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매체에 기고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싶은데. 지도교수님 추천으로 학생(졸업생) 신분으로 쓴 짧은 글입니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청년 때 이 찬양 참 좋아했는데... 담 앞에 서 본 사람은 압니다. 성벽이든, 허술한 벽돌 몇 개의 담이든, 담을 허무는 일이 얼마나 피눈물 나는 일인지 말이죠. 이 매체의 독자들에게는 한 특이한 개신교인의 고백이겠으나, 하찮은 이 글이 무엇이라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신교인은 죄다 통성기도만 한다든지 하는 선입견을 깨는 작은 구멍이라도요. 선입견의 담이 얼마나 견고한지 모르겠어요. 광화문에 모여 전광훈 목사에게 열광하며 통성기도 하는 분들이 개신교를 대표하지 않는 것처럼, 가톨릭 신자들도 마리아교를 섬기는 이단이 아닌데요.
“학생이 준비되면 선생이 온다.” 중국 속담이라고 합니다.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은 오랜 시간 준비한 한 학생에게 선물로 주어진 선생님 같은 곳입니다. 그 한 학생은 심지어 가톨릭 신자도 아닌, 보수적인 개신교 모태 신앙인입니다. 제가 문화영성대학원(이하 문영원)을 알게 된 것은 십수 년 훨씬 전입니다. 우연히 듣게 된 이 대학원의 이름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기도 했지만, 입학의 가능성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 늦봄 어느 날, 오랜만에 또 문영원 홈페이지에 들어갔습니다. 마침 2학기 입학전형 마감일을 며칠 앞두고 있었고 무심코 개설과목들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영성사, 영성 신학, 신비주의와 영성… 몇몇 과목이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멍하니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엄마 옆으로 딸이 다가와서 뭘 하고 있냐고 물었습니다. “엄마가 언젠가는 이런 공부를 해 보고 싶어.” 했는데 딸이 하는 말이 “지금 해!”였습니다. 입학전형 서류 준비며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가능하니 다 도와주겠다면서요. 그렇게 조금 어이없이 일사천리로 진행하여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우발적인 것 같지만, 우발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저는 개신교회 목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또 밤낮으로 기도하는 어머니의 딸이기도 했습니다. 신앙에 관한 한 성골 진골이라는 은근한 우월감과 자부심 속에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면서 열정을 다해 교회에 봉사하고 신앙생활했습니다. 결혼 후 ‘중년의 위기’라 하기에는 조금 이른 나이에 마음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마음이 메마르고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신앙까지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확실했던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예배에 가면 반감이 생겨서 그 모든 자리를 피하고만 싶었습니다. 마음은 차가워지고 냉소가 깊어졌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인가 싶어 두려움과 막막함에 길을 잃은 느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기도의 언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때 우연처럼 만난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는 언표가 저의 상태를 그대로 설명해 주는 것 같아 깜짝 놀랐습니다. 16세기 스페인의 십자가의 성 요한의 저서 제목인 것을 뒤늦게 알았고, 그때로부터 저에게 어떤 세계가 열렸습니다. 개신교인으로서는 접할 수 없었던 중세의 영성 서적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특히 아빌라의 데레사의 《영혼의 성》은 길을 잃어 캄캄한 기도의 길에서 만난 이정표와 같았습니다.
내용이 썩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공감과 위로가 있었습니다. 읽고 또 읽고 필사하면서 낯선 세계에서 온 기도의 선생님을 따라 어설픈 침묵 기도를 해 보았습니다. 덕분에 길을 잃었다고 느꼈던 그 어두운 숲에서 조금씩 빠져나오게 되었고, 혼자 해보는 낯선 기도의 길에서 조금은 막막하고 외로웠기에 무언가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문영원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그즈음이었고요. 그러니 갑자기 일사천리로 진행된 문영원 입학 절차는 우발이 아니었습니다. 오래 기다려온 학생에게 선생님이 찾아오신 만남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홈페이지 개설과목에서 봤던 영성사, 영성 신학, 신비주의와 영성, 중세 여성 신비가 같은 과목을 더없이 행복하게 공부했습니다. <영혼의 성>을 만나고 십수 년 동안 남모르게 혼자 해 온 기도가 깊고 오랜 영성의 강물과 닿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공부였으니, 수업 한 번 한 번이 영적 체험 같았습니다.
행복했던 만큼의 감내할 어려움과 마주해야 하는 그림자도 있었습니다. 기도의 길은 결국 하나님께 닿는 것임을 배우고 보니 ‘교회 일치’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가까이 있었습니다. 개신교에서 나고 자라면서 배운 ‘하나님’은 가톨릭 형제자매들이 만나는 ‘하느님’과 다른 분이 아니었습니다. 인간 언어에 담을 수 있는 분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높고 두꺼운 제도의 벽 또한 건재했습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존재의 집을 짓는 인간이기에 ‘하나님’과 ‘하느님’ 사이 간극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행복하게 공부하며 일치의 기쁨도 누렸지만, 분열로 인한 소외감과 아픔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문영원 수학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선물은 논문인데, 언감생심 생각지도 못한 일이 었습니다. 논문을, 그것도 <영혼의 성>을 연구하는 논문을 쓰면서 저를 문영원까지 이끈 목마름의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 모든 과정을 마치고 졸업한 후 다시 저의 자리로 돌아오니 이제야 더 잘 보입니다. 문영원 입학은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 담을 넘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횡단이 아니라 종단이었습니다. 1517년, 시대의 담을 넘어 초 세기부터 16세기 스페인에 이르는 영성의 강에 닿았습니다. 이 강물에 몸을 맡겨 흐르며 헤엄치다 발이 땅에 닿아 디디고 섰더니 원래의 내 자리입니다. 제가 나고 자란 교회, 혹독하게 신앙 사춘기를 겪고 다시 돌아온 못난 우리 어머니의 품 같은 저의 교회입니다. 횡단의 대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종단으로 밝히 알게 된 출생의 비밀이랄까요. 목마름의 실체를 깨닫습니다. 교회 사랑과 하나님 사랑, 하나님을 그리는 마음, 그것이었습니다. 준비된 학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목마른 학생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 학생에게 선생님으로 다가온 문영원, 여기로 이끄신 나의 주님께 사랑과 영광을 드립니다.
<평신도> 2024년 가을/ 계간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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