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이랑 같이 장을 보면서 저녁으로 뭘 해줄까, 했더니 된장찌개를 주문했다. 당연히 차돌박이 얹은 된장찌개려니 하고 냉동 고기 쪽으로 향하니 아니란다. 고기 안 들어가도 된다고. 고기 말고 까만 소라 같은 거 넣으면 좋겠다고. 우렁이를 말하는 것이다. 냉이도 한 팩 사서 된장찌개를 끓이는데. 채윤이가 나와 반색을 하면서 "우렁이와 냉이라고?!!!!! 와, 2023년 중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다." 어깨춤을 추었다.
❝개안한듯하다. 하나님과 나 자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내면을 봐야 한다는 말은 늘 하지만, 실제로 체험했다. 이 여정을 계속하고 싶다.❞
작년 여정에 함께 하셨던 목사님의 후기입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여정을 통해 공황장애, 수면장애, 위장장애가 자연스럽게 나은 일들도 있답니다. 물론 나를 마주하는 더 아픈 과정을 용기 있게 통과하신 덕이긴 하지만요.
❝문제가 생기면 밖에서 답을 찾았는데 내적 여정을 통해 '내 안에서 찾아야겠다. 이미 붙들고 있는 걸 놓아버려야겠다'라는 마음을 가진다. centering prayer로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내 존재로 있는 것을 배운다.❞
재수강하신 벗님의 후기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만나는 여정입니다.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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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로 살아.” “나로 살아야지.” 한 번쯤 하거나 들어본 말입니다. 한 번쯤 다짐해 본 것이기도 하고요. 나로 살고 싶은데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얼마나 소중하고도 막연한 질문인가요.
내적 여정은 에니어그램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나의 실재를 보고, 그 너머 ‘하나님 닮은 존재’로 지어진 나를 찾아가는 영적 수련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라면, 하나님 지식은 반드시 자기 지식과 닿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궁극적으로 ‘치유’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로 에니어그램 1단계를 시작하여 ‘내게 하나님은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만나는 영성과정까지. 한 달에 두 번씩, 5개월의 시간 동안 전에 해보지 않은 질문, 전에 해보지 않은 기도의 여정을 걷습니다.
✔ 일정 : 평일(금요일), 주말(토요일) 과정이 있습니다. ✔ 장소 : 온라인 줌(zoom), 단계별 2회기, 6시간 ✔ 인원 : 12명 ✔ 비용 : 12만 원(재수강 6만 원) / 단계별 ✔ 문의 : 010-4235-8020 ✔ 하반기 여정 신청은 7월에 받습니다.
친구의 축 처진 어깨, 자신감 잃은 말투가 눈에서 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내 일처럼 마음이 무겁다. 늦둥이로 얻어 애지중지 키우는 아들과의 갈등으로 생사를 오가고 있다. 생사가 실제 생사겠는가. 마음이 죽어간다는 뜻이다. 시들어가는 친구의 마음이 보이는 듯하다. 커다란 덩치에 가정, 친구들, 교회 공동체…. 어디서든 해결사 역할을 하는 남자 사람 친구이다. 한 교회에 다니며 중고등부 때부터 알아왔다. 그 시절 친구 모임이 느슨하게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 최근에 시간들이 많아져서인지 더 자주 얼굴을 보고 있다. 친구 J는 우리 중 제일 늦게 결혼했다. 아들 둘을 내리 낳았는데 지금 현재 그 무섭다는 중2, 중3이고. 사춘기를 맞은 첫째, 그 뒤를 이어 다른 방식으로 질풍노도에 발동을 걸고 있는 두 아들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모임에서 쉽지 않단 얘길 가끔 했지만, 어느 집에나 있는 일이려니 했다. 우리 아이들도 지나온 시간이니까. 도움을 구할 것이 있다 하여 만나서 얘기를 나눴다. 무기력과 우울감을 호소해 왔다.. 성격이 불같은 면이 있긴 하지만, 정의를 사랑하는 친구이기에 그 뜨거움은 용기와 당당함으로 보였다. 적에도 내겐 아름다운 강함을 선물로 가진 친구였다. 그런데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고 한다. 때로 극단적인 생각이 든단다. 기도도 어떤 노력도 다 의미 없는 것 같다고. 불면증으로 잠을 못 잔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얼굴은 초췌해졌고 전 같은 열정이나 밝은 모습이 아니었다. 그 큰 덩치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구부정하게 앉은 것이 내가 아는 강한 용사가 아니었다. 뭐든 맞서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다 여기며 살아왔는데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해결하려고 나서면 자꾸 폭력을 쓰게 된다고. 그러고 나면 후회가 밀려오고, 아이와는 더 멀어지고, 인생 잘못 살아온 것 같단다. 실패한 인생이라며 자괴감에 빠져 내놓던 말이 귀에 쟁쟁하여 마음이 아프다. 다행히 상담이라도 받아볼까 싶다고 하여 최 선생님께 연결을 시켰다.
자식 문제엔 다들 무력한 해결사
정말 좋아하는 친구인가 봐. 친구야 내가 안 봤으니 모르겠다만, 정 선생이 죽어가는 얼굴인데. 당신 친구 아니어도 마음 써서 상담할 텐데, 염려하지 말아요. 잘 부탁한다는 말을 몇 번을 하는 거야. 감사해요, 선생님.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함께 지낸 친구 모임이 있어요. 서로 모르는 게 없고요. 이 친구는 유난히 더 마음이 가는 친구예요. 남자라며? 뭐, 젊을 때 좋아했었어? 에이그 선생님. 남자 사람 친구라니까요. 남자 사람 친구는 또 뭐야. 그냥 친구라 이거지? 암튼 각별하구나. 그렇게 마음을 쓰는 것이. 말하자면 저희 모임의 대장이거든요. 청년부 때 교회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불의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함께 항의하고 그랬어요. 이 친구가 앞장섰고 몸을 사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대표로 불려 가 야단도 맞고, 교회를 파괴하는 녀석들이라고 정죄도 당하고 어려움을 많이 겪었어요. 그런저런 일로 늘 고마운 친구예요. 정말 용감하고 강한 친구거든요. 아하, 그래서 친구의 약한 모습이 크게 보이는구먼. 네, 그런가 봐요. 해결사죠, 해결사. 그런데 인생의 가장 어려운 문제 앞에서 무력하다는 거예요. 무력함 너머 생의 의미까지 잃은 것 같아서 걱정이 많이 되네요. 저러다 정말 뭔 일 저지르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러게요. 제가 과도하게 감정이입이 되는 것 같아요. 그래, 정 선생이 많이 슬퍼 보여. 왜 그럴까요. 실은 저희 아이들도 사춘기 지났으니까요. 그 심정 저도 모르는 바 아니죠. 자칭 타칭 엄마 중독자라 했던 아이의 눈빛에서 저에 대한 냉소, 아니 어쩌면 혐오 같은 것이 느껴졌을 때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이었어요. 무너졌죠. 이렇게 우리 사이는 끝난 건가? 그 사랑스러웠던 아이가…. 아, 그 운동화 좋아하는 철학자 아드님 말인가? 네, 선생님 정말 기억력 끝내주세요. 그 녀석도 그렇고. 사실 첫째 사춘기 때는 처음이라 더 당황스러웠죠. 사춘기를 심하게 했어? 아니요. 사실 여느 집에 비하면 그리 요란하지는 않았어요. 친구네 아들들 얘길 들어보면 저희 아이들 사춘기는 사춘기도 아니죠. 그래, 밖으로 드러나는 갈등이 문제가 아니라 아이가 부모로부터 분리되고 떠나는 게 사춘기니까. 부모로서 상실감이야 비슷하겠지. 맞아요. 상실감요! 애가 말을 안 듣거나, 맥락 없는 화를 내고 하는 것들은 각오도 되어 있었고요. 어떻게 견디겠더라고요. 그런데 저나 제 아빠를 향한 냉소나 불신의 눈빛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어요. 그때 감정이 상실감이에요. 그 귀여웠던 아이 어디로 갔지? 이런 거죠. 친구 얘길 들어보면 그 눈빛이 온갖 행동으로 다 나오는 거고요. 때려도 보고, 용돈도 끊어보고, 달래도 보고 해도 개선이 안 된다는 거예요. 사춘기가 어떻게 개선이 돼. 통과의례인데. 어떻게든 터널 끝까지 가서 빠져나오길 기다려야지. 아, 그렇죠…. 그러엄. 정 선생 아이들 다 컸잖아. 안 그럽디까? 그렇죠. 둘째도 이제 눈에서 독기가 빠져가는 것 같아요. 독기라? 네, 딱 사춘기 눈빛이 있거든요. 눈에 독이 들어가고, 얼굴은 막 못생겨지고, 머리에서 냄새나고…. 하이튼 딱 그 표징이 있어요. 하하. 눈에서 독기가 사라지면 사춘기가 끝나는 거예요. 맞아요. 그런데 고통 중에 있는 친구에게 사춘기 결국 지나간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런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렇지. 아이는 아이대로 두고 부모의 인생길을 가야지 뭐. 그래. 상담은 친구가 자원한 거요? 정 선생이 권한 거요? 뭐라도 해야겠다고요. 저한테 상담받을 수 있냐는데, 저랑은 편하게 수다 떨고요. 상담을 받고 싶으면 선생님을 소개하겠다고는 했어요. 생각해본다 하더니 연락을 해왔더라고요. 상담까지 받아야 하는 제 처지가 처량하다면서요. 하하. 상담까지 받아야 하는 게 처량하구나. 그렇게들 생각하지. 대단히 문제가 많아서, 수선이 필요한 인간이라서 상담으로 고쳐야 한다고. 아직도 사람들이 상담이나 정신과 치료를 그렇게들 보지? 그러니까요. 선생님과 자주 얘기했듯, 그나마 자발적으로 상담받으러 오는 분들은 희망이 있는 건데요. 제 친구도 지금 괴로워하는 걸 보면 안타깝긴 하지만 결국 나아질 거라 믿고요. 게다가 선생님께서 만나주실 거잖아요.
아들 사춘기가 들고 온 초대장
그래, 나라고 별 뾰족한 수는 없지만, 중년에 자기를 돌아볼 기회를 가진다는 건 무조건 좋은 일이야. 상담이든 무엇이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 친구는 영적 초대장을 받은 것만은 확실해요. 아들 사춘기가 들고 온 초대장이지. 영적 초대장이요? 사춘기가 가져온 초대장이라…. 그래요. 아, 왜 카를 융이 그랬잖아요. 자신이 만난 중년 이후의 내담자는 모두 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왔다고. 표면적으로 가져온 문제는 다 달랐지만 결국 상담하다 보면 영적인 문제였다고. 아, 그렇죠. 카를 융이 중년을 중요하게 말했죠. 선생님도 늘 중년, 생의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에 대해 말씀하시는 그 맥락이군요. 제 친구도 그럴 수 있겠네요. 단지 아들과의 갈등이 문제가 아니에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하나님께서 인생을 이끌어가시는 것이 참으로 신기해요. 생애 발달에서 아이 사춘기와 부모의 중년기 또는 갱년기가 거의 겹치거든. 교차한단 말야. 그 교차점에 어떤 신비가 있는 것 같아. 오, 어떤 신비일까요? 알 것도 같고요. 내 보기에 인간 발달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두 번의 시기가 있어. 언제예요? 일단은 사춘기겠죠. 아이가 자고 일어나면 키가 커서 나와요. 그렇지. 신체발달이 어마어마하지? 2차 성징과 함께 말야. 그 빠른 신체발달에 성적 에너지가 분출하는데 정신적 성장이 따라가질 못하고. 스스로 그 분열을 어쩌지 못해서 하는 행동들이 사춘기의 질풍노도 행태일 거야. 아, 그렇겠네요. 몸은 갑자기 어른이 되어 버렸는데, 정신은 어린애니…. 맞아요. 딱 그런 것 같아요. 하는 짓이 말할 수 없이 유치한데, 제 딴에는 어른인 척한단 말이죠. 아주 그냥 꼴 비기 싫죠. 척 보다는, 어느 정도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겠지. 어설프게…. 하하. 그러면 또 한 시기는요? 정해진 답인가요? 중년기? 그래. 영적 발달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때. 내 식대로, 내가 느끼는 대로 말해보자면……. 영적 발달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데 여기서도 내 정신이 그걸 따라가질 못해. 흠…. 정신적 발달이 영적 발달을 따라가지 못한다…. 어려운데요, 선생님. 어렵지. 그 왜 어떤 공허감, 허무감 같은 것 있잖아요. 선생님 친구가 했다는 말. 내가 뭐 하고 살았나 싶다. 인생 잘못 살아온 것 같다. 실패했다. 살 이유를 못 찾겠다…. 같은 말들. 저만치 가는 영적 수준을 정신적인 것이 따르지 못하는 괴리 같은 것 아닐까. 으으…. 더 어려워요. 그러니까 허무감 같은 게 영적 발달에서 오는 감정이라고요? 의미를 찾는 거지. 인생의 진짜 의미. 그러니 사춘기가 고맙지 뭐야. 중년기 영적 초대장을 받아 든 제 부모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딱 알려주니까. 엇, 뭐라고 알려주는데요? 하하. 그걸 보여줘야겠다. 내가 강의하다 즉흥적으로 칠판에 그렸던 건데 말이야. 그 옆에 메모지 좀 줘 봐. 내가 그래프를 그려봤다우. 자 봐봐. 이건 부모와 자녀 사이 존재 힘의 그래프야. 아래쪽이 아이 위쪽이 부모라 생각해 봐요. 처음 만났을 때 어때? 갓 태어난 아이는 완전히 무력하고 의존적 존재지? 아이의 힘은 바닥이다. 그렇지? 부모의 전적인 보살핌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어. 부모의 힘은 최대치가 되겠지. 24시간 붙어서 돌봐야 하잖아. 그런데 아이가 뒤집고, 기고, 걷기도 하며 기동력이 생기고. 존재의 힘이 커져. 그러면 점점 부모의 돌보는 힘이 이렇게 줄어드는 거지.
오호! 그러네요. 와아아, 맞아요. 선생님. 처음에 끄덕끄덕 목도 못 가누는 걸 안는데 잘못 만지면 어떻게 될까 봐 어쩔 줄 모르던 순간이 생각나네요. 얼마 안 가서 목을 빳빳하게 세우는데 신기했어요. 그렇군요. 아, 그랬던 적이 있었죠. 식당에서 밥 먹다가도 ‘엄마, 쉬’ 하면 데리고 화장실 가야 하고…. 그런데 혼자 화장실 가는 것도 엄마에겐 얼마나 자유예요. 그러니까. 육아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 거야. 갑자기 가장 무력한 상태로 내 앞에 나타난 한 존재를 24시간 책임져야 하잖아. 다행인 것은 시작이 최고점이고 갈수록 그 힘이 줄어든다는 거지. 떠나보내는 과정이라는 거야. 젖을 떼고 기저귀를 떼고 해 봐.. 점점 부모 손이 자유로워지지. 그렇게 둘 사이에서 힘의 그래프는 반대 방향으로 변하는 것 아니겠어? 아하, 참 이것 어렵고도 신박하군요. 그러면 사춘기 아이가 중년 이후를 어떻게 살으라고 딱 가르쳐 준다는 거죠? 정답 나왔잖아. 힘 빼라고. 이기지 말라고. 이길 수 없다고. 그래프를 보라고.
도(道) 중의 도는 내비도!
아아…. 어, 어려워요. 그러면 제 친구는 아들들에게 무조건 져야 하는 건가요? 중년의 초대장을 받아 든다는 건 그런 뜻인가요? 훈육하지 말라고요? 글쎄. 나는 훈육의 골든타임이 있는 것 같아요. 인간 된 도리를 가르치고, 기본적인 생활 습관을 가르치는 것, 더 나아가서 신앙의 훈련까지도 사춘기 이전까지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사춘기는 아이들이 자신을 한 성인, 한 존재로 받아들여 달라는 몸부림을 하는 거거든. 부모 가르침이 들리겠수? 옳은 말씀 하는 부모 말에 반발심만 들걸. 내가 상담했던 아이는 그러더라고. 부모가 잔소리 시작하면 속으로 “너나 잘하세요.”.” 하며 딴생각한다고.. 그랬던 것도 같네요. 어쩐지 사춘기 때 애들 얼굴 떠올리니 그랬을 것 같아요. 맞아요. 가르치려 할수록 엇나갔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막 나가는 아이를 그냥 둘 수는 없잖아요. 친구가 그렇게 말했어요. 그냥 두면 애 인생 망칠 것 같다고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부모가 힘을 쓸수록 아이는 더 저항하는 것 같아요. 하하, 그래서 엄마들끼리 그런 말을 하죠.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도 닦는 심정으로 살아야 하는데요. 도중의 도는 내비도! 래요. 허허허, 내비도. 그거 좋네. 거기서 득도하는 게, 그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 선생님 친구도 J 씨도 만나서 얘기 들어봐야 하겠지만…. 아이를 어떻게 해보려는 힘을 빼고 물러나는 게 자기가 살길일 수도 있어요. 여하튼 내가 만나 보리다. 선생님, 참 쓸쓸해요. 뭔가 이렇게 인생에서 많은 것들이 떨어져 나간다는 게 참 그래요. 언젠가 제가 선생님과 약속 잊었던 일도 있었잖아요. 지금도 건망증은 더 심해지고 있거든요. 안심하라고 하셨지만, 처음처럼 그렇게 걱정이 되진 않아도 뭔가 좀 쓸쓸해요. 이렇게 존재가 스러져가는 건가…. 이 그래프에서처럼 최대치의 힘을 점점 빼고 하강하며 소멸해가는 것인가요? 이런 그래프도 있어. 봐봐. 요제프 골드브룬너라는 이가 이런 그래프를 그렸대. 뭔지 알겠소?
글쎄요. 감이 잘 안 잡히는데요. 아까 그 존재의 힘의 교차와는 다른 것 같고요…. 뭐예요? 자, 여기 실선이 뭐랄까 활동성이나 몸의 기능 같은 것들? 인생의 외적 부분이 진행하는 과정이라고 합시다. 점선의 화살표는 정신적 발달이라는 거야. 외적 곡선은 어느 순간 하강하는 반면, 그러니까 정점에 이른 다음부터는 아래로 떨어지지 않소. 바로 그 지점에서 정신적 발달을 가리키는 화살이 새로운 자유를 향해서 나간다는 거야. 정신적 발달, 영적인 발달은 오히려 이때부터 더 먼 곳으로 날아가지. 멋지지 않아? 쓸쓸함도 진실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그러네요. 뭔가 위안이 되는 것 같아요. 와, 고린도후서의 말씀이 이런 뜻일까요?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갑자기 이 말씀이 훅 알아들어지네요.. 아이구, 성경을 줄줄 외는구나. 아니요. 외우는 구절 거의 없는데요. 뭔가 참 꽂히는 말씀이라 마음에 맴도는 몇 안 되는 구절 중 하나거든요. 선생님, 정말 갱년기 허무감이 희망으로 다가와요. 선생님이 저 그래프의 살아있는 버전이시잖아요. 무슨 소리야. 살아있는 버전은 또 뭐야. 저는 느껴져요. 저의 인생 롤모델이시잖아요. 제 눈에 보여요. 선생님의 정신발달 화살표가요. 얼마나 높이 멀리 나아가고 계시는지 보인다고요. 저기, 저어~기 타원형같이 생긴 구름 있잖아요. 그 정도까지 가 계세요. 히히히. 또, 또, 노인네 골리기 시작한다. 모든 일에 반항하는 아이는 사춘기, 엄마 아빠는 오춘기인가 봐요. 뭐 의미 있는 게 없고 삶의 낙이 없고 쓸쓸하기만 한 엄마는 오춘기... 육춘기도 있으려나요? 아, 그런 책이 있어.『신앙 사춘기』라고. 제목을 제대로 지었더라고. 신앙생활에서 아이에서 어른 신앙으로 넘어가면서 오는 질풍노도를 딱 잘 그렸던데. 마침 그 저자도 나이가 딱 중년기더라고. 어쩌면 아이가 생물학적 사춘기를 겪는 동안 부모는 영적 사춘기를 함께 통과해야 하는지도 몰라. 하나님께서 생애 발달을 그렇게 묘하게 엮어 놓으셨나 봐. 친구 문제 상담하다 제가 깨달음을 얻네요. 아이들 사춘기 때 느꼈던 휑하게 텅 빈 것 같은 그 느낌이 다시 살아와요. 인생에서 아름다운 시간은 다 끝났구나. 되돌릴 수도 없구나. 허망하구나 싶었던 것 같은데. 제 친구가 저와 결은 다르지만, 그 시기인 것 같네요. 강한 친구가 약해 보이니 더 안쓰러웠던 것 같아요. 이 시기가 정말 그 친구에게 영적 전환점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물론 제게도요. 상담 잘 부탁드려요. 정말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러리다. 얘기 나누다 보니 나도 성경 한 구절이 떠오르네. 언젠가 내가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정 선생이 좋은 노인에 관해 물었을 때 했던 말 같아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힘을 빼고, 주도권을 이양하며 남이 나를 띠 띠우기를 허용하는 것, 생애 후반의 영성이야. 네, 선생님. 조금 알아들어져요. 그런 의미로 아이의 사춘기는 요란하고도 세미한 그분의 초대의 목소리인 것 같기도 하고요. 친구의 마음 여정을 보면서 저도 잘 배울게요. 더 많이 가르쳐 주세요.
여성적인 것의 구원 2019년, 팬데믹 직전이었다. 연구소 시작하고 1년을 지내고 송년의 밤을 열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시작한 연구소, 생각보다 더 좋았던 1년을 정리하는 말로 이보다 적절한 표현이 없었다. 여성적인 것의 구원. 이걸 내걸었었다. 카를 융과 함께 분석 심리학 작업을 했던 마리-루이제 폰 프란츠의 책 제목(궁금하면 클릭!)이다. 의미를 설명하기는 참 어렵다. 융 심리학을 '경험의 심리학'이라고 한다. 머리로 아무리 이해해 봐야 체험하지 못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심리학이란 뜻이다. 게다가 '여성적 경험'을 담은 융 심리학 책이니 과연 몇 명의 독자가 제대로 읽어냈을까. 이 직관적인 책을 나 역시 제대로 알아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마음 깊이 새겨진 이 한 문장의 강렬한 여운만은 진실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안다.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나는 살고 지향한다. 여성적인 것의 구원을.
체험으로서의 교회, 여성성의 교회 대학원 3학기를 통틀어 이 한 문장을 얻었다. 이 문장을 듣기 위해 잉여에 겨운 석사과정을 했다 해도... 오케이, 인정이다! 잉여라 해도 아깝지 않다. "제도로서의 교회(남성성)와 체험으로서의 교회(여성성)는 동등하고 함께 가야 합니다." 진보적 여성 신학자의 말이 아니고,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남성 목사의 말도 아니다. 보수적이라면 보수적일 교수 신부님의 말이다. 사이버 캠퍼스에 올라온 강의안의 저 문장을 보고 쿵, 하고 마음이 흔들렸다. '동등하고'라는 말에 먼저 울컥했지만, '체험으로서의 교회'라는 말은 내 마음에 아니 내 삶이 이미 충만한 것이어서 익숙했기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비로소 '언표'된 것이다. <영성신학> 과목이었다. 영성이란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전제, 생명과 체험, 한 학기 내내 이 두 단어의 역동을 생각했다.
이 말 한마디 듣고자 여기까지 왔다. 언제 첫 발을 떼었을까? 서른여덟 즈음 신앙 사춘기가 시작되던 때일까, 중1 여름 수련회 때 "예수님 위해서 살고 싶어요. 선교사 될래요."라고 기도했던 때일까, 중1 겨울 아버지 손을 놓치고 천국에 있는 아버지를 그리느라 시작한 내적 여정일까, "고무신 신고 아장아장 느린 걸음 걸을지라도 해바라기 해 따라가듯 나도 예수님 따라갈 테야" 첫 노래를 부르던 때일까, 안방 벽에 붙어 있던 기도하는 사무엘 그림을 보고 누워있던 떡아기 때일까? 나의 교회 사랑(과 미움 또는 집착)은 언제부터였을까?
어쩌자고 나는 이 말을 이제 와서 듣게 된 것일까? 아니, 내 안에 충만했던 말을 굳이 왜 밖에서 들어 확인해야 하는 것인가? 이 말 한마디 듣자고 나는 이렇듯 먼 길을 돌아온 것인가. 내 몸이 담겼던 교회를 떠나 높고 높은 벽을 넘어, 여기서 들어야 했던 것일까. '선언'은 얼마나 중요한가. '선포하노라!' '죄를 사하노라!' 선포에 담긴 힘이란!
제도로서의 교회(남성성)와 체험으로서의 교회(여성성)은 동등하고 함께 가야 합니다. 이 강의안이 사캠에 올라온 때는 연구소 지도자 과정에서 "나의 구원사"를 나누는 목요일이었다. 쉬는 시간에 사캠을 열어 확인했던 것이고, 쿵!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지도자 과정 첫 시간의 소개와 나눔 시간에 나는 '교회'를 생각했었다. 이들에게 교회는 뭘까? 공동체는 뭘까? 이렇듯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뭐지? 하나님을 갈망할수록 교회에의 절망은 깊어져야 하는 걸까? 목사님, 사모님, 간사님, 선교사님, 전직 목사의 아내... 이들이 담겼거나 떠나온 교회에는 소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헌데 지도자 과정을 마치며 구원사를 나누고,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을 통해 일구고 싶은 공동체를 그리다 보니 이들은 이미 교회를 살고 있었다! 이들이 있는 곳이 교회였다. 다만 스스로 믿어주지 못할 뿐.
저 강의안이 올라오고, 다음 주 강의를 기대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지고 결국 종강 날의 주제가 되고 말았다. 종강 수업이 있던 날은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 종강 날이기도 했다. 줌으로 했던 모임이었는데 "얼굴 보고 싶어요, 안아주고 싶어요" 하는 마음들이 모아져 마지막 모임을 대면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눈이 많이 왔다. 과연 다들 올까? 싶었다. 대부분 지방에 계셨으니... ktx 타고, 고속버스타고 속속 모여들었다. 풀참 대면 모임이 되었다! 손에 손에 들고 온 것들을 풀어놓으니 먹을 것은 또 얼마나 풍성한지. 색색이 따뜻한 선물까지... 여성적인 것들을 모으면 이렇다. 늘 이렇다. 이러고 보면, '여성적인 것의 구원'이 아니라 '여성적인 것이 구원'이다. 이날의 주제는 '하나님의 어머니 되심'이었다. 짧은 강의 후에 "하나님 어머니께"라는 글을 쓰도록 했는데, 내내 창 밖으론 하염없이 눈이 쏟아졌다. 글을 쓰고 낭독하는 사이 눈물도 쏟아졌다. 너나 할 것 없이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넓은 창을 마주한 내 자리에선 하염없이 펑펑 쏟아지는 눈이 꿈속처럼 느껴졌다. 아, 우리들의 하염없는... 그 무엇...
글쓰기 모임 마치고 눈길을 뚫고 학교에 갔다. 강의는 한 학기 내내 그랬던 것처럼 내게는 뜨겁고 다른 학생들은 어땠는지는 모르겠고. 내게는 강의 시간이 너무 짧고 다른 학생들은 빨리 집에 가야하고. "제도로서의 교회(남성성)와 체험으로서의 교회(여성성)은 동등하고 함께 가야 합니다." 이 문장에 대한 설명을 어찌해주실지, 나는 기대에 찼고. 교수님은 어쩌자고 당신이 써서 올린 이 문장에 대해 한 마디 언급도 안 하시고. 그렇게 그냥 강의가 끝났다.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언표함, 선언으로 족했다. 체험으로서의 교회, 여성성으로서의 교회는 교수님보다 내게 더 가까운 앎일지 모른다. 하나님 사랑에의 참여로서 영성을 공부하시며 그것을 살아내며 알아듣고 선언해주신 것으로 족하고 감사할 뿐. 낮에 눈 펑펑, 눈물 펑펑, 하나님 어머니 펑펑... 그 체험이면 족하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일주일 후 <기독교반성폭력센터> 후원의 밤 모임에 참석했다. 마이크가 주어져 떠어들댈 기회가 생겼다. 이날 주제가 "안부_ 안전한 교회를 부탁해"였다. 누구든 안전한 사람, 안전한 장소에선 자신을 드러낸다. 자기 생각을 감정을 드러낸다. 안전하지 않은 곳에서는 보호본능으로 갑옷을 입고 포장지를 두른다. 교회는 안전한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곳인가, 드러내고 싶은 곳인가. 포장지 두르라 권하는 곳은 아닌가. 누구에게 교회의 안전을 부탁할 수 있을까. 내가 안전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안전한 사람이 하나라도 더 생기는 방법 밖에 없다. 우리가 안전지대가 되자는 얘기를 했다. 체험으로서의 교회, 여성성의 교회 얘기도 했다. 교회를 체험한, 체험으로서의 교회인 여성들이 각자 누군가의 안전이 되어 주어야 할 것 같다. 누구보다 내가.
이틀 후에는 연구소에서 또 다른 소소한 모임을 가졌다. 지도자 과정 마치고 대학원에 간 선생님들의 수다 모임이다. 한 학기 공부한 것도 나누고, 어려움도 나누는 종강파티! 여기 또 하나의 체험적 교회가 섰다. 안전한 여자들이 모이면 거기는 체험적 교회가 된다. 좋은 것은 오래 간직하고, 재현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런데 좋은 것은 재현되지 않는다. 영적 경험은 카피되지 않는다. 체험적 교회는 한 번 서고 사라지는 것이다. 좋은 것들을 복사해서 재현하고 제도화하려는 제도적 교회가 매력이 없는 이유이다. 선생님 한 분이 사 오신 케이크 위에 "Love the moment"이라 적혀 있었다. 그렇다. 정녕 그렇다. 순간 체험하고 사랑하고 향유하는 것이 전부이다. 우리 여성들이 그걸 잘해서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순간의 기쁨과 경이로 만족하고, 주어진 순간에 최선을 다해 진실했던 지난 1년에 후회 없다. 진실하게 몰입하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돌아서서 종종 부끄럽기도 했지만, 뜨악하는 반응에 괜히 했다 싶었던 적이 없지 않았지만 후회는 없다. 순간, 향유의 순간, 여성적인 것들의 구원이 있는 사랑의 순간이 나의 교회이다. 우리의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고.
4박 5일 기도 피정에 다녀왔다. 낯선 고향 같은 곳이다. 어쩔 수 없는 종교의 담이 있으니 가도 가도 낯설 수밖에 없고, 밖에서 찾던 하나님을 내 안에서 찐하게 만난 곳이니(말이 되나? 내 안에서 만나려고 그 밖으로 갔다...) 영적 고향 같은 곳이다. 침묵 피정인데, 침묵 속에서 전쟁을 치르곤 했기에 이번에도 단단히 마음을 먹고 갔는데. 숙제도 안고 갔는데... 웬걸! 한 시간 기도 시간은 10분처럼 지나가고, 밥은 맛있고, 9시부터 잠은 잘 오고, 화장실도 잘 가고. 방안에 든 겨울 햇살이 아름답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사랑스럽고, 마주 앉은 식탁의 자매님이 와사삭와사삭 콜라비 씹는 소리가 재밌어서 자꾸 웃음이 나오고… 어쩌자고 예정에 없던 신소희 수녀님이 피정 동반을 해주시고.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 4박 5일을 보냈는데, 전쟁 없이 숙제가 조금씩 풀리고, 마음의 그물이 치워지고, 분열된 어떤 것들이 통합되는 예상치 못한 피정이었다.
일정을 모두 마치고 폰을 받아서 열어보니 나를 뜨겁게 기다리고 그리워 하는 사람들은 역시나 연구소 식구들. 100개 되는 톡이 쌓여 있는 연구소 톡방에 신고를 했다.
출소! 아니... 이제 수감인가?
출소라면 출소고 수감이라면 수감이다. "어솨요. 속세로 아니 소장님의 성소로" 이런 톡이 있었다. 나의 성소다. 그래 나의 성소 싱크대 앞(클릭하지 마요! 클릭하지 마요! ㅎㅎ)에 서자! 일상이라는 감옥에 사식을 넣는 마음으로 김치수제비 해본다. 얼마 전 채윤이랑 둘이 만들어 먹으며 종필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마시께따. 나 김치칼국수 좋아하는데..." 했던 말을 킵해뒀었다. 애들은 고모가 스테이크를 사준대서 룰루랄라 나갔고. 2022년 마지막 날 아점으로 끓여서 둘이 맛있게 먹었다. 늙은 호박 갈아서 야심 차게 전을 해봤는데, 죽사발이 되어서 대신 돈가스를 데워서 곁들였다.
# 재미가 없으면 하나님이 주신 일이 아니다. # 실패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일이 아니다.
교회 젊은 부부들과 함께 하는 육아 세미나를 마쳤다. 『타고나는 부모는 없다』 오래된 책이고 고리타분한 책이다. 그럼에도 함께 읽을 충분한 가치가 있어서 선택했다. 육아의 기술이란 없고, 기독교 상담을 한다는 아빠의 실패담만 넘친다. 알 듯 모를 듯한 육아 원칙은 요즘 엄마 아빠들에게는 쉽게 다가가지도 않는 것 같다. 여백이 많은 책이다. 그래서 선택했다. 마지막 챕터는 '놀이'에 대한 내용이다. 내가 책을 썼다면 "아이들은 그 어느 때도 아닌, 부모가 놀아줄 때 사랑받는다고 느낀다."라고 썼을 텐데. 역시나... '놀이에 대한 신학적 이해' 같은 소제목의 글로 '재미'를 쏙 빼고 글을 쓰셨다.
그러면서 결론은 위의 두 문장이다. 그러니까 단지 아이와 놀아주는 얘기가 아니다. 육아를 아이와 함께 하는 긴 놀이로 보는 것이다. 조금 확장하면 인생 자체를 놀이로 보자는 말이었는데. 성과에 목숨 걸지 말고 순간순간을 즐기며 살자는 뜻으로 나는 읽었다. 소명으로서의 놀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시고 부여하신 소명은 "놀다 와라, 잘 놀다 와라"이다. 그러니 재미가 있어야 하고, 실패도 있어야 한다. 정말 나는 찰떡같이 알아들어진다.
모임 마지막에 그렇게 말했다. "저는, 저와 현승이는 지금 대학입시 놀이 중이에요!" 말하고 나니 더욱 믿어졌다. 맞아, 결과 하나가 아니라 과정 자체를 즐기고 있는 거야. 과정 하나하나를 즐기기 때문에 재미가 있고. 실패가 있어서 심장이 쫄리고 잠시 하늘이 내려앉기도 하지만, 과정이니까...
과연 실패도 있고, 재미도 있는 대입의 과정이었다. 잠시 희망의 속삭임이 마음을 간지르기도, 실패감의 먹구름이 덮치기도 하였다. 현승이 어깨가 툭 떨어지고, 말이 없어지자 가족 모두 생기를 잃었다. 슬픔과 막막함에 휩싸이기도 했다. 우리 현승이, 좋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보석 같은 선생님들을 만난 덕에 하루 이틀 고통의 터널을 지나 다시 희망을 붙들기로 했다. 고통 회피를 위한 긍정적 해석이 아니라 '큰 그림을 보자'는 뜻을 품게 되었다.
입맛을 돋궈서 밥이라도 많이 먹이려고 저녁으로 좋아하는 삼겹살과 파김치를 준비했다. '큰 그림'을 안고 학교에서 돌아온 현승이 얼굴이 편안하고 밝았다. 전날 저녁에는 꽉 막혔던 대화의 길도 활짝 열렸다. 둘이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 구운 삼겹살과 파김치를 두고 기나긴 이야기를 나눴다. 대입을 통과하고 뽀개는 재미, 실패를 마주하고 일어서는 재미가 있었다. 내가 말을 잘한 거다. 우리는 대학입시 놀이 중이다.
현승이가 이번 가을에 혼자 먹은 파김치가 5kg이다. 3kg 씩 두 번 주문해서 거의 혼자 다 먹었다. 뜨거운 밥에 먹고, 짜파게티에 먹고, 삼겹살에 구워 먹고... 심지어 수능시험 보는 날 도시락 반찬 뭘 싸줄까 했더니 파김치를 주문할 정도. 파김치 5kg 먹어 치우면서 행복한 대입 준비였다. 여러 번 말했지만 행복 등급으로 치면 1등급, 대한민국 고3 상위 5%였다.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대학 입시 놀이 잘 끝났다. 재미있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일이 아니다. 실패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일이 아니다.
연구소 소장이고 때로 ‘작가’로 불리기도 하는데. 작가로서 가장 어려운 글이 후원 편지입니다. 일 년에 한 번 쓰는 후원 편지가 그렇게나 어렵네요.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담고 싶은 말이 많아서라는 것을요.
후원 편지에 진심입니다. 함께 보내드리는 작은 선물에는 매번 발품, 손품, 생각 품을 쏟아붓고요. 이번엔 손수건에 연구소 심볼을 달아 보내드리려고 연구원 선생님들이 한땀 한땀 손바느질을 했답니다(양말에도 붙이려다 참았습니다!^^).
연구원 선생님들은 실은 1호 후원자입니다. 무료 상담 봉사는 아니지만, 교통비 정도 되는 활동비를 받으며 언제라도 연구소를 위해 주머니 터는 것으로 치면 최고의 후원자들이지요. 기쁨입니다! 치유와 성장의 여성 공동체를 일구고 누리는 것이 가장 큰 보상이라서요.
보내주시는 후원금은 꼭 필요한 분들 위해 은밀하게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들의 연결인 ‘나음터’가 계속 여기 있었으면 싶은 분들, 후원으로 연결되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또 후원자님 중에 우편으로 편지 받지 못하신 분은 연구소로 연락 부탁드려요.
해외에 계시면서도 꾸준히 후원해주신 벗님께 그간 모아 두었던 몇 년의 선물을 한꺼번에 보내드리는 기쁨도 누렸습니다. 후원자, 내담자, 모든 과정 참가자… 누구보다 저희 자신, 그리고 깨어진 이 세상, 무엇보다 누구보다 우리의 왕이신 주님과 늘 진심으로 연결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후원 계좌 : 농협 301-0240-4119-71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늘 감사한 후원자님.
지난 한 해, 마음으로는 수십 통을 썼던 편지를 이제야 한 통 제대로 써서 부칩니다. 감사합니다. 매달 꼬박꼬박 보내주신 후원금이 연결이 필요한 분들에게 닿는 끈이 되었고, 저희에겐 큰 지지와 힘이 되었습니다.
연구소에서 하는 일로 어떤 성과를 내고 있는지, 누구를 어떻게 돕고 있는지 자세한 보고를 드리지 못하는데도 한결같이 입금되는 후원금을 보면서 ‘믿음, 믿어주심’을 생각합니다. 믿어주심다고 생각할 때 더욱 마음을 새롭게 하게 되었습니다. 상담과 내적 여정, 그리고 여러 집단 여정을 통해 풍성한 치유와 아프고 기쁜 성장의 순간이 이어지고 이어지는데 이 감동을 자세히 알려드릴 방법이 없습니다.
나음터의 상담과 여정은 어느 지난날, 투명하게 마주하고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상처’와의 만남에서 시작합니다. ‘상처’의 문을 열고 들어가 거기 부재하셨던 하나님을 만날 때 심리상담은 영성 상담의 영역이 되곤 합니다. 박정은 수녀는 ‘상처가 존재의 무늬’라고 했는데, 과연 그러함을 신비롭게 체험합니다.
연구소 사역의 열매는 모두 개인의 상처와 닿아 있고 상처가 무늬가 되는 신비로운 체험이 흔하지만, 실적과 성과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후원자님께도 전해드리지 못하고, 저희 자신도 어려울 때가 있다는 것을 이 편지를 쓰며 확인하게 됩니다. 영혼 깊은 곳의 기쁨과 보람은 있지만, 내놓고 박수받고 찬사받을 일이 없으니 인간적인 마음으로 지치고 낙심될 때도 있습니다. 희한하게도 그럴 때 위로가 되는 것이 통장에 찍히는 후원자님의 성함입니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역시 마음을 보여주는 건 돈이로구나! ^^ 감사합니다. 믿어주심과 연결을 믿고 진실하게, 돈을 마음으로 바꾸어 내담자와 영적 벗들을 잘 섬기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연락 드렸듯, 지난여름부터 후원금 관리 기관(한빛누리)의 서비스를 중단했습니다. 서비스를 받기 위해 들어가는 물질적, 인적 에너지가 실제 후원금 대비 크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연구소 계좌로 바로 후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기부금 영수증’ 발급을 해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계속 후원을 위해 계좌이체 신청해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마음은 있으나 미처 하지 못하신 분께는 한 번의 수고를 부탁드립니다.
나음터는 자카리아스 하이에스 신부님의 묵상집인 ⟪별이 빛난다⟫를 읽는 기도로 드리며 대림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한 구절을 나누고 싶습니다.
❝별이 빛납니다. 당신은 이 길에 많은 것을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길 위에서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떠나보내십시오! 당신에겐 사랑의 황금과 갈망의 유향과 고통의 몰약이 있습니다. 그분은 기꺼이 이것들을 받아주실 것입니다. 당신은 그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