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을 영화 <가버나움>으로 시작했더니 한 주간이 무겁다,

라는 말도 가볍다.


나는 왜 '자인'이 아니고 난민이 아닌가.

나는 어쩌다 (대체 뭘 잘한 게 있다고) 국적이 있고 주민등록번호가 있는 '보장 받은' 사람이다.


여기서 시작한 질문은 최근 몇 달, 아니 몇 년 내 존재를 뒤흔드는 질문을 자꾸 끌고 나온다.


나는 어쩌다 주민등록번호가 있고 뒷자리 '2'와 정체성이 충돌하지 않는 사람인가.

나는 왜 성소수자가 아닌가.


나는 왜 세월호에 아이를 태워보낸 엄마가 아닌가.

나는 어쩌다 아침 저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미친 행운을 누리는가.


금요일은 여성 인권 운동가, 위안부라 불리는 김복동 할머니 발인이었다.

며칠 그분의 인터뷰를 다시 읽고 영상을 돌려 보았다.

성폭력 전문 상담가 교육을 받는 금요일 수업엔 오전 내 영화와 영상 두 편을 보았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멀쩡히 승승장구 하는 가해자와 같은 세상을 사는 피해자들이,

한때 장래가 촉망 되었고 우등생이었고 매력이 넘치던 피해자들이 차마 끝맺지 못하는 물음을 던진다.

왜 하필 나죠? 왜?


그 질문 앞에 몸과 마음이 풀어 헤쳐져 바닥으로 흘렀다.

다시 나는 묻는다.

왜 하필 나는 아닌가?

나는 왜 멀쩡히 살아 있고, 존엄을 지키고 있는가.


<가버나움>의 자인은, 열두 살 자인은, 사람을 찌르고 교도소에 있던 자인은,

출생 기록도 없고 정확한 나이도 모르는 자인은 부모를 고발한다.

죄목은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죄이다'


나도 언젠가 그 비슷한 고발장을 쓰고 제출했던 적이 있다.

다만 부모가 아니라 부모의 부모, 부모의 부모의 부모의 부모. 

내 하나님이었다.

바닥에 뒹굴고 내 몸을 자해하고, 피를 토하며 고발하던 끝에, 

응답인 듯 응답이 아닌 듯, 수용인 듯 체념인 듯 실존을 그저 끌어 안았다.


열두 살 자인은 고발장을 쓰는데 내 심장이 다시 불끈거리지만,

나는 이제 고발장 쓰기도 민망한 나이가 되었다. 

아니 차라리 자인에게, 나의 아이들에게, 성폭력 생존자들에게 답을 하거나

할 수 없다면 변명이라도 둘러대야 할 것 같다. 


약자를 향해 배제와 혐오를 서슴치 않는 기독교인들을 보며 열두 살의 패기가 끓기도 하지만

끓는점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화학반응이 일어나 슬픔과 무기력이 되고 만다.


그저 묻고 또 묻는다. 

왜 하필 나는 아닌가.

물으면 생각한다.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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