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행복해? 행복이 뭘까?' 질문을 받았다 치자. 답을 하는 대신 질문자의 행복 안부를 걱정하게 되지 않나? '어, 이 사람사는 게 힘든가 보다.' 묻는 사람 역시 마주앉은 이를 거울삼아 반사시켜 자기로 향하게 하는 질문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잘 정돈된 삶을 사는 정신과 의사 헥터 씨의 일상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행복 여행은 이 질문으로 시작된다. '당신 행복해?' 애인 클라라에게 '행복하냐'고 묻는 순간 예쁜 애인은 '헤어지자'로 알아듣는다. 행복하지 않구나, 나 때문이구나, 생각이 이렇게 흘러가는 탓이다. 내가 남편에게 이 질문을 받았다 가정해도 비슷하게 넘겨 짚을 것 같다. 어쨌든 헥터 씨는 불행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행복하지도 않아 행복을 찾아(자아를 찾아)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클라라가 헥터의 여행가방 안에 노트 한 권을 넣어 두었다. 이 노트에 그림 한 장, 명언 하나씩 채워지며 여행은, 영화는 진행된다. (리뷰 쓰고 싶은 관객들에겐 딱 좋은 장치이다. 여행의 기록은 행복의 정의에 관한 다양한 기록이고 노트의 문장들을 하나씩 묵상해보면 자연스럽게 추보식 리뷰가 완성될 것이다. 그렇게 쉽게 갈까, 말까 고민 중) 아무튼 첫 목적지는 '돈'이다. 돈이 행복인지 알아보기 위해 캐스팅된 나라는 중국.

 

"많은 사람들은 돈과 지위를 가지는 게 행복이라고 느낀다."

 

돈이 행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돈이 없어서 불행감을 느끼는 경우는 많다. 가끔 마음에 먹구름이 낄 때가 있는데 표면적인 다양한 이유와 달리 알고 보면 돈 걱정인 것을 보면. 걱정하는 마음과 불행한 마음이 늘 같은 마음은 아니지만서도. 어쨌거나 마음에 끼는 먹구름의 끝에는 먹고 사는 걱정, 즉 돈 걱정일 때가 많은 것 같다. 그래도 10여 년 전을 떠올려보면 나아졌나 싶기도 하다. 어느 때부턴가 남편이 '정신실 옛날 친구들 만나고 와서도 우울해 하지 않네. 올, 많이 변했는데' 어떤 친구들을 만나고 더 불행하게 느낀 것은 헥터 씨가 메모한대로

 

"남과 비교하면 행복을 망치"기 때문이다.

 

결혼 전 배우자 기도 목록을 따로 작성하지는 않았지만 품고 있는 건 있었다. 하나님께 내놓을 결재서류용 목록은 고상하고 형이상학적이었지만 실제 바램은 단순했다. 당시 오래된 티코를 타고 다녔다. 대학원을 다니던 중에는 실습 때문에 악기를 많이 싣고 다녔어야 했는데 차가 작아서 불편하기도 했고, 똥차라서 부끄럽기도 했었다. 여하튼 나의 백마 탄 왕자님은 제일 먼저 차를 바꿔줄 것 같았다. 그때 나온 차, 라노스 쥴리엣 빨간색이 그렇게 예뻤다. 결혼과 동시에 차가 바뀌면서 <돈에서 해방된 교회>-박득훈 저,가 아니고 돈에서 해방된 정신실이 될 줄로 생각했다. 똬하! 이걸 보고서용 서류에 명시했어야 하는데 거기 안 썼다고 이것만 안 들어주셨다. 그래서 언제라도 비를 뿌릴 준비가 된, 손바닥만 한 돈 걱정 먹구름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쓰다 보니 내 행복의 안위에 크게 위협적인 건 아니다. 잘 살아왔고 살아있는데 어쩔.  

 

춤춰라.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춤의 치유적 효과를 경험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나는 몸치이다. 평생 몸치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몸치'가 곧 '영혼치'라는 것을 어떤 피정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생각하고 글로 말로 유려하게 표현할 줄 알지만 몸으로 하는 일로 가면 박수조차 자유롭게 못 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자유롭게 춤추지 못하는 이유는 누군가 보고 있다면!이다. 춤출 때의 삐거덕거리며 바보 같은 내 몸을 누군가 보고 있다면? 오, 죽을 것같은 부끄러움이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비행기에서 만난 아줌마(아가씨?)의 초대로 고구마 수프를 먹으러 간 집에서 춤추는 헥커 씨. 몸치이며, 영혼치, 행복치였던 헥커씨가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시어머니를 보내드렸던 내면아이 치료 세미나는 4박 5일 동안 춤만 추다 오시는 곳이었다. 춤을 출 수 있을 때 어설픈 어른행세에서 벗어나 거침없이 행복을 추구하던 말랑한 영혼이었던 때로 회귀할 수 있다. 그 말랑한 영혼을 자꾸 풀어놓아 다니게 해야 한다. 행복과 직결된 중요한 지점이다. 

 

"사랑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삶도 두려워한다."

 

결국 사랑이다. 인간 본질에 관한 질문을 하다 '사랑'을 만나지 않을 방법이 없다. 적어도 내겐 그러하다. 헥커씨가  마지막 비행기 여행에서 만난 뇌수술 환자를 돌보고 난 후 메모한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행복에 관한 질문이 어디서 끝날지 예고하는 것이다. 헥커씨의 사랑은 오래된 사진 속 옛 애인이다. 당초 '나는 행복한가' 하는 질문에는 사진 속 연인 아그네스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남자이며 감정에 무딘 헥터는 느끼지 못했을까? 지금 애인 클라라의 촉이 먼저 감지한 것이다. 때문에 클라라는 꾸뻬씨의 행복 여행을 자신과의 이별여행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나이에 연애강의를 하는 게 늘 조금 부끄럽다고 생각했었는데 작년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연애 과잉의 시대를 곰곰이, 비판적으로 생각해보면서 연애(또는 연애감정)은 모든 세대의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이 역시 꿈을 통해서인데.... 꿈 드립은 그만하자) 연애를 하기 전에는 연애를 꿈꾸며 살고, 연애를 하면 연애를 살며 살고, 연애 후에는 연애를 추억하며 산다. 심지어 어떤 모임에서 60대 보통 아주머니들이 20대 연애사를 떠올리며 눈빛이 흐려지는 것을 현장범으로 체포할 수 있었다. 로맨틱 러브는 결국 더 큰 사랑, 아가페 사랑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다. 연애를 더욱 인문학적으로 확장시켜 공부하고 강의하자며 한껏 의욕이 높아졌다. 사랑에 비춰본 나, 다시 사랑하게 된 나. 행복은 사람 잇대어진다. 핵커씨가 여행의 끝에 찾아간 곳은 옛 애인 아그네스가 있는 LA이다. 자신의 아이들에게 핵커씨를 소개한다.'아 아저씨는 엄마의.... 음..... 엄마의...... (망설망설) 헥커야!' 이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지금 여기를 행복하게 사는 아그네스가 대화 중에 빡쳐서 소리 지른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 네 환상 속의 그녀를 사랑했지' (정확한 워딩 아님) 헥커씨는 이 말을 듣기 위해 '꾸뻬씨의 행복여행'을 떠나 지구 한 바퀴를 돈 것이다.

 

어디에 누구와 있을 때 행복한가? 둥근 지구를 한 바퀴 돌면 바로 자기가 서 있던 지점이라고 했던가? 결국 지구의 끝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 클라라와 함께하던 일상,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곳이 거기 있고, 행복 역시 그 자리에 있음을 깨달을 꾸뻬씨.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게 사랑이다. 행복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애써 퍼내지 않는 사랑이 속에서 솟아날 때,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곁에 있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눈. 그 눈을 실은 나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이다. 아그네스를 향한 그리움이 자신이 만들어 낸 환타지였음을 깨달았을 때, 오래 전 아그네스와 사랑을 나누던 시절에도 이미 환타지였음을, 무엇보다 아그네스로 그로 인해서 힘겨웠음을 깨달았을 때 꾸뻬 씨는 적어도 자신의 행복을 찾게 되었다.

 

 

나의 행복은 안녕하신가. 내 사랑은. 나의 사랑들이 내가 제작한 환타지의 틀에 갇혀 고통스러워하진 않는가. 페북의 좋아요 갯수 확인하느라 내 일상의 사랑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진 않는가. 어느 블로거의 명문을 읽느라 '엄마 이거 봐, 엄마 이거 봐'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환청처럼 듣고 있진 않는지. 내 사랑의 안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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