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이 떨어져가는 겨울나무가 유난히 싫다. 베란다 창 앞에서 지난 여름 나를 행복하게 해줬던 대추나무 잎이 하나 둘 지고 있다. 이 가을 지내며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내가 겨울나무를 싫어할 뿐 아니라 사실은 겨울의 헐벗은 나무를 두려워하는 구석이 있다는 것 말이다.
지는 잎을 바라보면서 기분이 그럴싸하게 좋았던 기억은 현승이를 임신하고 있던 그 가을 뿐이었다. 그 때 다니던 직장의 음악치료실 창으로 아주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것이 보였었는데 그 나무들의 하나 둘 앙상해지는 것을 보면 희망이 차올랐다.
'저 잎이 다 지고, 이 눔의 겨울이 후딱 가고 새 잎이 돋아나야 아기 만나는 날이다. 암튼 빨리 빨리 저 놈의 잎이 다 져버려야 한다' 이렇게 말이다.
그 외에는 오는 겨울을 자연의 섭리려니 하고 기쁘게 아니 최소한 자연스럽게 맞아보지도 못했던 것 같다. 아, 나는 겨울을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어했다.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인식조차 못하면서 말이다. 날씨가 추워지고 나무들이 앙상해지기 시작하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겨울이 피부로 느껴진다. 차거워지는 날씨와 함께 마음이 스산해지는 것은 81년도 겨울이 함께 떠오르기 때문이다.
단지 그 때문이 아닐지 모른다. 에니어그램 7번 유형인 내게 '고통이 없는 삶'은 지고의 목푝이다. MBTI 거울에 나를 비추어 ESFP의 얼굴을 보게 되었을 때 충분히 인식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재미' 가 없으면 열심이 나지 않는다. '지루'하다 싶으면 도망치는 것을 도모한다는 것도 알았다. 지루한 자리에 머무르는 훈련을 의식적으로 해왔다. 어떤 ESFP보다 참을성 있다는 자부심에 더 깊이 성찰하고자 하지 않았다.
에니어그램이 MBTI와 다르다면 방향이다. 바로 각 유형의 내면으로 돌격해 들어간다는 것이다. 동기를 꿰뚫고 죄에 대해서 직언한다. 7번 유형은 고통을 무조건 악덕으로 여겨서 멀리하고 회피한다는데 '나는 이미 그 정도는 알고 극복한 상태야'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겨울나무를 보는 내 눈을 인식하면서 고통에 직면하지 않는 쾌락주의자로서의 나를 새롭게 보게 된다. 아, 이 정도였구나! 블로그에 댓글 하나를 달아도 나를 추동하는 힘은 쾌락주의자의 그것이다.
해피앤딩 아닌 영화는 보지 않는다. 고등학교때 영화 <애수>를 보고 거의 한 달 간은 정신을 못 차리고 살았던 경험이 있다. 슬픔에서 헤어나오질 못했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비극은 보지 않는다! 또 몸이 아파도 마음이 아파도 엄살이 심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바이다. 미리 엄살을 떨어 놓으면 그 고통이 엄살 떤 만큼은 아니기에 더 견디기가 쉽다는 정신적 메카니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내 엄살은 고통의 현실을 보지 않으려는 회피의 메카니즘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주일인가 학교를 안 갔었는데 장례식을 마치고 처음 학교에 갔던 날에 대한 기억이 분명하다. 분명히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슬픈 맘 말로 다 할 수 없는데 내가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보고는 웃었다. 어쩔줄 모르는 친구들을 보고는 웃었을 뿐 아니라 그 날 학교에서 밝게 지내고 집에 돌아왔던 기억이다. 슬픈 때 슬퍼야 하는데 슬픈 얼굴을 하지 못하거나 안하거나.
고통에 대해서 좀 더 정직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파서 소중한, 아파서 진실인 에니어그램의 선물을 받아들 때가 되었다. 과장도 회피도 말고 고통에 머무르는 것.
쓸쓸해져가는 겨울나무를 부러 오래 바라본다. 슬프다 슬프다 하면서 엄살 떨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도 들이고, 겨울이 휙 지나가서 새봄의 새순이 나는 때만 그리지 말고, 겨울의 추위를 있는 그대로 몸으로 맞는 날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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