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간에서 인심 난나고. 김치통이 가득 차니 넉넉한 마음으로 요리를 하게 된다. 김치통이 가득 찼다는 건,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제천에 다녀왔다는 뜻이다. 이 즈음 제천 민이네 갔다 오면 김치통이 가득 차고, 냉장고 야채 박스는 내가 좋아하는 3종 세트(호박잎과 고추와 호박)로 넘친다. 바쁘기도 했지만 뭔가 마음도 뭣도 빈곤하고 여유가 없어서 제대로 뭘 해 먹이질 못했다. 집에 입시생 둘이 있는데, 이 둘을 잘 먹이질 못했다. 늦은 밤 돌아오는 길 통화하며 "현승아, 집에 먹을 게 없었는데 저녁 어떻게 했어?" 했더니 편의점에서 메뉴로 잘 먹었다고. 아, 죄책감이 밀려오…진 않지만 미안함과 고마움에 가슴이 저릿하다. 채윤에게도 같은 마음.레슨 갔다 또 연습하고 밤늦게 들어올 채윤이 점심 든든하게 먹으라고 김치찜을 한다. 오전 10시, 식사 준비하긴 애매한 시간에 김치찜을 안쳤다. 친구가 준 김치, 어느 집사님께서 손수 말리고 갈아서 만들어주신 생강가루가 고맙다. 한소끔 끓었을 때 전에 횡성 어느 두부전골 집에서 산 고춧가루 한 스푼 듬뿍 넣으면 그렇게 칼칼할 수가 없다. 빈곤했던 마음에 무엇이 주입되었는지, 많은 것이 감사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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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의 담을 넘고,
신분의 담을 넘고,
공간과 시대의 담을 넘은
중세 여성 평신도 공동체 “베긴(Beguine)” 영성 특강에 초대합니다.

작년 12월, 연구소 3주년 기념 특강으로 “여성, 영성, 공동체”란 이름으로 베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혼한 여성도 있고, 비혼 여성도 있고, 자기 집에서 사는 사람, 공동체로 사는 사람, 은수자로 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분처럼 살고자 했던 여성들, 수도원이 아니라 일상의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살았던 수백 년 전 여성들의 이야기가 우리 마음에 많은 것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을 마음에 품게 되었고요.

작년 특강 후에 마음에 남은 시가 하나 있습니다. 급진적으로 아름다운 이 공동체가 기존의 신학과 잣대로 규명되지 않자, 사제들과 남성 신학자들은 탄압하기 시작했고 마녀로 지목되어 화형당한 지도자도 있습니다. 그들의 탄압에 반응한 어느 무명 베긴의 시라고 합니다.
  
당신은 말을 하고, 우리는 행동한다.
당신은 분석하고, 우리는 응시한다.
당신은 검열하고, 우리는 선택한다.
당신은 씹고, 우리는 삼킨다.
당신은 노래하고, 우리는 춤을 춘다.
당신은 꽃을 피우고, 우리는 열매를 맺는다.
당신은 맛을 보고, 우리는 향기를 맡는다.

좋은 선생님을 모시고 다시 한 번 배움의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가톨릭 대학교의 정태영 신부님을 모시고 베긴 영성의 배경과 함께 베긴의 산파로 태어난 여성 신비가 제르트루다(Gertrude of Helfta, 1256-1302)의 영성에 대해 배워보려 합니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접하기 어려운 고난도의 철학과 신학을 연구하며 인문학적 소양을 갖췄던 그는 베긴 등 새로운 영성을 전통 안에서 받아들여 자신의 고유한 방법으로 결합시켰다고 합니다. 제르트루다의 저서 『수련(Excercitium)』으로 ‘말씀’을 통한 마음의 수련에 대해 배우겠습니다.

+ 강사 : 정태영 신부(가톨릭 대학교)
+ 일시 : 2022년 10월 7일(금) 오후 2:00 ~ 4:00
+ 인원 : 30명
+ 장소 : 공간, 서로이음
        (마포구 서강로 9길 52, B1)
+ 참가비 : 이만 원(후원자, 내적 여정 참가자 만 원)
+ 문의 : 010-4235-8020
+ 신청 링크 : https://bit.ly/3kDbLfR

 

담을 넘은 여인들 : Beguine 영성 특강

베긴영성 특강 강의 신청 양식입니다. + 강사 : 정태영 신부(가톨릭 대학교) + 일시 : 2022년 10월 7일(금) 오후 2:00 ~ 4:00 + 인원 : 30명 + 장소 : 공간 <서로이음> (마포구 서강로 9길 52 B1) + 참가비 :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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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사람들과 같은 음식을 하고, 똑같은 갈등을 반복하는 명절 수십 년이다. 명절만 없었다면, 저 사람만 없었다면 하던 시간들이었는데 주변에서 사람들이 사라지고 명절도 힘을 잃었다. 어머니의 명절 이야기이다. 몸의 한 부분으로 기울어 수십 년 살아와 틀어져 고착된 관절 같은 명절이다. 같은 사람과 같은 음식을 하며 같을 갈등을 겪느라 마음 어디가 기울어 틀어져 버렸지만 명절이 사라졌다. 명절과 함께 사람들도...

명절 전날 여자들이 모이는 시간, 만드는 음식, 일이 끝나는 시간, 명절 당일 아침에 모이는 풍경, 어정쩡한 예배, 식사, 그리도 점심, 또 저녁 손님... 어쩌면 그렇게 어느 해 명절을 따로 특정할 수 없을 만큼 똑같이 찾아왔었다. 명절 전후의 걱정 근심, 그리고 분노와 피해의식도. 매 명절마다 같았다. 그런데 이제 매 명절마다 "어떻게 모이지? 뭘 먹지?"를 아주 새롭게 고민하고 창의적으로 계획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 채윤이 현승이가 각각 공부로 시간을 낼 수 없다는 특별한 상황을 백분 활용하여 또 다른 모양의 추석이다. 어머니 모시고 셋이 비싼 식사하고, 걷고, 차 마시는 추석 전야를 보냈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북적대는 식구가 싫었고, 그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이 고통스러웠던 어머니, 조용히 단출한 음식을 하고 싶었던 어머니에게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고 단출해도 너무 단출한 노년의 시간이 왔다. 혼자 지내시는 것이 외롭고도 외로우시다. 최선을 다해 도와도 어머니 일생의 서사가 담긴 그 외로움과 서러움을 해결할 수 없으니 근심이 쌓여가고. 그래도 힘을 내어 할 줄 모르는 너스레를 떨고, 농담을 하여 웃겨 드리고, 토닥여드리는 모습이 아름답다.

야야, 나는 먹기 싫으면 안 먹고, 그냥 바나나랑 견과류 넣어서 휘리릭 갈아서 먹으면 아침 땡이야. 혼자 밥 먹기가 너무 싫어. 어머니, 저는 아침 세 번을 차려요. 각각 시간대 별로 일어나서 먹는 것도 다 달라요. 현승이는 꼭 국에 밥 말아먹어야 하고요....(셋 다 각자 알아서 먹는 편이지만 과장해 봄) 그렇지, 세 식구 따로따로 먹으면 힘들지... 그렇지...

젊은 부부들이 육아전쟁으로 부부전쟁도 치르고 내면의 전쟁을 치르는 것을 들으면 "그래도 다시 안 올 아름다운 시간인데. 힘들어도 지금이 제일 예뻐..."라고 가닿지 않을 말을 하(거나 삼키)곤 한다. 돌아보면 육아로 힘들 때 "언제 우아하게 외식 한 번 해보지?" 막막했던 어떤 날이 있었는데. 그 힘겨웠던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그리운 시간이 될 줄이야. 우리 어머니는 수십 명 모여 북적이던 그 명절의 시간이 그리우실까? 여전히 지긋지긋하셔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실까? 그런 회한이 좀 있으시면 좋겠다. 약간의 회한 끝에 단출하여 외로운 오늘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발견하셨으면... 이렇게 단 한 번의 새로운 추석이 가고 있다.

현승이가 일어났다. 단 한 번의 아침 식사를 챙겨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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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여 모이지 못했던 시가의 명절 모임을 했다. 어머님만 모시고 와 하루 함께 식사하고 놀아드리려 했는데. 어쩌다 다 함께 모이게 되었다. 기꺼이 식사 준비하려고 마음먹었다. 메뉴 조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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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추석에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추석, 설 명절에 흔하디 흔했던 장면들, 꿈만 같다. 생후 10개월 증손자와 95세 할머니가 눈을 맞췄다. 한 세기 가까운 나이 차이다. 사람을 알게 되면 이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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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은, 우리가 실제의 우리보다 더 나은 어떤 존재인 척하는(자만으로 인해 우리는 그렇게 상상한다) 대신에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진실로 자기 자신을 안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질서 안에서 적합한 위치를 조용히 차지할 것이다. 이렇게 초자연적 겸손은, 사회에 우리를 통합시키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느님과 올바를 관계를 맺게 한다. 이로써 우리의 인간적 존엄성은 그 가치를 더한다. 자만은 우리를 거짓 존재로 만들지만 겸손은 우리를 진실한 존재로 만든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교적 겸손과 금욕 생활은, 언젠가는 소멸할 세상에서 매일의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며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도록 협력해야 한다고 가가르친다(살후 3장). 사도 바오로는 평범한 생활을 초자연적인 일과 활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거짓된 신비주의에 의한 들뜬 동요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가치를 거부하며 현세적 안전과 행복을 탐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시간 속에서 삶을 지속하지 못한다거나 행복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 더 기뻐하며 더 안전하게, 소박하게 일하며 살아간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삶에서 어떤 특별한 성취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세속적 목적을 추구할 때 따라오는 무익한 동요를 피할 수 있다. 덧없고 헛된 가운데서 평화롭게 살지만 그것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 뒤의 실체를 본다. 즉 피조물이 창조주에 대한 기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완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인 평범한 생활은 장엄한 금욕적 생애보다도 더 거룩하고 더 초자연적일 수 있음을 깨닫는 일이 바로 최상의 겸손이다. 그러한 겸손이야말로 평범할 수 있으며 영적 자만의 한계를 넘어선다. 자만은 항상 평범하지 않기를 갈망하지만 겸손은 그렇지 않다. 겸손은 평범한 것을 들어 높여 변모시키고, 하느님의 영광으로 채우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희망 속에서 모든 평화를 찾는다.❞

토머스 머튼의 사랑에 이르는 길, 중


어렸을 적부터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 들을 때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재산을 팔아 바쳤는데, 조금 챙겨 숨겼다고 죽이기까지? 초대교회 시작의 엄중한 시절이라 하나님께서 시범 케이스로 본때를 보여주셨다는 해석도 들은 것 같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고? 팔 토시 끼고 다니며 시범 케이스로 아무 학생이나 패는 ‘학주’ 같은 그런 분이라고? 내적 여정의 어느 길목에서 알아들어졌다. "실재보다 더 나은 존재로 보이려는 척"이 무서운 죄로구나! 추석을 휴일로 지내는 아침 영적 독서 내용이 참 좋아서 옮겨 적어보았다. 겸손은 진실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아니 진실로 자기 자신을 알 때 맺는 열매가 겸손이다. 자만은 항상 평범하지 않기를 바라고, 지금 여기의 평범을 회피한다. 그러다 빠지는 것이 거짓 신비주의이다. 누추하고 무력한 지금 여기의 시간을 초자연적인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의 시작이다. 실재의 나보다 더 나은 나로 포장하지 않는 것이 가장 가까이 있는 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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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참 좋아하고, 선생님들을 좋아하며 존경하는 현승이가 '선물'을 요구한다. 지난 스승의 날부터 선생님 몇 분을 꼽으며 선물을 준비해 달란다. 현승이가 이러는 경우는 "찐"이라, 정성 담아 준비했었다. 추석 앞두고, 수시 원서 접수 앞두고 고3 현승이의 선생님을 뵈었다. 제 성향과 달라서, 제가 없는 것을 가지고 계셔서 더욱 선망하는 것 같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청소년에게 존경하는 선생님이 있다는 건. 의미가 발견되어야 공부도, 뭣도 하는 아이인데 그 '의미'를 찾아가는 좋은 안내자가 되어 주시니 가끔 질투가 나도록 감사하다. (언젠가 학교 자랑 포스팅을 한 번 해야겠다, 교장 선생님을 비롯해서 이런 선생님이 한두 분이 아니니.) LA 갈비를 사서 양념을 했다. 요즘 우리 먹을 음식도 잘하지 안(못)하는데, 전날 학교 수업 마치고 11시에 집에 왔는데, 기쁘게 무리를 했다.   

 

함께 하고 있는 연구소는 직장이 아니라 공동체이다. 직장이라고 치면 악덕 업체다. 열정 페이, 헌신 페이로 제대로 받는 것 없이 쏟아붓는 시간과 재능은 어마어마 하니까. 상담, 강의, 여러 세미나 진행은 거의 재능 기부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함께 연구하고 성장하고 노는 게 좋고, 연결되는 이들을 돕는 게 기쁨이니 공동체이다. 그래도, 그래서... 두 번 명절에는 심사숙고하여 선물 하나를 잘하려고 한다. 실용적이고 정성 담긴 선물을 하려고 매 명절마다 행복한 고민을 한다. 제한된 재정으로 좋은 선물 고르기 위해 엄청난 창의성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것이 기쁨이다. 이번 추석에는 LA 갈비를 전했다. 맛있게 딱 한 끼 먹을 분량이다. 일단 우리 가족이 한 번에 딱 맛있게 먹어 치웠다. 만족이다. 

 

주고 싶은 마음, 먹고 싶은 마음

 

참 잘 만든 광고 카피들이 있다. 투게더 아이스크림 같은 추석 선물로 마음이 풍성하다. 주고 싶은 마음, 먹고 싶은 마음이 양방향으로 채워져서. 

 

* 그리고... 물가가 비싸도 너무나 비싼 이 시절에 목사라고 작가님, 선생님이라고 추석 선물 주시는 분들께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먹고 누릴 때마다 얼굴을 떠올리는 기도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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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러 서울 갈 계획은 오지도 않은 태풍과 굵은 빗방울로 접어 버렸다. 서울 가는 길은 멀다. 분당으로 처음 왔을 때 교회 집사님들이 "서울 갔다 왔어요. 서울 갔다 와서 피곤해요?" 하시면, 여기서 서울은 서울에서 서울보다 가까울 수도 있는데 저러시나 싶었었다. 살다 보니 알겠네. 서울 가는 먼 길을... 합정동 살 때 참 좋았는데. 씨네큐브, 아트하우스 모모, 상상마당, 필름포럼이 죄다 버스 한 번에 30분 거리였었다니! 여하튼 이러다 포기하는 영화가 대부분이다. 나중에 네이버에서 봐야지, 잠깐의 위안을 위한 결심을 해보지만 노트북 작은 화면으로 보게 되질 않는다.

밥 먹고 카페 가서 공부나 하자! 그래서 간 집 근처 유명 카페다. 유명 카페라서 낮에 가면 도떼기시장이라 테이크 아웃 한 잔으로 만족하고 빠져나오기 바빴었다. 소문만 무성한 태풍과 굵을 빗방울로 어째 여기가 다 한산하네. 논 한가운데 있는 카페라 창밖 뷰가 저렇다. 비 오는 날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비멍' 하며 하염없이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뷰가 저러니 정말 감동이다. 막 모내기 마친 논, 초록 벼로 빽빽한 논, 황금물결 넘실거리는 논, 텅 빈 겨울 논... 다 좋아한다. 어릴 적 익숙한 풍경이라서인가. 이거 정말 경치가 유혹이네! 공부에 집중이 안 되는 것.

 

남편도 영화 좋아하지만, 합정동이 아니어서 크게 아쉬울 것이 없다. 서현, 오리, 동백... 근처에 멀티 영화관이 쎄고 쎘으니까. 취향 존중의 미덕을 발휘하여 내 영화를 함께 봐주곤 한다. 취향과 취향이 충돌할 때 그는 이기는 법이 없다. 영화도, 점심 메뉴도, 카페도 그의 선택은 하나다. "존중입니다, 취향 해주세요!" (온전히 나, 오직 내) 취향 저격 카페에 앉아 각자 읽을 책을 펼쳤다. 조직신학과 영성신학이 펼치고 마주 앉았다. 이번 주 수업 주제이기도 하고, 책을 읽다 궁금하기도 하여 조직신학, 교의신학, 윤리신학과 영성신학의 관계에 대해 무언가 질문을 던졌다. 남편 입의 봉인이 풀렸다. 술술술술, 네버앤딩, 네버앤딩, 술술술술.... 우이씨, 아는 것도 많아! (나는 토론을 하자는 게 아니라 책에서 본 한 마디를 한 거였다고오....) 그냥 인신공격 전술로 판을 엎어 버릴까?

 

조직신학과 영성신학이 싸움 붙으면 이기고 지는 편이 뻔하다고오! 영화 <헌트>와 <베르히만 아일랜드>가 흥행으로 싸움이 되냐고. (라고 비유하면 블친 둥절인가요?) 보편적 개념들로 견고한 틀을 갖춘 '조직' 신학과 개인의 '체험'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신비(영성)' 신학이 싸움으로 붙으면 되겠느냐고!

남편이 연구소의 가을 프로그램 하나를 맡아 주었다. 달라스 윌라드의 <마음의 혁신> 읽기 모임이다. 달라스 윌라드 덕후로서 전작을 읽었을 뿐 아니라 <마음의 혁신>은 여러 차례 읽었고, 책모임도 한 번 했었다. 저작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구글 맵으로 달라스 윌라드가 나고 자란 곳, 살았던 곳 골목까지 따라다닌 '광' 덕후이다. 내가 <내적 여정 세미나>를 이끄는 방식은 다소 직관적이고 영성적이다. 그래서 어려워하는 분들이 있다. 조직신학에 익숙한 목회자들에게는 '내적 여정'을 위한 다른 언어가 필요하단 생각을 해왔다. 그래서 목사님, 전도사님, 선교사님이 많았던 작년 지도자 과정에선 여름방학 모임으로 <마음의 혁신>을 읽었었다. 달라스 윌라드는 철학자이며 신학자로 개신교 안에서 '영성 형성'을 꾸준히 연구하고 틀을 세운 분이다. 그러니까 영성을 풀어내는 그의 언어가 철학적이고 신학적이다. 김종필과 찰떡이다.

조직신학과 영성신학을 마주 펼쳐놓고 약간의 논쟁을 하다 김종필의 이 말에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았다. (실은 꺼내지도 못했다.)심지어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마음의 혁신>의 결론은 결국 사랑이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는 말씀에 대한 해설이야.


많은 싸움이 취향과 취향의 대결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누가 이길까? 취향을 존중하는 자? 존중받는 자? 나는 '조폭신실'이고 항상 승자이다. 현상적으론... 그런데 늘 어딘가 모르게 진 느낌이 있다는 건 그냥 없는 느낌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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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 현상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마음으로 주는 것. 은총. 선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강요할 수도 달라고 할 수도 없는 것. 노력과 애씀으로 신비 현상을 얻어내려는 것 자체가 문제. 신비현상 자체가 문제가 아님. 신비 현상에 집착한 나머지 왜곡된 영성 생활을 하다 잘못된 사람들은 시대마다 있어 왔다. 현재에도 있다.

버섯전골 사진 걸어놓고 붙이는 인용문으로 뜬금없긴 한데... 이번 학기 듣는 [영성 신학의 주제별 심화] 수업 첫 시간에 필기해놓은 대목이다. 신비현상에 대한 분별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분별 "어렵찌 않아요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학기 교과서였던 [신비 신학]의 저자 윌리엄 존스톤은 신비 신학은 "사랑학"이라고 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에 못 이겨 사랑으로 주는 것이 (모든 신비체험 포함) 은사이다. 뭘 해서 보상으로 얻는 것도 아니고, 갚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선물이다. 내내 마음에서 은총, 선물이란 단어가 떠나질 않는다.

선물로 온 버섯과 색깔 고운 국수다. 선물이다. 주일 오후 남편이 다른 교회 설교에 초대받아 갔다. 오후 네 시나 되어 집에 왔는데 점심도 못 먹은 상태. 저녁 메뉴로 '버섯 국수 전골' 하기로 하고 아이들도 기대하고 있는데, 설교를 세 번 한 배고픈 목사를 위해 빨리 끓여 보았다. "엄마 아빠 먼저 먹어도 돼?" 단톡에 양해를 구하고. (그리고 애들은 집에 와서 자장면 시켜먹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

남편은 배고팠다 치고. 와~아씨, 나는 내가 한 음식이 왜 이리 맛있어? 4인분 생각하고 끓인 걸 둘이 싹 비워 버렸다. 배 부르고 몸이 뜨끈하고 영혼까지 채워진 느낌. 맛있게 뚝딱 먹어 치운 남편이 기분이 좋은지 고백을 해왔다. "여보, 사실 나... 나 버섯전골 좋아해. 나는 전골류를 좋아하는 것 같애." 아니 좋으면 전골한테 직접 고백할 일이지 그 사이에 왜 나를 끼워? 둘이 예쁜 사랑해!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래,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건 참 좋은 일이지."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고. 있으면 있는 것 아무거나 대충 먹는 당신이 안타까웠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건 정말 좋은 일 같아,라고 말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선물, 그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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