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유치부의 *준에게 키 크는 비법을 전수 받았다.


나 : 준아, 사모님이 지금 준이 코 파는 거 봤어.

준 : 그래요? 나 코딱지 먹어요.

나 : 갑자기?

준 : 나 코딱지 잘 먹어요. 코딱지는 맛이 짜요.

나 : 으아...... 너 혹시 코딱지 먹어서 요즘 키가 그렇게 크는 거야?

준 : 맞아요. 

나 : 사모님은 키가 안 커서 걱정인데 코딱지를 먹으면 될까?

준 : 그럼요. 코딱지를 먹으면 돼요.

나 : 얼만큼 먹어야 해?

준 : 음...... 아침에 일어나 한 번, 저녁에 자기 전에 한 번 먹으세요.

나 : 그렇게만 먹으면 돼?

준 : 아아아아! 낮잠 자기 전에 한 번 더 먹어야 해요. 하루 세 번 먹어요.

나 : 오케이! 알았어! 이제 나도 키가 클 거야. 코딱지만 먹으면 되는 거지?

준 : 아니요. 밥도 먹어야 해요.

나 : 알았어. 사모님 코딱지 세 번 먹고 밥도 먹고 그럴 거야. 그래도 키가 안 크면 준이가 책임 져야 해.

준 : 응.


집에 오려고 나오면서 멀리 있는 준과 눈이 마주쳤는데 손가락 세 개 펴서 보여주며 '세 번'이라고 확인시켜주었다. 집에 와서 가족들에게 비법을 전했더니 키가 제법 훤칠한 스무 살 딸이 말했다. "그거 확실한 방법이야. 나 보면 알잖아!" 아, 맞다.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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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교회 청년부 생활이 주는 유익 중 하나는 주체적 참여 태도이다. 시스템화 된 성경공부나 훈련의 기회가 적은 대신 스스로 채워야 할 배움의 시간과 공간이 많기 때문이다. 몇 주 전 예배 설교 시간에 여기저기서 노트 필기 하는 모습이 갑자기 눈에 많이 띄었다. 옆에 앉은 채윤이도 부지런히 적어대고 있었다. 청년부에서 설교 나눔을 하는데 함께 같은 노트를 구입해서 필기하기로 했다는 것. 스스로 뭐라도 하는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올해에는 한 달에 한 번 [이우 청년 신학클럽] [이우 청년 북클럽]이란 시간을 갖기로 했다. 신학클럽은 남편이, 북클럽은 내가 이끈다. 목사님 앉혀 놓고 신학과 신앙, 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하는 시간이 신학클럽이다. 북클럽은 말 그대로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읽고 나누는 것인데 내 목표는 어쨌든 읽게 하는 것이다. 한 달에 한 권을 못 읽어도 된다. 한 줄이라도 읽으면 된다. 오늘 오리엔테이션을 했다. 본회퍼, 손봉호, 이현주, 존 스토트. 우리 부부 썸의 시작, 연애의 시작과 헤어짐엔 이 네 분이 함께 했다. 이분들의 책이 있었다. 언제 들어도 재미있을 남의 연애 이야기, 목사 부부의 연애 이야기로 시작하니 다들 눈이 초롱초롱. 좀 세게 약을 쳤다. 고등학교까지 나왔는데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죄라고 말했다. 자신에 대한 죄라고 말했다. 진심 우리 청년들이 읽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스스로 읽는 힘으로 스스로 서는 사람,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읽고 또 읽으면서 자기 확장의 노력을 쉬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로 지금의 관심 주제 키워드를 포스트잇에 적고 나누었다. 크고 작은 고민들이 이미 선정해놓은 책과 잘 맞아 떨어진다. 한 달 넘게 심사숙고 하여 책을 골랐다. 2019년을 사는 청년들의 고민을 다루되 (어떤 의미로든)치우치지 않을 것, 책은 어렵거나 현학적이지 않을 것, 이런 원칙을 가지고. 올해 청년부가 된 채윤에게 일정 부분 읽혀 보기도 하면서 꼭 읽힐 책을 고르려고 했다. 어쨌든 목표는 읽게 만드는 것다. 모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바로 책을 구입했다며 인증샷이 단톡에 올라왔다. 벌써 보람이고, 기대가 된다. 


이우 청년 북클럽 도서 목록 


[헝거]  록산 게이, 사이행성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백소영, 뉴스앤조이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헨리 나우웬, IVP
[신도의 공동생활]  디이트리히 본회퍼, 대한기독교서회
[연애의 태도]  정신실, 두란노
[자기 결정]  페터 비에리, 은행나무
[좋은 사람은 드물다]  플래너리 오코너, 현대문학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문학동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청아출판사
[세계관 수업]  양희송, 복있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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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아직 2018년이 끝나지 않았다.

2018 이름으로 쓰고 싶은 것, 써야 할 것이 '비공개' 상태로 남아 있는 한

끝난 것이 아니다.

송구영신 예배 전후로 날아든 똑같은 문자와 카카카오 톡들에 답신을 하지 못했다.

그중 연배가 높으신 분이 계셔서 죄송한 마음이 있고, 싸가지 없는 인간이라 하시면 인정! 

그러나 단체로 쏜 메시지에는 답하지 안해도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또 시간의 인위적 경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기도 하다.


2018년을 마무리 하는 글 세 개를 쓰고 싶었으니 이걸 써야 끝이다.

실은 사진만 걸어둔 채 '비공개'로 오래 묵혀서 조금 질려 버린 건 사실이지만.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간판을 내걸고 시간과 비용을 거룩하게 낭비하고 있는 중이다.

개소식이란 이름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시간과 비용 낭비를 연거푸 9회를 하고,

마지막 개소식인 10회는 남편들을 초대했다.

와서 밥만 먹는 줄 알았던 벌쭘한 남자들(세상에 벌쭘하지 않은 남자는 몇이나 될 것인가) 넷이 모였다.

앉혀 놓고 개소식 프로그램을 그대로 진행했다.

개소식 프로그램이라 하면, 소장의 세바시(세상을 못 바꾸는 시간 40분) 강의가 주메뉴이다.

밥만 먹겠다는 남편들에게 굳이 이 강의를 들려주어야 할 이유는......

흠, 우리는 순수했다. 도대체 왜 이 시점에서 마음성장연구소인지,

도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 알려야 할 의미도 권리도 있으니까.


정말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강의를 마치고 남편들이 이심전심으로 알아들었다. 

"여보, 미안! 돈 버는 연구소 아니야"

공부 시키느라 돈 많이 든 여자가 이제나 저제나 좀 벌어 오려나 했는데,

드디어 연구소를 내고 상담을 하고 제대로 강의를 한다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다만 크게 기뻐하진 않았지만 누구도 불편해 하지는 않았다.

부부는 닮아간다는데,

우리가 왜 이런 걸 하겠다고 뭉쳤겠어.

당신이 사는 방식이고, 당신이 살고 싶은 방식이지!

말하자면 이런 거다.


연구원 은경 쌤의 짝꿍인 백 이사님(남편들을 강제로 연구소 이사로 추대함)도 이러고 살고 계시니.

직원 '예배'말고 '복지' 챙기는 사장님

시의 적절게 기사가 나왔을 뿐, 

남편 네 사람 모두 '의미 있게' 사는 것에의 고민을 놓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 고민 놓아버리면 마음 편할 것을,

그걸 하지 못해 때로 죄책감과 자기 비판으로 괴로워 하기도 한다.


연구소가 무엇이 될지 모르겠다.

의미 있는 상담도 하고 만남도 하는 게 분명한데 

지속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곳, 낫고 나아지는 '나음터'가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하다는 생각은 분명하다.

함께 하는 네 사람이 안전한 사람들이고,

넷의 삶과 인격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오래 지켜본 사람들의 불편한 지지로 인해

더욱 확증을 얻는 안전함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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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체력이 달려서 아이들 치료교육을 그만두어야 하는데, 

이런 에피소드 하나로 일주일은 버틸 힘을 얻기에 멈출 수가 없다.

새해 첫 수업 헬로송을 부를 땐 늘 계획된 도발을 한다. 

“안녕, 다섯 살 해뜰반” 하자마자 아이들이 피를 토하며 달려든다. 

“아니에요오오오, 여서 딸이에요오오오, 여서 딸 돼써요오오오오오오(핏대)”

가장 태연하게 “무슨 소리야. 너희 다섯 살 반이잖아” 하면 

이제 핏대 세우고 앞으로 나와서 절규를 한다. “여!서!딸! 여섯 살이에요” 

“지난 번에 다섯 살이었잖아. 어쩌다 여섯 살이 됐어?” 여섯 살 된 비법이 난무한다. 

엄마가 여섯 살이래요, 떡국 먹었어요, 키가 커졌어요, 우유 먹었어요. 

그러다 한 녀석이 "나이를 먹었어요오~"

뭐라고? 나이를 먹었다고? 나이는 어떤 맛인데?

하자마자 이제 뻥이 난무를 한다. 

동그랗게 생겼는데 초콜릿 맛이에요. 

하트 모양이에요. 

야야, 그런데 선생님은 나이가 몇 살 같애? 

열다섯 살이요, 열세 살이요! ㅎㅎㅎㅎ (계속해, 계속) 이십 삼살이요, 

(자꾸 듣다보니 씁쓸)

 “얘들아, 실은 선생님은 나이 먹는 게 싫어”라고 고백해 버렸다. 

그러자 한 녀석이. 

“아이 참, 션샘미. 골고루 먹어야 해요!”


파, 당근, 나이.....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먹기!




십여 년 영성공부의 마침표를 찍은 것은 철학상담 4학기였다.

수많은 철학자를, 영성가를 소개받고 읽고 만났지만 돌아보면 가슴에 남은 것은 한 마디다.


"사랑이 메마른 곳을 일부러 찾아 상처받지 말고, 사랑 받는 곳으로 가야한다"

인간 본성이 그러하다.

칭찬과 존경의 말에 목마르면서도 그 반대의 소리에 귀가 커진다.

곱씹고 묵상하는 것은 나를 믿어주지 않는 사람의 표정과 말이며

부러 찾아가 맴도는 곳은 나를 홀대하는 곳이다. 


모양새를 위한 송년회가 아니라

당신들과 함께 한 일 년이 정말 소중했다, 는 송년회였다.

갚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셔도 되는 걸까, 싶게 대접 받는다.

일일이 손으로 한 예쁘고 맛있는 음식이며, 데코레이션이다.


그분의 손은 내게 사도행전 '루디아'의 손이었다.

나도 요리하는 것 참 좋아하는데,

음식 만드는 것에 정이 떨어질 정도로 슬프고 비루한 식사 준비의 나날을 보냈다.

그분이 건넨 밑반찬과 레시피가 도착한 날은 '삶은 요리'였던 내 인생이

'죽음의 요리'가 되던 시절이었다.


마음 성장을 위한 모임이라고 해서 내적인 것만 판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정신과 몸이, 마음의 길과 일상의 여정이 다른 것이며

둘 중 하나만 중요한 것처럼 치우쳐버린다면 그것이 가장 위험한 일이다.

마음 공부를 위한 모임일수록 일상의 이야기가 살아 있고,

먹을 것이 풍성해야 한다고 믿는다.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에서 늘 좋은 원두로 커피를 내리는 이유이다.

마음 공부를 위해서 급조(맞다, 급조가 맞다. 순간 떠오른 분들께 급 메시지를 보내어 구성되었으니)

모임인 꿈모임이 밤에 꾸는 꿈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먹을 것을 나누고, 

무엇보다 존경과 신뢰를 나눴다.


어쩌다 이렇게 좋은 모임이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내가 만들었고 이끄미로 있었으니 내가 잘한 것 같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나는 늘 '나'라는 무거운 존재 하나를 끌고 다닌다.

어디선들 내가 다르게 했을까.

함께 모인 '나'들의 역동이라 설명할 수 밖에 없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를 내어 놓는 아이처럼 자기 내면을, 가진 것을 그냥 내놓았기 때문일 터.

송년 모임의 키워드는 누구도 계획하지 않았지만 내내 '천사'였다.

누가 천사인지는 시시각각 바뀌었지만,

선물교환으로 받은 앞치마를 한 내가 마지막으로 

천사를 찾아 싸바, 싸바, 싸바, 춤을 추었으니 마지막 천사는 '나'인 걸로.

모든 '나'인 걸로.


"사랑이 메마른 곳을 일부러 찾아 상처받지 말고, 사랑 받는 곳으로 가야한다"







나이 50이 되는 해였다. 100 살을 살지 못할 텐데 '반'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생의 의미'를 붙들고 싶은 탓일 터이다. 쉰이라는 나이를 거의 한 번도 인식하고 살지 않았다. 연말이 되어 송년회란 이름으로 모여 돌아보니 이제야 나이가 보인다. 그 어느 해보다 좋은 시간을 보냈다, 말하기에는 외적인 조건은 좋지 않았지만, 좋았던 것이 사실이다. 요란하지 않거나 의례적이지 않은 송년모임들이 인증해준다. 사람이 있었다. 사람을 만나는 곳이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상처 받고 찔려 피흘리는 곳도 사람이 있는 곳이라 한다면, 그것도 인정!이다. 


아, 올해 내게 의미 있던 곳은, 다른 말로 하면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 목회자에게, 그렇다 그 누구도 아닌 목회자에 의한 성폭행 피해자들과 글쓰기로 만난 곳이다. 피해자, 또는 생존자라는 말로 당신에게 어떤 사람의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무엇이 됐든 틀렸다! 당신이 틀리기 전에 내가 먼저 틀렸었다. 첫 모임에 가면서 누구보다 긴장했다. 상상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상상한 모든 것이 다 틀렸고, 빛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구보다 빛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빛을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 자신의 빛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다 쓸 수는 없다. 8주 씩 두 번의 글쓰기 자조모임을 하면서 많이 울었고, 분노에 치를 떨기도 했다. 


1,2기 함께 모여 송년회를 했다. 낭독회로 모였다. 낭독회 다녀와 페이스북에 남긴 소회를 다시 올린다.


글쓰기로 만난 사이였는데 이상하게 목소리와 말투가 생생하게 남아 있다. 매 시간 써 온 글을 소리 내어 읽었고, 사려 깊은 수다(소리)가 끝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리라. 글쓰기 자조모임 송년파티 낭독회가 있었다. 두어 시간 앉아서 눈물 찔끔거리고 웃었다. 그녀들의 목소리가 참 좋다. 어쩌면 사람의 목소리가 저렇게 다른 빛과 결을 가지고 있을까. 눈을 감고 들으면 더 신비롭다.


며칠 약한 두통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사라졌다. 어느 순간인지 모르겠다. 반가운 얼굴이 들어올 때 살짝 심장이 들썩거린 순간인지, 마주앉은 이의 눈물에 공명하던 순간인지, 와하하하 웃던 순간인지. 이 모임에 앉아 있으면 모두가 나 같다. 피해와 상처도 내 것 같고, 그것을 돕는 일에 치인 활동가의 피곤함도 내 것인 듯하고, 나는 당연히 나다. 오늘 낭독회에서 들은 글의 일부이다.


자조 모임. 막연하게 거부감이 들었고, 마음 깊은 곳에선 겁이 났다. 나는 자조 모임 초기에 자주 세상에서 공포를 느낀다고 썼다. 나는 내가 내밀하게 감각하고 오래도록 사유한 것들을 모래 속 자갈 골라내듯 투박하게 다루는 세상이, 실로 무서웠다. 그래서 그냥 슬펐다’, ‘분노했다처럼 내 언어들도 단순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면 설명하지 않아도 됐고, 그러면, 판단 당하지 않아도 되니까.

 

자조 모임을 통한 글쓰기는, 내가 방치한 기억들에 세세한언어를 부여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뭉개놓았던 기억들을 끌어올려서 가만히 펼쳐놓고 조금씩 다시 쓰기 시작했다. 나를 온전히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내 감정에 집중한 채로 내 기억을 쓰다듬고 매만지면서, 나는 무엇이 고통이었고 왜 고통스러웠는지를 직시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가해자의 그루밍에 길들여진 자아가 영혼에 가하는 자해. 그것이 내 부끄러움의 발로라는 것을 자조 모임을 통해 배웠다. 그 배움 덕에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도 모르는 최초의 기억따윈 없었다. 그 기억이야말로 가장 견고한 환상이었다. 내 고통은 모두 그냥 그 자체로 진실이었다. 나는 자조 모임이 끝나고 고통을 느끼기를 주저한 내 자신을 꼭 껴안고 어를 수 있었다.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다.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이해의 불가능성은 유한한 인간의 영원한 콤플렉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나는 연결을 믿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일이 나를 들여다보듯 투명하게 타인을 들여다보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됐다. 타인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공간이 안전한 장소가 될 수 있음을 믿는다. 고통이 언어가 되어 쏟아져 나올 때 최대한의 경청으로, 제 몸의 변화까지 겪어가며 있어 준 사람들 때문에. 나는 사실 지구의 밑동을 파고 들어가면, 이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사실 이 분이 써오는 모든 글이 좋았다. 이미 자기 소설을 출간한 분이다.  헌데 이 글이 유난히 큰 소리로 들리는 이유가 있다. 글쓰기 모임 초반에 신형철의 글을 인용하여 ‘타자의 이해불가능성’에 대한 글을 써오신 적이 있다. 그때의 이해불가능성은 건널 수 없는 강, 건널 필요도 없는 강 같았다. 냉소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지구 밑동을 파고 들어가면, 모두 연결되어 있다’니! 연결을 믿는다니! 아, 확실히 이 말에서 내 두통이 사라졌다. 이 문장을 듣는 순간 뇌가 확 열리면서 뉴런이 마구 밖으로 뻗어나가 둘러앉은 모든 이들의 뉴런에 접속되는 느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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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에 한 번 어린이집에서 아가들 음악수업을 빙자하여 발달체크도 하고 부모 상담, 교사 교육도 한다.

가끔 보는 장면인데 볼 때마다 마음이 한참 머문다. 생선 반찬이 나오는 날엔 선생님들 너나 없이 위생 장갑을 끼도 생선 가시를 발라낸다. 그러고 나면 냄새에 물리고 질려 정작 자신은 먹지 못한다고 한다. 20대 초중반 나이 선생님도 있다. 집에서 자기 먹을 생선을 저렇게 살뜰하게 정교하게 바를까? 집에서라면 가시 발라내는 게 귀찮아 아예 안 먹을 지도 모른다. 생선 가시 발라내는 저 모습은 보기 좋다고 말하기 뭣한 야릇한 뭉클함이다.

뉴스 하나가 제대로 터지면 포털 검색어가 우르르 한 곳으로 몰리고. 한 집단을 싸잡아 비난하고 증오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세상에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처럼. 애초 선한 집단 악한 집단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거침 없이 갈라치고 혐오한다. 무서운 세상이다. 뉴스 한 번 터질 때마다 어린이집 선생이란 이유로 두려워 하고 위축되는 모습을 본다.

어느 집단에든 사람이 있고, 개인이 있다. 평생 발라 본 생선 가시보다 더 많은 양의 생선 가시를 하루에 마지고 있는 젊은 선생님. 유난히 행동이 많은 아이들이 몰려 일년 내내 기 빨리며 씨름하다 결국 탈진하여 상담소를 찾는 선생님. 자기 몫을 감당하는 사람들, 가끔은 자신을 해하며 자기 자리를 지켜내는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를 떠받치고 있다. 생선 가시 발라내는 저 손들, 이 얼마나 고귀한 하찮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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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전공과 본업은 음악심리 치료사입니다. 아이들을 치료했고, 요즘은 학부 전공까지 살려 어린이집의 아기들 치료교육과 함께 부모 상담으로 일주일 중 하루를 보냅니다. ‘유리드믹스’라는 음악교육을 하며 아이들 발달을 개별 체크 하고, 이것을 근거로 부모 상담도 합니다. 전공에 부합하는 가장 의미 있는 일입니다.


노래 ‘도레미송’을 시작으로 사운드 오브 뮤직 OST로 한 6주 수업을 했습니다. 각각의 음이 개성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교육적, 치료적으로 큰 의미이지요. 이 빨간 원통 안에는 음악 선생님보다 노래를 쪼~금만 더 잘하는 아줌마가 들어 있다는 말을 아이들은 철썩 같이 믿습니다. 스피커만 보면 '어, 아줌마다. 아줌마 안녕하세요' 인사를 합니다. 예, 줄리 앤드류스, 즉 마리아지요.

마리아의 노래를 들려줄 때는 꼭 아이들 입에 m&m 초콜릿을 하나 씩 넣어 줍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아줌마가 전해달래. "음악은 달콤한 거야. 초콜릿처럼!" 6주 동안 미각과 청각에 동시 자극받은 아이들 기계적으로 말합니다. (초콜릿 통에서 눈을 떼지를 못하지요) “음악은 달콤한 거야, 초콜릿처럼”


오늘은 마리아 아줌마와 작별하는 시간입니다. (음계, 도레미송으로 뽕을 뺐다는 얘기지요) “아줌마가 오늘은 어떤 친구를 데려왔어. 아줌마의 친구가 새로운 노래를 들려줄 거래. 들어볼래?” 트랩 대령의 ‘에델바이스’를 들려주었습니다. 아이들 저 표정을 보십시오. 달콤한 음악에 빠져든 저 표정. 예, m&m 초콜릿 한 알의 기적입니다.


물론 마지막엔 초콜릿 없이 에델바이스 왈츠 버전에 춤을 추었습니다. 이 시간을 위해 6주를 달려온 것이고요. 아이들, 음악, 춤. 이 셋은 자유의 삼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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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가요, 라고 톡을 보내고

헤벨레 옷차림 그대로, 부시시한 머리 그대로, 쓰레빠를  신고 나간다.

60초 후, 편의점 앞에서 만난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로 시작되는 유안진의 수필이 생각 나지만,

이 수필 별로 안 좋아하니 이런 느낌이라는 얘기만 해두자.


이 낯설고 척박한 동네에서 

이렇듯 따뜻하고 정성스런 것을 나누는 이웃이라니!

돌아가신 친정 엄마를 향한 그리움과 창조성 담아 식혜를 만들고,

또 꿈틀대는 창조성에 조청을 만들고마는 여인이 있다.

그 식혜를 얻어 와 마셔본 남편이 "이거 장모님이 해주시던 맛인데"란다.

재료 중에 '엄마' 성분이 들었음에 틀림 없다. 


늦은 밤 편의점 앞에 서서

중년의 두 여자,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남다른 두 여자,

꿈을 꾸고 꿈에서 가끔 길을 만나는 두 여자,

비슷하지만 다른 길 가는 딸을 키우는 두 여자가 짧은 수다를 떤다.

조청 레시피 얘기, 딸들 대입 얘기, 결론은 딸내미 뒷담화.

 

그리움과 창조성이 농축된 작은 병과

군산 이성당 빵 서너 개를 맞교환 해 돌아온다.

맨 얼굴에 쓰레빠로 만나는 이웃, 얼마나 큰 축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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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맞는 돋보기가 없어서 ‘읽기’를 포기하신지 오래다. 

94세 우리 엄마. 

‘저녁 먹었응게 예배 드리야지. 같이 드릴려? 안 혀? 그려’ 

하고 가.정.예배 드리러 들어가셨다. 


설거지 하고 살짝 문 열어보니 돋보기 끼고 찬송가 펴놓고 부르고 계신다. 

어? 엄마, 보여? 

아니이, 잘 안 보이는디 그냥 감이루 보고 불러. 23장 맞지?” 17장 펴놓고 부르신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리라.


내가 확인한 바, 엄마의 가정예배는 쉬지 않고 50년 째다. 

어렸을 적엔 그렇게 우리를 닦달하던 시간이다. 

아주 그냥 저녁마다 정말 고달픈 시간! 

식구들 다 떨어져 나갔는데 원망도 그 무엇도 없이 혼자 여전히 지키는 가정예배 시간이다.


동생 식구가 휴가를 가서 아기가 된 엄마 돌보러 친정에 왔다. 

저녁 먹고 앉아 1000번도 더 들었던 몇 개 남지 않은 인생 에피소드 레퍼토리를 꾹 참고 들어드렸다. 

그리고 엄만 예배를 드리러 들어간다. 

저런 엄마 팔아서 쓴 원고를 넘기곤 온 날이다. ㅠㅠ 그

래서인가. 더욱 마음이 저릿하고, 지난 세월이 미안하고..... 같이 있어도 벌써 그리운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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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주제로 각종 단체와 교회에 강의하러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하지만 새벽 6시 강의는 처음입니다. 5시10분 분당 출발, 5시 55분 쌍문동 도착. 새벽하늘을 배경으로 한 영장산과 도봉산을 한 시간 차로 마주했습니다. 


'피택 장로님을 위한 교육'에 초대 받아 간 것입니다. 새벽 강의라니, 엄두가 나지 않았을 텐데 초대하신 목사님을 알기에 기꺼이 가게 되었습니다. 예비 장로님 교육의 주 내용이 다름 아니라 '렉시오 디비나' 등의 기도 훈련과 영적 식별 등이라니요! 새로 부임하신 교회에서 조용히 준비된 만큼의 목회철학을 펼치시는 모습이 좋아 보였습니다.


영적 우월감에 빠져 삶과 신앙의 정답을 다 아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자아팽창에 허덕이며 과도한 확신 속에 교인들의 영적 삶을 통제하지요. 통제하고 억압하는 방식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폭력적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목사님들도 많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할 수 없는 것의 한계를 인정하며 교인들 각자의 영적 여정을 겸허히 인정하는 분들이죠. 


몇 주 전, 어느 교회 수련회에 가서 뵌 목사님 모습도 인상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강의안 올려놓고 강단으로 쓸 탁자(수련회 장소니까 식사 때는 밥상으로 쓰인)를 살피시다 ‘어이쿠, 상이 끈적하네.’ 하며 닦으시더군요. 그냥 본인이 닦으셨습니다. 


근거 없는 영적 우월감 대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고 내어주는 목사님들이 좋습니다. 새벽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저 산처럼, 그런 목사님들 건강하게 든든히 서계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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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인연이 있다.

명동성당을 언저리를 맴돌다  만난 성당 언니들이 있고,

성당 언니들을 가르치는 불자(佛子)이신 선생님도 계시다.

가장 소중한 것을 배우는 여정에 만난 분들이다.


신심 깊은 성당 언니가 암은 문턱에 섰다 깨달은 간증이 뜨거웠다.

지적인 욕구가 높은 이 언니는 개신교의 은퇴한 철학교수의 가르침에 빠져있다.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 깊은 철학적 성찰, 그리고 명상이 그를 변화시켰다고 했다.

명상의 유익에 대해 또 열변을 토하셨다.


어, 그런데 명상이라고 하셨나?

내가 아는 어떤 가톨릭 신자보다 믿음이 뜨거운 분이고,

마음공부와 영성에 관해 모르는 것, 안 해본 것이 없는 분이다.

선생님, 명상이라고 하셨어요? 향심기도가 아니구요? 라고 했더니.

향심기도 열심히 했는데 모르던 것을 명상으로 배우니 알겠더란다.


담을 넘어 가 배우는 기쁨과 두려움, 신선함과 막막함을 안다.

평생 들어 귀에 딱지 앉은 얘기를 새로운 언어로 들을 때 무릎 치며 알아듣고

귀에 딱지로 남은 평생 배움의 진가를 그제야 발견하게 되는 것이 신비롭다.


80, 60대 선생님(이라 쓰고 언니라 읽는다)들 사이에서 막내 역할을 맡는 것도 신나는 일이다.

밥 생각 없으시지만 막내 배고프다니 헤어지던 발걸음 돌려 저녁 먹어(라고 쓰고 '멕여'라고 읽음)주심,

야야, 나는 이해가 안된다, 는 아주 일상적인 말로 내 종교가 가진 편협함을 가차없이 찔러주심.

재능과 꿈 덮어두지 말라고 사업계획 짜주며 먹고 살 걱정까지 해주심.

담을 넘어 만난 분들과의 수다가 사랑 노래가 되어 가슴에 남았다. 


불금의 명동에서 연가를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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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토요일, 일요일에 이우교회에서 사경회가 있습니다.

강사는 고신대원의 박영돈 교수님이십니다.

남편이 존경하는 은사님이시고요.

그야말로 따뜻한 통찰, 예리한 공감으로 저술, 설교, 페북 글이 모든 인기 최고이지요.

어제 남편이 박영돈 교수님 뵙고 왔는데

밤늦게 이런저런 신대원 시절 얘길 하다 페북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이런 사연이 있었고요.

분당 근처에 계신 박영돈 교수님 팬들께서는 오셔서 들으셔도 좋겠습니다.

 

13일 토요일 오후 7시 / 14일 주일 오전 11시 / 오후 1시30분


[박영돈 교수님, 과 남편, 과 나]

결혼하고 7년 째 되는 해에 남편은 신대원에 갔다. 고등학교 때부터 꾸던 꿈이라지만 ‘내적 소명’은 확실하나 그것으로만 선택할 일이 아니었기에 ‘피할 수 있을 만큼’ 피해보려던 차, 사랑하는 사람이 목사의 아내 되기 원치 않으니 이 또한 좋은 싸인이라 여겨 결혼을 위해 장신대 도서관에서 입시 준비하던 책 싸 들고 나왔다.

그리하여 결혼하고 직장생활도 하고 대학원도 하나 하고 7년의 시간을 보냈다. 숨소리만 들어도 그의 행복과 불행을 알아차리게 된 즈음, ‘사랑하니까 헤어지는 거야’ 하는 심정으로 그를 신대원 기숙사로 떠나 보냈다. 대신 그가 당연하게 그렸던 광나루역의 장신대원(장로교신학대학원)이 아니라 천안의 고신(고려신학대학원)이었다. 나의 바람이었다. 당시 함께 다니던 교회가 고신교단이었고 나는 단지 남편의 진로 변경으로 인한 변화의 폭이 작기를 바랬다. 신학적 폭이야 남편의 연륜으로 충분히 품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현실은 예상과 달랐다. 무슨 계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여성 안수’ 문제를 놓고 남편은 그야말로 1:17로 싸우는 막다른 골목에 선 적이 있다. 여성 안수 불가를 주장하던 분들이 당시 싸이 클럽에서 쓴 표현들을 나는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여성 목사를 꿈도 꿔본 적이 없지만 그때 본 글들로 인한 상처는 쉬 아물것 같지 않다. 나이도 많고 웬만큼 인격도 되던 남편은 동기들의 신뢰도 얻었던 것 같은데 그 시절만큼은 외톨이가 되었다. 형 그럴 거면 장신대로 가시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는 날에는 내가 나를 얼마나 미워 했는지 모른다. 늦게 신대원 가는 것이 무슨 대역죄처럼 내 말을 넙죽 수용해준 남편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그때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외롭고 슬픈 남편의 표정을 보았다. 그럼에도 남편은 감정에 빠지지 않고 공부만큼은 열심히 했다. 어떤 경우에도 사모의 역할을 강요하진 않겠으나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 내게 있단 걸 미안해 했고 두 아이의 아빠로서도 그러했던 것 같다. 가족을 두고 온 신대원에서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미안할수록, 슬플수록, 외로울수록 공부에 매달렸다. 그 시절 남편을 붙든 영적인 스승님이 박영돈 교수님이시다. 강의는 물론 그분의 삶과 일상의 고뇌를 통한 가르침이 그 보수적이고 경직된 신대원 생활에서 버팀목이었던 것 같다. 박 교수님의 연구조교를 하면서 교수님의 책 출간을 돕기 위해 혼자 이리저리 얼마나 고군분투 했는지 모른다. 교수님의 첫 책 <성령충만 실패한 자들을 위한 은혜>에는 남편의 남모르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나 역시 남편으로 인해, 또는 그저 한 독자이며 페북 팔로우어로서 박 교수님을 존경한다. (존경하다 실망한 지도자들로 인한 상처로 다시는 유명하신 분께 쓰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박영돈 교수님은 여전히 존경한다. 그분의 책이나 페북 글이 아니라 아주 작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알기에 그렇다.) 이번 주말에 박영돈 교수님께서 우리 교회 사경회 강사로 오신다. 이런 기나긴 이야기를 떠올릴 때 감회가 남다르다. 교수님은 잘 모르실 것이다. 늦게 목회자의 길을 걸으며 흔들리고 고독한 제자에게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신지, 그 목회자의 아내에게 얼마나 감사한 존재이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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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를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송구영신 예배 설교 중에 인용된 시이다. '이삭의 우물'이란 교회 이름에 담긴 의미를 발견하는 대목이었다. 여러 번 파고 빼앗긴 이삭의 우물 중 하나의 이름이 '르호봇'이다. '숨 쉴 공간'으로 교회라고 한다. 비록 빼앗김의 상처로 시작된 교회이지만 빼앗긴 상처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의 지경을 넓혀 누군가에게 숨 쉴 공간이 되어주자는 것이다. 목자의 옷을 입은 종교인에게 상처 받은 이들이 속출하고 있는 시대, 앞선 경험자로 서서 누군가에게 숨 쉴 공간이 되어주자고 한다. 


헨리 나우웬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상처 입은 치유자. 상처 받은 사람은 흔히 가시옷을 입은 사람으로 비유된다. 다시  상처 받는 것이 두려워서 지레 자기방어의 옷을 입는다. 십자가를 통과한 고통은 더는 가시가 될 수 없다. 치유의 인자가 된다. 예수님처럼, 헨리 나우웬처럼.


<영적 발돋움>에서 헨리 나우웬은 관계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적대감에서 환대'로의 변화라고 했다. 나를 만족시키고, 내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존재로 타자를 바라볼 때는 적대감과 냉대이다. 영적으로 깨어난 자의 관계는 '환대'이다. 의심과 적대감에서 '환대'로 극단적 입장 전환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게 온 단 한 사람이 실로 어마어마한 것을 끌고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라는 것.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보이는 것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그 마음을 아주 조금이라도 헤아려 보려는 것이 '환대'라고 시인의 입을 빌어 설교가 말했다.


2017년 마지막 날에는 [커피&메시지]라는 이름으로 메시지 성경 읽기를 함께 했던 청년들이 집에 왔다. 그들은 어마어마한 것을 끌고 내 앞에 온 것이다. 2017년은 어마어마한 인생을 끌고 새롭게 내 앞에 선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상징 아닌 실제 한 사람이 2017년 마지막 주일에 자기의 인생을 끌고 내게 왔다. 내 글을 읽고, 내 영상을 보고 내 교회를 찾아왔다. 나를 찾아 나의 공간으로 왔다. 그냥 나를 믿어줌으로, 찾아왔다. 이것에 내게는 더 없는 위로이며 환대였다. 그리고 그와 마주하여 그가 끌고온 인생 이야기를 들으며, 그를 토닥토닥 하는 것이 동시에 나를 토닥이는 것이 된다.


헨리 나우웬을 읽으면서 늘 언감생심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또는 적대감 대신 환대하는 사람이 되는 것 말이다. 다만, 지향할 곳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여전히 내가 될 수 있다 생각하진 않는다. 가만 두면 나는 나의 빼앗긴 것에 몰두하여 자기연민의 속옷을 입고 가시 겉옷을 입은 채로 일상을 서성거리기 일쑤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은 안다. 부서지기 쉬운 마음을 헤아리는 것, 그것이 환대라면 환대는 '생각'만으로 되지 않는다.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그와 얼굴을 맞대야 비로소 마음을 더듬을 눈을 얻게 된다. 커피 한 잔, 떡볶이 한 그릇이라도 놓고 마주 앉아 얼굴과 얼굴을 맞대야 한다. 


나는 빼앗긴 것이 많아서 모두 되찾기가지 수없는 날 눈물로 기도 해야겠지만

나는 가진 어둠이 많아서 모두 버리기까지 수없는 아쉬움 내 마음 아프겠지만


하덕규의 <푸른 애벌레의 꿈>의 가사 일부이다. 환대 받고자 함이 아니라 환대 하고자 하고, 누군가에게 숨 쉴 공간이 되어주자 마음 먹고 보니 나의 처지는 저러하다. 빼앗긴 것에의 서러움, 이미 가진 어둠이 그득하다. 그럼에도 사랑과 생명의 숨은 이미 내게 부어져 있음을 알고 있다. 아쉬움과 어둠이 온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지금 여기서 가능함을 알고 있다. 한 사람, 어마어마한 것을 끌고 온 사람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고, 마음을 헤아리려는 경외심으로 가다듬는 한 나는 자유이고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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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교회 2017년 성탄절은 '선물'이다. 찬양으로 드린 성탄예배의 주제가 '선물'이었다. 조건 없이, 되돌려 받겠다는 슬픈 헤아림 없이 기꺼이 거저 주는 것이 선물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그 선물(the Gift)로 오셨다. 짧은 설교 후의 기도에 여러 번 감동 받아 목사님을 협박하여 입수했다. (딸 신앙고백문, 아빠 설교 후 기도문으로 연일 글 장사 중)



주님, 주님께서는,
높고 높은 왕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낮은 여물통 위에 뉘이셨습니다.
영광스러운 아들의 권세 비우고,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되셨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낮추시고, 비천하고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주님,
처녀의 몸 안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기적의 본질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서 보잘것없는 마을, 이름없는 인생들을 당신의 거처로 삼으신 것이야말로 참된 기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얻고, 새로운 생명에 눈을 뜨게 된 것이야말로 참된 선물입니다.


주님, 이미 오셨고, 앞으로도 오실 줄 믿습니다.
또한 오늘도 지금도 오고 또 오시는 줄 믿습니다.
보잘것없는 사람들 속으로,
무시당하고 냄새나는 가난한 이들의 식탁 속으로
보금자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땀 흘려 일할 일터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권리를 상실한 유명하지 못한 을들 속으로,
뜨거운 불길과 화염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실의에 빠진 이들 속으로,
오늘도 지금도 오고 또 오시는 줄 믿습니다.


주님,
혼돈과 암흑의 시대를 가르고 한 줄기 큰 빛으로 이 땅에 임하실 때, 천군천사가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로다’ 노래했습니다.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진 분열과 분쟁의 도시 예루살렘이 이날은 모든 무기를 내려놓고 노래하게 하옵소서.
분노와 대립의 정치로 인해 집을 빼앗기고 정처없이 바다위를 떠다니는 난민들을 불쌍히 여겨서 평화의 마을에 안착하게 하옵소서.
아직도 완전한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 한반도 땅을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거짓 평화와 억눌린 계급사회 속에서 신앙의 자유를 향해 출애굽 노예들의 노래를 부르는 북녘의 고난받는 백성들의 기도를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밤낮 노동으로 고된 일상을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앙망하며 성령 안에서 새 힘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배제되고 빼앗기고 모함받고 조롱받았으나, 오늘도 목마른 마음으로 우물을 파는 우물지기들이 모였습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호모쑤마돈을 체험하는 성령의 공동체가 되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형제자매의 다름을 존중하고, 주님을 향한 각자의 생각을 신뢰하며, 다양한 목소리들이 저마다 빛을 내되, 성령님 안에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는 기적과 감동의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 소망 담아 드리는 오늘의 찬송을 기쁘게 받아 주시길 소망하며,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시며 더 큰 자유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중에 교회로 한 통의 성탄 선물 편지가 도착했다. 어떤 인연으로 교회에서 돕고 있는 북한 이주민 가족 이야기, 가장인 아빠가 쓴 편지이다. 여러 사연이 있고, 성탄 예배 설교 시간에 그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장 비천한 사람들 양치는 목자들에게 가장 소중한 선물이 도착했음을 천사들이 알렸다. 예수님의 탄생은 한 마디로 '비천' 그 자체이다. 가장 비천한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나 삶의 방향이 달라진 한 남자의 이야기가 편지에 담겨져 있다. 담안에서 온 편지이다.

몇 년째 성탄 오후에는 '고난받는 자들과 함께 드리는 성탄예배'에 가곤 했는데. 성탄절 저녁에 아빠가 아이들을 데리고 간 곳은 편지 속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는 엄마와 딸이 사는 곳이다. 선물을 들고. 다섯 살 아이가 좋아할 핑크색 케잌과 쌀 한 자루이다. 시골에 계시는 이모가 보내주신 쌀이다. 신산한 삶을 살아오신 이모가 '내가 살아 있을 때나 이렇게 보내지' 하며 어려운 형편에 보내주신 쌀이다. 이모의 선물이다. 선물이 오고 간다. 비천한 우리들 사이에 이렇듯 선물이 오고 간다.

갈까 말까 망설이다 다녀온 채윤이는 아주 흥분을 했다. 다섯 살 아이가 너무 예쁘고, 말도 잘하고. 잠깐 놀아주는데 참 좋았다고. 아이가 그린 그림을 선물로 받아왔다. 이번 성탄절에 받은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매주일 교우들이 돌아가며 준비한 반찬으로 식사를 하는데, 주일 밥 시간이 그렇게 기다려질 수가 없다. 일 년에 한 번 성탄절 점심 식사는 더욱 풍성하다. 불이 없어서 조리를 할 수 없는 주방이라 집에서 조리한 음식을 냄비 째로 양푼 째로 들고 들어오신다. 남 모르는 수고와 정성으로 맛을 낸 선물의 향연이다. 


나는 수십 년 만에 성탄절에 중창을 다 했다. 알토로 노래를 불러본 지가 언제던가. 어떻게 멤버를 만들다 보니 올해 내게 큰 위로를 준 선물 같은 사람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성탄 찬양 중 백미로 치는 곡. 그 중에도 가장 사랑하는 가사 '진리는 오묘하고 사랑은 성결해' 부분을 솔로로 부르는 영광까지. 선물이 되는 삶, 그 오묘하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부르신다. 


귀중한 보배합을 주 앞에 드리고 우리의 몸과 맘도 다함께 바치세

진리는 오묘하고 사랑은 성결해 주께서 탄생하신 거룩한 날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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