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놀이터가 하나 생겼는데 서현역에 있는 알라딘 중고매장이다. 걸어서 왕복 5km라서 운동 삼아 다녀오기 딱 좋은 거리이다. 가족들의 주문을 접수하여 백팩 따악 메고 비오는 길을 걸어 알라딘중고매장을 다녀온다. 돌아오는 길,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어깨에 맨 가방에 누가 작은 돌멩이 하나 씩 티 안나게 집어 넣는 듯. 걸을수록 무거워진다. 무거울수록 뿌듯함은 더 크다. 식구들 각자에게 꼭 필요한 책을 구했고, 도합 이만 몇천 원이라니~ 이것 참, 무겁지만 가볍다. 



수년 전 아주 무기력한 날('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도 하지)을 보내던 시절이 있었다. 책이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때 우연히 손에 잡은 책이 <책만 보는 바보>였는데, 영락없이 내가 책만 보는 바보였다. 요즘은 전에 없이 소설에 빠져 보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소설 <잠>이 '꿈'에 관한 내용이라는데 낚여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예약주문을 했다. 이 책을 손에 잡으면서 뭔지 모르게 마음을 못잡고 있는 터에 '소설만 보는 바보'의 삶이 시작되었다. 밀렸던 소설읽기 숙제 아니고, 놀이나 몰아서 하자.


옆에서 힐끗거리던 현승이가 <잠1>을 집더니 휘리릭 읽고, 2권 어서 읽어내라고 성화였다. 그러더니 '베르나르 베르베르, 완전 내 스타일' 하고 빠져들었다. <웃음> 1,2권을 금세 읽고 <뇌>를 비롯한 다른 작품 사내라고 자꾸 주문을 넣는데. 일단 사와서는 기말고사 마치고 읽기로 하고, 몰래 책을 감춰 버렸다. 거실에 분 소설 열풍에는 아빠의 부채질도 있었다. <82년생 김지영>을 사들고 오는 바람에 이래저래 뽐뿌질이 된 것이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 글쓰기 강의를 하였다.  글쓰기 강의, 그것도 비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강의라서 내심 혼자 짜릿했다. 쓰는 얘기를 하자니 읽는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엄마가 글을 쓰고 책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아이들은 어떤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 아이들이요?! 

TV 없는 거실 18년 째이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천장 보고 누워 있던 시절부터, 보행기를 타고 기동력을 가진 때도, 네 발로 기어다니던 때도, 그 이후에도 배경은 늘 책으로 둘러싸인 거실이었다. 그런 거실에서, 잠들기 전 침대에서 엄마 아빠는 '세트로 책만 보는 바보'였다. 아이들 독서교육이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어디 있는가? 아이들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 아닌가. 헌데 현실은 그 반대. 책에 멀미가 난 것이다. 게다가 엄마 아빠의 사랑을 뺏어간 책은 나쁜 놈! 한동안 두 아이 모두 그 어느 집 아이들보다 책에 관심이 없었다. 아, 환경의 역습이구나!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지만 진즉에 '책 읽는 아이'로 키우는 것은 포기했다.


인생이 그리 짧지 않으니 뭐든 속단 내릴 필요는 없지 싶다. 어젠가부터 아이들이 책을 읽는다. 책에 관한 한 덕후 기질이 있는 현승이는 꽂히는 책에 깊이 꽂히고. 작년에 꽃친을 했던 채윤이는 그때 그때 꽂히는 대로 짧은 흥미를 가지고 읽는다. 요즘 거실이 조용해서 둘러 보면, 넷 중 셋은 책을 들고 있는 그림이 많다. 이게 웬일이니! 아빠, 엄마, 현승이는 비슷한 소설을 돌려 보는 동안 채윤이는 의외로 <언어의 온도>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반지성적인 이미지로 각인된 채윤이의 요즘 취향이 살짝 적응이 안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제가 좋다니까! 큰 기대는 없이 '글이 그렇게 좋으면 하루 한 편씩 필사를 해봐' 했는데. 대박, 얘가 그 말 듣고 꾸준히 필사를 하고 있다.


아침 먹고 설거지 가득 쌓아 놓은 채 소설 한 권 붙들고 앉아 하루를 보내는 요즘, 소설만 보는 바보'다. 꼭 써야 할 글에는 손도 머리도 움직이지 않고, 사는 게 자꾸 씨리라라라(아, 이거 오랜만! 재방송 링크 한 번 더! ㅎㅎㅎ ), 될 대로 돼라, 약간 핀이 나간 상태이다. 그러니까 바보라는 건데. 이런 날도 있지, 이 또한 지나가리, 힘이 나지 않을 때는 힘 내지 말자, 하며 살고 있다. 거실에 나말고도 바보 셋이 더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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