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뉴질랜드 코스타 참석하느라 집을 비웠다. 현승이 수능 날에 출국하여 마지막 논술시험 마치는 날에 들어오는 일정으로. 일정도 어쩌면... "중요한 때 아빠가 액운을 싹 몰아가지고 바다 건너갔다가 끝나고 오는 거라고 쳐. 어쩌면 아빠 자신이 액운... ㅎㅎ"


월요일 아침 현승이와 둘이 밥을 먹다가 말했다.
월요일인데, 월요일엔 아빠랑 같이 보내는 안식일이거든. 걷고, 밥 먹고, 카페 가서 책 보고.... 그렇게 쉬는 날인데. 아빠가 없으니까 어쩐지 월요일이...
허전해?
아니. 휴가받은 느낌이야. 쫌 좋아. 월요일에 아빠랑 쉬는 거 진짜 좋아하거든. 그런데 오늘 여유 시간이 생긴 것 같고 막 뭔가 홀가분하고 그러네.
아,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구나. 엄마 아빠....
(015B 노래 '아주 오래된 연인들' 맞다. 현승이 태어나기도 전 노래지만, 이걸 말하는 거 맞다. 얘는 어렸을 적 장래희망이 '옛날 가수'인 애라서 그렇다.)
일종의... 그런가 봐.

낮에 '아주 오래된 연인들' 가사를 찾아보았다.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지 / 가끔씩은 사랑한단 말로 서로에게 위로하겠지만 / 그런 것도 예전에 가졌던 두근거림은 아니야 / 처음에 만난 그 느낌 그 설레임을 찾는다면 / 우리가 느낀 싫증은 이젠 없을거야~이야

 

아닌데... 아직 두근거리는데. 설렘도 있는데... (빡침과 싫증이 없다고는 안 했음)

저녁에 현승이에게 다시 말했다.
현승아, 엄마빠 '아주 오래된 연인들' 그거 아니야. 가사 다시 찾아봤는데. 아니야. 엄만 아직 아빠한테 설레. 아침에 말한 느낌은 좀 다른 거야.
아, 그런 거구나! 나도 시험 때 아빠가 없으니까 뭔가 편한 게 있어. 아빠가 죽은 것도 아니고... 시험 끝날 때 올 거고. 아빠는 노력해서 한 마디 하는데, 내가 예민해 있을 테니까 또 짜증 낼 수도 있잖아. 그러면 또 아빠가 엄청 신경 쓰일 거고, 그런 아빠를 아니까 나는 더 신경 쓰이고... 그래서 뭔가 마음 편한 게 있어.
그치? 그치? 그 비슷한 걸 말하는 거야.

MBTI로 NT 아빠-NF 아들, 에니어그램으로 5번 아빠-4번 아들 사이 긴장이 있다. 서로 사랑하는데, 가끔씩 도통 이해 못 하는 그런 지점이 있다. 그걸 말하는 거다. 아무튼, 그가 오늘 돌아온다! 현승이 논술 입시도 오늘이면 끝이다!

 

와이카토 대학 캠퍼스에 선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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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지도자과정 마치고 저녁에는 학교 수업이 있는 날이다. 수업 들어가기 직전 전화가 왔다. 동네 친구다. (실은 교회 집사님... 인데 나를 '사모'아닌 '나'로 대해주시기에 '친구'하기로. 동네 친구이며 교회 친구) 통화는 못하고 여차저차 용건은 겉절이를 전달하겠다는 거다. 얼씨구나! 수업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들러 받아가겠다 메시지 보냈는데. 어느새 우리 집에 배달까지 해놓은 상태다. 동네 친구 덕에 의미 있는 야식 타임이었다.

아침에 채윤이가 "요즘 김장하는 때 같은데... 이럴 때 겉절이에 보쌈 해먹는 거 아니야?" 했다. "글치, 겉절이에 보쌈이지!" 그 말에 막막 식욕도 돋고, 어떤 식욕이 돋으면 자극받는 그리움... (왜 식욕은 자꾸 우리 엄마로 향하는 거야?!)에 조금 간절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겉절이 배달이라니! 늦은 하굣길 마트에 들러 보쌈용 고기 한 덩어리를 사서 막 달려와서 압력밥솥에 막막 고기를 앉혔다. 축구가 시작되는 시간에 딱 맞췄다.

축구 좋아하는 채윤이. 사람들 많이 모여서 얼싸덜싸 하면 에너지가 솟구치는 채윤이가 좀 안 됐다. 월드컵 첫 경기 하는 날, 그것도 카타르(지난 여름 미국 오가는 경유지로 질리도록 엉덩이 비비면 앉아 있던 카타르...)에서 말이다. 거실에 모여 앉아 야식 차려놓고 으쌰으쌰 하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엄마는 축구의 'ㅊ'도 몰라. 동생 놈은 방에서 혼자 본다고 해. 그나마 같이 봐줄 아빠도 없어. 게다가 내일 11월 25일은 채윤이 생일.

생일상 차려줄 여력은 없고. 생일상 대신 전야제로 보쌈을 차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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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세미나 중인 교회 젊은 부부들과 J 집사님 댁에 초대를 받았다. 아이들은 잔디밭에서 뛰놀고, 긴 시간 훈제로 구운 삼겹살은 입에서 살살 녹고, 탁 트인 시야로 마음까지 트인 사람들은 여유롭다. 내 마음도 마찬가지여서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주일 오후 시간을 보냈다. 헤어지기 전에 기념촬영을 했는데, 집에 오니 단톡방에 몇 년 전 그 장소의 사진이 올라와 있다. 와, 이렇게 작았었다고? 씬스틸러는 아기들이다. 보자마자 신이 나서 사진 오려 붙이고 화살표 그려서 단톡에 올리며 낄낄거리는데... 채윤이가 그랬다.

엄마, 제발... 체통을 지켜. 이러는 거 주접...
아! 그래? 어쩌지? 이미 올렸는데.... 괜찮아. 재밌으면 땡이야!


희망을 잃은지 오래다. 교회에 대해 낙관적 기대는 없고, 남편이 목회자가 아니었다면 벌써 교회를 떠났을 것 같다. 한창 교회가 싫을 나이, 신앙 사춘기 한가운데의 허세는 아니다. '허튼' 희망을 잃었다고 하자. '신앙 사춘기'의 독기가 완전히 빠지진 않았지만, 나름 치열하게 교회의 빛과 그림자를 마주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마음도 있다. 하지만 지금도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자매들과 치유 글쓰기를 하는 중이고, 목회자로 인해 신앙은 물론 삶까지 망가진 분들을 흔하게 만나고, 반면 얼치기 신앙 사춘기 교인들로 인해 정신과 영혼이 말라비틀어져가는 목회자들을 본다. 자주 생각한다. 교회엔 희망이 없어...

주일 오후에 <육아 세미나>로 만나는 시간에 교회를 느낀다. 육아노동 가사노동으로 인한 갈등, 어린이집 선택부터 사교육의 문제까지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서의 긴장, 내 부모로 인한 상처가 아이에게 투사되어 또 다른 상처를 유발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아니 그냥 아이들 등원시키고 출근하는 고된 아침을 '죽을 것 같다'는 느낌으로 사는 이야기, 종일 아이 재울 생각만 하다 막상 잠든 아이를 보면 밀려오는 죄책감 같은 것....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교회를 느낀다. 엉뚱하게도 내게 교회가 있어서 다행이다, 이 사람들 곁에 내가, 내 곁에 이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교회를 느낀다.

나는 교회의 딸이다. 이건 추상적 표현이 아니다. 태어나보니, 교회의 딸이었다. 어릴 적에 누군가를 따라 동네 우체국에 간 적이 있었다. 우체국에는 전화국도 함께 있어서 교환수 언니 한 명이 전화를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으로 동네 전화를 다 연결했다. 나를 보자마자 "79번!(우리집 전화번호) 교회집 딸이네!' 처음 듣는 표현이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날 보고 "목사님 딸"이라고 하니까. 교회집 딸이라... 그러면 절집 딸도 있겠고... 여하튼 태어나보니 목사 딸이었고, 목사 딸로 불렸던 나를 부르는 다른 말은 '교회집 딸'이었다. 이렇게 정말 나는 교회의 딸이다. 자랑과 자부심이기도 했다. 지금은 조금, 때로 많이 부끄럽다. 좋은 교회 좀 소개해 달라는 사람들에게 소개할 교회가 없다. (아는 좋은 교회가 없어요...)

모임을 모두 마치고 엄마빠와 아기를 태운 차가 하나 씩 골목을 내려간다. 안녕, 안녀~엉! 감사합니다! 가보겠습니다! 안녀~엉! 한 대씩 떠나보내는 중 남편이 "꼭 명절에 큰 형님 집에 온 동생들 보내는 분위기예요."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집사님 가족과 우리 부부, 또 다른 형제님 한 분이 골목 양편에서 서서 인사를 하는데 따뜻한 것이 꼭 가족모임 이후 같았다. 카시트에 폭 싸인 아기들 때문인지, 고기로 꽉 채운 위장이라서인지, 영혼이 따뜻한 무엇으로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교회에 희망을 걸지 않는다. 영성을 배우고 있으니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제도로서의 교회에는 무엇도 희망하지 않는다. 체험으로서의 교회를 배워가고 있다. 정해진 어느 장소, 어느 시간에 존재하는 교회가 아닌 거부할 수 없는 친밀감과 연민과 기쁨이 생겨나는 곳(또는 때)이다. 연구소 모임에서는 자주 체험으로서의 교회가 선다. 거부할 수 없는 친밀감이, 사랑이 사람들을 묶는다. 기쁨보다 슬픔, 간증 나눔보다 실패의 고백인 경우가 훨씬 더 많지만 체험으로 예배는 그래서 더 성공이다. 체험으로서의 교회는 이제 내 일상에 흔하다. 그렇다면 그 누구보다 그 어느 때보다 교회를 살고 있는 것이다.


사진을 들여다보다 깨달았다. 이 교회에 처음 왔을 때 젊은 부부란 없었다. 몇 년 전 <신혼부부 세미나>를 진행할 정도가 되었고, 이번에 모여 사진을 찍고 보니 '이렇게 많았어?' 싶은 것이다. 조용히 이렇게 무엇이 자라고 있었구나. 게다가 최근 등록한 두 두 커플이 함께 초대되어 왔는데. 이들은 JP와 나의 젊을 날을 함께 했던, 교회에의 열정이 순수했던 그 어느 날에 함께 했던 이들이다. 사랑하고 실망하고 배신당했던 교회생활의 역사를 함께 했던 이들이 저 사진에 다 있다. 저 사진 속에 교회가 있다.

J집사님 부부가 참 귀하다.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낯선 사람을, 초대하고 베풀면 다시 초대해서 되갚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 키우며 살아내기에 바빠 내놓을 것이 없는 여유 없는 사람을, 한참 어린 사람을 초대해준 집사님이 교회를 열어주었다. 성령님께서 이날 이 순간 잠시 내 마음에 교회를 열어주셨다. 메마른 땅에서 잘 견뎠다고 토닥토닥해주시며, 교회는 여기 있으니 사랑을 포기하지 말고 자꾸 발견해가라고 하셨다.

논문과 써야 할 원고, 연구소 지도자 과정을 위해 "읽어야만 하는 책"이 늘 쌓여 있지만, "읽고 싶은 책" 없이 지내기는 어렵다. "읽어야만 하는 책" 역시 알고 보면 다 좋아서 읽는 것이긴 한데, 성격 상 '의무'의 흔적만 있어도 못 견디는 그런 취약함이 있다. 신형철의 시화詩話집 『인생의 역사』는 얼마나 꿀 같은지. 숨 쉴 틈으로 한 편씩 읽기 딱 좋은 시와 짧은 글로 적잖이 위로를 얻고 있다.

여기에 더해 2년 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눈풀꽃>이란 시로 마음을 크게 뒤흔들었던 루이즈 글릭의 시집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소식. 세 권을 한꺼번에 사기는 그렇고 『야생 붓꽃』을 먼저 주문했다. 주문하려고 보니 추천사를 신형철 선생이 썼네. 올 가을은 신형철인가 보다! 길고 길었던 화요일 늦은 밤, 아프고 텅 빈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래도 『야생 붓꽃』이 도착해 있을 테니까. 한가닥 위안의 빛이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뭐가 묻었나? 설마... 한 귀퉁이가 훼손된 책이 왔다. 혹 종이 조각이 붙은 것일지도 몰라, 괜한 희망을 걸고 비닐포장을 뜯었으나 역시였다. 하루 종일 참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말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 고통을 본다. 고통을 유발한 악도 본다. 그 부조리함이 형언되지 않아서 말도 못 하고 울지도 못했다. 가해자는 오늘도 강단에 서서 마이크를 흔들며 권력의 춤을 추고 있다. 교회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 모임을 마치고 학교에 간다. 

어쩌자고 저녁 학교 가는 길이, 학교 식당의 저녁 식사가, 스치는 사람들이, 자아도취에 빠진 작은 권력들이... 자꾸 나를 절망으로 밀어 넣는다. 꾹 참고 집에 왔건만, 마지막 소소한 절망 하나가 남아 있었다. 냉정하고 무심하게 쪼인트를 날려 애써 버티던 다리를 꺾어버렸다. 파본 『야생 붓꽃』. 파손된 모양 자체가, 오늘 밤 펼쳐 읽을 수 없다는 이 소소한 절망 하나가 견딜 수 없게 서러웠다. 얼마 전, 가슴뼈가 빠개질 것 같은 꿈을 꾼 날이 있었다. 잠을 깨고 나서도 가슴 언저리가 아팠었다. 하고픈 말을 할 수 없는 서러움에 벽을 붙들고, 그러다 가슴을 쥐어짜며 울던(아니 울지도 못했던) 꿈이었다. 치유 글쓰기를 시작한 어간이었다. 그때 그 꿈속의 통증 비슷한 통증, 또는 서러움을 안고 잠에 들었다. 오늘 아침에 눈을 떴는데 "하나님, 난 공평하신 하나님이 싫어요. 실수 없으신 하나님도요. 그냥 제 편 돼 주세요. 저를 좋아한다면 제 편이 되셔야죠. 편 들어준다고 저 버릇 나빠지고 그러지 않아요. 그냥 다짜고짜 편들어 주세요. 가진 것 없고 억울한 자매들 편 들어주세요. 불공평하고 치우친 하나님 말이에요..."라는 말이(어쩌면 기도가) 툭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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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갯불에 잡채를 해봤다. 집에 오는 길에 재빠르게 장을 봤다. 당근 하나, 시금치 한 단,  파프리카 하나를 샀다. 당면을 삶고 야채를 따로 볶는 과정 없이 막막 만들었다. (간편 잡채 만들기 영상을 여러 번 본 터라 그냥 막 만들어졌다.) 딱히 밥 생각 없었던 채윤이는 금요 기도회 반주하러 금방 나간다더니 '잡채'에 낚여서 미적거렸다. "오, 잘했는데! 딱 잡채 맛이야!" 하면서 산더미 같은 잡채를 먹어 치우고 나갔다. 그렇지! 잡채가 잡채 맛이면 된 거지! 스터디 카페에서 돌아온 현승이는 잡채밥 산더미를 해치웠다. 셋이서 각 '일인일산더미잡채' 했더니 JP 몫이 없네. 금요기도회 마치고 와서 잡채를 먹어봐야 배만 나오니까. 

 

괜히 갑자기 잡채를 한 게 아니다. 전날 반찬가게에 갔는데 예의 그 반찬가게 식 호객 행위가 있었다. "잡채 한 번 잡숴봐. 금방 해서 맛있어요." 시식 한 입 했는데 과연 맛있었다. 그런데 너무 비싸. 코딱지 만큼 놓고 오천 원이라니. "잡채는 안 하셔?" 하는 압력을 뿌리치고 나왔더니 결핍감이 남아 있긴 했던 것. 하지만 이것만은 아니다.

 

오전 일정이 천안에 있는 대안학교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작가의 삶, 글쓰기를 주제로 초대를 받았는데  큰 기대가 없었다. 전업 작가도 아니고, 청소년들에게 읽힐 책을 쓴 것도 아니고. 막상 가서 얘길 나누다 보니 준비되지 않은, 그러나 내 안에 있던 얘기가 나와서 신이 났다. 대안학교 친구들의 가장 큰 특징은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훈련된 태도인 것 같은데, 질문을 잘한다. 좋은 질문은 좋은 답을 끌어내기 마련이다. 

 

글감은 어디서 찾으세요?

주로 언제 글을 쓰세요?

책을 쓰면 돈은 얼마나 벌어요?

책 한 권 쓰는데 걸리는 시간은요?

글쓰기가 힘들었던 적은 없어요?

 

글감은 어디서 얻느냐는 질문에 '지금'이라고 말했다. 일상, 지금 이 순간이 글쓰기의 재료가 된다고 말했다. 당장 천안까지 오는 동안 동생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곧 마감인 글에 쓸 좋은 소재를 얻었다고 했다. 매 순간이 글감이라고 했다. 마지막 질문을 하라고 했더니 "인생의 가치를 어디서 찾으세요?"란다. 오호, 이 친구들 내공 보게! 1초도 망설임 없이 "지금 이 순간!"이라고 했다. 인생의 가치는 지금 이 순간을 기쁘고 소중하게 누리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지금 친구들과 글쓰기 얘기하는 이것이 내 인생의 가치라고 했다.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고 또한 진실이다. 내 글쓰기는 순간순간, 즉 일상의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에서 나온다. 특히 실패! 그리고 존재에 달라붙은 결핍과 상실의 감각들. 친구들의 질문이 글 쓰고 사는 나를 돌아보는 자리에 세웠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이 '잡채:JOB을 갖고 세상의 필요를 우는'이었다. 프레드릭 뷰크너의 소명에 대한 정의에서 따왔지 싶다. 집에 오는 길에 재빠르게 장을 봐서 번갯불에 잡채를 만든 건 바로 이 'JOB채'에서 불러일으켜진 식욕 또는 창작욕이었다. 채윤이가 갑자기 잡채를 왜 하냐 묻는데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엄마가 오전에 갔던 강의 제목이 잡채였어. 그래서 잡채를 만들었어...."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글감을 얻는 것도,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도 지금 이 순간이라는 뜻이 담긴 지금 이 순간의 잡채이다. 먹고 없어지면 다음 사람은 먹을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의 잡채이다. 

 

 

며칠 전 점심에 JP과 싸우느라 맛도 모르고 먹었던 음식이 '편백나무 찜'이다. 그 와중에 "나중에 집에서 해야지." 마음의 레시피로 담아 뒀었다. 편백나무로 된 찜기가 씬 스틸러였는데, 요리는 간단하다. 찜기 위에 숙주 깔고 우삼겹을 올려 10여 분 찌면 되는 것. 음식값의 반이 편백나무 찜기 값인지, 숙주와 고기는 얇게 펴놓은 정도였다. 찜기 값을 식재료로 몰아주는 방식으로 양에 승부를 걸어봤다. 수능을 일주일 앞두고 온라인 수업에 돌입한 수험생, 그리고 낮에도 자고 밤에도 자는 백수생 둘이 점심으로 맛있게 먹었다. 둘 중 누가 "이거 술안주 아냐?" 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유명한 짤, 이선균이 거품 반 맥주 반으로 따르는 그 장면에서 함께 먹는 게 이거랑 비슷했었다. 겨울이 오니 <나의 아저씨> 정주행 다시 가줘야 할 때가 되었는데... 고기 돌려담으면서 채윤이랑 '지폐 돌돌 말아서 만든 케이크 같다'는 얘길 했다. "부모님들이 그거 좋아하잖아. 엄마도 원해? 그런 케이크 좋아?" 안 좋겠냐? 돈인데! 모든 음식에는 수다가 있다. 오늘 먹은 편백나무 찜에는 편백나무가 없고, 저번에 싸우고 먹은 편백나무 찜엔 수다가 없었다. 뭐 하나 빠진 음식도 나름 먹을만 하고, 뭐 하나 빠진 시간과 경험도 두고두고 곱씹을 만하니, 괜찮은 일인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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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해. 그만하라고 했잖아.
가르치듯 그렇게 말하면 당신은 기분 좋아?
설명하고 가르치는 거 싫어하잖아.
토요일은 설교준비 하니까 말 못 하고.
주일은 설교하고 힘드니까 말 못 하고.
월요일은 긴장 풀고 느슨해져야 하니까 말 못 하고. 언제 말해?
그냥 이렇게 하면 좋겠다고 말해도 되잖아.
좋은 뜻으로 말하는 거였어.
그럼 그렇게 말하는데 잘 들어져?
도와주고 싶어서 하는 말이었다고.
상투성이 악이야. 한나 아렌트가 말했어.
악이라니! 그런 말을 함부로 해?
베드로한테 사탄이라고 하는 거랑 똑같애.
(침묵.......)
아우, 기분 나뻐.
나도 기분 나뻐.


월요일, 기분 좋게 걸어서 보정동 카페거리로 점심 먹으러 갔다가, 맛있는 편백나무 찜을 앞에 두고 설전을 벌이고 말았다. 누가 쏜 총알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피차에 쏘았다. 기분 좋게 식당에 들어갔다가, 말 한마디 없이 먹고 나왔다. 한 몸처럼 가깝고 친밀했던 사이가 1km로 멀어지는 것은 순간이다.

커피 마실 거야? 됐어. 집에 갈 거야. 스콘 사 가지고 집에 갈 거야. 나란히 걷지만 마음은 그새 2km 멀어져서 퉁퉁퉁퉁 걷는 길이었다. 탄천 길 버리고 산길을 선택했는데, 어머 산 입구 공원에 단풍이 왜 이리 예쁜 거야? 감동인데, 뚱한 얼굴에 감동을 담기는 그렇고... 카메라 들고 사진 찍어댔다. 예쁜 풍경 담다 보니 표정이 자꾸 풀리려고 해서 민망하다. 어, 새다! 박새로 추정되는 작은 새 두 마리가 폴짝폴짝 놀고 있는데 표정관리는 다 틀렸다. 헤벌쭉.... 그렇게 단풍 아래서 머물고 다시 걷는 길에 쓰윽 손을 잡아 버렸다. 새는 내게 하늘의 메신저인데, 이 순간 사랑에 깨어나라고 하시는 그분의 메시지인데 거부할 수가 없다.

손 꼭 잡고 집에 와 마음 상한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은 스콘과 함께 커피를 마셨다. 서쉐숵 목짠님께서 이태리 여행에서 사다주신 에스프레소용 원두로 모처럼 모카포트에 커피를 만들었다. 다시 마주 앉으니 조금 민망하고, 아까 그 기분 나쁜 느낌이 다시 살아나긴 했지만, 스콘이 맛있고, 커피가 좋아서 그럭저럭 괜찮은 시간이었다.

위의 사진은 가을 초입의 어느 비 오는 월요일에 운치 있는 카페에서 달달했던 순간이다. 달달한 순간에 읽기 딱 좋은 책 제목이 <악>이었다. JP의 책이지만, '악'은 우리 둘 모두 관심 있는 주제이다. 악에 관한 많은 책 중 내겐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 만큼 깊이 있고 실용적인 책이 없다. 성경만큼 가까이 두고 있는 책이다. 해마다 연구소 지도자 과정에서 함께 읽는 책이기도 하고. 마침 이번 주 지도자 과정이 이 책 나눔이다. 많은 이들을 만나 상담했던 스캇 펙은 악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으며 대부분은 그냥 피상적으로만 관찰하더라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악을 치유하려는 씨름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자기를 깨끗게 하는 것이야말로 언제나 최대의 무기가 될 것이라고. 늘 가슴에 새기고 있는 말이다. 마틴 부버의 말을 인용하여 두 유형의 악인을 구분한다. 하나는 악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 또 하나는 본질적으로 악에 먹혀 추락한 자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늘 악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과정 앞에 선다고 생각한다. 미끄럽다. 그 길이. 여차하면 미끄러져 들어간다. 악에 대한 여러 정의 중 "악한 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생명과 성장을 거스르는 일에 자신을 헌신한다"는 말은 연구소 이름에 '성장'이라는 말을 넣은 이유이다.

사랑은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의 문제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 두 사람이 성장하려면 투명한 소통이 있어야 하고, 갈등을 피하지 않고 마주해야 한다. "화해한 상태"에서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단풍나무에서 노닐던 두 마리 작은 새는 내 입으로 뱉은 말들을 순간 떠오르게 했다. 말이 아니라 태도를 생각나게 했다고 하는 게 맞다. 늘 '화해한 상태'를 유지하고, 언제든 화해하려 하는 사람은 JP이다. 나는 어떻게든 싸우려 하고, 더 싸우려 하는, 화해할 수 있는 상태에서 더 강퍅해지는 그런 부류이다. 내 약점이다. 약함이 여차하면 악함이 된다. 악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된다. 약함과 악함의 기로에서 어설픈 '성장'을 선택하는 것이 덜 악한 자로 사는 노하우이다. 내게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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