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결혼했는데 들어와 살아야 해서요.❞
전세가가 급격히 오르는 중에 계약이 끝나면 집주인들은 그렇게 말하더라.
물론 2년에 한 번씩 바뀌는 집주인은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다.
처음엔 정말 그런 줄 알았다.
같은 상황에서 반복해서 듣다 보니 절로 깨우쳐졌다.
❝다시 기회가 왔습니다. 새로운 세입자 찾아 전세금 바짝 올릴 때가 됐으니, 나가 주세요.❞
상상력이 부족하다.
굳이 상상력을 동원할 필요가 없는 지도 모른다.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싶지 않을 뿐이겠지, 내남이 다 아는 이유이니까.
뻔한 거짓말이라도 내미는 건, 일말의 양심의 가책인 것인가.
❝부모님이 들어와 사시기로 하셨어요. 집을 좀 비워주셔야겠어요.❞
어제 집주인에게 들은 아주 진부하고 신선한 이유다.
주인의 아들이 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 주인의 부모님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2년 전, 이사를 준비하며 아주 운 좋게 신축 아파트를 얻었다.
평생 꿈꾸던 산 앞의 집이며, 심지어 거의 산 위의 집이기도 하다.
겨울에 이사와 첫 만남은 모노톤이었다.
계절이 바뀌면서 연보라, 핑크, 노랑, 연두, 초록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숨이 멎을 것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아침마다 새롭고 또 새로운 놀라움이었다.
신축 아파트 전세는 2년 후에 오른다, 장난 아니게 오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올랐다는 소문과 함께 전세 2년 차 봄을 맞았다.
얼마 전에 베란다 앞에 서서 기도했다.
지는 해가 남기는 빛의 꼬리가 이렇게 저렇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하나님, 집이 많이 올랐다는데요. 올봄에 엄마 데려가셔서 제가 눈이 멀었었잖아요.
캄캄해서 아무 것도 안보였어요.
노랑연두, 그 아름다운 그러데이션을 못 봤어요.
작년엔 너무 흥분해서 차분히 머물러 즐기질 못했잖아요.
내년 봄에 한 번 더 누릴 수 있게 해 주세요.
기도의 응답이 왔다! 왔다?
남편이 뉴스를 물어왔다.
임대차 3 법이 발의될 것인데, 통과되면 우리 해결이다.
2년 계약 연장할 수 있고, 연장 시에 전세금을 5% 이상 올릴 수 없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엄마 없는 애 기도는 잘 들어주시는구나.......
이 뉴스가 좀 더 대대적으로 나온 어제, 참 좋았다.
오랜만에 남편과 드라이브를 하고 남한강변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 절묘한 순간에 주인에게서 온 문자다.
"부모님이 들어오셔야 하니 집을 비워줘야겠다."
아직 계약 기간도 꽤 남았는데 이런 조급한 문자라니!
아, 주인도 뉴스를 보는구나!
2년에 한 번씩 그러하듯, 다시 부동산이라는 거대한 탐욕의 신에게 얻어맞는 느낌이다.
얻어맞는다. 정말 억울하게 일방적으로 얻어맞는다.
어떤 부동산 전문가가, 어느 제도가 부동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욕망과 탐욕은 그 틈새를 비집을 텐데.
법망을 뚫는 고도의 테크놀로지를 개발하고, 공유할 테고.
세입자를 따돌리는 데는 최소한의 상상력만 발휘하면 되는 일이고.
부동산으로 돈 벌었네, 기뻐하는 분들이 알까.
대출 상한선을 스스로 깨고, 2년 만에 또 깨서 마련한 전세 대출금들의 처절함을.
그 코 묻은 돈, 아니 피 묻은 돈들이 흘러들어 두둑해진 주머니가 차라리 슬프다.
'그리고 또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별 선물 (0) | 2020.12.23 |
---|---|
우사세, 그사세, 우살세 (1) | 2020.10.07 |
독서 (0) | 2020.06.16 |
단 하나의 오이 (0) | 2020.06.10 |
실시간 취향, 편애 (0) | 2020.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