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열린 방문 틈사이로 보았다.

엄마 화장대에 앉아 거울을 들여다 보는 채윤이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낯설진 않은데, 언제 봤더라, 언제 본 표정이더라?

김채윤, 뭐 해?

그러자 특유의 입주면 근육만 활짝 벌어지는 부끄러운 웃음. 그리고 의외의 대답.

어...... 엄마 놀이.

그러고 보니 낯익은 그 표정은 어렸을 적 그분이 오실 때마다,

그분과의 대화에 빠졌을 때 힐끗 보았던 표정이다.

나이 열 여덟에 엄마 화장대 앉아서 엄마 놀이 하는 우쭈쭈쭈 우리 큰 애기.


클릭, 하면 그분 오시던 그 옛날의 한 순간




맹꽁이 열 마리 잡아 먹은 걜걜걜걜 하는 목소리에, 여드름 듬성듬성,

그리고 가끔 맥락 없는 버럭!

'나 키 또 컸어' 하면서 (벌써 따라 잡은) 엄마가 아닌 장식장과 책꽂이에 키 재는 중딩.

딴에는 클 만큼 컸고 세상을 알 만큼 아는 청소년,

웬만하면 '난 그냥 집에 있으면 안 돼?' 하는 중2 현승이다.

집에서 혼자 라면 끓여 먹겠다는 청소년을 삼고초려로 설득하여 냉면 먹으로 갔다.

친절하신 아주머니, 젓가락은 탁자 서랍에 있다며 아가용 포크 하나를 챙겨서 현승 앞에 놓아주셨다.

(뽀로로 플라스틱 젓가락 챙겨 가지고 다닐 걸. 킥킥)


나름 혼자 다 컸다고 세상 우습게 보는 사춘기 아들. 가만 앉아서 스타일 무너지고 속수무책 1패.






'기쁨이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들과 나, 폭력과 하나님  (2) 2017.11.16
탁자 밑 신선  (2) 2017.11.14
자탄풍 15  (0) 2017.05.12
국가안보요원 중2 님 탄신일  (4) 2017.05.01
김 노인의 4월 15일 하루  (0) 2017.04.15




우리는 결국 사랑을 찾는 구도자입니다.


최근 작 <연애의 태도>에 저자사인에 쓰는 문구입니다. '찾는'보다는 '찾아 헤매는'이라는 형용사가 더 끌리지만 순화하기로 합니다. 어쩌다 술술 만년필이 움직여 끄적이게 되었지만 생각할수록 하나의 마침표 같은 문장이라 의미가 있습니다. 여섯 권의 책을 한 마디로 정리한 것이며, 내적여정을 공부하고 훈련한 10 년의 결론이며, 음악심리치료라는 생소한 공부를 선택한 20여 년 전 깊은 내적 동기이며, 50여 평생의 마침표입니다. 우리는, 아니 저는 결국 사랑을 찾는 구도자였습니다.


<연애의 태도>의 저자소개는 편집자 님이 쓰셨는데 '아,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타자의 시선으로 저를 정리하는 의미 있는 소개였습니다. 저에 대한 소개를 제가 읽으면서 저라는 사람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요.


정신실 작가는 인생에서 꼭 한 가지 성공하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그는 '연애계'를 떠나지 못한다고 곧잘 말하며 여전히 청년들의 교회 누나로 사서 고생을 하고 있다. 연애에는 정답이 없기에 연애 강사 백 명이면 백 가지 답이 나온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가 고민깨나 한다는 청년들에게 연애 강사로 사랑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나답게 연애하자'라고 즐겨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이 연애의 기술을 알려 주기 전에, 연애 당사자가 원하는 연애가 뭔지, 사랑이 뭔지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상담을 시작한다.

자기를 잃어버리고 사회의 가치관에 따라, 자기를 잊은 채 타인의 사랑법으로 누군가의 이모티콘이 되어 움직이는 애정 결핍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나답게 연애하는 태도를 가질 수 있기를 저자는 우리 시대 크리스천 청년들에게 말해 주고 싶어한다. 동시대 신앙 선배로서, 사랑을 배워가는 사랑의 탐구자로서, 카페에서 수다처럼 쏟아내는 속깊은 고민들도 진심으로 들어주는 MBTI 전문 강사이지 에니어그램 전문가로 청년들의 연애사에 동참한다.


책과 강의 어딘가에서 한 번쯤 했던 말이 정리되어 담겨 있습니다. 대화의 기술에서 '미러링 기법'처럼 제가 했던 말을 되돌려 주는 저자 소개를 통해 '아, 맞아. 내가 이런 이유로 연애 강의를 하지' 하고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제가 쓴 서문 일부입니다.


나만의 고유한 사랑을 찾아가는 데 연애만한 출발지가 없습니다. 그것도 썩 잘 풀리지 않는 연애 말입니다. 여친 생기는 기술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마음이 낙심으로 차분해지는 순간, 헤어져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시원하게 정해 줄 연애 상담가 찾다 검색질 손가락을 멈추는 순간은 전향의 순간입니다. 사랑꾼 기술자와 사랑의 구도자 사이 갈림길입니다. '단지 남친이 아니라 깊은 친밀감을 나눌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었구나!' '인형 같은 여친과 하는 애인 놀이는 애초부터 없었어. 더불어 성장하며 영혼의 친구가 되어 가는 것이구나!' 이보다 소중한 사랑의 깨달음이 없습니다. 사랑꾼 기술자 지망생이 사랑의 구도자로 태도를 전향한다면 이것은 가장 좋은 소식입니다. 기술로 안 되는 연애, 답이 없는 연애의 길을 빛은 결국 그 사랑이니까요. 기술이 아니고 태도입니다. 


"너는 애가 사랑이 없어" 어렸을 적부터 엄마에가 가장 많은 들은 말 top5 안에 드는 말입니다. (1위는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살어') 어쩌다 나는 이토록 사랑에 천착하게 되었을까? 아마 엄마의 저 말이었을 것입니다. 가장 듣기 싫었고, 외적으로는 인정도 하지 않았지만 내면에서 가장 큰 부끄러움으로 간직한 말. 누군가 조금 관계가 불편해지 수도 있는데, 못마땅하고 싫은 사람이 알짱거릴 수도 있는데 그걸 해결하지 못하면 지옥가는 줄 알고 부단히 애를 써댔지요.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남는 것은 더 깊은 수치심 뿐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요. 내 사랑 아버지를 갑자기 빼앗긴 것도 '사랑'에 목숨 거는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신앙, 연애, 결혼, 육아, 관계를 통해 본질적인 무엇을 발견하고 싶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사랑을 찾는 구도자의 길이었다는 것을 내적 여정을 통해 이제 알았습니다.


위험부담을 안고 도전을 하나 합니다. 연애도 육아도 관계도 심지어 신앙간증도 아닌 '사랑'이라는 주제만으로 짧은 강의를 합니다. 사랑이란 얼마나 식상한 주제입니까. 한 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편집되어 영상으로 돌아다닐 강의이니 더욱 무모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50년 사랑의 여정 동안 좌충우돌 하면 깨달은 것을 정직하게 나누자며 정리하고 있지만 심적인 부담이 큽니다. 이런 얘기 하렵니다. 사랑받지 못할 곳에 괜히 얼씬거리지 마라, 어차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상처주는 사람을 끌어안으려 하지마라, 가급적 만나지 마라, 사랑은 변한다, 안 변하면 사랑이 아니다, 결혼과 사랑은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의 문제이다, 이 사람을 만나도 저 사람을 만나도 상대가 애인이든 남편이든 자녀이든 결국 사랑을 위해 늘 끌고 다니는 건 '나'다, 그러니 '나 자신이 되어, 나를 탐구하고, 나를 좋아하는 일'이 관건이다. (그러니까 에니어그램 세미나에 와라?!) 


암튼 저는 어릴 적부터 사랑 없는 사람으로서, 사랑을 찾는 사람입니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8

 


책으로 둘러싸인 거실의 창가, 낮은 책꽂이 위에 공들여 키운 화초들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남들 눈에는, 심지어 식구들에게도 그렇고 그런 들쑥날쑥 흔한 식물이겠으나 공들여 키우는 제게는 다릅니다.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고 물을 주고 매만집니다. 사랑을 듬뿍 받는 녀석들이지요. 돌보는 이가 한결같지 못하여 간혹 방치될 때도 있습니다. 일이 많아 바쁘거나 마음이 메말라 화초는 물론 그 무엇도 돌볼 여유가 없는 날이 있지요. 그런 순간엔 돌보지 못한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바쁜 일이 지나고 아팠던 마음이 나아지면 비로소 잎을 축 늘어뜨린 화초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때야 정신이 번쩍 들어 싱크대로 가져가 하염없이 샤워를 시켜보지만 끝내 살아나지 못하는 녀석도 있습니다. 회생불가 판정을 내리고 싱크대 안에 둔 채 하룻밤을 자고 났는데 어느 새 살아나 빳빳해진 잎을 보기도 합니다. 이것이 부활이구나, 싶어 조용히 쿵쿵 심장이 뜁니다.

 

한결같지 못하고 부지런하지도 않은 주인인 제게 스파트필름이라는 화초는 딱 마음에 드는 놈입니다. 물 줄 시기가 지나면 바로 어깨, 아니 잎들을 축 늘어뜨립니다. 온몸으로 목마름을 표현하지요. 주인의 일상과 마음의 몰골이 말이 아니라도 물 달라, 제발 물을 달라온몸으로 시위하는 녀석을 외면하기는 어렵습니다. 얼른 물을 떠다 바치며 흐릿해진 마음의 줄을 다잡게 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고마운 녀석이지요. 그래, 목마르다고 말을 해야지! 표현을 해야 알지! 꾹꾹 참고 아무 내색 안 하다 갑자기 시들어져 회생하지 못하고 떠나간 초록이들이 야속합니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화초가 목소리를 가졌다면 스파트필름 같은 녀석들은 주인님, 목마릅니다.’ 소리를 낼 것입니다. 그 소리에 손을 움직여 물 한 바가지를 먼저 부어줍니다. 예수님, 목마릅니다. 가뭄에 쩍쩍 갈라진 제 마음에 단비를, 성령의 단비를 부어주소서. 구하고 두드리고 찾아야 합니다. 정말 그래야 하겠습니다. 문제는 먼저 갈증을 느낄 수 있어야 말이든 기도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목이 마른지, 배가 고픈지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요구하고 표현할 수 있단 말입니까. 목마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능력은 목마름을 느끼는 살아 있는 감각입니다. ‘내가 목이 마르다자기 영혼의 메마름을 감지할 수 있다면요.

 

빈들의 마른 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찬송을 시작하는 첫 구절, 이 한 구절에 저는 마음을 빼앗깁니다. 오랜 가뭄에 쩍쩍 갈라진 빈들의 땅, 말라 시들어가는 위태한 풀 한 포기 같은 영혼의 상태를 간파해내는 작사자의 감각 말입니다. 우울해, 사는 게 재미가 없어, 꿀꿀해, 사람이 다 싫어, 공동체가 무슨 필요야, 시도 때도 없이 화가 나..... 툭 내뱉어진 나의 말에서 시들은 나의 영혼을 느낄 수 있다면요. 우울하고 외롭고 화가 나는 지금의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되지는 않겠지만 ,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성령의 단비로구나!’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메마른 땅에 오래 방치된 탓에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있지만, 회생 불가의 메마름이 아님을 알고 소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퍼뜩 일어서진 않겠으나 하룻밤 이틀 밤 지나며 다시 살아나 생명과 맞닿을 것입니다. 참된 사랑의 언약은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참되신 사랑의 언약 어길 수 있사오랴

오늘에 흡족한 은혜 주실 줄 믿습니다

 

기실 실낙원 이후의 인간은 늘 목마른 존재입니다. 연결되어 있어야할 그 무엇, 생명의 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무의식적인 결핍감은 아무 것이나 들이키게 하고 빠져들게 합니다. 애정이든, 알코올이든, 하다못해 스마트폰의 화면이든 무엇에든 사로잡혀 있고 싶게 만듭니다. 그렇게 갖고 싶던 것을 손에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식상해지고, 일이 잘 풀리고 있는데도 불안하고 금세 공허해지는 이유. 무언가 더 좋은 것을 향한 끝없는 목마름입니다. 결국 애초 단절되었던 그 관계, 사랑이신 분으로 충만해지기까지 우리의 목마름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를 보며 내 영혼이 노래합니다.

 

반가운 빗소리 들려 산천이 춤을 추네 봄비로 내리는 성령 내게도 주옵소서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 옛날에


동생의 존재는 내게 '전쟁터 세상'을 가르쳐주었다. 맛있는 것, 좋은 것을 독차지 할 수 없는 세상. 둘 중 하나가 혼나야 한다면 나는 어떻게든 나는 살고 봐야 하는 세상. 동생을 마주하면 알 수 없는 전투력이 뱃속에서부터 꿈틀거린다. 친정에 가서 동생과 식탁에 마주 앉으면 가장 맛있는 걸 빨리 먹어치워야 할 것 같은 조급증이 생긴다. 옛날 옛날에 몸에 밴 습관이다. 내가 덜 가지고 덜 먹는 건 상관 없지만 동생이 더 먹는 것, 더 가지는 것은 견딜 수 없다. 이왕 혼난다면, 어떻게든 동생이 한 개 더 혼나게 만드는 것이 어린 시절 중요한 이슈였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공격이 가정예배 시간에 웃음보 터트리기인데. 돌아가며 성경 읽는 시간에 내가 읽는 부분이 끝나고 동생이 받아 읽어야 할 순간. 말실수 같은 걸 던져서 동생 웃음보가 터지면 압승이다. 수습되지 않는 웃음보는 결국 예배 끝나고 혼나는 걸로 마무리 되기 때문이다. 기도 시간에 엄마 아버지 눈 감고 있을 때 둘이 눈 뜨고 소리 안 내고 웃기는 건 리스크가 큰 모험이지만 자주 감행했다. 설령 걸려서 혼나더라도 나보다 동생이 1만 더 혼나면 만족이었다. 그때 계발한 기술이 콧구멍 벌렁거리기 같은 것이다. 소리 안내고 눈만 마주치면 웃길 수 있는 테크닉이다.


아웅다웅 티격태격 엄청 싸워댔다. 가끔 육박전도 했는데, 국민학교 5, 6학년 때 쯤 어느 날, 늘 하던 개싸움 육박전이 시작되자마자 동생이 먼저 나를 깔고 뭉개는 전에 없던 일이 벌어졌다. 그날 이후로 육박전은 조용히 그만 두었다. 늙은 엄마 아버지를 놀리기 위해서는 가끔 의기투합을 하기도 했다. 엄마가 하는 방언 기도나 찬송 가지고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것 등. 어찌됐든 동생의 존재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독차지' 하고픈 내게는 치명적인 걸림돌이었다. 동생 앞에만 서면 전투력이 상승했다. 현명한 부모님이 최소한의 싸움을 위해서 몇 가지 원칙을 주셨는데 그 중 하나가 '반띵의 원칙'이다. 손님이 오셔서 용돈을 주시는 행운의 불로소득이 있을 때, 얼마나 행복했던가. 문제는 둘 중에 하나만 집에 있는데 손님이 오신 때이다. 동생이랑 나눠가져, 라는 말일 붙이는 경우와 그냥 주시는 경우. 내게는 엄청난 차이인데 밖에 있다 돌아온 동생에겐 내게 없는 돈 100원이 누나 손에 있다는 것 외에는 보이지 않으니 내놔라, 누나가 안 주면 엄마가 주라, 난리 난리를 쳤을 것이다. 그래서 만드신 법이 '반띵의 법' 일명, 남내 불로소득 공산주의 시스템이다. 손님이 나눠 가져라, 하지 않아도. 예기치 않은 모든 불로소득은 무조건 반띵이었다. 100원이 생기면 50원 씩, 50원이 생기면 집 앞 가게에 가서 '10원 네 개랑 5원 두 개로 바꿔주세유' 해서 나눠 가졌다.


# 간만에


김포에서 흑석동으로 주일 예배 가는 날이 엄마에겐 최고의 날이다. 아침에 예배 전에 태워 드리고, 오후 예배 마치면 모시러 가는 것이 동생의 주일 일상이기도 하다. 주일 집에 가는 길에 꼭 동생이 전화를 한다. '누나, 엄마가 나 돈 줬다.' 우리 자랄 적에 그렇게 돈돈 하던 엄마가 돈에 대해서 완전 '내려놓음'이 되어가지고. 돈이 좀 모여지면 주는 게 일이다. 주일에 교회 가면 최고령 권사님인 엄마에 대한 애정으로 몇 만원 씩 용돈을 드리는 분이 계신가보다. 그걸 집에 가는 차 안에서 동생에게 기름값이라며 주고, 동생은 여지 없이 내게 전화하여 염장질을 한다. '엄마 바꿔, 엄마 바꿔! 엄마, 운형이 돈 주지마. 나도 줘.' 폰에 대고 떼를 쓰면 엄마가 무척 좋아하신다. 그러면서 또 '야야, 나 데리고 사느라고 운형이 선영이가 심(힘)들어. 나 먹을 거 사다 대고 심(힘)들어. 노인에 하나 데리고 있는 게 얼매나 심든줄 아냐?' 하신다. 주중에 전화를 했더니 '얼라, 우리 딸 보고 싶었는디 전화를 혔네.' 하기에 '엄마, 운형이 돈 주지 말고 모았다가 나 줘. 20만원 모아 놓으면 내가 엄마 보러 갈게. 나 보고 싶지? 운형이 주지 말고 20만원 모아 놔.' 생떼를 썼더니 또 좋아한다. '얼라, 너 사모가 그르케 돈 좋아허믄 못 써. '하면서도 '20만원...... 은 그거 나라에서 주는 거 그게 나와야 되는디..... 궁시렁궁시렁' 하다 끊었다.


# 메소드 연기


며칠 뒤어 엄마를 보러 갔는데 신실아, 신실아 조용히 부르더니 꼭 쥔 주먹을 내 손바닥 위에 놓는다. 눈 찡긋, 찡긋. 빨리 집어 넣어. 우힛, 꼬깃꼬깃 만 원 열 장이내 손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동생과 마주 앉았다. '엄마, 누나 돈 줬어?' 이 순간 와, 우리 엄마 메소드 연기. '참나, 내가 돈이 어딨다고 돈을 줘워?' 천하에 촉 좋은 동생이 속았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시침 뚝 연기였다. 며칠 후 동생하고 통화하며 '야, 엄마가 나 돈 줬다. 몰랐지?' 제보하고 '엄마 취조하고 재밌는 거 있으면 말해줘' 했다. 좋은 것 두고 무조건 경쟁하는 것이 습관이 된 남매, 평생 남매 사이에서 알아도 모르는 척(엄마, 아까 낮에 오셨던 아버지 친구 목사님이 누나 돈 줬지? 나 없을 때 줬지? '아니~이!'), 몰라도 아는 척(엄마, 낮에 오신 목사님이 누나 100원 주셨어? 200원 주신 거 아니지? 누나가 나 50원 줬어. '50원 줬으면 100원 받았겄지~!) 했던 엄마. 93세 메소드 연기 엄마는 아들의 취조에 어떻게 응할 것인가, 두둥!


#  93년 내공의 리액션


이제부터 동생 보고이다. 운동하러 나가면서 엄마 방문 앞에서 달달하게 인사했단다. 엄마, 운동 갔다 올게~/(엄마는 침대에 누운 채로 아이컨텍을 위해 고개를 한쪽으로 든 귀여운 모습으로)이이~ 그려, 갔다 와/엄마, 선영이도 탁구 치러 갔으니까 2시 쯤 올 거야. 늦는다고 뭐라 하지마/(천진난만 밝고 순한 표정으로)그려~어, 알었어/그런데 엄마, 엄마 누나 돈 줬어? 두둥~/(귀엽게 들었던 고개를 체념하듯 베개에 떨궈 누우며, 단호하고 무표정하나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려.서?! /줬다더니! 얼마 줬어? 누나 얼마 줬어?/(더욱 단호하고 시크하게) 니가 경찰이야? 니가 경찰이냐고?


이런 예측불허의 93세 시트콤 주인공 같은 노할머니라니!


* 벌써 10여 년 전의 사진이다. 엄마는 지금 성경을 읽지 못한다. 돋보기의 도수를 최고로 올려도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꽃보다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흩어지는 예배  (2) 2017.10.30
언니, 서울역이서 만나  (0) 2017.10.11
대통령 블렌딩  (0) 2017.05.29
두 개의 운명, 천만 개의 운명  (2) 2017.05.21
으막션샘미 일상  (2) 2017.01.27



해리포터 마법학교 강의실은 아니다. 빨간 물은 그냥 허브티, 파란 물은 블루 레모네이드, 검정 물은 독극물 아니고 커피일 뿐이다. 저녁 먹고 야근 출근하는 남편이 '수요 성경공부 종강' 날이라며 커피 배달 안 되냐고 했다. 일 잔당 천 원씩 쳐주겠다니 남는 장사이긴 한데..... 어르신들이 밤에 무슨 커피를 드셔? (딱히 커피로 밤잠 못 주무실 어르신들은 아니지만서도 일단 연배가 높으시니)  그리고 나 피곤해..... 일단 튕겨는 보았다. 


말에 신중한 사람이라, '커피 해줄 수 있어?' 말로 나왔을 때는 백 번 생각한 것일 테니 응해주고 볼 일이다. 야밤에 커피는 좀 그렇다 싶고. 다른 음료가 없을까 생각해 보니, 현승이랑 장보면서 산 저칼리 블루 레모네이드가 있다. 시원~한 푸른 색이 일단 좋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강의 하고 선사 받은 허브티의 붉은 색도 있다. 청홍의 조합이 딱이네! 여기에 생각이 마치자 소파에 달라붙어 있던 몸에 힘 빡 들어간다. 끌어안고 있던 쿠션 집어 던지고 급히 빨간 약과 파란 약을 조제하였다.


그리고 우리 특급 도우미 채윤이. 힘이 세서 무거운 것 잘 들어, 엄마 닮아 이벤트 좋아해, 이런 채윤이와 함께 배달에 나섰다. 콩알 만 한 쿠키도 가져갔는데 옥수수 쪄오신 집사님 계셔서 짧고 가볍게 풍성한 시간을 보내고 왔다. 


커피 내리며 채윤아, 사진 찍어! 했더니. 엄마 또 블로그에 '커피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올릴 거지?' 한다. 눈에 힘 딱 주고 '아니, 커피 어쩌구 저쩌구 하지 않을 거야. 이 사진 제목은 영부인 따라잡기야.'라고 했다. 그렇다. 이 포스팅의 주제는 대외적으로 '김정숙 여사 코스프레'로 하겠다. 실은 두어 주 전 금요일에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대학 친구들과 일박 여행을 작당한 날이었다. 한참 전부터 정해진 약속 날인데 남편이 '사랑방(구역)모임 종강파티'를 한다며 커피 안 되겠냐고 했다. 당연히 안 되지!


친구들 일박 숙소가 여차저차 하여 에버랜드 근처가 되었고, 이러쿵 저러쿵 끝에 다섯 명 완전체로 모이는 시간이 밤이나 되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요리조리 머리 굴려보니 에버랜드에서 교회까지 달리면 20분인데다 아침부터 가장 성실하게 풀타임으로 놀며 운전수로 몸도 바쳤기에 저녁시간 잠시 나왔다 들어가도 되겠다. '그래, 여보. 커피, 콜!' 하고 받았더니, 같이 노래도 하자, 잠시 게임도 인도해라 요구 사항이 많아졌다. 한 학기 수고하신 사랑방장(구역장)님들 위로하는 의미로 모든 프로그램을 혼자 준비하려고 한다니. 목사의 마음이 갸륵하여 허락했다. 핸드드립 하고, 율동도 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듀엣도 했습니다. (네네, 목사 부부가 특송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불렀습니다. '그대 고운 목소리에' 시작하자마자 아멘, 아~아멘! 은혜 충만이었습니다.)


미션 클리어 하고 그제야 다 모인 친구들에게 달려갔다. 칭찬쟁이 친구 하나가 '신실아, 너 김정숙 여사 같애.' 뭐라고? 김정숙 여사라고라? 다짜고짜 기분 좋은 이 말, 가슴에 품어두었던 것이 확실하다. 게다가 그날 낮부터 만나 놀던 친구가 내가 신을 쪼리 예쁘다 예쁘다 해서 줄까? 하고 벗어준 터였다. 세상에! 다음 날 친구들과 헤어져 집에 와 뉴스 보는데 우리 김정숙 여사님, 미쿡 가셔서 예쁘다 예쁘다 하는 말에 옷을 벗어주고 오셨더라. 아, 나는 진정 분당의 김정숙 여사로구나! 그렇구나! 셀프 감동, 셀프 추앙이었다. 혼자 김정숙 여사처럼 웃어보았다. 오호호호호호홍....... 라면이라도 먹고 가야지. 종피리 너 나랑 결혼 할 거야, 말 거야. 빨리 말해!


영부인이라서, 오직 남편에게 맞춘 역할로서의 행동만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한다. 역할에 맞춘 연기로서의 삶에는 '기쁨'이란 없는 법이다. 기쁨 없이는 '자발성'도 없다. 기대역할에 부응하려는 동기가 없지 않겠지만 내 나라, 내 민족, 민주주의에 대한 개인적 열망과 사명감이 없을까. 나는 김정숙 여사의 예측불허 미담행보를 그렇게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의 남편, 우리 이니님이 평생 보여준 삶에 대한 신뢰도 자발성과 기쁨의 원천일 것이다.


내조니 외조니 하는 말이 와닿지 않을 뿐더러 가끔 거부감까지 느껴진다. 무엇이 안쪽의 도움이고 누구의 도움은 바깥의 도움인가? 내가 밖에서 하는 강의와 쓰는 글을 시니컬하게 비평하고 검증해주는 그의 도움은 내조인가? 외조인가? 그가 안방에서 설교준비 하는 동안 집안을 고요하게 만들고, 간식을 챙기고, 거실에 앉아 기도하는 마음으로 돕는 것은 내조인가? 외조인가? 믿음이 가는 사람이 하는 일에 도울 일이 있다는 것이 기쁠 뿐이다. 엄밀히 따지면 그의 일도 아니다. '내 공동체, 내 교회'의 일이다. 해리포터, 아니 파파스머프의 발명실에 있을 법한 빨간약과 파란약을 발명한 여름 밤, 보람과 기쁨 돋았다. 


 


'JP&SS 영혼의 친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자 남편의 자격  (2) 2017.10.19
가을을 두고 떠난 여름 여행  (2) 2017.09.03
수박수박수박수....박수박수박수  (2) 2017.07.10
참회록  (4) 2017.06.03
18년 만의 기적  (0) 2017.04.09



이놈의 더위는 언제 끝나나? 여름 내 여름의 끝을 기다리지만 막상 보내려면 아쉬운 이유가 있었다.

더 이상 수박을 먹을 수 없다는 아쉬움은 더위와 싸우지 않아도 되는 안도감의 크기와 막상막하였다.

('이다' 아니고 '였다'임)

수박을 향한 열정이 서서히, 인식도 못할 만큼 식어가고 있었다.

오늘에야 식어버린 수박 열정에 대하여, 그 이유에 대하여 깨달음이 온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도 수박 한 통을 사서 나르는 일이 버겁다고 느꼈지만,

이젠 수박 들고 집 계단을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아 살 생각을 못한다.

돌쇠 1,2,3이 함께 장을 봐줄 때 한 통씩 또는 반 통씩 사기도 하지만

계단 등반에 성공하여 싱크대 앞까지 운반했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이 무겁고 딱딱한 놈에 칼을 집어 넣어 반으로 가르고, 먹기 좋게 썰어서 통에 담아 놓기.

계단 오르는 일이 다리의 수난이라면 썰기는 팔목의 노역이다.


팔 다리의 힘이 노역에 부응하지 못한 탓으로 수박 먹는 즐거움을 알아서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한 5년, 삼시세끼를 밖에서 해결하는 베스트 허즈밴드로서 아내에게 최상의 가사 복지를 제공했던 그가,

그랬던 그가! 삼시세끼를 집에서 먹는 三食이 세끼 님이 되신 것이다.

심지어 지병을 하나 얻으셔서 빵이나 씨리얼도 아닌 섬유소 많은 반찬에 국에 밥을 챙겨 드셔야 하는......

그러니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은 땀뻘뻘 '체험 삶의 현장'이 되었다.

수박의 단물이나 빨던 시절은 다 지나간 것.


착한데다 아프고, 아픈데다 내게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삼식이 남편을 미워 할 수도 없네 그려.

돌덩이 같은 수박 한 통이 싱크대 위에 오른 어느 날, 삼식이 남편에게 칼자루를 쥐어 주었다.

도저히 내 힘으로 칼을 꽂을 수 없으니 힘 좋은 삼식이 돌쇠께서 어떻게 좀 해보라고.

그날 이후로 삼식이는 수박 썰기에 취미를 붙였다.

크기와 두께 딱딱 맞춰서 썰어 내는 것이 나름 적성에 맞고 신나는 모양.

애들은 적응이 참으로 빠르다. '아빠, 우리 수박 먹으면 안돼?' 칼자루고 아빠 쪽으로 간 것에 금방 익숙해졌다.


저녁식사 마지막 숟가락들을 놓는데 삼식이 아빠가 뭔가 앞북 치는 느낌으로

'과일 뭐 먹을까? 살구 먹자. 살구! 수박은 내일 먹자'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데, 발연기 일인극 쩐다.

(어리숙한 꼼수쟁이 가트니라구!)

얕은 꼼수에 대한 응징으로 관객은 엊나간다. 나는 수박, 나도 수박, 아빠 수박 썰어줘.

발연기 꼼수 실패로 칼 잡은 김에 수박 예쁘게 썰더니 아티스트로 변신하여 작품을 내놓았다.

작품의 모티브는 현승이 얼굴,

제목은 [수수.....]




'JP&SS 영혼의 친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을 두고 떠난 여름 여행  (2) 2017.09.03
영부인 따라잡기  (6) 2017.07.12
참회록  (4) 2017.06.03
18년 만의 기적  (0) 2017.04.09
어제가 된 현재  (6) 2017.02.28

 

 

비오는 토요일 저녁 어쩌다 신메뉴 탄생.

 

엄마 마트 가는데 같이 갈래?

(시험이 코앞이라 공부 빼고 뭐든 재밌는 중2) 그래 그래, 나도 엄마랑 장보러 가고 싶었어.

엄마, 뭐 할 거야? 난 솔직히 지금 먹고 싶은 게 있는데..... 닭고기 같은 거야. 찜닭이나 그런 거.

아빠가 김치찜 먹고 싶다고 해서 김치찜 할 건데.

김치찜? 그래. 뭐, 나쁘지 않아.

(비 오는 골목을 터덜터덜 걸어 마트 앞에 다다랐을 때, 오랜만에 요리의 신이 오셨다.)

좋은 생각이 났어. 김치찜을 닭으로 하는 거야. 찜은 아니고 아무튼 어떻게 하면 될 거 같애.

진짜? 그렇게 할 수도 있어?

그럼! 일단 김치는 고기랑 푹 끓이면 무조건 맛있고. 김치가 맛있는 김치니까 성공예감!

닭치찜이야? (어쩌다 작명)

오, 닭치찜! 좋네. 닭치찜!

이름 좋다. 뭔가 욕 같기도 하고.... 참 좋다.

맛도 있을 거야. 이거 완전 신메뉴 탄생!

엄마, 왠지 닭치찜은 밥도둑이 될 것 같애.

 

닭치찜은 완성되었고,

아닌 게 아니라 닭치찜 이 녀석은 밥을 엄청나게 훔쳐갔다.

 

 

 

 

 

 

 

 

 

'음식, 마음의 환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꾸덕꾸덕 말려서 까노름한 불에  (0) 2017.11.16
어쩌다 어른  (2) 2017.10.27
어?!향육사  (2) 2016.12.17
초록 흰죽  (0) 2016.08.22
세월 찜닭  (2) 2016.06.2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