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미용실이 하나 새로 생겼다. 내 또래의 말이 없는 여자분이  미용사인데 솜씨가 그럭저럭 괜찮다. 현승이 한 번 가고, 이후에 남편도 그곳으로 보내고 있다. 앞을 지날 때마다 들여다보게 되는데 거의 손님이 없다. 미용사분 혼자 조그만 난로 가까이에 손을 대고 불을 쬐며 TV를 보는 모습이 늘 똑같다. 아효, 오늘도 손님이 없네. 걱정을 하면 아이들이 엄마는 왜 그리 남의 집 장사에 신경을 써? 한다. 머리 잘 자르는데 장사 안 되서 문 닫을까봐 그러지. 라고 대답하고 만다.


그 옆에는 여름엔가 봄인가 오픈을 한 카페가 있다. 훈남 청년이 하는 건데 손쉽게 원두를 살 수 있어서 좋다. 블랜딩한 원두가 꽤 맛있었는데... 갈수록 조금 아니다 싶다. 동네 카페들과 달리 특별히 로스팅을 잘 하는 곳에서 원두를 받아온다고 했었다. 장사가 잘 안 되니까 단가가 낮은 원두로 바꾼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도 지날 때마다 들여다보게 되는 건 마찬가지다. 여름엔 장사가 좀 되더니 날이 추워지니 손님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왜 이리 신경을 쓰고 그래? 엄마~아! 하는 아이들에게 '생각을 해 봐. 사람들이 장사를 할 때는 준비도 많이 하고 돈도 많이 쓰며 시작한다구. 어쩌면 돈을 은행에서 빌렸을 지도 모르고, 가진 돈을 다 썼을 지도 몰라. 그러면서 얼마나 기대를 했겠어? 그런데 막상 손님은 없고 매일 저렇게 앉아 있으려면 정말 속상하겠잖아. 그러다 정말 문을 닫기라도 하면 희망이 무너지지 않겠냐? 그런 게 마음이 아파서 그래. 엄마도 카페 하고 싶어 하잖아. 엄마가 저렇게 되면 어떻게 하겠니? 마음이 아파.



그러다보니 아이들도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서 '엄마, 미용실에 사람 하나 있더라.' 하며 (지들이 되려) 신경을 쓰고 그런다. 지난 12월 28일. 채윤이는 그 미용실에서 방학 기념 매직 퍼머를 했다. 점심 때를 넘기고 있었다. 카페에서 라떼 한 잔과 코코아 한 잔을 사서 가져다 주었다. 괜히 뿌듯해진다. 늘 마음에 쓰이던 양쪽 집을 한 번에 챙긴 느낌. 그리고 채윤이를 미용실에 두고 현승이 손을 잡고 시청 앞 광장으로 향했다. 



 

별다른 일도 없고, 무력하고, 슬픈 성탄절을 보내고 난 후였다. 성탄절 이브에는 집에서 혼자 따뜻한 전기장판 켜고 낮잠을 잤다. 25일 성탄 예배에 가서는 정말 영혼의 잠을 자고만 싶었다. 이렇게 등 따시고 배부른 내가 더럽고 천한 마굿간에 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맞고 모실 수 있을까? 페북을 통해서 접하는 이웃의 탄식은 하늘에 닿아 있는데 참된 '안녕'은 천국에가 가야 이뤄지는 것, 여기서 아둥바둥 할 게 뭐 있냐며 그저 내 일신의 안위만 붙들고 사는 하루하루다. 무력해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느낌으로 잠이나 처자고 싶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28일 시청 앞 집회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한 번 나가자 나가자 하면서도 남편 시간이 날 때를 기다린다는 핑계를 붙들고 있었는데 그저 가기로 했다. 하필 이 날은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잡혀가면 어떡하냐, 물대포 쏘면 어떡하냐며 엄마 가지마 가지마 하는 현승이를 설득해서 손잡고 나갔다. 얼마 전 새로 사귄 형아를 만날 수 있다고 꼬셨다. 시청역 출구에서부터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잠시 일행을 잃고, 추위에 동동거리고.... 그러다 빠져나와 일행과 함께 코코아 한 잔 하고 돌아온 것이 전부이다.

 

 


 

 


현승이가 '나는 안 갈 거야. 엄마도 가지 마. 잡혀가면 어떡해?' 라며 걱정에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채윤이가 그랬다. '현승아, 엄마랑 같이 가. 안 잡혀가. 그리고 가면 재밌어. 누나도 깁스만 안 했으면 가고 싶어.' 현승이가 겁이 많고 기질적으로 새로운 자극에 대해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탓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문득 채윤이랑 했던 2004년 광화문 촛불집회가 생각났다. 채윤인 그 경험을 아주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것 역시 채윤이 기질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그때와 다르다. 2004년의 광화문에는 기가 막히는 적반하장에 어이없는 한숨은 있었지만 이렇게나 절망적이지 않았다. 수십 년 뒤로 물러난
민주주의 시계를 감지하면 삼엄함에 압도될 수 밖에 없다.

 

 


2002년은 현승이를 가진 해이다. 돌이켜보니 현승이를 품고 민주당 경선을 지켜보며 인생에서 흔히 경험할 수 없는 감동과 희망을 경험했다. 임산부의 몸으로 한 끼 금식기도를 하기도 했다. 문성근씨의 연설을 들으며 남편과 함께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대선 당일, TV가 없어서 친구 집에서 대선 개표방송을 보고 당선 확정 결과를 보고 집에 돌아오는 길. 추운 겨울 춥지가 않았다. 세 살 우리 채윤이가 앞서서 춤추며 걸어갔다. 내 마음도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말을 알아듣을 만큼 커서 그 시절을 보낸 채윤이에겐 시위도 즐거운 축제가 될 수 있었으니 '현승아, 괜찮아. 가. 가면 재밌어.'라고 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끔 현승이가 가진 좋은 성품에 깜짝 놀라 때가 있다. 어쩌면 이렇게 마음결이 고울까? 특별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2002년 대선과 함께 한 그 드라마 같은 경험이 정말 좋은 태교가 되었겠다. 그랬겠다. 시편의 기자가 그렇게나 목놓아 하나님께 울부짖는 것이 왜 악인이 잘 되고 의인이 고통받습니까? 정의가 어디 있습니까? 정직한 사람은 왜 늘 약자이고 폭압 아래 있어야 합니까? 어찌 악인은 높아지고 승리합니까? 이다. 몇 천 년 후를 사는 나 역시 그렇게 하나님께 묻고 싶다. 그런데 2002 그때. 힘없고 빽없고 정직한 정의가 이길 수 있구나를 경험한 것이다. 그 기막힌 경험을 하는 엄마의 몸 속에서 나온 좋은 에너지가 어찌 현승이 성품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동생이 살고 있는 집이 매매가 되어 본의 아니게 이사를 해야할 상황이었다. 우리집 역시 계약기간이 끝나서 대출이 늘어나는 것으로 결론이 난지 얼마 안 됐다. 엄마랑 동생네 걱정을 하며 얘기하다 "엄마, 우리 나라에서 집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성실하게
절약하고 착하게 살아도 2년만 지나면 그냥 빚이 늘어'나. 그런 세상이야." 했더니 공감을 하시며 "그르니께 애들 잘 켜(키워), 공부 잘 혀서 성공허라고 혀." 라고 하셨다. 90 노모 앞에 무슨 말 할 수 있을까. 헛웃음을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


두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 안녕이라는 고지를 점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 오시기 전까지 안녕하지 못할 이 세상에서 안녕하지 못한 자리를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사람으로 말이다. 무엇보다  천국을 진짜로 믿고 사는 사람, 하필 가장 더럽고 천한 마굿간으로 오셨다 가신 예수님을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고 따라가는 사람. 이웃의 안녕하지 못함을 담보한 나의 안녕과 부와 힘은 허상일 뿐인 샬롬이다. 앞으로도 할 수 있다면 더 자주 아이들과 함께 현장에 가려고 한다. 이 아이들에게만은 더 좋은 세상을 물려줘야 한다거나,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서도 아니다. 역사가 지속되는 한 늘 안녕하지 못할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를 가르쳐주고 싶다. 안녕하지 못한 이웃의 곁,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자리가 예수님 자리 아닌가.


결코 따로 떨어진 문제가 아닌 동네 미용실과 카페와 동생네와 우리네의 불안한 일상. 내 이웃의 안녕과 우리의 불안한 일상. 때로 기막힌 절망의 일상. 마라나타를 저절로 되뇌이게 되지만 그 주님이 이미 이 낮고 가난하고 빽 없는 사람들에게로 오셨었다. 그 자리를 애써 피하지 말고 내가 살면 되는 것이다. 그렇긴 한데..... 참으로 절절한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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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보다 세심한 편이 아니라서 때에 맞는 인사 챙기는 걸 하지 못합니다.
오늘은 하고 싶네요.^^


블로그에 찾아주시는 분들께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블로그로 인한 귀한 만남들이 많았습니다.
올해는 유난히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일상의 시덥잖은 얘기들을 끄적거리는데 찾아와 읽어주시고,
웃어주시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이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숨어계신 (하나님 아니고) 블로그 친구들이 꽤 계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글을 올리고 댓글 하나 달리지 않아도 마음이 따뜻합니다.
보이지 않는 댓글들을 저는 보니까요.^^


무엇보다 여기는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니까요.
드러낸 제 일상과 마음에 대해 공격도 없고,
방어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오랜 세월 확인했지요.
오늘의 저를 있게 한 것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2000 포스팅이 되는 이 블로그의 기록인 것 같아요. 단지 기록만 있는 것이 아니라 따스한 분들과의 만남이 있었기에 말이지요.
늘 감사했지만 올해 더욱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보이지 않는 댓글이 보이듯 눈팅만 하고 가시는 얼굴도 모르는 여러분의 마음까지
따스함으로 읽어버리겠습니다.
송구영신의 시간, 의미있고 재미있게 보내시고.
날이 갈수록 더욱 안전한 곳에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길요.
여러분으로 인해 여러분 주변이 더욱 안전한 곳이 되기를요.


사진은 올해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입니다.
태평양을 건너가 강의를 하고, 시카고 거리를 누비고 다녔던 시간입니다.
늘 그러하듯,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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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의 감옥에 갇혀 어둠의 시간을 보낼 때,
힘들지만 얼마나 고귀한 일인지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는 것보다,
아이의 눈이 얼마나 천사같으냐며 생의 아름다움을 찾는 것보다,
빵터지는 웃음으로 힘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하는 실수 같은 것들에 그저 한 번 웃는 것 말이죠.
유머가 육아에 찌든 엄마를 가끔씩 구원하지요.
아이처럼 귀여운 구석은 없으면서 손이 가기로는 아이 못지 않은 노모.
노모를 모시는 우리 올케 선영이는 유머를 건져올리는 눈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좀 덜 미안해지고, 무엇보다 고맙고 그렇지요.
올케가 페북에 올린 엄마 이야기 옮겨왔습니다.

 

 


3대 거짓말 하면,

처녀가 시집 안 간다는 말.
노인이 빨리 죽어야지 하는 말.
장사하는 사람이 밑지고 판다는 말.

어머니가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다.
"빨리 죽어야지."
"내가 오래 살아서 니들이 고상(고생)이 많다."

지난 달, 내가 어머니 가을이불에서 겨울 솜이불로 바꿔 드리려고 작업을 하고 있으니까,
"야야, 허지마라. 나 얼마 못 산다니께. 겨울까지 안 가."

좀전에 우현이가 발로 찬 탱탱볼이 방 문을 열고 나오시는 어머니 몸에 맞았다.

(깜짝 놀라서 버럭하시며)
"이 놈아~ 나 죽을 뻔 봤잖여. 나 죽으면 어떻게 헐라고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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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고부간 이야기로 썰을 푼다해도 그다지 빠지진 않는다
.
보통의 며느리들이 겪은 '완전 어이 없는' 에피소드도 있고,
보통보다 센 쩌는 에피소드도 있다.


특별한 고부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어머님이 나를 며느리 이상으로 생각하시고,
나 역시 단지 시어머니로 어머니를 대해 오지는 않았다.
한 사람을 사랑하겠다는 결심 하나로 오랜 시간 어머니와 관계 맺어왔다.
그러나 사랑이 늘 그렇듯 껌씹으면서 대충 해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더 많이 사랑할수록 아픈 것이기 때문에,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사랑이 늘 그렇듯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변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하기로 결심한 나 스스로에게 '자아확장'을 요구해야 하는 일이다. 
어머니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보아야했다.
두려움으로 했던 일들을 사랑이라 우기는 나 자신을 보았다.
내 몸 불사르도록 내어준다해도
사랑이 없으면 결국 '번 아웃' 되어 나가 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보통의 고부간에 머물기보다 특별한 고부간으로 지내온 편이다.
'두려움'과 '자기의'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날이 많았지만 어머니를 사랑했다.
내 사랑이 어머니를 구할 줄 알고 애쓰고 노력했지만
결코 어머니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많이 좌절했다. 포기했다.


오늘 성탄절.
저녁식사 준비를 해서 어머니 댁에 다녀왔다.
어머닌 여전히 그러하시다.
외로움과 오래된 분노로 긴장된 그런 모습이다.

식사를 마치고 "내가 요즘 이걸 여러 번 읽고 외운다." 하시며 성경구절 하나를 꺼내셨다.
어머니의 상처 많은 과거를 돌아보나 지금을 떠올리나
이보다 더 적절한 말씀이 없는 듯하다. 
사실 어머님이 이 말씀을 가슴으로 알아들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피정도, 상담도 모시고 다녔다.
물론 크고 작은 신경과와 통증 클리닉, 한의원을 전전하던 시간은 더 길었었다. 
상담까지 모시고 가서는 "이젠 됐다. 답을 찾았다!" 했을 때, 그때 어머니가 돌아서셨다. 
내가 애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나 역시 손을 놓았었다.



"전에 성경 읽을 때는 보이지도 않았던 말씀인데 이게 이렇게 눈에 들어오냐."

하시는데 속에서 울컹울컹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가 잉태되시는 그때부터 노인이 되신 지금까지 안고 업고 계신다니까요.
그래요. 어머니. 그렇다니까요.


어머님도 어머님 방식대로 여전히 자라고 계신다.

어머님 방식대로 당신의 하나님을 만나가고 계시며,
그분의 사랑을 배워가고 계신다.
어머님도,
또 나도,
그도,
그녀도,
각자 나름대로 사랑의 여정을 걷고 있다.
진정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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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볕 / 박노해


가을볕이 너무 좋아

고추를 따서 말린다.

흙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높푸른 하늘에 내걸린 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며 눈부시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난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






어제 가을볕에 좋은 분들과 하루 종일 산길, 강둑, 들길을 걸었습니다.
오래 묵은 마음의 돌멩이들이 사라진 느낌으로 기분 좋은 아침입니다. 

마음껏 까불고 와서 그런지 뭔가 불편한 것들을 덜어낸 느낌으로 마음이 가볍습니다.
좋은 분들,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진은 위는 김종필님, 아래는 김동원선생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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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북한 방문기 제목이 <사람이 살고 있었네>였다. 어떤 곳이라도 그곳이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일단 안심이다. 헌데 요즘은 밤길에 제일 무서운 것이 사람이니, '사람'이라고 다 내게 '사람'이 아니기도 한 것이다. 코스타를 통해서 내게 와 의미가 된, 그 의미가 더욱 새로와진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 두드리는 변죽이다.


페이스북에서 사진으로 몇 번 봤던 이수진 씨다. 황병구 본부장님의 부인이다. <와우 결혼>의 추천사를 부부가 함께 써 준 인연으로 페이스북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이 분이 코스타에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출국 비행기도 같았다. 어릴 적 같지 않고 많이 까다로워지고 편협해져서 계속 갈 사람, 여기서 보면 됐고! 할 사람이 금방 알아차려 진다. 도착한 날 저녁 시간부터 오랜 친구처럼 얘기가 통하는 게 감이 참 좋았다. 언젠가부터 내 또래 아줌마를 만나서 사는 얘기, 애들 키우는 얘기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줌마들 얘기를 주로 지켜보는 방식이고, 가끔 '너는 어떠냐?'하고 물어서 내 얘기를 조금만 꺼내도 '참 이상한 아줌마다' 하는 눈빛이 돌아오기가 일쑤라서 말이다. 이 아줌마도 어디 가면 나 같겠구나. 싶어서 한 번에 깊은 마음속 문까지 열렸나 보다.


보기보다 낯을 많이 가려서 강사들과 덥석덥석 인사하고 말을 걸지도 못했으니 수진 씨 아니었으면 꽤 외로웠을 뻔했다. 후반으로 갈수록 상담으로 바빠져서 긴 수다를 떨지 못했어도 어느새 '언니 동생' 되어 오래 사귀어 온 사람처럼 편안해졌다. 이 어여쁜 아줌마에 관한 이야기는 다시 만나 나눌 얘기도 많고, 블로그에 풀어놓을 썰도 많다.
 

 

 

애써 거부하지도 않으려고 한다. 한영교회를 떠나오면서 남편이 청년들에게 그랬다. '될 수 있으면 1년 동안은 연락하지 말아라. 새로운 목사님과 좋은 관계 만들고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다시 연락해라' 나 역시 한영교회 아이들과는 정을 떼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이나 나나 그렇게 가슴을 열고 만나는 사람들이 있었을까 싶다. 3년간의 목회자가 아니라 오랜 선배이고 큰오빠 큰언니 정체성이 그들과 우리 사이에 있었지 않나 싶다. 애써 찾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연스러운 만남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보고 싶을 때 찾아오면 만나고, 말 못 할 고민이 있어 연락이 반갑게 맞는다. 그런 의미에서 TNTer들과의 사랑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어떤 사랑이 물리적인 거리로 끊어질 수 있단 말인가.

1년간 어학연수를 가 있는 정윤이가 코스타에 참석했다. 1,000여 명의 사람들 중에서 그의 지난날을 아는 사람을 만나는 기쁨이란! 오가며 캠퍼스에서 자주 마주치는 정윤이는 익숙함이란 느낌을 일깨워 주었다. 익숙함이란 안정감이며 편안한 느낌이 아니겠나. 일정을 다 마치고 휘튼 캠퍼스 안에 있는 빌리그래엄 홀에 들러 찍은 사진이다.  

 

 

엘리트 신학생과 꿈이 아름답고 드높은 간호사였다. 이들을 처음 만났던 때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남편이 신대원에 들어가서 만난 마음 맞는 동생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일곱 살, 네 살 때였으니 지금 이들 부부의 아이들인 하린이 한결이와 엇비슷할 때이다. 강 목사님은 나랑 비슷한 점이 많아서 잃었던 누나를 찾은 것 아니냐며 농담을 했던 적도 있다. 코스타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휘튼으로 달려와 주었다. 아, 맞다. 내가 페이스북을 가입한 이유가 저 아기, 미국으로 건너간 한결이를 보기 위해서였다. 어느새 많이 자랐다.

 

 

감정 표현에 인색한 남편이 칭찬해 마지 않는 후배가 전지성 강도사님이다. 정말 좋은 목회자가 될 것이라며 아주 그냥 대놓고 이뻐라 하신다. 울보 은혜 역시 우리 부부에게는 귀한 사람이다. 그 멀리 미국에 가서 이들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니. 게다가 돌쟁이 은슬이, 하드웨어는 엄마 소프트웨어는 아빠인 은슬이라 이틀 밤을 지내면서 꿈같은 시간이었다. 

 

 

반 하루를 함께 지내는 동안 생활 속 찍사인 승주사모님이 연실 사진을 찍었다. 찰칵찰칵, 난생처음 미국에 와 흔적을 많이 남기고픈 내게 고맙고 위로가 되는 소리였다. (대접받고 싶은 마음이 늘 충천하지만) 그것을 가장하기 위해서 먼저 대접하는데 익숙하고, (실은 찍히고 싶지만) 찍어주는 것으로 그 마음을 대신하는 내게는 이 부부들의 환대가 또 다른 새로운 기쁨이었다.

 

 

시카고 한복판에서 두 시간 남짓 기다려서 유명하다는 지오다노 피자를 먹었다. 사실 그 시간이 그리 힘들지가 않았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거기 함께 있다는 것이 내내 믿어지지 않아서 현실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인 듯. 이 모든 만남이 종합선물 세트처럼 내게 안겨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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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을 지내고 부활주일을 지내면,
오락가락 하던 봄이 제대로 완연해지며 푸르름이 본격적으로 펼쳐질 때면
한솔이의 계절입니다.
어느덧 2주기를 맞이하며 한솔이 나무가 있는 정읍을 다녀옵니다.




작년 태풍에 한솔이를 닮은 잘 생긴 소나무가 쓰러졌습니다.
한솔이가 쓰러져 떠난 것에 비하면 아무 일도 아니지만 장로님과 권사님 걱정에 
철렁 마음이 내려 앉았었습니다.

한솔이가 거기로 가야할 이유가 그 나무였을텐데 그 나무가 쓰러졌다니....
정읍의 그 곳이 상상이 되질 않았습니다.
헌데, 한솔이가 웃고 있는 사진이 담긴 비석이 세워져 반겨주니 생각지 못한 반가움이었습니다.




한솔이와는 한 치 건너 두 치의 사이로 그리 많은 것을 나눈 기억이 없습니다.
아파서 힘들 때도 가까이 다가가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했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절절해지는 것 같습니다.
조금 휑했던 웃는 한솔이 얼굴 앞에 꽃을 둘러 심습니다.




실은 한솔이가 누구도 아닌 내 마음에 남긴 흔적이 있습니다.
오랜 영적 방황으로 흔들리던 내게,
기도에 길을 잃고 헤매던 때 나를 내려놓고 기도하게 했었고,
인간이 한계 지어놓은 '기도의 응답'의 실체를 보게 했고,
기도 너머의 신비, 삶을 넘어선 죽음에 대한 새로운 눈을 열어주고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것들에 대한 묵상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오랜 고민 끝에 남보다 늦은 나이에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그의 사역은  한솔이를 아프게 품고 시작하였습니다.
한솔이의 마지막 3년을 함께 하며, 사랑과 복음을 다시 배우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 무력하게 한솔이를 떠나보낼 즈음 아버님 또한 죽음에 빼앗겼습니다.
또 그 즈음 존경하던 이정석목사님께서 끝까지 암에 항거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며 천국을 향해 가신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압니다.
그의 인생에, 그의 목회에 '죽음을 짊어진 삶' 에 대한 트라우마가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지를요.
그 트라우마는 끝이 아니라 복음을 든 그에게 주어진 새로운 숙제라는 것을 또한 압니다.





오고 가는 긴 시간 동안 뒷좌석에 앉아 계속 돌직구 날려주는 영애 덕에 즐거웠습니다.
영애, 하면 착한 애로 통하고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로 알려져 있지만
알고보면 돌직구 여왕인 이 아이를 나는 많이 좋아합니다.
야곱의 축복, 이삭의 축복, 야베스의 축복.... 모두 다 동원해서 축복하고 싶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이런 제자 하나를 남겼다는 것은 내게 참 축복입니다.
지금 여기에 함께 하고 있는 이 사람들, 이 사랑들이 삶의 이유입니다.





'생명의 샘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가운데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죽음을 짊어진 삶, 하루하루 죽음에 더 가까이 가는 '작은 죽음'을 등에 지고 사는 우리들이지만
생명의 샘이 주께 있기에 가장 큰 절망 속에서도 빛을 향한 지향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언젠가 함께 만나 저렇게 환하게 웃을 날일 있을 것을 알기에.



 

1년이 또 다시 금방 지났고,
그 사이 한솔이 나무가 쓰러졌지만
정말 소중한 것들은 의미없이 스쳐 지나가지도 않았고 쓰러져 말라버리지도 않았습니다.
지나가고 스러지는 것들이 여전히 많겠지만
그 빛은, 그 생명의 샘물은 영원에 가 닿아 있음을 압니다.
다시 1년 후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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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잎


가까이 보아야 예쁘다. 

자세히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음악치료를 하러 가는
어느 초등학교에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 중에 키 크고,
반달 눈웃음을 지으며,
노래를 엄청 못하고,
좀비놀이를 즐기고,
순한 6학년 애제자가 있다.


교실에 들어갔더니 이 녀석이 눈이 벌개가지고 목에는 상처가 난 채로 앉아 있었다.
싸울 애가 아닌데 싸웠단다. 1학년 동생들이 팔을 붙들고 늘어지고 매달려서 귀찮아도 다칠까봐 힘으로 탁 떼내지 못하는  착한 형아다.
어떤 녀석들이 장애인 이라고 놀렸단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고 가슴이 아파서 수습이 잘 되지 않았다. 흔하지 않지만 가끔 있는 일이다. '통합'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 하에 이 아이들이 제일 많이 다치는 일이 이것이다.


예전 어느 학교에서 학교 주차장 근처에서 바로 그 장면을 목격했다. 놀리던 녀석을 벽에 붙여 놓고 주먹을 바들바들 떨면서 협박을 했다. 너 한 번만 더 이 딴 짓 해봐! 교육을 한 것이 아니고 협박을 했다. 협박 이후에 생전 해보지도 않은 욕을 내뱉을 뻔 했었다. 이성을 잠시 잃었던 것 같아 남편한테도 이 얘기를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여전히 이런 일을 보면 순간적으로 치올라오는 분노를 어쩔 수가 없다.
목에 대일밴드 까지 붙이고 힘없이 앉아 있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모르겠었다. 치료 시작을 위해서 헬로송을 불러야하는데 바로 노래를 시작하면 목이 메일 것 같고,
그저 가서 이 녀석을 꼭 안아줬으면 싶은데 담임 선생님도 옆에 있는데 내가 그러는 건 오버고.


이런 저런 이유들로 바로 그 아픔을 치료 중에 다루지도 못하고 세션을 끝내고 돌아왔다.


가까이 보고, 자세히 볼수록 더 사랑스러운 아이들인데 내 사랑은 저 아픔을 싸매줄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부끄럽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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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부를 졸업하면서
가장 슬펐던 건 정신실 선생님과 헤어지는 거 였던것 같다.
그런 마음을 아셨는지 초등부를 졸업한 우리들을
선생님 댁으로 초대해 주셨다.
직접 피자도 만들어주시고 게임도 하며
한 마디로 엠티를 다녀온 셈이다!!ㅎㅎㅎ

중등부에 올라가서
중등부 선생님과 친하면
정신실선생님을 배신하는 느낌이여서 그랬는지
엄청? 싫어했다...ㅠㅠㅋㅋㅋ

그리고 가장 부끄러운 건 선생님 결혼식날
초등부도 아닌 중등부가 껴서
축가를 하는데
맨 뒤에서 결혼식 내내 펑펑 울었다....ㅋㅋㅋㅋㅋㅋㅋ
(나 뿐 아니라 우리 친구들 모두)
왠지 도사님한테 뺏기는 기분??ㅋㅋㅋ
암튼 그 때 생각하면 완전 웃긴다!

이 일기 또한 현실로 이루어졌다.
어른이 되어도 정신실선생님을 잊지 않고
계속 괴롭히고 있다는 거!!ㅎㅎㅎ
선생님 사랑해요~~♡♡
(손발 오글오글)
왠지 초딩 일기같다!!ㅋㅋ


출처 : 이영애의 싸이 다이어리


♡ ♥ ♡ ♥ ♡ ♥ ♡ ♥ ♡ ♥ ♡ ♥ ♡



영애가 방정리를 하면서 초딩 일기장을 발견했다며 어느 날의 일기를 싸이 다이어리에 공개하였다. 삶이 개그인 영애가 어렸을 때는 안그랬던 걸로 기억하는데 '깨는 영애'는 그 때도 그랬구나. 초등부를 졸업하고 중등부로 올라가면서 우리집에 데려와서 하루 같이 자고 놀았었나본데....  마지막 문장을 빼면 흔하디 흔한 초딩들의 일기구성이렷다.
아놔~ 근데 마지막 문장.
정신실선생님!! 화이팅!!!ㅋㅋㅋㅋ


얘네들 지휘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머리가 허연 할머니가 되어서도 이런 아이들과 찬양을 하고 있으면 좋겠다.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
영애가 아직 노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영애의 바램은 이루어져서 아직 나를 괴롭히고 있는데.ㅋ
나는 그 좋아하던 지휘를 못하고 있네.


아무튼 오묘하고 감사한 일이다. 내년에 영애가 그 당시 내 나이가 된다고 하니 말이다. 그 때 그 아이들이 자라서 우리 아이들의 주일학교 선생님이 되고....^^


영애의 초딩일기 마지막 문장에 상당히 은혜를 받아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네. 그 감동으로 새로운 일기장에 옮겨 적어봤다.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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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 생활11년 만에 명절을 제끼고 집에 혼자 남았다.


외며느리야? 맏며느리지? 하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으며 며느리 역할에 혼신을 다해왔던 것 같다. 아, 난 외며느리도 맏며느리도 아닌 막내 며느리다.
명절에든 부모님 생신에든 집안의 대소사든 몸 사리지 않고 열심히 나름 즐겁게 몸을 던져왔다. 동기를 굳이 들쳐보자면 순수한 '사랑의 발로'도 없다 할 수 없고,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기 위한 몸부림도 적쟎이 작용했다고 본다.


한 10여년 애쓰고 힘쓰던 관계가 가족 중에 있는데 하룻 밤을 함께 지낼 자신이 유독 생기질 않았다. 틀어진 관계가 힘을 쓴다고 회복되는 게 아닌데 그간 내가 과하게 힘을 쓴 탓인 것 같다. 어떤 노력도 상대방에게 선의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좌절감에 좀 내려놓은 상태다. 착한 며느리, 착한 크리스챤 컴플렉스가 여전히 마음에서 시끄럽게 설교를 해댔지만 질끈 눈을 감고 내가 원하는 걸 하기로 결정했다.


실은 몸이 먼저 데모를 해댔다. 이유없이 배가 꼬이고, 계속 화장실에서 불러대고... 또 배가 꼬이고... 남편이 '스트레스썽 아니야?' 그렇게 화장실에 불려다니다 보니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졌고 더더욱 힘든 관계를 마주할 힘이 나질 않았다. 그러던 중....



# 티슈남 할아버지의 눈물의 티슈 한 장 #



몸의 상태에 대해서 물으시고 보고하느라 시댁과 계속 통화가 오갔다. 주일 밤에 전화가 왔는데 아버님께서 갑자기 민간요법 하나를 생각해내신 거였다. 그걸 먹으면 바로 화장실의 호출이 멎을 거라시면서 지금 달이고 있으니 내일 가져다주마 하셨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 전화벨이 또 울리고 현승이가 전화받았는데 '네? 할아버지가 우리집요? 지금요? 앗싸~아!' 하면서 '엄마, 할어버지가 지금 우리 집에 오신대. 버스타고 오신대' 한다.
날이 어두워지면 출입문 밖으로 좀처럼 나가시질 않는 분들이다. 방금 달인 민간처방약을 가져다 주시려고 그 밤에 버스를 타고 덕소에서 나오시는 거였다. ㅠㅠㅠㅠ 어떻게든 여행에 데려가 싶은 마음, 한편 순수하게 며느리의 건강을 걱정하시는 마음이 느껴져 찡하고 아팠다.


# 티슈남 할아버지 눈물의 티슈 두 장 #


어찌어찌 모두들 펜션으로 떠나고 집에 홀로 남았다. 비가 무섭게 내리고 날이 캄캄하니 마음이 한결 더 무거웠다. 그 때 휴대폰이 울리는데 원조 티슈남 아버님이시다. 부끄럽거나 쑥스러워지시면 말투가 더 퉁명스러워지시는 아버님이 '야!' 하시더니... '너 밥 먹었니? 그래, 우린 다 먹고 지금 치웠다. 애들도 많이 먹었어. 너 혼자 있다고 밥 굶으면 안 돼. 밥 챙겨 먹어라' 하시는데 콱 목이 메였다. 눈치 채신 아버님의 목소리도 살짝 떨리시더니 바로 '끊자' 하시며 서둘러 끊으셨다. 나... 티슈 한 장 뽑아들고 훌쩍훌쩍.


# 티슈남 할아버지 눈물의 티슈 세 장 #


오늘 아침 남편과 통화 중. '추석예배 드렸어. 주기도문 하고 마칠려고 하는데 아부지가 갑자기 어머니한테 작은 며느리 위해서 기도 한 번 하라고 하시대' 한다. 교회는 일요일이니까 가시고, 기도는 어머니랑 아들이 하니까 됐고, 예배는 무조건 짧아야 하고, 예수님은 자꾸 교회에 돈 갖고 오라고 해서 싫으신 아버님께서 먼저 '기도하라'는 제안을 하셨다니... 이거 티슈를 또 한 장 안 뽑을 수가 없는 일이다.
 





# 티슈남 손주의 대를 잇는 감동 #


며칠을 엄마가 아프다고 빌빌대고 있으니까 노심초사 하던 현승이가 며칠 전 저녁에 덥석 내 손을 잡더니 '엄마 내가 기도해줄께. 눈 감어' 한다. '하나님! 엄마가 꼐속께속 아파요. 엄마가 이렇게 아프니까 제가 마음이 너무 불편해요. 추석 때 펜션도 가야는데 엄마가 아파서 못갈 수도 있으니까 너무 마음이 불편해요. 엄마가 빨리 나아서 같이 갈 수 있게 해주세요'


그러니까 티슈손주의 불편함은 이거였다. 엄마를 혼자 집에 놔두고 갈 수가 없다. 왜냐? 누가 엄마를 잡아갈 것 같다. 엄마는 어른인데 뭘 그리 걱정을 하냐 괜찮다. 하니깐 어른이지만 여자 아니냐! 한다. 자기가 펜션에 안 가고 엄마를 지킬려고 하니 너무 가고 싶고, 엄마 혼자 있는 건 마음이 불편하다. 그러니 엄마 흑석동에 외할머니 댁에 가 있으면 안돼냐? 그러면 엄마랑 떨어져 있는 건 싫지만 걱정은 안된다. 이것이다.


하이튼 그런 식으로 며칠 간 엄마 손 잡고 기도해주는 아들의 지극한 효성은 이어졌고, 어제 출발 시에는 급기야 아빠의 기도 끝에 엄마의 가슴에 파묻혀 엉엉 울고 말았다는... 그렇게 모자는 눈물의 이별을 했다는....







감정형 할아버지와 감정형 손주의 따스한 마음 씀씀이로 티슈는 좀 많이 소비했지만 마음에는 대일밴드 하나 붙이게 된 2010년 추석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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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이름대신 색깔로 더 많이 불렸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 하늘나라 가신 지 1년여. 사진의 웃음 끝에 그 특유의 목소리가 들릴 듯합니다. 그립습니다.
이 포스팅은 그 분 돌아가시기 훨씬 전부터 기획된 것입니다. 그 분의 노년을 바라보던 어느 날  '아, 인생을 강직하게 올곧은 정직함으로으로 달려가는 자의 노년은 저렇게 아름다운 것이구나'를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이유있는 그 분의 아름다운 노년에 대해 연작물이 될 지 모를 글을 시작해봅니다. 


그 분의 노년은 견주어질 또 다른 노년이 하나 있어서 더욱 빛이 났습니다. 평생 '정치 라이벌'이라고 불렸지만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와 라이벌이 되려면 노벨 뭐라도 하나 받으시고 말씀하시지요. 가만히 계신 분을 제가 호명해서왈가왈부 하려고 하니, 뭐 그럼 제가 노벨상 하나 드리지요. YS께 드립니다 '노벨 머리 나쁘고, 컴플렉스 심한 상' 있다면 또는 '노벨 황당한 독설 내뿜기 상'이 입니다.


'노벨 독설상'을 수상하신 YS 전대통령님은 뉴스에 참 자주 등장하셨습니다. 등장하시는 족족 '독설'이셨지요. 그 독설이 후배 정치인을 향한 따끔한 일침이든, 나라를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이든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왜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는지는 고든 스미스의 <소명과 용기>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노년의 소명은 '권위와 주도권을 기꺼이 포기하고 지혜와 축복을 베푸는 일' 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노년이 되었다고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의 삶에서 책임있게 성장해온 사람들이 맺는 자연스러운 인생의 열매일지 모르지요.


그래서 그 분, 김대중 대통령의 뒤로 물러나 말없는 노년이 더더욱 빛이 났습니다.






이 글이 진즉에 씌여지지 못한 이유는 김대중 대통령님 서거 당시 저는 5월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아직 喪 중이었는데 또 다른 상을 마음으로 받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저 장면을 보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지금도 가슴이 저릿합니다.

그 경황 중에도 저는 걱정을 했더랬습니다. '건강이 안 좋으시다는데.... 혼신을 다해 이루어낸 민주주의가 뒤로 퇴보하는 걸 지켜보시며, 그러다 함께 민주국정을 이룬 동지의 안타까운 죽음을 보며 너무 많이 무너지시는 건 아닐까?' 하면서 말이지요.
아닌 게 아니라 몇 달이 못 가서 우리 곁을 떠나셨지요.ㅠㅠㅠㅠㅠㅠ


저는, 아니 우리는 눈물의 힘을 압니다.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해서 억지로 짜내는 눈물이 아니라 인간 마음 깊은 곳에서 어쩔 수 없이 흘러나와 넘치는 그 감정의 흔들림을요. 그 분의 노년은 권위와 통제의 힘을 내려놓고 언제든 울 수 있는 말랑말랑하고 유약한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아니,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는 그 분이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며 연설하는 투사로 새겨져 있을 지 모르나 그 분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울어야 할 때 우는 분이었나봅니다. 그럴 겁니다. 우리 안에는 강직함과 유약함, 곧음과 부드러움이 분명히 함께 공존하고 있을테니까요.


칼융은 심리유형론에 따른다면 MBTI 성격유형에서 자신의 유형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충실히 쓸 때 자신에겐 열등기능이었던 것들이 중년 이후에 자연스럽게 무의식에서부터 떠올라온다고요. 그러면서 노년에는 점점 통합된 인격으로 향해가는 것이겠지요.


어차피 비교하기 시작한 거 여기서 '노벨 독설상'에 빛나는 와이에스님에 대한 얘기를 더 해보죠. 정혜신의 <남자vs남자>에 의하면 와이에스님이 잘 사용하는 말 중 하나가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였다는군요. 가만보면 이 분의 '버르장머리 고쳐놓겠다'는 신념은 연세가 들수록 더 견고해지시는 것 같아요. 언론에 비쳐질 때마다 젊은시절 민주화운동으로 삶을 불태우시던 때보다 더 굳게 앙다문 입술, 경직된 표정, 입만 열면 독설.... 이런 것들로 유추해볼 때 그렇단 말씀입니다. '노벨 버르장머리상' 을 하나 더 추가해드리고 싶군요.







그 분의 <자서전>을 읽고나니 그 분의 노년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분의 인생 그대로습니다. 이 포스팅은 시리즈물입니다. 담아내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서 섣부른 시작을 못했고, 시작해보니 한 번에 끝낼 수가 없어서요. 그리고 정작 하고싶은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못했습니다.


여러가지 결론들은 미궁에 빠뜨려놓은 채 횡설수설하던 이 포스팅의 결론을 내겠습니다. 저는 저의 가장 닮고 싶은 노년의 모습의 상위권 랭킹으로 김대중대통령님을 올려놓습니다. 이제 중년에 접어들었지만 청년이었던 내가 소리 소문 없이 중년이 되었 듯 노년도 먼 이야기가 아니기에 지금부터 그렇게 살아보려고 합니다. 그 분의 자서전을 많이 곱씹어보려고 합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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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월, 지금 다니는 한영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다니던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새로 오시는 과정에서 지도자들의 거짓말에 상처받아 만신창이가 된 마음이었다. 곡절 끝에 집 가까이에 있는 한영교회로 교회를 옮기게 되었고, 초등부 교사를 하게 되었다.
전에 교회에서 어린이 성가대 지휘를 하면서 너무 행복했었기에 몇 달을 '한영교회에서 성가대를 만들어 다시 한 번만 지휘할 수 있다면....' 하며 기다리고 기대하며 보냈다. 역시 곡절 끝에 성가대를 조직했고, 어린이 성가대 아이들과 함께 내 생애 잊지 못할 행복한 순간들이 갱신되고 또 갱신되는 경험을 했다.


예배가 시작하려는 순간때 눈동자의 움직임도 없이 나를 향하던 아이들의 눈망울. 그리고 내 오른손의 까딱하는 움직임에 한 목소리처럼 내던 '사랑의 주'.... 지금 생각해도 매주일 거룩한 설레임으로 심장이 잠시 멈추는 느낌이다. 돌이켜 보면 정말 그 일을 사랑했고, 함께 했던 아이들을 사랑했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 시절 그 아이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내 기도 속에서 성가대 아이들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며 축복하고 울던 시절이었다. '이 아이들 당신의 아이들로, 믿음의 사람들로 자라게 해주세요. 진짜 삶으로 하나님 찬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해 주세요' 
아이들은 자라서 중등부로 가고, 고등부가 되고, 어느 새 청년이 되었다. 그리고 2008년 11월에 남편은 그 아이들이 있는 청년부의 담당 교역자가 되었다. 아, 오늘의 주제는 이게 아닌데 서론이 무척 길어버렸다.



 



얼마 전 아주 늦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하나 받았다.
카드에는 '늦어서 죄송합니다' 라고 씌여 있었지만 이건 죄송하다는 것도 무색할 정도의 늦은 크리스마스 카드다. 그러니까 한 십 몇 년 정도 늦은 카드다.ㅋ
한영교회 어린이 성가대 창단 멤버, 창단 시에 4학년으로 가장 어렸던 영애가 중등부에 가서 나에게 쓴 카든데 이제야 내 손에 들어왔다. 이건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닌게, 당시 나도 성가대 아이들에게 엽서를 많이 보내곤 했는데 가끔 책을 뒤지다보면 그 때 아이들에게 써놓고 붙이지 않은 엽서가 툭 툭 떨어지곤 하니 말이다.


아무튼 영애의 크리스마스 카드에서 제일 중요한 point는 이거다. '올해 안으로 꼭 시집 가세요!'ㅋㅋㅋ 덕분에 나는 그 핸지, 그 다음 핸지 시집을 왔다.





영애는 내 마음에 특별하게 남아 있는 아이였다. 성가대 원년에 막내여서도 그랬고, 아마도 6학년 졸업할 때까지 주일에 거의 빠진 적이 없었을 것이다. (요즘은 컸다고  늙은 선생님을 놀려대기도 하지만) 순하고 착했고, 늘 약간 촉촉하게 젖은 듯한 눈으로 시키는대로 열심히 찬양하던 아이였다. '예수 귀하신 이름, 아름다우신 영광의 주...' 하는 찬양의 솔로를 하던 작고 떨리던 목소리도 기억이 난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중등부로 올라가면 그렇게 무서워하고 존경해마지 않았던ㅋㅋㅋ 정신실 선생님을 쌩까기 시작하는데... 가끔 교회에서 부딪히면 여전히 그 때 그 마음이라는 느낌이 들던 아이들 중 하나가 영애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서 영애가 대학생이 되고 어느 해엔가 사랑부의 찬송 율동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먼발치서 지켜보았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찬송 율동 선생님을 할 때 똘망똘망 하게 앉아 있던 녀석이 바로 그 자리에 선생님이 되어있다니...







2010년 9월. 영애는 남편의 그늘 아래 있는 어린양이고 또 같은 아파트에 사는 동네주민이다.
간호사라는 불규칙한 삶의 리듬을 넘어 영적 리듬을 잘 타는 영애이기를 기도하고 있다. 자주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공동체 사람들과 일정한 경험을 나누지 못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소속감을 잃지 않으면서 말이다.


'예수 놀라운 이름 아름다우신 영광의 주 임마누엘 함께 하시는 은혜의 구주 말씀이라'
오래 전 영애가 노래했던 것처럼 친구들, 선배들과 떨어져 홀로 밤을 지새우며 긴장 속에 병동을 지키는 자리에서도 '임마누엘 함께하시는' 그 분을 딱 붙들고 있으면 좋겠다. 아니, 이미 자신을 붙들고 있는 강한 손이 있음을 믿으며 삶의 형편에 관계없이 행복한 하루하루 살았으며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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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가 싱가폴로 떠난 지 열흘이 넘었다. 가기 훨씬 전부터 포스팅을 계획했었던 터라 머리속에서 컨셉이 여러 번 뒤집어졌다. 지난 주, 그러니까 며칠 전 베란다에 앉아 기도하는 중에 윰 출국 기념 포스팅에 관한 마지막 계시를 받고 오늘에야 자판을 두드린다. 윤미와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만남이 내게 남긴 것들이 많다.

나이가 들수록 말을 들어주는 후배가 있다는 것이 행복이라는 걸 새삼 알겠는 요즘 나는 진정 노땅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암튼, 말을 들어주고 글을 열심히 읽어주는 윤미. 내가 사는 모습을 보면서 결혼에 대한 소망이 생겼다는 윤미가 갑작스레 직장을 싱가폴로 옮기게 되었단 얘길 들었다.
아, 목자모임에서 자신을 망가뜨려가며 분위기를 띄워주는 윤미. 청년부 사역의 든든한 동지 윤미가 간다니.... 모두들 잘 됐다고 한다는데 우리 부부는 한 번 매달려 붙들고 싶은 유혹을 어쩌질 못했다. 가지마, 가지마...잉.

헌데, 그 소식을 들고 집에 온 윤미가 그랬다. 그렇게 싱가폴 가고 싶어서 난리 칠 때는 안 보내주시고 이제 다 내려놓고 무엇보다 공동체가 너무 좋아 떠나기 싫은 지금 가게 되다니요.... 맞다. 그렇게 갖고 싶어서 집착하는 것은 내 것이 되기 어렵다. 왜냐면 하나님은 우리가 집착하는 것이 결국 우리를 삼킨다는 것을 아시기에, 우리를 절절이 사랑하는 그 분이 아무리 우리가 갖고 싶어해도 독이 되는 것을 주실 리 없다.  싱가폴이 결정 되기 전이었는데 새로 문을 연 윤미의 블로그 제목이 'In His Time' 이었다. 윤미는 자기의 때를 포기하고 그 분의 때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 분이 내게 말씀하신다.

'윤미를 인도한 내 손길을 주의깊게 보렴. 아무리 네가 갖고 싶어도 그것이 나를 아는 것보다 네게 더 소중한 것일 때, 네게 줄 수 없어. 내 사랑이 너무나 커서 너가 갖고 싶어서 목을 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그걸 주지 않는 내 마음이 너무 아프지만 널 사랑하기에 네가 그걸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는 거란다. 내 사랑을 알겠니?'


우리 부부 역시 윤미를 한 번 붙들어보고 싶은 것은 집착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목자로 선배로 몇 몫을 하는 윤미의 빈 자리가 작지 않을 거라는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배워야 한다.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놓는 것을.
공동체 우리가 아둥바둥 지키려고 애를 써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생각해보면 청년부 사역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훌륭한 리더들을 떠내보내야 했다. 단기선교사로, 타교회 전도사님으로, 또 타교회 사모님으로.... 그렇다. 인간적인 계산법으로 아쉽지만 그 빈자리에 부는 허한 바람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훈련시킨다. 그 허한 바람으로 마음이 일렁일 때마다 그 끝자락에서 결국 그 분을 바라게 될 것이다.
윤미언니 출국하는데 공항까지 갔다온 채윤이가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엄마, 벌써 윤미언니가 보고싶어' 했다. 내리 삼 일을 윤미언니 떠난 얘기를 일기로 쓸 만큼 채윤이에게도 쉽지 않은 헤어짐인 것 같다. 엄마 아빠가 기꺼이 떠나보내는 훈련을 하는 동안 열 살 채윤이 나름대로 자신만의 연습을 한다.


여기까지 라고 생각했었다. 헌데, 지난 주 어느 햇살 부서지던 오전이었다. 오래된 물음표 하나가 마음에서 점점 커지면서 나는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이런 가운데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길을 잃었었다. 최근에 깨달은 것이지만 그렇게 길을 잃고 흔들릴 때마다 실은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다. 흔들리는 내 자신을 보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다. '내가 명색이 목회자의 아내가, 신앙이 있다고 자부하는 내가 이렇게 흔들리다니.... ' 자동으로 나를 자책하는 모드가 되고 그 이후에는 내게서 고개를 돌려버리실 것 같은 하나님. 벌을 내리실 것 같은 하나님을 느낀다.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아...

베란다에 앉아 기도 아닌 기도를 하면서 여기까지 깨달은 순간 지난 겨울의 윤미가 생각이 났다. 남편의 청년부 사역이 시작되었던 작년 11월 즈음이다. 윤미의 얼굴에 웃음이 없었다. 한 눈에 봐도 많이 힘들어 보였다. 내가 아는 윤미가 아는데.... 혹시 우리가 청년부로 온 것이 싫은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픈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첫 눈이 오던 날이었던가? 교육관에서 목자모임을 마치고 목자들이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은 난 윤미의 뒷모습만 지켜보고 있었다. 그 날도 무겁게만 보였던 윤미의 뒷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목자라는 짐을 지고 힘겨웠을 날들이 마음으로 느껴졌고 그저 한 없이 안아주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어렴풋이 '아, 청년들의 방황도 사랑스럽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며칠 전 기도랍시고 앉아 하나님께 대들고 한편으로 나를 정죄하던 그 순간에 그 눈오는 날 윤미를 바라보던 내 마음이 생각난 것이다. 그리고 내 마음에 말씀하시는 그 분의 음성.
'바보! 니가 내 사랑을 좀 의심한다고, 니가 나의 진실과 공의를 좀 의심하며 흔들린다고 내가 너에 대한 사랑을 거둘 것 같냐? 너가 가장 흔들릴 때 내가 널 가장 사랑하는 것 여태 몰랐지? 지난 겨울 눈 오던 날에 윰을 바라보던 그 사랑의 눈빛보다 몇백 배 몇천 배의 따스함으로 바라보는 나를 아직도 모르겠니?' ㅠㅠ



윤미가 가면서 에스프레소 머신을 내게 남겨주고 갔다. 매일 매일 커피를 내려 아이스아메리카노의 깔끔한 맛과 향에 감동할 때마다 윰과의 만남을 통해 일깨우신 그 분의 사랑을 음미하려 애쓴다. 우리 삶과 만남의 구석구석에 아로새겨진 그 분의 사랑. 윤미 역시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매일 매일 발견하기를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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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피, 아빠피, 살짝 고모피까지? 개그의 피가 면면히 흐르고 있는 제 조카 정수현입니다.
오토바이는 있고 헬맷은 없다. 그렇다면 팬티를 뒤집어 쓰고 헬맷을 대신해주는 센스!!!

이제 많이 커서 엄마빠 떨어져서 할머니랑 같이 고모집에 와서 하룻밤 자고 가기도 했어요

'고모집에 한 번만 가자' .
'현숭이 형아 보고입삐다' 
'할머니 허리 아퍼. 아가 업지마'
이런 말을 줄줄줄 해댄답니다.

저걸 본 채윤이 누나 현승이 형아 감동받아가지고 바~로 따라서 시도했는데 역시 저 헬맷이 젤 잘 어울리는 아이는 수현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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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라는 형용사가 너무 자연스럽게 붙여지는 진태훈, 오윤선 부부가 잠시 귀국하였습니다.
어제 수요예배에서 우리 진선교사님의 선교보고가 있었죠.

예배를 마치고 진선교사님한테 가서 제가 그랬습니다.
'내가 이제껏 들어 본 선교보고 중 최고의 보고였다'고요.과장도 없고 오버도 없는 표현입니다.
최근에 어느 선교보고를 들으면서 '선교를 했다는 거야? 안 했다는 거야? 선교가 뭐라는 거야?'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이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최근의 어떤 선교보고를 들으면서 '하나님을 설득해서 내 편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마음을 좌지우지할 능력이 없으면 선교사 되기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이고 대부분의 선교보고를 들을 때마다 은혜를 받습니다. 최근에 경험한 두 번의 선교보고가 어제 진선교사님의 보고를 더 돋보이게 했는 지는 잘 모르겠으나 분명 최고였습니다. 왜나면 선교 보고를 듣고 났더니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 그렇다면 나도 선교사로 나갈 수 있겠다' 하면서 마음이 뜨거워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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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선교보고에는 드라마틱함이 없었습니다.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태훈형제가 목장모임에서 나눔 시간에 얘기하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애써 하나님의 일하심과 큰 능력을 과장하려는 표현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들의 사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저 언약학교 학생들이 어떻게 자라났으면 좋겠는지, 이들이 자라서 네팔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는지, 그것을 위해서 어떤 프로그램들을 하고 있는 지....일상의 얘기처럼 들렸습니다.
맞습니다! 일상입니다! 어제 선교보고를 듣고 제가 '그렇다면 나도 선교를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태훈형제의 선교보고드 태훈, 윤선 부부의 2년 간의 일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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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 전에 잠깐 태훈형제를 만났습니다. 남편이 수요예배 설교를 할 때 처럼 살짝 제가 떨렸습니다. 찬양하는 시간에도 제가 앞에 설 것처럼 두근거리고 떨려서 기도하며 찬양했습니다.
저는 사실 두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마음 한 구석 너무 젊은 나이에 선교사로 나간 것, 너무 젊은 나이에 네팔의 학교, 교회, 회사를 책임지게 된 것이 쫌 마음이 걸렸습니다. 두 사람의 젊은 패기로 확 선교사에 헌신하고 떠난 게 아니냐 하는 우려를 들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교보고를 들으면서 더욱 확신에 넘쳤습니다. 이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일상 그대로 선교를 그들의 일상으로 끌어들여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면서 자신의 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필요를 세심하게 듣고, 그 필요를 작은 것부터 채워주면서 그저 섬기고 있었습니다. 학교에 오는 아이들이 행복하게 학교 다니도록 아이디어를 내고,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가지도록 사랑해주고, 주민들에게 그저 교회를 한 번 씩 들여다 볼 기회를 주고.....
드라마틱한 얘기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낸다고 하지만 실은 그 속에 자신의 헌신과 고생을 은근히 드러내는 방식의 선교보고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거기서 얼마나 고생을 하며 사는지, 얼마나 힘들어서 울고 불고 했는 지에 대한 얘기를 아끼는 것. 제가 느껴지기에는 그것이 진정 하나님을 드러내는 보고였습니다.

진선교사님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그랬습니다.
"저희들에 대한 오해가 있는데요....여기가 히말라야 산자락 마을입니다. 여러분들이 저희가 이 산자락 밑에서 살면서 고생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데요 아닙니다. 저희는 여~어기, 여기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하하하...저희는 도시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신선하고 솔직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마디란 말입니까?
정말 나이는 저보다 훨씬 더 젊지만 이렇게 잘 준비된 귀한 선교사님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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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파송예배를 드릴 때 목장식구들이 축복찬양하던 모습


자랑은 없고,
그저 일상이 드러난 선교보고...
아름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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