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윤이랑 장을 보는데 무화과를 사자고 한다. 무화과를 왜 사? 처음 클릭된 내 마음이었다. 그리 비싸지도 않고, 채윤이가 사자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냥 먹고 싶다는 것이다. 먹고 싶다는 것보다 정직한 이유가 있으랴. 그래, 사!라는 반응에 "어, 진짜?" 하는 게 조금 슬프다. 우리 엄마가 그랬듯 아이들이 뭘 사고 싶다거나 욕구를 드러내면 나는 일단 빨간불을 켜 들었다. "왜애? 그게 지금 필요해?" 엄마가 내게 그러는 게 그렇게 싫었으면서 아이들에게 그러고 있다. 그걸 인식한 순간부터 그러지 않으려고 뼈를 깎는 노력을 했으나 아이에게 가 닿는 건 몸의 언어이다. 표정과 세포로 말하는 것을 먼저 들었다. 그 행동이 맞고 틀려서가 아니라 엄마가 전적인 지지를 하지 않으니 아이는 불안한 것이다. 내 엄마가 내게 그랬던 게 그렇게 싫었는데... 그렇게 심긴 무의식적 메시지가 "네가 선택하는 것은 옳지 않아!"라서 그 메시지를 지우는데 긴 시간이 걸렸는데 내 아이에게 그러고 있었다. 그러지 않겠노라 결심한 세월이 짧지 않지만, 내 몸에 새겨진 것이 아이 몸으로 흘러가 버렸다.
그래, 사.
어? 정말? 엄마 무화과 사준 적 한 번도 없잖아. 정말 사도 돼? 그렇게 무화과 한 박스를 사왔다. 아이의 몸에 새겨진 "안 돼! 필요 없는 것을 왜 사? 네 선택은 옳지 않다!" 트라우마는 이런 작은 경험으로 치유되어야 한다. 그렇게 무화과 한 박스를 사 와서 이렇게 저렇게 먹는 동안 무화과에 얽힌 나의 이야기가 하나 씩 둘 씩 풀어져 나왔다. 무화과에 얽힌 사연이 많다.
베란다 화분 위에 감 하나를 내놓았다. 분명 연시라고 샀는데, 다른 애들 다 익어서 후루룩 먹어버린지 한참인데, 도통 물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감이다. 연시가 아니라 단감인가? 연시인가 단감인가, 도통 감이 안 잡힌다. 새들 먹이로 베란다에 내놓자는 신박한 제안을 JP이 했다. 이걸 기억하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다, 해놓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아이들을 유혹할 수 있을까, 잘게 발라 널어둘까, 견과류와 함께 내놓을까, 일단 나도 생각 중이었다. (정말 '생각'을 좋아한다. 생각을 많이 하고 실행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다. 나란 사람.)
토요일 오후, 황금빛 시간 골든타임을 꼭 붙들어 산책을 나갔다. 역시나 기우는 빛이 만드는 향연이란, 쌓이고 뒹구는 낙엽 위의 황금빛을 뭐라 형언할 수가 없다. 동네 아파트 큰 나무 밑을 지나, 산길 같은 공원을 지나, 민영환 선생 묘지를 지나, 남의 동네 아파트를 가로질러 탄천에 닿았다. 삐리 삐리 삐리... 지나가는 아줌마를 휘파람으로 유혹하는 새 한 마리가 전깃줄에 앉아 있다. (그래서 산책할 때는 이어폰을 끼지 말아야 한다. 유혹을 당하고 싶으면 말이다.) 목이 빠져라 올려다보는데, 배 부분이 노란 것이 곤줄박이로 추정되는 녀석이다.
아무리 줌으로 당겨도 노란 색은 커녕 모양도 잡히지 않지만, 여하튼 배가 노란 작은 새다. 4선 악보 맨 윗 줄에 까맣게 뭐 묻은 것 같은 그것이 곤줄박이로 추정되는 애다. 한참을 그렇게 아줌마 목을 빼놓더니 휘리릭 낮은 곳으로 내려와 사라졌는데, 그 녀석 찾으러 탄천길 버리고 고물상이 있는 옆길로 살금살금 뛰어가 봤다. 아니나 다를까, 네가 다시 너를 보여줄 리 없지! 넌 늘 이런 식이야! 멀쩡히 제 길 가고 있는 아줌마 마음을 빼앗아 불을 지피고 사라지곤 하지.
어쩐지 이번엔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나도 유혹에 나선다. 감을 자르네 마네, 고민 집어 치우고 통째로 내놓아 보았다. 걸려라, 걸려라, 한 번은 걸려라. 곤줄박이든, 박새든, 어떤 녀석이든 걸려라.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멀리서 새소리가 들린다. 누구든 낚일 것이다.
수능을 두어 주 앞두고 있다. 애들 말대로 '어디 간다고 태워주고, 늦었다고 태우러 나가고...' 그런 삶을 살지 않는 부모라 큰 기대도 없다는데. 이제 와 좀 미안하기도 하고, 수능이 얼마 남지도 않아 마음의 위안이라도 줄까 싶어 때를 얻는 대로 운전기사를 자처하고 있다. 조금 더 자겠다고 학교 셔틀 보내고, 버스 타고 가겠다고 하는 걸 운전해서 등교시키고 왔다. 2,30분 차 안에서 나누는 짧은 대화가 꿀 같다.
현승 : 엄마, 내가 윤리와 사상에서 계속 철학자들을 공부하잖아. 그게 갑자기 순간적으로 떠오를 때가 있어. 엄마 : (잘 외우고 있다는 뜻인가? 뭐라고 반응해야 하지?) 오... 그래? 현승 : (뚱한 얼굴로) 엄마가 굳이 티맵을 또 보잖아. 가는 길이 늘 똑같다고 하는데도 굳이 티맵을 보잖아. 그럴 때 답답한데... 그건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잖아. 하지 말란다고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내 마음을 고치는 수밖에 없어. 엄마 : (부끄러움인지 분노인지 미열이 나지만) 스토아학파 말하는 거야? 불편심? 현승 : 아니. 부동심. 아파테이아(apatheia). 정념에 휘둘리지 않는 것.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아파테이아가 딱 떠올라. 엄마가 티맵을 다시 보든 안 보든 그건 어쩔 수 없으니까 난 거기에 휘둘리지 않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 조금 괜찮아져. 엄마 : (뭔가 자존심 상하고, 대견하고) 오... 생활 속 철학인데! 현승 : 철학자들의 말이 진짜 다 우리가 조금씩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더 알고 싶은 게 많아. 엄마 : 맞아, 철학은 제대로 살고 싶은 모든 사람이 다 각자 가진 생각이기도 해. 현승 : 그래서 철학사를 배우는 게 참 좋아. 크게 이해하게 되거든. 엄마 : 오, 엄마도 그런 생각 하는데... 조각조각 영성 공부를 했잖아. 영성사를 배우는 게 중요하더라고. 한 줄로 꿴다는 게... 엄마도 요즘 영성사 공부가 너무 재밌는데... 현승 : (뚱하게)그래. (철학, 아파테이아 얘기가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출발할 때 굳이 티맵 한 번 더 보느라고 시간 보내지 말자고, 진짜 짜증 난다고 하고 싶은 거였는데... 그 말은 귓등으로 듣고 철학 얘기만 하는 게 더 짜증 난 모양. 도통 얼굴이 펴지지 않고, 아파테이아가 이루어지지 않는 모양) 엄마 : 현승아, 너 정말 멋있어. 이게 공부의 여러 차원이 있거든. 스토아니 에피쿠로스니 이런 걸 달달 외우는 머리가 있고, 그 의미를 알아 들으면서 외우는 게 있고, 그 의미를 알아들으면서 나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지식 너머 지혜야. 상황을 읽는 지성과 자기 성찰 능력이 있어야 지혜가 되는데... 우리 현승이는 그걸 다 갖춘 것 같애. 아흐, 우리 현승이 정말 멋있어! 나는 청년들 중에도 이렇게 생각 있는 청년은 거의 못 만나봤어. 현승 : 그건... 아, 아니야. 엄마 : 왜? 그건 니가 엄마 아들이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 현승 : (계속 뭔가 못마땅)응.
이후 스토아, 에피쿠로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흄... 짧은 철학 토크를 했으나 '굳이 티맵을 보는' 엄마에 대한 짜증은 해결하지 못하고 하차하신 듯하다. 아파테이아에 이르지 못했다. 철학, 아무리 배우고 깨달아도 삶으로 도달하는 건 녹록치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수능 철학이라 그런가, 싶기도 하고. 여하튼 꼬마 철학자는 이렇게 무르익어 가고 있다.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가슴뼈가 빠개지는 통증을 느끼며 깼다. 울었는데 울 수 없었다. 울 수 없는 울음을 울다보니 가슴뼈가 빠개지는 것 같았다. 잠을 깼는데도 가슴팍이 얼얼하다. 오전 내내 꿈에 머물다 보니… 할 말 많지만 말하지 못하는 세상의 모든 하위 자아들이 가엾어졌다. 목소리를 갖지 못한 모든 자아들이. 내 안의, 네 안의, 우리 안의.
밤 늦게까지 일정이 있어서 늦게 출근하겠노라는 남편과 채윤이와 나를 위해서 집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때려 넣어서 토마토 파스타를 만들었다. 뭐라도 먹어서, 먹여서 힘을 내게 해야지! 올리브유에 구운 가지는 언제나 진리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영화 <밤에 우리 영혼은, Our Souls at Night, 2017>을 보았다. 80대의 제인 폰더(Jane Fonda)와 로버트 레드포드(Robert Redford)가 주인공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먼저 빠져든 것은 노인이 된 두 거장의 얼굴과 몸이었다. 저렇게 예쁘고 잘생긴 명배우도 늙는구나! 도발적인 대사에 귀가 커졌다. “제안을 하나 하고 싶어요. 괜찮으시면 언제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잘래요?” 애디 무어 역을 맡은 제인 폰더가 루이스 워터스 역의 로버트 레드포드에게 하는 말이다. 영화 속에선 오래 알고 지내던 동네 할아버지에게 동네 할머니가 불쑥 찾아가 하는 제안이고. “섹스를 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밤을 견뎌보려고 그래요.”란다. 영화는 그렇게 시작한다. 혼자 사는 두 노인이 외로운 밤을 견디기 위해 밤을 함께 보내는 것이다. 침대를 공유하면서, 불면이 숙면이 되고 요란하지 않은 우정 또는 애정이 무르익는다. 우리 문화에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설정이지만, 볼수록 묘하게 공감이 갔다. 아, 나이 들어 혼자 산다는 것은 저렇듯 쓸쓸하고 외로운 것이겠구나. 긴 밤을 혼자 지내야 한다는 것은.
최 선생님 댁에 처음 방문하던 때, 저녁까지 먹고 더 놀다 가라는 선생님의 제안에 부담스러워하던 사람들의 말이 생각났다. 당신이 부담을 주는 줄도 모르고 제안을 거절하고 가는 이들에게 서운해하는 것이 최 선생님답지 않아서 의아했었지. 혼자 지내야 하는 밤, 그 외로움이 실감 나게 다가온다. 최 선생님도 최 선생님이지만, 누구보다 홀로 지내시는 어머니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밤이 더 힘들어.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잠이 오면 무슨 걱정이 있겠니. 잠이 들어야 말이지. 밤에는 시간이 더 안 간다.”라고 하시는 어머니는 잠을 위해, 아니 밤을 위해 약을 드셔야 한다. 노년은 이렇듯 쓸쓸하기만 한 것인가? 인생의 마지막은 밤을 견디는 시간인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정신을 차려보니 선생님 댁에 도착했다. 내가 지금 만나려는 노인의 밤은 정말 어떨까? 60대 초반에 혼자 되어 80대 중반이 된 이 노인의 밤은.
노인의 밤은 정말 어떨까
선생님, 영화 보고 왔어요. <밤에 우리 영혼은>요. 보고 왔으니까 말씀해주세요.
무슨 말씀?
아, 왜 그 영화 보시고 ‘내 마음이 저랬구나’ 싶어지셨다면서요. 언젠가 혼자 살 때가 온다고 하시면서 저번에 그러셨잖아요. 부부관계 너머에 뭐가 있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그랬어? 뭐가 있다고 했을까?
아, 진짜 선생님. 낚으신 거예요. 뭐예요?
하하, 낚았다고 하는 거구나. 그래, 영화 한 편 낚았수다.
아니, 선생님. 영화가 아니라 제가 낚였다니까요. 아무튼, 영화 잘 봤어요.
그래, 어떻습디까? 공감이 돼?
네…. 공감이라 해봐야 진정 공감이긴 할까 싶지만요. 아니, 공감이라기보단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할까? 다르게 보이는 것 같아요. 초반에 제인 폰더가 “괜찮으시면 언제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잘래요?” 할 때, 무슨 소리야? 했거든요. 그런데 아직도 그 대사가 마음에 남아 있어요. 뭔가, 아, 그렇겠구나…. 하는 느낌이요.
뭐가 그렇겠구나~아, 싶다는 거야?
음…. 혼자 사시는 시어머니의 마음이 조금 이해가 됐어요. (실은 영화 보는 내내 최 선생님 생각도 많이 했는데 그걸 말씀드릴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외로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거든요. 가족이 함께 어머니 뵙고 올 때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혼자 서서 인사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늘 아파요. 매번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의 느낌이 있어요.
흠…. 그렇지. 뭐….
선생님은 그 영화를 어떻게 보셨을까 궁금해요.
그 댁 시어머니나 나나 다를 바 없네. 날 보고 가는 우리 아들네도 정 선생 같은 마음이겠지 싶고. 영화가 이런 혼자 사는 노인네 마음을 잘 읽어줘. 내게도 저런 마음이 있겠구나 싶어. 영화가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알아주더라니까.
생각해보면 이제 선생님과 대화하지 못할 주제가 없다. 술술 말이 나온다. 어떻게 생각하실까, 헤아릴 필요 없고 포장할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하고 듣게 된다. 전에 제주 공항에서의 대화 이후로는 더욱 그렇다. 불편한 감정도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 있고, 거의 받아주신다. 이 연세에 어떻게 이렇게 선입견 없이 사람을 대하고, 유연하실까 싶다. 무엇보다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이시는 태도는 참으로 존경스럽고 배우고 싶은 부분이다. 그런데 이런 순간엔 좀 어쩔 줄 모르겠다. 민망하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쓸쓸한, 외로운…. 같은 형용사로는 부족한, 뭐랄까 노년의 실존 같은 것에 대해서는 말이다. 솔직히 영화가 읽어냈다는 선생님의 마음, 쓸쓸한 노인의 마음을 듣고 싶지가 않다.
아아…. 그, 그럴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모르던 제 마음을 영화가 알려주고 소설이나 드라마가 보여줄 때가 있어요. 그, 그러셨구나….
이 사람 왜 그래? 뭘 그러셨구나, 야. 정신이 어디 다른 데에 가 있는데. 허허.
(어휴, 정말 귀신 같은 최 선생님!) 헤헤, 선생님. 다른 데 가긴요. 선생님도 모르는 마음이 있으세요? 왠지 선생님은 세상 모든 사람 마음 다 아실 것 같은데요. 아! 다른 사람 마음은 다 알아도 내 마음을 모르는 경우가 있긴 하죠.
그렇지. 물론! 나는 젊어서부터 혼자 잘 지내는 사람이었어요. 공부도 일도 혼자 하는 게 편했고. 남편 먼저 천국에 가긴 했지만, 실은 이전의 결혼생활 중에도 상당히 독립적이었어요. 나는 내 할 일로 늘 바빴고, 남편도 남편의 일이 있었으니까. 언젠가 말했었죠? 남편과 친정어머니를 비슷한 시기에 천국에 보내고, 삶이 무너지고, 그때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이후 자연스레 혼자 지내면서도 외롭다는 생각은 안 해본 것 같아.
아아, 그러시군요! 네, 그러고 보니 그래 보이세요. 뭐랄까 어쩐지 감정에 잘 휘둘리지 않으시는 것 같았어요. 아무래도 감정적인 사람들이 외로움도 더 많이 느끼겠지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소만.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꼭 좋은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니까. 내가 외롭지 않았던 게 아니라, 안 그런 척 나조차도 속이고 살았던 거야. 외롭지 않으려고 얼마나 일을 만들게요. 내가 이 나이에도 집에 상담실을 차려놓고 상담을 하고 있잖아. 외롭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야. 자존심 때문에 내 외로움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어머나, 선생님. 너무 솔직하신 거 아녜요?
내가 정 선생 앞에서 솔직해야지 누구 앞에서 솔직하겠어. 아들 며느리 앞에서 나 외롭다, 할 수 있겠소?
아들 며느리 앞에서는 하시면 안 되나요? 저의 어머니는 외롭다, 혼자 먹는 밥이 맛이 없어서 밥을 못 먹으니 건강이 안 좋아진다, 하시는데요.
자존심이라니까! 나 자존심 강한 할머니야. 정 선생한테만 무장해제 한 거라고.
헤헤. 정말 선생님….
몸의 외로움
그런 면에서 그 영화가 참 좋더라고. 미국 사회라고 쉽게 받아들여질 설정은 아니야. 혼자 사는 노인네들이 밤이 외롭다고 함께 밤을 보내면서 우정을 쌓는다는 게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현실이지. 하지만 그 설정을 가능하게 하는 외로움만은 진실이야. 밤이면 더 외롭고, 그 외로움은 몸의 외로움이지.
몸의 외로움이요?
그래. 몸의 외로움! 지난번에 정 선생이랑 성에 관한 얘기를 신나게 하고 났더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혼자 사는 외로움은 혼자 자는 외로움이구나. 그래서 그 영화 생각이 났어. 몸이 그저 몸이 아니잖아요. 내 인격, 내가 걸어온 역사, 감정과 욕구, 생각을 담고 있는 게 내 몸이니 몸은 그냥 살덩이가 아니야. 지난번에 정 선생이 그런 말을 했지. 인간이 몸으로 나누는 최고의 친밀감 표현이 섹스라고. 접촉의 욕구, 스킨십의 욕구는 인간의 기본 욕구 중에 하나잖아요. 친밀감의 가장 원초적인 표현이라고!
아! 선생님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몸의 외로움이요. 맞아요. 그렇다면 모든 외로움은 몸의 외로움이에요.
알아들었지? 그 왜 애착 이론 중에서 할로우(Harry Frederick Harlow)의 실험 알지요?
알죠. 모형 어미 원숭이 실험 말씀하시는 거죠? 두 마리의 어미 원숭이 모형을 아기 원숭이들이 있는 공간에 두었는데요. 한쪽은 철사로 만든 어미 원숭이이며 젖을 먹을 수 있게 해두었죠. 다른 한쪽은 부드러운 털로 만든 모형이고요. 헌데 아기 원숭이들이 젖을 먹어야 할 때는 철사로 만든 어미에게 가지만 그 외 대부분 시간엔 부드러운 털을 가진 쪽에 가서 놀더라는 거요.
그래, 스킨십이 필요한 거예요. 몸으로 부비고 부대끼며 친밀감을 확인하는 것이 몸을 가진 존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야. 우리는 몸이라는 한계를 가진 인간이지 않아요?
아, 선생님. 저 따끈한 경험이 있어요. 코로나에 걸렸었는데요. 제가 가족 중에 제일 먼저 걸렸어요. 재택 격리가 막 시작되던 때여서 화장실 있는 안방에 딱 격리되어 있었거든요. 어느 순간 널따란 침대가 너무 넓게 느껴지는 거예요. 평소 남편에게 좀 떨어지라고 엄청 구박하거든요. 제발 넓은 침대를 넓게 편하게 써보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소원성취했지 뭐예요. 넓디넓은 침대에 덩그러니 누워 있는데 식구들이 식탁에서 식사하는 소리가 들려요, 시답지 않은 농담에 웃는 소리, 숟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아득하기만 하고, 벽 하나 사이에 두고 있는데 영 다다를 수 없는 가족들의 몸이 그렇게 그리운 거예요. 침대 이렇게 넓은데 저쪽으로 좀 가서 떨어져 누우라며 남편을 구박했던 것에 회개가 되더라니까요.
내 말이 그 말이야. 평생 강의하고 상담하면서 정서적 유대, 애착, 스킨십에 대해 얼마나 많은 말을 해댔겠소, 내가. 지금이야 심리학 이론도 워낙 발전하고 섬세해졌지만, 내가 공부하던 초기에는 할로우 실험을 정말 많이 언급했거든. 말로는 그렇게 가르쳤지만, 정작 그 의미를 나는 몰랐어.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는 몸의 언어뿐이니 많이 안아주라, 어쩌라 부모교육도 하고 그랬지만. 정작 내 아들에겐 그러지 못했고. 남편과도 마음이야 정이 있었나 모르겠지만, 몸으로 살가운 기억은 없어요. 우리 세대 부부가 다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지 간에 말로만 떠들어댄 알맹이 없는 가르침이었지. 나는 살지도 못하는 걸 가르치며 그걸로 밥을 먹고 살았으니.
아, 선생님. 정말 너무나…. 선생님은 정말….
무슨 말이야. 왜 그래요? 말을 하다 말고 하고 잘라 먹고, 잘라 먹고 그래.
아니요. 그런 걸 인정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요…. 잘 못 봐서요. 어르신들께서 잘못을 솔직하게 말씀하시고 인정하시는 것 잘 못 봐서요.
에이, 부끄러운 얘기지. 내가 얼마나 머리로만 살았고 교만했는지 많이 생각해요. 신앙 깊은 친구 하나가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그야말로 신앙이 깊은 친구이거든. 강직하고 무엇보다 의지가 강해요. 젊은 날에 일찍 일에서 물러난 남편 대신 집안을 일으키고 자녀들 잘 키워내고, 그걸 다 신앙의 힘으로 했거든. 남편 사별 후 그렇게 강직했던 친구가 외로움에 힘들어하는 거예요. 제발 출근하는 남편과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집에 혼자 좀 있어 봤으면 싶다고, 온종일 남편과 붙어 있는 게 지긋지긋하단 얘길 평생 했거든. 그랬던 사람이 혼자 지내면서 외로움에 못 이겨 밤마다 술을 한두 잔씩 마셨나 봐요. 그 술이 과해져서 중독 수준이 되었다고 친구 아들이 도움을 청해왔어요. 신앙의 힘으로 삶을 버티던 친군데, 팬데믹으로 예배는 물론이고 새벽기도에도 못 가는 상황도 작용했을 거예요. 친구 얘길 들어보니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 남편 코 고는 소리는 물론 숨 쉬는 소리도 듣기 싫어서 사별 전에 이미 각방 쓴지는 오래였대. 혼자 살다 보니 사람 몸의 온기가 이렇게 필요한 거구나 싶었다고. 자신이 이렇게까지 될지 몰랐고, 자식들에게 알려져 부끄럽기까지 하다며.
아아….
그런데 나는 차라리 이 친구가 정직하단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 몸이 정직하달까. 그 와중에 <밤에 우리 영혼은>을 봤고, 마침 지난번 정 선생 강의하고 우리 집 왔을 때 나눴던 성에 관한 대화 이후에 내가 참 나를 속이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 평생 머리로만 살아온 거예요. 몸처럼 정직한 것이 없는데…. 애정과 친밀감은 몸으로도 내보일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왜요, 선생님. 이제라도 얼마든지 표현하실 수 있잖아요. 아드님 가족이 선생님께 극진하시고 특히 손녀딸들과 허물없이 지내시잖아요.
그게 아니야. 90년이 다 되어 가는 몸이 굳어버려서 쉽지 않아. 이제는 노인네 냄새날까, 가까이 다가가는 게 망설여지기도 하고 말이야. 가만 생각해보니 손녀들이 나를 좋아하긴 하지만 스킨십 하는 경우는 거의 없더라고. 이번에 깨달았어요. 그게 다 내가 살아오고 관계 맺어온 결과야. 내 몸에 스킨십의 습관이 없어. 친밀감을 표현하는 몸의 언어로 치면 나는 장애의 수준이라니까. 그러니 외로움이 있다 한들 그것이 외로움인 잘 감각도 못한다니까. 그래서 차라리 내 친구가 정직하다는 거예요. 다 늙어 뒤늦게 깨달아졌어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 하하. 나 자존심 강하다니까. 불쌍한 노인네 취급 사양이오!
불쌍이라뇨! 아니에요. 불쌍은요. 실은 선생님, 그 영화 보면서 저의 어머님 생각, 그리고 선생님 생각도 많이 났어요. 로버트 레드포드가 혼자 식사하고 설거지하는 장면, 티브이 뉴스 켜놓고 신문 보는 장면. 실감 나게 다가오는 면이 있더라고요. 어머니는 지금 어떡하고 계실까? 선생님은 뭘 하실까? 자꾸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특히 저의 어머니께서 밤에 시간이 너무 안 간다, 혼자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다, 하는 말씀들이 깊이 이해가 됐어요.
몸으로 함께 있는 '때'를 누리기
아하. 그래서?
그래서요? 그래서…. 아, 그런 생각까지 해봤네요. 저의 어머니가 언어 비언어적으로 외롭다고 하시는 말씀은 우리 가족과 같이 지내고 싶다는 뜻이거든요. 턱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마음이야 그러시지만, 막상 같이 살면 분명 불편한 부분이 있을 거고, 저도 감당할 자신이 없고요. 결국, 서로 불행해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왔거든요. 그런데 요 며칠 모실까 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고 있어요. 친정엄마와 비교도 되고요. 엄마는 90이 넘으셨는데 믿어지지 않을 만큼 몸과 마음이 건강하시거든요. 동생네 가족과 사시는데 늦게 본 손주들의 왁자지껄 속에 계세요. 엄마의 건강이 거기서 오는 것 아닐까 싶어요. 선생님 친구분이 말씀하셨다는 그 사람의 온기 말이에요.
반대!
네?
나는 반대라고. 어머니 몫으로 두어요. 같이 산다고 외롭지 않을 것 같아요? 천만의 말씀! 어설프게 착한 며느리 하다가 괜히 정 나지 말고. 친정어머니와 단순 비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 그렇죠? 제가 너무 앞서갔죠? 단호하게 말씀해주시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요. 그 영화 보고 공감이 될수록 죄책감이 함께 들었거든요. 어머니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러라고 영화 낚시질을 한 게 아니에요. 영화 낚시질이라고 했던가? 뭐라고 했지? 낚았다고 했나? 아무튼, 남의 외로움 신경 쓰지 말고 당신 외로움이나 잘 간수해요. 하하.
네, 선생님 저는 외롭지 않아요. 아, 그렇진 않구요. 외롭죠. 외롭긴 하지만, 그거야 저만 그런 게 아니고 누구에게나 있는 외로움 정도죠. 갑자기 정호승 시인의 시가 생각나네요.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하하하. 그 정도는 외로워요.
내 말이! 제 몫의 외로움이 있는 거예요. 노인은 노인의 몫이 있는 거고. 어머니가 당신네 가족과 함께 살면 그 외로움이 가실까? 그렇지 않을걸. 평생 만들어온 외로움의 방식이야. 특히 몸으로 만들어온 방식이니까. 내가 그런 것처럼 말야. 자식이고 누구고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영화에서도 노인네 둘이 서로 보듬잖소. 그마저도 오래 갈 수 없고. 지금의 외로움은 살아온 날의 결과야.
아하, 좋은 노년은 없다, 좋은 중년의 결과라고 하셨던 말씀 생각나네요.
그걸 기억하라는 거야. 그 영화 보고, 나나 당신 시어머니 보면서 늙어 외로울 걱정 미리 가져다 하라는 것 아니야. 할 필요도 없어요. 지금 누려. 나처럼 어리석게 몸뚱아리 다 늙어 깨닫지 말고요. 가까이 있는 사람 보듬고, 손잡고, 안아주고 하면서 누려요. 늙어 외롭게 지내는 거? 너무 걱정하지 마. 살만해. 내가 지난번에 정 선생과 성에 관한 얘기 나누고 크게 깨달았어요. 이런 가정은 해볼 필요도 없겠지만, 다시 돌아간다면 남편 죽기 전에, 몸으로 함께 있을 때 그 순간을 누리겠다 싶어요. 아이를 다시 키운다면 몸으로 더 많이 부벼주고 말야. 어쩌면 그 아쉬움 때문에 더 외로워. 내 친구 말이에요. 그렇게 싫었던 남편 없어졌는데 더 외로워진 것 봐요. 아쉬움과 후회가 우울이 된 거지 뭐야. 그러니 인생의 밤이 오기 전에 남편과 몸으로 나누는 사랑을 충분히 누리라고. 의무방어전이든, 꼴 보기 싫은 남편이든 지금을 누리는 것 외에는 우리 외로움에 대처할 다른 방법이 없어. 이미 잘 하는 것 같지만! 영화는 이 얘기해주고 싶어서 낚은 거라우.
김난도 교수의 책에 나오는 ‘인생 시계’라는 계산이 있다. 80세를 수명으로 하여 하루 24시간으로 환산한 것인데, 80을 훌쩍 넘기신 선생님은 계산대로라면 인생의 시계 밖에 계신 거네! 깊디깊은 밤의 시간을 살고 계신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나는 오후 4시 12분이다. 밤의 어둠이 오려면 아직 더 있어야 한다. “밤에 우리 영혼은”이라는 영화의 제목을 다시 떠올려본다. 선생님과 얘기 나누고 보니 “밤에 우리 몸은”이라 읽어도 의미가 통하지 싶다. 굳어버린 몸처럼, 세월로 고착된 관계나 삶의 방식을 노년이 되어 고칠 수는 없다. 최 선생님조차도 그럴 수 없음에 회한을 느끼시는 것을 보면서 생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인생의 깊은 밤 시간은 햇빛보다 더 밝은 천국에 가깝기에 가장 캄캄한 시간일지 모르겠다. 생의 마지막 시간에 우리 몸과 영혼은 처절한 외로움과의 사투를 벌이는 것이 숙명일지도. 인생의 깊은 밤에 든 지혜로운 노인의 말, 마주하기 민망한 쓸쓸함을 가진 노인의 말을 무겁게 마음에 심어본다. 몸의 장막이 무너지기 전에, 오늘, 여기, 몸으로 부대끼는 사람들을 몸으로 사랑하겠다.
2022년 10월 25일. 아침 운동 갔다 돌아오는 길, 고개를 푹 떨구고 걸는 중이었다. 짹짹짹짹, 귀를 잡아 이끌어 위로 향하게 하는 소리이다. 새 한 마리가 혼자 허공을 향해 고래고래 울음을 내뱉고 있다. 왜, 왜애, 무슨 일인데? 왜 혼자 그러고 있는데? 고개를 들고 가만 서서 들어보니, 울음 섞인 성토 같기도 하다. 무엇이 됐든 '혼자' 저러고 있는 게 마음이 쓰인다. '혼자'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바로 옆 나무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혼자가 아니었구나, 둘이 대화 중이었구나! 둘이 주거니 받거니, 어는 순간엔 함께 짹짹짹짹 꽥꽥꽥꽥한다. 하나는 제자리에, 또 하나는 이 가지 저 가지를 옮겨 다니며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대화 중에 움직이는 게 예의가 아니라 끝까지 함께 있으려 했는데, 둘의 대화가 끝나지 않아서 내가 먼저 털고 나왔다. 한참 고개를 쳐들고 있었던 탓에 뒷목이 뻐근하기도 하고...
교회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 모임을 시작하는 날이다. 벌써 내려앉는 마음, 벌써 치밀어 오르는 뜨겁고 차거운 분노, 벌써 띵한 통증이다. 하늘의 전령이며 우리들의 선생님인 새가 메시지를 가지고 왔다. 고개를 들어 높은 곳을 바라보라고. 함께 쓰고, 말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기억하고 떠올려 보라고. '혼자'가 아닌 게 얼마나 큰 힘이냐고. 발치에 떨어진 낙엽 하나를 주워와서 책갈피에 꽂았다.
중학교 어느 시험 기간에 (딴에는) 감정 폭발과 함께 내놓은 절규였다. 10시 안 되어 자려는 아이에게 '그래도 시험 기간인데 조금 더 공부를 하는 게 어떠냐? 성적이 문제가 아니라 뭔가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다못해 엄마도 늘 하는 강의를 다시 고치고 하면서 최선을 다한다'는 말에 분노 폭발하며 한 말이다. 그리고 시험공부가 다 끝났다고 했다. "어느 과목은 싫어하는 것이라 아예 안 하기로 했기 때문에 두 과목만 공부하면 된다고..."
과연 현승이는 그렇게 살아왔고, 살고 있다. 맹목적으로 최선을 다한다거나, 자기를 갈아 넣는 그런 삶을 살지 않는다. 고3이다. 수능을 한 달 정도 앞둔 어느 토요일 아침 <5분 뚝딱 철학>을 읽는 여유있는 모습이란...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삶'이라는 자기 철학에 진정으로 부합하는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엄마가 어릴 적에 나를 잘 파악해준 것 같아."라고 말한 것은 수시 원서를 쓰고나서 였다. 국문과와 철학과를 지원했는데, 블로그 카테고리 중 '어린 시인, 꼬마 철학자'가 딱이라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살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겠다는 뜻이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내며 심리학과, 행정학과... 같은 전공도 찔러봤지만, 고3 되어 선생님과의 멘토링을 통해 확신하고 선택한 학과는 국문과와 철학과이다.
수능 최저를 위한 집중 공략 과목도 딱 '국어'와 '윤리와 사상'이다. 역시 좋아하는 과목을 선택하여, 최선을 다하지 않고 즐기는 것이다. 얼마나 살아 있는 공부를 하는지, 아빠와 마주 앉으면 철학 이야기이다. 인문학 수업에서 배우고, '윤리와 사상' 수능 준비하며 외우는 철학 이야기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을 꿰면서 요즘은 철학자들의 에니어그램 유형을 추정하고 있다.
아빠가 주중에 <5분 뚝딱 철학>이라는 책을 사주었고, 주말 아침 머리에 까치집을 이고 5분 반짝 독서 중인 것이다. 학교 들어가기 전 어느 휴일, 혼자 일어나 늦잠 자는 엄마빠 깨우지 않고 <마법 천자문> 읽던 그날과 다르지 않은 느낌이다. 아, 주로 서양철학을 더 많이 공부하긴 하지만 동양철학이 자신에게 더 맞다고 끌린다고 했다. 노자나 장자에 끌린다고. 무위자연... 최선을 다해 살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