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에 관한 한 충분히 준비된 몸이다. 누군가 붙여준 별명처럼 '이사의 달인'이다. 남편은 부동산 관련 모든 업무를 꿰고 있고, 나는 미리미리 정리해야 할 짐, 바로 전날에 해야 할 일들을 잘 알고 있다. 이번 이사는 특히 집이 안 구해져 마음 졸이던 시간이 길어서 받아야 할 스트레스도 차고 넘치도록 받았다. 정서적으론 분노도 설움도 다 지나갔으니 그저 이사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벌써 열두 번째 이사이니 덤덤할 수 있다, 덤덤해야 한다, 마음먹고 덤덤히 지냈다. 이사가 사흘 정도 남은 날, 채윤이가 "엄마, 요즘 무슨 일 있어?" 하고 물었다. "왜애? 무슨 일 없는데..." "아니, 그냥 표정이 계속 안 좋아서..." 그리고 그다음 날, 이사 이틀 전.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맘에 들지 않았다. 뭐든 딴지를 걸고 싶어 눈동자를 굴리고, 예민 지수가 쭉쭉 올라가는 나를 발견했다. 다행히 그런 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나를 느낄 수 있었지만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남편과 산책을 하다 "나 이사 앞두고 예민한가봐. 집이 구해져서 다행이고, 여러 모로 다 잘 됐는데, 이사 준비도 당신이 알아서 착착 잘하고 걱정할 게 없는데 자꾸 예민해져." 고해성사하듯 꺼내놓아 보았다. "나도 그래. 예민해지고 불안하고 그래. "당신도 그렇다고? 아, 내일 아침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오는 시간, 그 시간을 상상하면 벌써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가. 이삿날 아침 그 시간, 아무리 여러 번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고 힘들어." "나도 그래. 갑자기 군대 있을 때 훈련받던 생각이 나네. 한 달에 한 번씩 일주일 야외 훈련을 하거든. 아침에 신호 울리면 부대 안의 짐을 싹 다 싸는 거야... 이삿날 아침하고 비슷하지."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이삿 날 아침의 스트레스는 군대 훈련 스트레스를 방불케 하는구나, 싶으니 뭔가 위로가 되었다.
사람 마음이 참. "나만 그런 거 아니구나"를 확인하니 한결 여유가 생겼다. 불안하여 예민해지는 나를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왜 그런지도 알아졌다. 이삿짐 센터 분들이 들이닥치는 순간부터 집안의 모든 것은 '이삿짐'이 된다. 그 말은 헤집어지고 풀어헤쳐진다는 뜻이다. 이삿짐을 쌓고 푸는 과정이 내 물건들이 다 까발려지는 느낌이다. 그게 그렇게 마음을 어렵게 하는 일이었다. 일하시는 분들에겐 그저 일일 뿐이지만, 내 일상의 물건들이니까. 늘 보이는 물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까지 죄 끄집어내야 하는 일이 이사니까. 내게 속한 물건이니 나의 일부, 심지어 나 자신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이사의 달인, 이사 전문가가 되었어도 이사 당일 감내할 수밖에 없는 이 불편함. 그저 이 불편한 하루가 어서 지나길 바라며 추운 날 발을 동동 구르며 서성이는 것이었다.
그랬구나! 괜히 불안하고 괜히 예민해진 게 아니었어. 이렇듯 마음 먼저 정리되고 맞은 이삿날 아침은 괜찮았다. 일찍 일어나 영적독서, 기도 시간을 갖고 더욱 여유 있게 내려 커피도 한 잔 했다. 커피잔을 들고 베란다 앞에 서니 동쪽 산 끝자락에서 붉은 해가 머리를 내밀기 시작. 어설픈 각도로 사진 한 장을 남겼다. 그러고도 여유가 있어서 집안 여기저기 눈을 맞추는데, 오메! 아까 머리를 내민 해가 베란다 이쪽으로 한참 가까워져서는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다. 선인장과 다육이를 가지고 신박한 그림자 그림을 그려냈다. 멋진 작별인사다. 아침마다 바로 이 자리에 서서 행복했다. 충분히 행복하여 아쉬울 것 없는데, 마지막 날까지 그냥 보내지 않고 이렇듯 선물을 준비해 쐈다. 아이구, 뭐 이런 걸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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