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하루 종일 강의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 걸 몸이 정직하게 말한다. 9월28일 토요일. 내적여정 하루 세미나 마치고, 평소 같으면 회식으로 긴장 풀 시간이지만 간단한 식사하고 서초동으로 향했다. 연구소 공식 일정도 아닌데 연구원들이 죄 서초동으로 출동이다. 몸이 안 좋아 집에 계시는 선생님은 아쉬워 어쩔 줄 모르시고.
서초역에서 나갈 수나 있을까 하면서 그저 사람 파도에 밀려서 떠나녔다. 파도에 몸과 마음과 목소리를 맡겨 흘러간다. 하루 종일 강의하느라 목을 썼는데 어디서 새힘이 흘러나와 검찰개혁! 검찰개혁! 외치며 춤추듯 걷고 있었다.
인파와 구혹 속에서 귀를 의심하게 하는 구호를 들었다. 문재인 개새끼, 문재인 개새끼. 뭐라고? 200만 인파에 둘러싸인 섬같은 맞불(은 무슨!)집회 앞이었다. 우리는 인산인해지만 쌩목인데 빵빵한 스피커에 대고 어떤 여성이 외쳤다.
법치수호-조국구속-문재인 탄핵.
스피커가 선동하면 쌩목의 촛불들이 하하 웃으며 받아쳤다.
검찰개혁! 조국수.호! 문재인체.고!
누가 어디서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외치는 소리에는 흥이 넘쳐난다. 번쩍 촛불을 드는 팔도 춤을 추듯 흔들린다. 높다란 무대 위에선 남자는 빵빵한 스피커로도 부족하다는 듯 피를 토한다. 문재인 개새끼 조국 개새끼. 온몸을 뒤틀어 젖먹던 힘까지 짜내는 폭력성이 차라리 가련하다. 촛불 시민들은 힘도 안 들이고 하하 웃으면 문재인, 체고!로 받아친다. 흘러가는 인해, 사람의 파도들, 이 사람들이 진심 체.고! 체고! 최고!
지난 8월, 검찰개혁 정국이 시작되던 시점 조국 장관 가족의 안위가 걱정되어 잠을 잘 자지 못했다. 그 어간에 투병 중이시던 권사님의 병세가 악화되신 일이 겹쳤다. 며칠 인생 최악의 불면의 밤을 보내고, 권사님 장례를 치르고, 연이은 여름 수련회 강의로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한 칸도 남지 않았었다. 남편의 분석만 간간이 들으며 가급적 뉴스를 멀리했다. 내 한 몸 지키기 위한 방어였다. 그래도 늘 조국 장관 가족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촛불 광장에 나가면 에로틱 파워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흘러다니는 느낌이다. 에로틱 파워란 다름 아닌 프로이트가 말하는 삶 충동이다. 성 충동 그 이상의 에너지이다. 가장 긍정적으로 발현될 때 생명 에너지라 할 수 있다. 여성신학자 카터 헤이워드는 하나님을 '에로틱 파워'라고 불렀다고 한다. 바로 그 충만한 생명, 생기이다. 서로에게 한없이 너그러지고, 기꺼이 자발적으로 양보하면 길을 터주고, 가져온 것을 나눠주는. 별다른 말이 없어도 긍정 에너지로 하나 되는 느낌이다.
남편이 기독교인들의 이기적이고 편협한 자아를 설명하며 들려주는 자기 경험이 있다. 어렸을 적 어머니따라 기도원에 가서 겪을 일이다. 앉을 자리가 비좁아 한 번씩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강사 목사가 '할렐루야' 하면 '아멘'을 외치며 방석을 들고 앞으로 한 뼘씩 이동하는 시간이었단다. 상상할 수 있 듯, '아멘'은 크게 외치되 앞으로 나가지 않는 분들이 있고 그분들 앞에 공간이 생겨 편안해지되 바로 뒤에 앉았던 엄마 따라간 어린 아이는 뒤에서 밀리고 앞에서 막히니 숨이 막히는 지경이 되었다고.
촛불 광장에 나가면 딱 그 반대이다. 자기 공간을 내어주는 사람들로 중간에 누가 화장실이라도 갈라치면 바로 길이 난다. 나가는 사람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도 그렇게 말랑할 수가 없다. 그 사이에 들리는 욕설은 타나토스 충동이 광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생생한 현장이다. 극단의 공격성, 배제와 혐오. 자기로 가득 차 누구도, 무엇도 침투할 수 없는 타나토스의 감옥에 갇힌 자로 보일 뿐이다.
젊은 시절에 기도가 목말라 어느 대형교회 철야집회 간 적이 있다. 극장식 좌석이었는데 늦게 온 사람들이 안쪽의 빈자리로 들어가려 할 때, 무릎을 틀어 자리를 내주는 분들의 짜증스런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심지어 통성기도를 한 판 하고나서 찬송 부르는 시간이었다. 마냥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 나 역시 종교생활에 익숙할대로 익숙한 인간이기에 어디서 어떤 본색을 드러낼지 모르니까.
어쨌든 촛불광장에는 교회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톨레랑스가 있고, 유머와 재치로 받아치는 너그러움이 있고, 에로틱 파워가 사람들 사이에 강처럼 흐른다. 희한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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