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 메리 도허티 수녀님의 <분별>의 마지막 장을 어젯밤에 덮었다. 단순하고 고요한 내용에다 작은 책이다. 하지만 분별의 삶을 어떻게 살아온 분의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저작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차차 사귀고 배울 좋은 선생님이시구나 싶었다. 같은 얘기도 남성이 하는 것과 여성의 목소리로 들려지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잔잔하게 남는 여운을 안고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페이스북에서 뉴스를 본다. 바로 이 로스 메리 도허티 수녀님이 2월 28일돌아가셨단다. 잠시 눈을 의심했다. 맞다. 만나자마자 떠나셨다니.
지난 주일은 내 생일이었다. 채윤이가 끓여준 생일 미역국 사진을 꿈모임 단톡방에 올렸다. '죽음'에 관해 꿈을 꾸신 벗님 한 분이 삶과 죽음, 태어남과 죽음을 묵상했는데 카톡을 열자마자 미역국 사진을 보고 생일 이야기를 들었다고. 삶과 죽음의 근접성, 이 둘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 씩 덧붙여 가면서 풍성한 단톡 나눔을 가졌다. 동시성에 놀라고 놀란다.
주중에 믿고 싶지 않은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그래서는 안 될, 세상 사람 다 아파도 절대 아프지 말았으면 싶은 두 분의 소식이다. 나이가 젊어도, 연세가 드셨어도 그렇다. 부질 없는 왜? 왜?가 먼저 튀어 나온다. 그리고 입맛을 잃고 무기력과 무기력이었다.
내일은 집에서 생신 식사를 하기로 했다. 몇 년 만에 집에서 대식구 식사 준비를 하는지 모른다. 부담이 많이 되지만, 그래도 하고 싶고 해드리고 싶었다. 계단 무서워 딸 집에 못오시는 엄마에게 주차장에서 현관까지 엘리베이터 연결되는 집을 보여 드려야지. 늙은 엄마의 딸인 죄로 벌써 오래 전부터 엄마 생신 때마다 '마지막 생신일지 몰라' 각오를 단단히 하며 보내곤 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엄마 생신은 늘 엄마의 죽음을 생각한다.
태어남과 죽음이,
꿈과 현실이,
죽음과 부활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알고 믿고 사는 것이 '분별'인지 모른다. 이것을 믿는 것은 소망이지만 그 소망은 핑크빛이 아니다. 입맛을 잃음이고, 생기를 잃음이며, 무기력이고, 위장된 말과 거짓된 관계는 죄 뱉어내고 싶은 삐딱함기도 하다.
책 <분별>의 에필로그에 나오는 말이 무기력한 내게 주는 로즈 메리 수녀님의 유언 같다.
분별하면서 사는 삶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보다 명료하게, 더 많이 보기를 바란다. 과거를 돌아보며 "내가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달리 선택했을 텐데"라고 말할 때가 종종 있을 것이다. 때로는 삶을 더 멀리 보는 비전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근시안이다. 멀리 볼 수 있음은 은총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오직 이 순간이라는 사실을 결국에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 다음"은 그때가 되면, 그 다음이 여기에 있을 때 우리에게 보일 것이다. 우리는 그 다음을 기다리면서 지금 이 순간을 견디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이 순간에 온전하게 참여해야 한다. 지금이 우리가 가진 순간이며, 생명의 전부가 그 안에 담겨 있다. 그 다음 순간은 이 순간에 충실하게 집중하는 데서부터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이 없다며 어떻게 될까? 이 순간이 전부라면 어떻게 될까? 이것으로 충분한가? 이 순간을 온전하게 산 것으로 삶을 잘 살았다 생각하고 평화롭게 휴식할 수 있을까? 분별하는 삶은 우리가 매 순간을 마지막 순간이라 생각하고,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선택을 하며 살 수 있을 때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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