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즐거움은 '새로운 것'을 마주하는 설렘인데, 새로운 것은 낯선 것이기도 하다. 늘 걷던 길을 벗어나는 것이다. 늘 걷는 길은 대체로 예측 가능하다. 저만큼 가면 大자로 누워 있는 고양이가 있고, 오른쪽 탄천엔 사람들이 많을 거고, 왼쪽으로 가서 올라가면 조용하겠지만 그늘이 없어 더울 거고... 낯선 곳으로의  여행에도 나름의 '예측'을 장착하지만 그 예측이 모두 머리로 하는 것이다.  검색하고, 그려보고, 충분히 예측하고 떠난다. 직접 몸으로 걸어보는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여행은 체험이다. 인공위성 사진으로 들여다보는 것과 직접 가서 거기 서보는 것의 차이는 얼마나 큰 것이다.

 

 

예기치 못한 즐거움과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사이를 오가는 것이 여행이다. 그 사이를 오가며 며칠 코스타 일정과, 시카고 뉴욕 여행을 마치는 마지막 날에 뉴저지에 있는 켈리 님을 만났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면 코로나 검사 음성 결과 확인이 필요하다. 48 시간 이내의. 손쉽게 무료로 할 수 있다는 것이 '검색'을 통해 했던 예측이었는데, 그새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검사절차도 절차지만 1인당 200불의 검사 비용이 든다니! 여행 중 예측 못하는 많은 것 중에 타격감이 가장 큰 것은 사실 비용이다. 뉴욕 여행 중에 만나기로 한 켈리 님에게 이 사실을 알렸더니, 현지인 메리트에 타고난 정보 수집력을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해버렸다. 최소 비용으로, 자가검사 키트를 이용해 비대면 검사를 하는 것이었다. 이 검사로 얻은 결과지를 인정해주는지, 한국 당국에 메일까지 보내어 확인까지! 그리고 뉴욕 출발 당일 호텔로 와 검사 진행까지 깔끔하게 해 주셨다.

 

적지 않은 예측 불가의 사고를 경험한 여행이었다. 정말 사고였다. 출발 전날에는 일행 중 연구소 D 쌤이 공원에서 사고를 당했다. 천만다행으로 최소한의 상처를 입었지만,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사고였다. 외적인 사고만이 아니다. 내적 전쟁도 만만치 않았다. 여행의 즐거움이 적지 않았지만, 예측 못한 어려움으로 겪은 고충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코로나 검사 문제가 해결되고도 여전히 남아 있는 걱정은 "우리 양성 나오면 어떡하지?"였다. 비행기는 어떡하고, 10여 일의 체류를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설마 하나님께서 그것까지 하시겠어? 그럼 너무 하지. 겪을 고난은 다 겪었지!" 셋이서 쓸데없는 예측 수다를 주고받곤 했는데, 다행히 모두 음성! 안도의 한숨!

 

켈리는 그렇게 우리에게 선물이었다. 두 딸(채윤이와 D쌤)은 켈리 님이 뉴욕 천사라고 했다. 존재 자체가 선물이었는데, 직접 만든 카드에 세 사람 따로따로 선물을 준비해 오셨다. 이메일 한 통으로 시작된 인연이다.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을 읽고 받은 감동으로, 그 밤에 바로 보냈다는 그 이 메일이 만남의 시작이었다. 책이 나올 때마다 멀리 미국에서 구매를 하고, 응원을 보내오고. 이러다 이 분 만나는 거 아냐! 싶었는데, 정말 한국에서 만나는 역사가 생겼다. 연구소 '일일 글쓰기 강좌'를 했던 2019년 가을. 20년 만에 한국에 나가는 언니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글쓰기 강좌에 등록을 하시겠다는 거였다. 어머, 이 분은 받아줘야지! 그리고 그날 글쓰기 모임은 두 분의 글로 더욱 풍성해진 기억. 그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워 내가 데이트 신청을 했고, 두 분과 함께 남한산성에서 보낸 시간의 기억이 아련하다.

 

'

코로나 음성 확인까지 하고, 안도하며 체크아웃하고, 점심 대접까지 받았다. 여행객 또는 이방인으로서는 검색해서 찾을 수도 없고, 엄두도 내지 않을 식당에서 근사한 점심식사를 했다. 센트럴파크가 내려다 보이는 창가에서! 이 표현을 하자니 다시 눈가가 뜨거워진다. 2주간의 일정을 잘 지냈다고, 안팎의 사고를 잘 견뎌냈다고 베풀어 주시는 잔치상 같았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You treat me to a feast, while my enemies watch. You honor me as your guest, and you fill my cup until it overflows.)" 이번 코스타의 주제는 'Let us feast'였다. 이 아름다운 오찬으로 이방인 셋은 환대를 경험했다. 내 영혼의 잔이 넘쳤다. 켈리 님, 천사 맞다. 그분이 보내신 천사였다.

 

 

 

 

좋은 사람

Carl Jung은 '동시성'이라 하고 우리 동네에너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한다. 도모한 일이 흘러가다 누군가의 도모를 만나 내 통제 밖의 일이 되는 것. 그리고 일을 도모한 각각의 사람에겐 계획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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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뉴욕에서 실시간으로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 가져옴)

 

쌍둥이빌딩이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인공분수 앞에 섰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물줄기가 그치지 않는 눈물로 보였고, 음각된 이름 하나하나를 읽자니 슬픔이 밀려왔다.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한 존재, 하나의 우주인 생명임을 느낄 수 있었다. 둘레를 따라 걷는데 어느 이름, 아니 생명 옆에 흰 장미 한 송이가 꽂혀 있다. 소중한 한 생명이었을 뿐 아니라 누군가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꽃을 꽂고 간 어느 분을 위해, 여기 새겨진 사랑을 잃은 분들을 위해 기도했다. 정방형 분수를 둘러싼 관광객들 역시 성별, 인종, 몸의 생김, 소속한 국가, 가진 이념…과 무관하게 아름다운 생명이어서 음각된 이름과 다름 없는 각각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코스타 기간에 교회 한 권사님께서 호스피스로 가셨단 소식을 들었다. 아직 권사님의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하루 이틀 지나 남편이 허락되지 않는 면회를 다녀왔다는 얘길 전해왔다. 꼭 권사님을 뵈어야겠고, 권사님 역시 자신을 기다리고 계실 거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렇게 권사님을 뵙고 손잡아 드리고 왔다고. 의식은 없으시지만 발을 만져드릴 때 반응하셨다고, 분명히 아시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소천 소식을 전해왔다.

팔십여 년 권사님 생애 마지막 6년의 인연으로 만났다. 어릴 적부터 음악을 좋아하셨단 얘기, 약한 몸으로 태어나 고생이 많으셨던 얘기, 교회 분쟁을 맞기 전 성가대 봉사가 그렇게 즐거우셨단 얘기를 반복해서 들었다.  그 외 어떤 인생을 살아오셨는지는 잘 모른다. 생애 마지막 시간 목회자의 전횡으로 인한 교회 분쟁을 겪으시고 만난 목사가 남편이다. 남편이 권사님 생애 마지막 목사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몸이 편찮으시고 두려울 때 전화하셔서 “목사님, 기도해주세요.”라고 하셨다. 권사님께서 오래 섬겨오신 대형교회 당회장 목사가 가진 아우라나 영적 능력 같은 건 없는 목사이다.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들의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기도해 드리고 위로하는 남편을 볼 때 유일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목사하길 잘 했나 봐.”

그라운드 제로에 섰던 시간에 한국에선 권사님 발인예배를 드리는 시간이었다. 조용히 혼자 짧게 권사님 천국 환송 기도를 드렸다. 같은 시간 모마 미술관에 가 있던 벗이 사진을 보내왔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를 켜고 기도 드렸다는 메시지와 함께. 저 눈물같은 분수와 불 밝힌 초에 권사님의 생명과 사랑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담는다.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들의 슬픔에 잇대는 기도를 담는다.

한혜숙 권사님, 감사했고 사랑합니다. 머지않은 날에 천국에서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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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카드를 받았다.
정성 담긴 고운 필체로 뭐라뭐라 쓰여 있는데,
미래 문자라서 해독이 어렵다.
천국 문자다.
읽어낼 재주가 없다.
















다행히 번역이 붙어 있다.

스승의 날 카드다.
동윤아, 섭섭하다!
우리 친구 사이인 줄 알았는데...
동윤이랑, 나랑, 브라키오랑 친구잖아.
내가 선생이면 네 엄마 선생이지...
네 엄마랑도 요즘은 거의 친구 먹는다.
(아, 며칠 전에 네 엄마 문자를 씹었다. 나중에 답신 해야지, 하고 잊었네. 괜찮겠지?)
네 엄마가 스승의 날 선물에 너를 끼워 넣은 거구나.
취향 저격이네!

그렇다면... 고맙다, 내 친구 동윤이 엄마야.
(자꾸 문자 씹어서 미안해.)

오늘도 잘 살게!
못 살 이유가 백 개라도
동윤이가 잘 살으라 했으니 잘 살아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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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수업에서 반장을 하고 있다. 비대면으로 진행되다 보니 수업마다 일종의 조교가 필요하고, 반장이 그 역할이다. 뭘 시킨다고 하는 성격이 아닌데 좋아하는 교수님이라 덥석 하겠다고 했다. 좋은 수업의 반장으로 즐겁게 한 학기 보내고 있다. 학비 비싸다 비싸다 노래를 하지만, 이번 학기 세 과목 수업이 모두 좋아서 아깝지가 않다. 자본주의적 사고를 거두고 마음 가는대로 계산한다면, 한 학기 수업료 분을 한 과목 당 낼 만큼의 가치가 있다. 물론, 다른 학생들도 그리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반장 일이라는 게 이런 것이다. 사이버 캠퍼스에 올라온 줌 수업 주소 단톡에 퍼 나르기. 교수님께 사소한 민원 접수하기. 반장으로서 가장 뿌듯한 일은 그거였다. 교수님의 사이버 캠퍼스 계정에 문제가 생겨서 강의 줌 주소를 이미지 파일로 카톡방에 올려주시는 거다. 반장으로서 학우들을 위하여 이 한 몸 불태우리!!! 돋보기 끼고 이미지 확대해 놓고는 한 땀 한 땀 쳐서 텍스트로 만들어 올려 바로 링크 접속이 되도록 하였다. 내가 연구소에선 소장이라. 연구소 샘들이 최고의 조교로 알아서 줌 열어, 줌 주소 올려, 중간에 문제 생기면 일일이 개인 톡 하고 통화해서 문제 해결해. 이런 대접받는 소장인데. 돋보기 끼고 "흠... 대문자 N, 그다음 소문자 q... 이건 뭐야? 대문자 I야? 소문자 l이야?...." 이런 봉사를 하였다. 너무나 즐거웠다. 사소한 민원처리 또한 즐거웠다.

바쁘고 분주한 스승의 날을 보냈다. 각 수업에서 반장 주도로 스승의 날을 챙겨달라는 원우회의 부탁. 이런 거 또 아무렇게나 하고 싶지 않은 태생적 이벤트주의자로서 아드레날린 방출이다. 줌 수업 상황에 맞춘 여러 아이디어들이 오가곤 했다. 손편지 써서 ppt로 띄우기... 등. 손편지는 다른 과목에서 이미 썼고. <음악과 영성> 수업이라 음악을 활용해보려 했으나, 일천한 콘텐츠로 교수님 앞에서 뭘 하기도 그렇고. 채윤에게 하나 연주해 줄래? 했다가 오버하지 말라고 까이고.

학우들 부담되지 않고, 교수님 너무 민망하지 않게 조촐한 서프라이즈를 도모했다. 교수님 강의 시작하는데 마이크 켜고 난입하여 "저, 신부님 드릴 말씀 있는데요..."를 신호로 학우들은 A4 용지에 감사 메시지를 써서 카메라에 비추기! 몇 초 안 되는 이벤트였는데 화면 캡쳐 하랴, 상황 살피랴, 심쫄이었다. 부끄러워하시는 교수님 얼굴을 제대로 감상도 못하고. 이 와중에 나는 팬심 가득 담아 교수님 성함으로 삼행지를 지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없는 시간 쪼개서 발품 팔아 선물을 준비하고, 연이은 강의와 원고 부담을 뒤로 하고 직접 전달하러 나섰다. 또 하나의 반장 임무였다. 가톨릭 신학교 교정을 걸어보고 좋은 시간이었다. 그냥 좋은 시간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했던 땅에 서는 행운을 얻었다.(그 땅에 대해선 언젠가 공개하리!) "학생이 준비되면 선생이 온다." 중국 속담이란다. 나이 들어, 경계를 넘어가서 배우는 용기 내길 잘했다 싶은 것은 좋은 선생님들과의 만남이다. 감사한 선생님들께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몸으로 뛸 수 있어서 더 의미 있는 스승의 날이었다. 꽃집이 없어서 버스 한 정거장을 다시 거슬러 걸어가 꽃을 사고, 골목을 헤집어 문방구를 찾아 카드를 사고... 중고생이 된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해마다 스승의 날 마음 한 구석 슬픔이 일렁였다. 오늘의 내가 혼자 된 게 아닌데. 감사할 선생님이 한둘 아닌데. 정작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선생님이 없다. 가지각색의 이유로 그렇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게 된 예전 어느 날의 배움이 더는 싫지 않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선생님들이 더는 밉지 않다. 그렇다고 기쁘게 감사를 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게 아니라도 고마운 선생님들이 너무 멀리 계시다. 마음의 감사를 그저 혼자 여러 번 드린다.

오랜만에 반장 완장을 차고 지난날 모든 스승님들께 하듯 선물과 이벤트와 꽃과 카드를 준비하니 그냥 좋았다.

스승의 날인 5월15일은 주일이었다. 어느 교회 청년부 예배에 강의를 갔는데, 광고하던 청년이 담당 목사님을 호명하더니 스승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여기도 또 서프라이즈 당하신 스승님! 꽃다발 안은 목사님이 놀라고 민망하여 스승의 노래를 듣고 계시는데, 내 마음이 울컥했다. 얼마 만의 스승의 노래인가. 아, 목사도 스승이었지. 목사도 언젠가는 스승이었다. 남편이 도사님으로 불리던 강도사 시절, 친구네와 휴양림으로 놀러 간 적이 있다. 스승의 날 지난 스승의 주일이었는데, 주일예배 마치고 늦게 합류한 남편이 커다란 꽃다발에 커다란 케이크를 들고 와 바비큐장이 환해졌던 기억이 아련하다.

우리에겐 모두 스승이 필요하다.
스승이 필요한데, 스승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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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워서 쓰러지겠귀.

무자비한 귀여움 어택에 방어가 안되어... 이러다 내가 죽겠긔.

 

지난 주일 교회 아기들이 모두 과자 백팩을 메고 돌아다녔다. 어린이주일 선물로 선생님들이 준비하신 것인데,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백팩이라니! 아니다. 백팩 자체는 그냥 막 신박한데, 백팩 매시는 분들의 귀여움이다. 쟤가 보기보다 무거운 백팩이다. 사이드에 뽀로로 음료수가 한 병씩 달려 있으니, 저 쪼그만 등이 감당할 무게가 아니다. 사진의 저분도 수월 치는 않을 텐데 나름 그 무게를 이기고 의연함을 잃지 않으시지만(아오, 저 조그만 나이키 운동화는 또 어쩔!). 직립 보행한 지 얼만 안 된, 휘청휘청 걸음마하는 아기가 저도 가지겠다고 달려들었다. 백팩 메다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렇지, 쌀가마니 수준 아닌가! 쌀가마니 등에 지는 수준 아닌가 말이다. 

 

귀엽고 사랑스러워 터지는 심장 부여잡고 커다란 하트를 보낸다. 나의 아기 친구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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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좋아한다. 사람의 손을 사람 인격 보듯 한다. 손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사람의 손을 자세히 보지 않는다. 덥석덥석 손을 잡지도 못한다. 남편의 손을 좋아하고, 약간 집착도 하는 편이다. 세상에서 몸을 통해 얻는 위로 중 최상급일 것이다. 남편이 손을 잡아주는 것. 특이한 손을 가져서 손이 늘 부끄러웠다. 늘 손을 감췄다. 언제 어디서든 손을 감추던 젊을 날에 성가대 지휘는 어떻게 했나 몰라. 그때 성가대 했던 아이들이 특이하게 생긴 내 손을 기억하고, 달랑거리던 반지를 기억한단 얘길 해오면 낯이 뜨거워진다. 엄마 손을 따뜻하게 잡아본 기억이 없다. 엄마 손이 싫었다. 엄마와의 스킨십은 어쩐지 조금 소름 끼쳤었다. 손을 잡는 것보다 사진으로 담아 들여다보는 것이 더 좋았다. 이제야 뒤늦게 잡을 수 없는 엄마 손이 그리워 허공을 잡아보곤 한다. 유튜브에서 나문희 선생이 노래하는 무대를 봤는데, 손 때문에 울었다. 얇은 피부, 튀어나온 혈관... 우리 엄마 손과 비슷한 정도로 나이 들어 있었다. 한 인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손이었다. 손에서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세월을 담고, 인생을 새긴 손이 노래를 하고 있었다. 손만 봤다. 손의 소리만 들렸다.

* 손에 대해 글을 쓰려했더니, 작년 생일에 이미 구구절절 충분히 징징거려 놓은 게 있네.

껍데기 없는 생일

생일 아침에 미역국을 먹었다. 딸 채윤이가 전날 밤 11시가 넘어 끓이기 시작했다. 11시 넘어 줌 강의를 마치고 "그럼 엄마 먼저 잘게" 하고 누웠다. 딸이 끓이는 미역국, 참기름 냄새에 취해 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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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발길 닿는 대로 걷다 '소년 김대중의 공부방'을 만났다.
여행의 마지막 꿀같은 몇 시간은 소년 김대중을 만나는 시간여행이었다.
하의도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가족이 목포로 나왔다고 한다.
매일 저 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무르익었을
섬소년의 생각과 감수성이 조국 민주주의의 지성과 행동이 되었다.
그로 인해 겪을 고초들...
저 방 주인 소년 김대중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 <킹메이커>를 본 여운이 남아 있어서
벽에 걸린 포스터가 복잡하게 다가왔다.
지적이며 맑고 촉촉한 눈빛을 한참 바라보았다.

디지털 방명록이 있어서 흔적을 남겼다.
마침 대선 일주일 전이다.
간절한 기도를 적었다.

지난 토요일,
줄이 아무리 길어도 기쁘게 기다려 사전투표해야지,
하며 오전 강의를 마쳤는데.
사전투표하러 갈 시간에 PCR 검사 대기 줄에 서는 사태가 발생했다.
며칠 가슴에 품어 더욱 뜨거운 한 표가 되었다.
확진자는 6시 이후에 투표할 수 있다니,
간절한 마음 담아 미리 내놓으려 했던 한 표를
오늘 투표의 마침표로 찍겠다.
마침기도로 쓰겠다.

두렵고 떨리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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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어렸을 적, 아마도 현승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당시 교회 가정교회 카페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을 부러움 가득 안고 바라본 기억이 있다. 안갯속에 싸인 미시령의 어느 길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와하, 나는 언제쯤? 우리는 언제쯤?"이 내가 붙인 사진 제목이었다. 그 당시 가정교회 목짠님이셨던 서쉐석 목짠님이 가족 여행 중 올려주신 사진이었고. 둘째 출산으로 다시 시작한 밤중 수유로 인간답게 사는 날이 아득하게 여겨졌던 시절이니. 아이들 데리고 여행을 한다는 것은 다다를 수 없는 행복처럼 느껴졌다. 그랬었다. 서목짠님 부부와 미사 강변을 걸었다. 살짝 비가 뿌리는 날씨였지만, 비 따위가 우리의 '걷기 사랑'을 막을 수 없지! 우산을 쓰고 이 얘기 저 얘기 천천히 걷는 길에 만난 안개 싸인 예봉산 풍경이다. 여기서 그때 그 미시령 사진이 생각났다. 꼽아보니 벌써 20년 전이다. 

 

서목짠님 부부는 20년 넘게 우리 부부 앞에서 서너 걸음을 사이에 두고 걸어주셨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우리도 제 발로 걷는 두 아이 데리고 미시령을 넘어 가족 여행을 갔고. 졸졸졸 뒤를 따라 생의 고개들을 넘었다.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고, 대학을 준비하고, 성인이 되어 자기 길을 찾아가는 것을 딱 서너 걸음 뒤에서 지켜보았다. 자라는 아이들이 부모와 겪는 갈등을, 중년에 오는 마음의 어려움을, 연로한 부모님을 돌보는 일의 지난함을, 그러다 떠나보내드리는 것을... 딱 서너 걸음 뒤에서 지켜보며, 딱 그 길을 따라 살고 있다. 강변을 걷고 댁으로 가 함께 식사를 하는데, 모처럼 g와 g의 동생 G(쥐쥐쥐지 베이베...) 두 아이(가 아니라 성인인데...)가 다 집에 있었다. 아직 내게는 초등학생 중학생 같기도, 대학생 같기도 한 g와 G 남매가 새삼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다. 각각 자기 빛깔로 자기다움을 살아내는 것이 부럽고 자랑스러웠다.  

 

수영을 배우면서 돌파되지 않는 지점을 뚫어주는 가르침은 코치가 아니라 늘 한 레인 위의 형님이 주셨다. 그저 자기 수영을 열심히 하시는 어느 형님. 인생길 수많은 만남으로 배우고 사랑받으며 걷고 있다. 서너 걸음 앞의 서목짠님 부부는 묵묵히 자기 수영을 하시는, 그러다 가끔 만나 우리 이야기를 하염없이 들어주시는, 그러다 다시 우리 앞에서 서너 걸음 앞의 삶을 살며 가르침 주는 윗 레인 형님같은 분들이다. 갈수록 더 감사한 만남이다. 성인 초입에 들어선 채윤이와 현승이를 키우는 일은(이젠 키워지지도 않지만) 밤중 수유 때와는 또 다른 막막함이다. g와 G 남매가 나란히 서서 설거지하는 뒷모습을 참 좋아 보였는데, 우리 집에서도 익숙한 남매의 뒤태였다. 채윤과 현승의 서너 걸음 앞에서 자기 삶을 살아가는 g와 G를 보고 와서 어떤 좋은 마음이 무르익고 있다. 그 좋은 마음이 조금씩 염려를 먹어 치우고 있다. 이날 먹은 g가 제주에서 산지 직배송으로 주문한 대방어는 최고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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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홀로 같이  (3) 2021.10.17

유치부 설교를 했다. 한 20여 년 만이다. 한때 유치부 설교자였던 적이 있었다. 유치원 유치부 아이들의 성샘미, 어린이 성가대 선생님이었던 때는 순간순간 꿈틀대는 생명을 살았던 때다. 장애 비장애 아이들과 함께 했던 젊을 날이 없었다면 내적 여정 안내자로 사는 오늘 또한 없었을 것이다. 하늘 나라 같은 아이들의 세계를 맛보아 알기에 내적 여정에서 'Wonderful child'과 '상처 받은 내면 아이' 강의를 뜨겁게 전할 수 있다.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은 리처드 로어 신부님 말씀처럼 "사랑 안의 성장에 관한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사랑의 안의 성장'을 가장 생생하게 체험하는 '체험, 사랑의 현장'이다.

돌아보면 20여 년 전 유치부는 '기-승-전-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셔'였다. 울고 짜증내고 장난치는 아이에게 산타 할아버지는 선물을 안 줄지 몰라도 하나님은 다르단다. 이번에도 내가 하고픈 얘기는 그거였다. 설교 준비는 다이소에서 했다. 다이소 돌아다니며 하트 모양 스티커를 , 하트로 된 장난감을 전수조사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하트 반지를 발견! 이건 뭐, 다이소에서 주운 다이아 반지. 내일 설교는 끝났네! 끝났어! 내가 이겼어!


은재야, 사모님은 은재 사랑하는데 은재는 어때?
(당연히) 나도 사모님 사랑해요!
그러면 은재는 누구를 제일로 사랑해?
은재를 제일 사랑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야?
와아, 진짜? 엄마가 언제 은재를 사랑해?
어... 말 잘 들을 때.
(걸려 들었쓰!)

엄마 아빠는 우리를 제일 많이 사랑하는데, 하나님은 더 많이 사랑한대. 하나님은 그리고 우리가 말 안 들을 때도 사랑해. 아무 때나 다 사랑해. 오빠랑 싸울 때도 사랑하고, 치카치카할 때도 사랑하고, 치카치카 안 할 때도 사랑하고, 똥 쌀 때도 사랑하고... 말 한마디 할 때마다 하트 스티커를 손에, 옷에, 얼굴에 막막 붙여준다. 이러다 보면 유치부 아이들 전체가 설교자가 된다. 애들이 정답을 너무 빠르게 파악! 피아노 칠 때 사랑하신대~애. (맞아, 그리고 피아노 안 칠 때도 사랑하신대.) 치과 가서 울 때도 사랑하신대~애. 온갖 고백과 간증이 터져 나온다.

 

그러다 7세 은준이의 총각 같은 한 마디. "죄 지을 때도 사랑하신대" 이 말에 맞장구치며 하트 스티커 붙여주다 울컥하고 말았다. "맞아, 죄 지을 때도 사랑하신다. 그런데 죄 지을 때는 더 많이 사랑하신대. 하나님이 너무 슬퍼서 막막 울면서 사랑하신대." 그리고 그 말이 내게 다시 돌아와 내내 가슴 한 구석을 건드리고 있다. 우리 엄마가 그렇게 좋아하던 찬송 '예수 사랑하심은' 3절 가사가 살아온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하트 스티커의 향연이 끝나고, 약속의 반지를 끼워주었다. 잊어버리지 마. 하나님이 매일매일 아무 때나 사랑하셔. 잊어버리면 안 돼. 다이아... 아니 다이소 반지를 소중하게 끼워주었다. 예배 마치고 "은재야, 사모님이 뭐 잊어버리지 말라고 했어?" "어... 음, 반지! 반지 잊어버리면 안 돼!" 아... 반지... 그래, 반지라도 잃어버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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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래된 인연처럼 느껴지네요." 생각해보니 참 오래된 인연이 맞다. ⟪이프⟫ 초대 편집장으로 알게 된 박미라 선생이니 말이다. 확인해 보니 ⟪이프⟫는 1997년 창간이다. 그렇게 안면을 트게 된 페미니스트 박미라 선생을 <치유하는 글쓰기>의 저자로 다시 만났을 때 동명이인이 아닐까도 생각했다. 어쨌든 그러니까 내 편에서는 독자로 오래된 인연인 것이 분명하다. 치유 글쓰기 모임을 만들면서 수십 권의 책을 참고했지만 실질적인 안내는 <치유하는 글쓰기>를 통해 얻었다. <슬픔을 쓰는 일>을 쓰고 편집자님과 추천인 논의를 하며 이구동성 게임처럼 '박미라 선생'이 나왔을 때 신기했지만, 결국 선생의 추천사를 싣게 된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출간 이후 감사 메일을 보내고 답장을 받았다.

 

<상처 입은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합니다> <모든 날 모든 순간 내 마음의 기록법>. 이번에 출간하신 두 권의 책을 직접 보내주셨다. (영광입니다!) 앞의 책은 <치유하는 글쓰기>의 개정판이고, 나머지 한 권은 글쓰기 매뉴얼이다. 서문에서 '내가 개발한, 나만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피 같은 글쓰기 기법을 아무에게도 뺏기지 않을 거야'하면서 전전긍긍하셨단 얘기를 읽었다. 완전 공감이 되고, 책 받기 전 온라인 서점에서 책 소개를 보고 나도 생각했다. 찐득한 경험으로 짜낸 필살기를 이렇듯 공개하다니! 이어지는 글이 이렇다. '욕심으로 노심초사하던 마음에서 해방되려고, 지난 17년 간 모아둔 치유적 글쓰기 방식을 책으로 만들어 여러분과 나누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역시 알 것 같은 마음이다.

 

책을 보내는 정성, 특히 포장하고 우체국을 찾는 노고를 안다. 새삼 '오래된 인연처럼' 느껴지고 감동과 위로가 된다. 오래된 사이라도 마음의 길이 닿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얼굴 한 번 보지 않았는데 오랜 인연처럼 깊은 연결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외로운 인생길 예기치 않은 선물이다.   

 

http://aladin.kr/p/vP75I

 

[세트] 모든 날 모든 순간, 내 마음의 기록법 + 상처 입은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합니다 - 전2권

도서 모든 날 모든 순간, 내 마음의 기록법과 상처 입은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합니다 세트 상품이다.

www.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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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 기도 시간, 마음은 자꾸 저 길 위에 있었다. 8시에 나가 저 길을 걷고 있을까? 전날 친구들과 함께 걸었던 길이다. 다섯 시간 정도 함께 있었을까? 다섯 시간이 번개 같이 지나가니, 저 오솔길을 걸었던 시간은 또 얼마나 짧은가? 그런데도 마음은 자꾸 저 길 위를 걷는다. 오후에 친구가 산책을 나왔다며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사진을 보자마자 가슴이 뜨끈했는데, 어제 함께 걸을 때 우리를 웃겨주던 두 마리 새소리, 그리고 우리들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메시지와 함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셋이 한 마음이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흘리지는 않았다고 친구가 말했고. 나도 그렇다.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이다. 내내.

 

단톡에는 만남 이후 식사 메뉴 사진이 속속 올라오는데. 시골 아지매, 도시 아지매 식단이 바뀌었다고. 도시 아지매 둘은 끼니마다 꿀 같은 묵은지에 밥 먹느라 과식이고. 제천 아지매는 보정동 카페골목 브런치 부럽지 않은 연어 샌드위치다. 바뀐 식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토요일 점심, 나는 호박잎을 쪄서 강된장에 먹었다. "그려, 이 맛이지!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애들은 삼겹살과 함께 주었다. 배트맨(얼마만인가, 배트맨. 맛없는 건 넣자마자 뱉어내는 배트맨) 현승이가 "와, 호박잎 맛있다."라고! 바리바리 싸 온 것이 호박잎만이 아니다.

호박잎
상추
겨자채
청경채
비타민
부추
토마토
방울토마토
애호박
늙은 호박
(vvip에게만 주는)파
(향이 살아있는)풋 아삭이고추
(3년 된) 도라지
대추
묵은지
사과

교회에 붙어 있는 사택 텃밭에 남편 목사님이 키운 것들이다. 농사(지어 나눠주는?) 재미에 빠지신 목사님이 뜯어주고 퍼주고 하셨다. 목사님이 재차 확인해주신 바, 이 농작물 100% 목사님 수고임! 친구는 이 과정에 1도 개입하지 않았고, 나는 아주 마음에 드는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넌 원래 좀 도회적인 여자니까! ㅎㅎ) 친밀한 사람들의 뇌는 서로 연결되고 자연스레 교류한다고 한다.(이건 남편이 짐 와일더 책에서 읽고 했던 말인데, 내 말처럼 한다고 뭐라 하겠지만, 친밀한 뇌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한 번 만나고 와서 세 집의 식탁이 바뀌어 버린 건, 뇌가 연결되고 삶이 연결되어 교차한다는 것의 증거다. 아, 그러면 농사지은 목사님의 뇌와 친구의 뇌도 교차하고 있으니 세 집의 색다른 식탁은 그냥 우리 모두의 것인 걸로!

셋이 참 다른데, 다르면 또 얼마나 다른가 싶다. 50여 년 인생, 각자 다르게 고군분투하며 산다 싶은데, 그 고군분투가 다르면 또 얼마나 다를까 싶기도. 이 긴 세월 서로의 친구로 곁에 있어주는 것, 연결되고 교류하는 뇌라서 가능한 일이라면 우리는 갈수록 비슷해져 가는 것 아닐까. 말이 쉽지, 30여 년 친구인데.

목사관 화단에 분꽃이 여기저기 많이 피어 있다. 친구가 분꽃이 좋단다. 분꽃은 내게 귀걸이 꽃이다. 꽃을 따서 씨방 쪽과 꽃을 살짝 떼어 쭉 빼고, 귀에 꽂으면 달랑달랑 귀걸이가 된다. 어릴 적에 저러고 참 많이 놀았는데... 얘네들이 이걸 모른다. 찐 시골 출신은 나다! 옆에서 도라지 캐서 흙 털고 있을 때 혼자 귀걸이 놀이를 했다. 나는 꼭 내려갈 것이다. 산과 논이 있는 동네로 가서 살려고. 지금은 전셋값 압박에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밀려나고 있지만, 언젠가 주도적으로 아래로 가려고! '은퇴'라는 기회가 우리를 좀 바꿔주면 좋겠다. 도회적인 선은 이제 좀 도시로 나오고, 찐 시골 아이인 나는 내려가고. 도회적인지 시골적인지 잘 모르겠는 정, 너는 그냥 큰집 지어서 언니들 한 집에 살 수 있게 해 주든지. ㅎㅎ 많은 날 홀로 외롭게, 가끔 이렇듯 함께 걸으며 가는 인생길이 새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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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친구가 있다. 나 포함 셋이 1년에 한두 번 만난다. 친구 J가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일을 하는 덕에 자주 보게 된다. 그렇다. 아프리카에 있어서 자주 본다. 미국이나 캐나다가 아니라 아프리카니까. 한 번 들어올 때면 꼭 봐야 할 것 같은 이심전심이다. 실은 아프리카가 아니어도 만남을 도모하는 친구는 꼭 J였다. 어릴 적 친구들 정보도 죄다 꿰고 있다. 여전히 연락하고 있다는 뜻이다. 조용하고 내향적인 친구인데 말이다. 잊지 않고 잇고 마는 역할은 늘 J의 몫이다. 사람을 향한 남다른 감각, 따스한 마음이 탁월한 친구이다. 고마운 친구다.

친구 W는 생각해보니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 싸개에 싸여서 만났을 것이다. 엄마 등에 업혀서 같은 예배를 드렸을 테고. 아버지 목회하던 교회의 젊은 집사님의 아들이었다. 대여섯 살 즈음에는 장로님 딸 의정이까지 해서 어린 삼총사였다. W의 부모님이 의상실을 하셨는데 거기서 셋이 놀던 기억이 아련하다. 마네킹 보관해둔 곳에서 숨바꼭질하며 무서워하며 동시에 깔깔거렸던 기억들. W의 아버지는 빼어난 테너 목소리셨다. 성가대에서 노래를 잘하셨고, 이번에 만나고 문득 떠올랐는데 우리 아버지 장례 예배 때 특별 찬송을 부르셨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영원히 쉬일 곳 아주 없네.....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찬송을 부르고 예배당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으셨던 모습이 인생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셋이 친구가 된 건 고등학교 때이다. 서울의 교회에서 만났다. 한 교회를 다니게 된 건 엄마와 W 부모님의 친분이다. J는 고등학교 때 전도되어 온 친구이고. 대학에 가서 함께 중창단을 만들고 죽이 맞아 같이 돌아다녔다. J가 군대 가기 며칠 전, 모란시장의 겨울이 생각난다. J가 모란시장의 순대국밥이 먹고 싶다고 했던 것 같다. 난생처음 모란시장이란 곳에 갔고, 난생처음 순대국밥도 먹어봤다. 눈발도 날렸던 것 같다. 하나 씩 떠올려보니 강렬한 감정은 없지만 함께 한 소소한 것들이 잊히지 않는 이미지들로 남아 있다. 이 소소함이 어쩐지 새롭게 소중하게 느껴진다. 연인이 아니라 친구라서 참 좋구나!

만나도 별 것 없다. 르완다에서 가져온 커피를 건네고, 또 "이거 원두야? 어떻게 먹어?" 매번 물었던 걸 또 묻고. 그러면 나와 J가 동시에 "커터기에 갈아도 돼"라고 말하고. "아, 사무실에 기계 있어." 비슷한 얘기를 다시 하는 것 같다. 부모님 안부를 묻고, 그 사이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우리 엄마가 돌아가시고... 다음에도 곱창을 먹자, 다른 맛집을 찾자, 하고. 바람 좋은 야외 카페에 앉아 오가는 그 맹맹한 대화가 편하고 좋았다. 친구라서 참 좋구나!

지하철 역까지 가는 길에 내가 물었다. "너희는 나이 드는 게 어때?" 마주 앉아서 친구의 얼굴을 보며 나이를 많이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 얼굴이 내 얼굴 아닌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나는 어떠냐고 내게 되물어 와서 "나는 나이 드는 게 참 좋아"라고 했다. "너는 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서 그럴 거야." 하더니 W는 젊을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고. 젊을 때로 돌아가면 무엇을 하고 싶냐, 음악을 하고 싶냐 물었다. 아버지에게서 온 것일 텐데 W도 음악에 관한 탁월성을 타고난 친구이다. 대학가요제 나갈 준비를 했었는데, 하지 못했던 것 아쉽다고 했다. 대학 졸업하고 입사하여 한 직장에 다니는 친구이다. 약한 몸으로 태어난 아이를 묵묵히 키우고 돌보는 일을 한결같이 해 온 세월이기도 하다. 친구의 한결같은 인생이, 아니 어떻게 인생이 한결같겠나. 질곡 많은 인생을 한결같이 살아온 친구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60이면 은퇴니, 얼마 남지 않았고 그 이후의 삶이 걱정이라고 했다. 걱정하며 준비하고 있다고. 돌아오는 길 친구를 위해서 기도했다. 음악이든 무엇이든 젊은 시절 아쉬움을 충분히 보상하고 남을 인생 후반을 살기를. 무엇이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 취향을 존중하는 시간을 살 수 있기를. 그런 기도들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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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편도 전도 잡채도 없는 추석을 보냈다.

어머님 모시고 와 점심식사하고 율동공원 한 바퀴 돌았다. 

걷는데 힘들단 소리도 안 하고, 

할머니 어설픈 농담에 맞장구 쳐드리고,

와하하하 웃어 드리는 아이들이 참 예뻤다.

나만 그런가 싶었는데 남편도 같은 마음이었다고.

 

많이 드시지도 못하고, 소화력은 약하신지라

샤브샤브 하나 딱 준비했다.

야채 많이 드시고, 국물 뜨뜻한 것 드시면 딱이다.

우리 식구는 남은 국물에 칼국수, 또 남은 국물에 죽까지 가야 딱이고.

뜨뜻한 국물에 녹으셨는지, 분위기에 취하셨는지

허밍으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를 부르신다.

 

그렇게 노래 자아에 불이 들어오셔서는,

공원까지 가는 차 안에서 무반주로 몇 곡을 뽑으셨다.

아, 그런데!

음정이 좋으심, 아주 좋으심. 

같이 노래방도 갔었고, 예배도 많이 드렸는데 처음 발견이다.

아름답다, 어머니 목소리.

 

결혼 생활 22년은 어머니와 함께 한 세월이기도 하다.

여기도 또 책 한 권인데,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닌 건 분명하다.

착한 며느리 안 하기로 선언하고 벌써 몇 년이다.

예전이 그리운 어머니는 이렇게 찌르고 저렇게 어르고 하시지만

되돌릴 수 없는 날들이다.

되돌릴 수는 없지만 새롭게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

작지만 큰 발견,

어머니의 음악성이다.

남편에게도 채윤이에게도 흘러왔겠구나 싶다.

몇 년 만에 어머니와 둘이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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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회상'이라니!
'지금'의 김성호라니!
지금 김성호가 부르는 '회상'이라니!


내 첫 차 티코의 사물함엔 보물처럼, 유물처럼 카세트 테이프가 한가득이었다. 김성호의 앨범은 베스트 탑 5 안에 들었다. 그 차, 사물함의 카세트 테이프에 젊은 날의 꿈과 사랑과 고민과 외로움이 다 담겨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거기 담겼던 곡들을 이제 다시 들어도 살아오는 것들이 있다. 전주가 시작되는 순간 그 시절의 장소, 시간, 사람, 감정이 그대로 떠오른다. 티코가 가고, 여러 차들이 가고, 테이프와 CD가 지나갔다. 육아와 시가 살이 시간 동안 서서히 잊히기도 하였다. 벅스를 알고부터 잃어버린 음악이 살아 돌아왔다. 벅스에 없으면 유튜브를 뒤졌고, 웬만한 곡을 다 찾아졌다. 그런 방법으로 아무리 뒤져도 전곡을 들을 수 없어서 아쉬운 김성호였다. 아쉬움에 사람 검색으로 뒤져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좋은, 아껴서 듣는 곡이다. 그냥 회상이 아니라 '김성호의 회상'이라니. 김성호의 회상을 회상하는 정신실의 회상이다.

남편이 유투브 영상을 하나 보내왔는데, 지금의 김성호가 부르는 '김성호의 회상'이었다. 찾아보니 출연한 방송이 그대로 올라와 있었다. 목소리도 얼굴도 '그대로'라 할 수는 없지만... 참 좋았다. 아니 좋았단 말 대신 고맙다 하고 싶다. 무엇보다 얼굴이 참 좋았다. 오스카 와일드가 했다는 "나이 마흔이면 누구나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떠오르는데. 단지 얼굴이 아니라 내면이라는 것을 누구나 안다. 같은 친절한 표정이라도, 같은 무뚝뚝한 표정이라도 내면의 얼굴과 괴리가 크지 않아야 편안하다. 드러나는 표정이 어떻든 머물러 바라보고 싶은 얼굴은 그런 얼굴이다. 김성호의 얼굴이 그랬다. 목소리도 물론 아직(?) 팽팽했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세월과는 조금 달랐다. 가만 서서 노래하는 걸 여러 번 돌려보니, 느슨해진 성대의 긴장을 어떻게든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팔로우잉 하고 있는 몇 안 되는 페친 한 분이 김성호에 대해 쓴 글을 보았다. 짧은 글이 생각과 감성을 함께 자극했다. 공감하며 읽다보니 김성호가 좋았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기독교인인 것 같은데, 그래서 가스펠도 꽤 작곡했다. 신앙이 뜨거워져 가스펠을 만들었어도 가사가 적나라한 게토 언어가 아니었음이 좋았었지.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시인과 촌장 노래의 이런 가사가 있다.

당신의 눈썹처럼 여윈 초승달 숲 사이로 지고
높은 벽 높은 벽 높은 벽
높은 벽 밑둥아리애 붙어서 밤새워 새벽

시인이 믿음 뜨거워져 집사님으로 많이 불리면서 이런 노래를 만들었다. "GNP가 오르고 당신의 아이들이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이 거리를 달려도... 당신의 마음속에 사랑이 없다면 허무할 거예요" 믿고 싶지 않을 만큼 아쉽고 아까웠다. 저 '새벽' 노래를 함께 좋아하던 친구에게 뭔가 부끄러웠다. 기독교인인 것이 부끄러워졌었다. 전도지에 인쇄된 글귀처럼 보이는 가사를 보면서 좋아하던 가수를 잃을 상실감에 슬펐던 기억. 김성호가 좋았던 건, (몇 곡 알지도 못하지만) 가스펠도 시처럼 다가와서였다.

이 모든 것, 내 취향에 불과한 것을 알지만 소중히 여기고 싶다. 나를 존중하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다. 내 사소한 취향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 그래서 김성호의 회상을 좋아하는 나를 새롭게 회상해보는 중이다. 방송을 다 보고나니, 내 사소한 취향들이 멋지게 느껴진다. 그렇게 느끼게 해준 김성호 님에게 고맙다. 한때 좋아하고, 존경했던 내 취향들이 부끄럽게 되는 일이, 심지어 혐오하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마음 편히 이런 말 할 나이는 아니다만. 누군가의 취향의 대상이 되어 실망시킬 일이 더 많은 나이가 되어 앉아 있으니) 여하튼 마흔이 훨씬 넘은 김성호 님의 얼굴, 목소리가 좋아서 고마운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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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이었던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던 길이었다. 초저녁, 버스에서 내려 터덜터덜 걷는 길. 걷는 건 참 좋은 일이라, 아파트 큰 나무 사이를 걸으니 절로 마음의 생기가 차올랐다. 놀이터 옆을 지나는데, 지나는데... 아하, 말랑말랑한 생명체들 귀여운 만행의 현장 발견. 슬슬 차오르던 생기의 포텐이 터짐! 오동통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르고 만지고 주무르고 했을, 재잘거렸을 것들이 보이고 들리는 것 같은 잔여물이다. 이 얼마나 가슴 떨리게 아름다운 작품인가. 발을 뗄 수 없었다.

어느 큰 교회 강의에 갔다. 소개하신 목사님의 사모님과 아이들이 본당 저 끝에 앉았다. 엄마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더니 강의 마치고 나오는데 이 그림카드를 건네주었다. 사모님 "한테" 쓴 것이고. 의상이 포인트다. 내 여름 강의복이라 할 수 있는 검정 원피스에 흰 재킷을 그대로 살렸고. 내 트레이드마크인 '열정'을 그대로 담아냈다. 어찌나 열정이 넘치는지, 강의하는데 겨드랑이에서 하트가 뿜어져 나온다. '사모' '느낌표' '감사'는 쫌 중요하니 별표. "드림"의 디귿을 뒤집어써주는 미적 감각! 발을 뗄 수 없었다. 다시 돌이켜 이 아름다운 존재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오후에 있었던 지도자 과정에서 들은 아픈 이야기로 마음에 고인 슬픔이, 밤에 유튜브 강의라 1500명 본당에 청중 몇 명 앉아 계신 어려운 환경에서 강의하느라 경직된 몸과 마음이, 늦은 밤 빗길 운전하느라 쌓인 피로가 한 방에 풀렸다. 이 얼마나 가슴 떨리게 귀엽고 아름다운 작품인가.

참 아름다우신 분들, 참 고마우신 분들.
아이들 여러분들.
아이들이 있는 세상,
아이들이 있어서 이렇게도 아름다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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