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중독 #
오늘은 책을 제대로 한 줄도 못 읽은 날이다.
사실 요즘 나는 '독서 중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책을 읽는 것은 좋은 것이 분명한데 이걸 못하면 불안하거나, 또 불안한 어떤 것들에 맞딱뜨리지 않기 위해서 하려고 하면 '중독'이라고 하니깐 말이다. 약간 중독초기 아닐까?
그런데 오늘은 책을 한 줄도 제대로 안 읽었는데도 마음이 편하다. 다행이다.
# 우리 엄마 #
엄마가 집에 와 계신다. 하루 종일 누워서 주무시거나 잠시 일어나셔서 성경을 보시는 게 일과다. 하루 세 끼 식사를 챙기는 일 때문에 약간 생활의 리듬이 깨졌는데 아직은 견딜만 하다. 작년인가 내면작업 하면서 엄마가 너무 힘들었던 기억과, 그 때 잠시 우리 집에 머물러 계셨던 기억에 첨에 살짝 긴장이 됐었다. 며칠 지나면서 점점 엄마 마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내 맘이 그러니까 남편이나 애들이 엄마를 부담스러워 할까봐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그 역시 편안해지고 있다. 식사량도 워낙 적으시고 내가 신경쓰는 걸 더 걱정하셔서 최대한 편하게 가고 있다.
# 이웃 사촌 #
점심 먹고 나서 이제는 '반가운'이라는 말보다 '편한' 이라는 형용사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웃 사촌들이 들러 주셨다. 집에 한 번 놀러 오고 놀러 가는 일은 그리 참 쉬운 일이어야 하는데... 요즘 사는 방식은 '초대'라는 격식있는 용어가 오가야만 집에서 사람을 만나게 되는 시절이 아닌가 싶다. 우리 모두 바쁜 현.대.인 이라서 그럴거야.
이런 세상에 그저 전화나 문자 한 방 날리고 갑자기 휙 차 마시러 들러주거나 들를 수 있는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암튼, 잠깐 그렇게 만나는... 아! 이런 걸 두고 '마실'이라고 한다. 예기치 않은 그러나 편안한 마실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 고마운 채윤이 #
2박3일 수련회를 갔던 채윤이가 왔다. 2박3일 내내 채윤이의 부재가 그렇게 클 수 없었다. 채윤이가 동생들을 얼마나 잘 배려하고 돌보는 지를 새삼 느꼈다. 목요일에 조카들 둘이 왔었는데 둘을 데리고 노는 현승이를 보면서 알았다. 채윤이는 생각해보니 엘리베이터 타는 사소한 일에서부터 항상 자기보다 어린 현승이를 배려하는 것이 몸에 베여 있었다. 물론 그게 짜증이 나서 현승이에게 신경질을 부리기도 하지만 말이다. 현승이를 비롯한 집에 놀러오는 동생들에 대한 채윤이의 배려가 정말 귀한 태도임을 알았다. 현승이 역시 누나의 빈 자리가 커서 '누나 언제 와?'를 입에 달고 살았고, 둘이서 손가락을 걸면서 약속했다. '우리 채윤이 누나 오면 그 동안 정말 고마웠다고 말하고, 진짜 잘해주자'^^
외할머니가 이층침대의 일층에 자리를 펴셨는데 챈이가 어떻게 나올까 살짝 걱정이 됐었다. 2층이긴 하지만 할머니랑 같이 자려고 할까 어쩔까 하는 마음이었다. 수련회 다녀오자마자 엄마가 두 애들을 데리고 문방구 가서 선물을 하나 씩 안기셨는데 그게 약발이 잘 받았는지...챈이가 외할머니에게 많이 살갑다.
저녁 먹고 나서 살짝 귀속말로 그랬다. '엄마, 나 예전에는 외할머니가 오시면 좀 싫었는데 지금은 좋고, 외할머니랑 얘기도 잘 하게 돼. 엄마 수영 가면 나 할머니랑 얘기 많이 할거야'
이 말에 눈물이 날 뻔 했다. 내게는 엄만데 우리 아이들이 친할머니 만큼 따르지 않는 것이 그렇게 섭섭하고 때론 화가 나기도 했었다. 채윤이가 너무 고맙다.
# 지금 여기를 살기 #
책이라도 한 줄 읽어야 한다거나,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심지어 큐티를 빼 먹으면 안 된다는 좋은 강박관념 까지도 나를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같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서 즐기거나, 느끼거나 하면 되는데 여기 아닌 다른 곳을 살려고 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불안이 쌓이다 보면 분노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오늘 하루를 보내고 특별한 일 없이 이다지도 마음이 편안한 이유는 이걸까? 간만에, 아주 간만에, 아니면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금, 여기에 살기를 일상에서 오래 유지한 탓일까?
일찍 잠든 아이들과 조용히 기도 중이신 엄마. 미리 설교 원고 써 놓고 검토 중인 여유 있는 남편 때문에 아주 조용한 밤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더 좋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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