리를 했다.
'충동적'이란 말이 좋다.
갈수록 주먹 불끈 쥔 '의지와 치밀한 계획'으로 뭔가를 하는 것이,
특히 멋진 결기로 대단한 것을 이루는 것이 좋게 느껴지질 않는다.
나이 탓일 수 있다. 아니 단지 나이 때문이 아니다.
마음과 마음의 병, 그리고 신앙에 관해 질문하며 물고 늘어지다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렇다.
'내가 했다고, 내가 했다니까'
이루어 놓은 것, 성취감, 드러냄, 돌아오는 찬사, 가 참 좋은데.
그러느라 잃어버린 것을 알아채지 못함으로 우리는 단절과 외로움의 바다에 허우적댄다.
나는 갈수록 주먹 꽉 쥔 의.지.가 쓸모 없다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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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 정리 했다, 하면 될 일.
의지니 충동이니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 뭐 캥기는 것이 있는 모양.
(예, 자수합니다)
충동적이라고 했지만 계절이 바뀌면 으례 하는 일이다.
해야 할 일 목록에 있던 걸 갑자기 하게 된 것 뿐.
충동적 화분 정리가 아니라 충동적으로 저지른 살인, 아니 살초(殺草)의 찜찜함 때문이다.
***
여름 내 말라버린 화초의 시신을 하나를 수습해서 화분을 비웠다.
그러면서 동시에 멀쩡한 난초 하나를 쑥 뽑아서 쓰레기 봉투에 (처)넣었다.
멀쩡한 난초 화분이었다.
잎은 다 바닥에 붙어 있고 지지대로 꽂아둔 굵은 철사에 의지하여 삐죽하니 서 있지만,
그래서 살아 있는 느낌(생기)이라곤 느껴지지 않지만 때가 되면 꽃을 어김 없이 피우곤 하였다.
꽃이 피면 반가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꽃이 '이게 웬 조화냐!' (생화냐!)
꽃이 피어도 생기가 느껴지진 않았다.
****
뭐 했다고 저 분위기도 안 맞는 난을 집에 들였을까?
몇 년 전 망원시장 입구 트럭에서 산 것이다.
화분 여러 개를 사면서 꽃이 핀 난을 5천 원만 더 내고 가져가라 기에 생각 없이 들고 온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난 화분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견이 있다.
으리으리한 교장실 창가에 핑크 색 리본을 매달고 즐비하게 서 있는 난 화분.
그 방의 주인인 교장은 전교조를 탄압하고 참교육을 가로막는 적폐, 이런 각이다.
또 모시 옷 한 벌 빼입고 난초의 잎을 닦으며 "마, 니만 믿는다. 알아서 하기라'
차분하고 고상한 어투로 살인교사하는 조직의 큰 형님, 이런 그림도 있고.
*****
설거지 하다 문득 '도통 애가 자란다는 느낌이 없어. 그러니 살아 있는 것 같질 않지'
라고 혼잣말을 했다. 생매장한 난초 말이다.
신혼 때부터 우리 집에서 죽어 나간 화분이 셀 수도 없지만 살아 멀쩡한 화분을 버린 적은 없으니.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꽤나 신경질이 쓰이는 것이었다.
자란다는 느낌, 성장하고 있다는 표식이 없는 것이 참 싫구나. 그랬구나.
'성장'은 내게 참 중요한 말이고 의미이지.
죽을 때까지 성장해야 한다고 믿고, 자라고 싶잖아. 난.
성장 가능성을 보이는, 자아의 숲이 헐렁한 사람을 무조건 좋아하지. 난.
빽빽한 의지와 완고한 자아로 숨이 막힌다면 화분 하나 희생양 삼아 숨통을 트는 것도 나쁘지 않지.
멀쩡한 화분 생매장 한 죄를 스스로 사하기로 한다.
******
다육이 화분 여러 개가 겸손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다육이를 사랑하는 집사님께서 주신 것,
지난 학기 교회 에니어그램 여정 마치고 선사받은 것들이다.
지난 봄 민맘이 가져온 잘 자란 다육이가 든든하게 서 있다.
조르르 섰는 아기 다육이들의 엄마같다.
새벽마다 드리는 한결같은 기도의 효능이 친구가 두고 간 화분에까지 미치는 것일까.
의연하여 믿음직하고, 바라볼 때마다 힘을 준다.
에어컨 바람 바로 옆에서 추운 여름을 이겨낸 초록이들과 가을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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