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에 한 노래 있어 9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짧고 굵은 사랑에의 항변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 주인공 상우(유지태)의 대사지만 누구나 언젠가 한 번쯤 되뇌어본 말이기에 명대사의 목록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휴대폰 광고 속 대사도 떠오른다.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 지고지순한 태도, 사랑은 움직이고 변하는 거야, 솔직 당당하게 인정하는 태도. 어쩐 일인지 둘 다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가. 변하지 않는 것이라 간절하게 믿고 싶은 것은 결국 변하고 말 것임을 알기에 두려움으로 붙드는 썩은 동아줄인 지도 모른다. 바람기, 변심, 고무신 거꾸로 신기. 같은 연애 사담을 나누고자함은 아니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 사랑뿐이다, 설교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 찬송의 이 가사가 자꾸 입에 맴도는 탓이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미국의 낭만파 시인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는 시를 쓰고 가르치는 일을 노년이 되기까지 열정적으로 했다고 한다. 그 비결을 묻는 말에 정원 한 구석의 고목을 가리키며 이렇게 답했다고. “죽은 듯 보이는 저 나무가 봄이 되면 다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네. 그 이유는 저 나무가 매일 조금씩이라도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야. 나도 그렇다네.” 살아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매일 조금씩 자라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사랑이 살아 있다는 증거는 아주 조금씩이라도 성장해야 할 것 아닌가.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뜨겁게 고백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싶다. 어느 뜨거운 수련회 마지막 밤이었던가? 오랜 기도가 응답되어 기쁨의 눈물과 함께 흘린 말이던가. 언젠가 신앙생활이 뜨거웠던 적이 있었는데, 공동체를 향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시간을 내는 것도, 주머니 털어 밥을 사고 선물을 챙겨주며 내 배가 부르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쩌다 모든 것이 맹숭맹숭해진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을 하긴 하는 건가? ‘주님 사랑해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영혼 없는 고백은 찬양시간의 립싱크로만 남은 것인가? 기도, 선교, 봉사, 예배에 뜨거운 주변 친구들이 생소하기만 하다. 사랑이 식었어. 사랑이 어떻게 변하지?

 

성장하는 사랑은 변한다. 성장이라고 하니까 마냥 커지는 느낌이지만 마음의 성장, 사랑의 성장은 위가 아니라 깊이이고 넓이이다. 통장의 잔고가 눈에 띄게 많아지는 것처럼 온갖 긍정이 보란 듯 확장되는 것이 아니다. 처음 연애할 때 설렘의 무한충전으로 부풀어 오르던 행복함, 영화관에서 팝콘 봉투에서 손끝만 닿아도 온몸을 압도하는 찌릿하던 전율이 무한대로 커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조금 아쉽고, 시간이 지날수록 아련하긴 하겠으나 그것은 사랑의 시작이었을 뿐임을 안다. ‘, 내가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네,’ 실망하고, 차이로 인해 아픈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를 더 섬세하게 이해하게 되면서 사랑은 깊어진다.

 

그러니까 시인 롱펠로우의 나무처럼 죽은 듯 보이는 관계 속에서도 매일 조금씩 자라고 있다면 다시 꽃이 피고, 작년보다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이다. 그러니까 눈물 콧물 흘리며 기도하던 뜨거움이 사라지고, 예배를 향한 열정은 잃은 지 오래, ‘교회 안 나가를 고민하다 가나안 교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사랑 자체가 소멸하여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단단한 사랑을 위해 메마른 겨울바람을 맞고 서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무성한 잎을 내고 열매를 맺던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게 되는 시간일지 모른다.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어요. 이런 기도 하나 빨리 안 들어주시고. 제가 큰 걸 바란 것도 아닌데......’ 하는 순간에도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아니, 살아 있는 한 멈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수 년 전에 서른 셋 젊은 싱그러운 나무 같은 몸에서 암이 발견되어 긴 시간 투병하고, 나아지고, 희망하고, 절망하다 하나님 곁으로 간 청년이 있었다. 호스피스에서 보낸 마지막 며칠 동안 내내 가족들과 함께 불렀던 찬송이 이곡이었다. 건장한 청년으로 암 선고를 받는 충격의 순간, 고쳐주실 줄 알고 희망하던 순간, 희망이 절망이 되는 순간에도 그의 영혼은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노래했었나보다. 어제와 다른 사랑, 어제보다 더 깊어진 사랑의 성장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 친구였다.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 광화문


주중에 미팅이 있어서 광화문에 나갔다. 종로 2가에서 광화문까지 걸으며 뭉클했다. 지난 겨울, 저 넓은 차도를 운동장 삼아 걸었었지. 촛불 하나 들고 수많은 촛불에 떠밀려 걸었었지. 그때 외친 구호를 떠올리니, 오늘이 꿈인가 생신가 싶다. 꿈을 꾸듯 걸어 교보빌딩 앞에 도착. 익숙한 어떤 자리에 다시 앉았다. 대학로에서 시작해 광화문까지 걸었던 날이다.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쉬는데 시시각각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 들었었다. 잠시 앉아 어둑어둑해지던 그날의 거리를 떠올려본다. 빼곡히 촛불이 된 사람들이 앉았던 차도에 느릿느릿 자동차가 지나가고 아무렇지 않은 오후이다. 


약속 장소인 교보빌딩 1츠의 파리크라상에 도착하여 창가에 앉았다. 세월호 피켓팅을 하며 서 있던 바로 그 자리가 딱 보인다. 촛불의 파도를 타고 밀려다니던 겨울, 그 한참 전부터 세월호와 함께 광화문에 들락거렸다. '세월호에 있던 형과 누나들이 불쌍해요. 그 엄마 아빠들이 불쌍해요. 진실을 알려주세요' 앳된 현승이가 앳된 글씨체로 쓴 손피켓을 들고 엄마 옆에 서기도 했었다. 세월호 가족과 함께 홍대 앞에서 출발해 광화문까지 걸었던 봄날도 있었지.


광화문, 이 동네가 새삼스럽게 뭉클하고 애틋했다. 

미팅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 되짚어 종로를 다시 걸으며 '광화문 연가'를 불렀다.



# 양화대교


주일 오후, 고양시에 있는 교회에서 강의가 있었다. 티맵이 안내하는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가는데 조금 돌아가는 길이고, 톨비도 꽤 나오지만 뻥뻥 뚫린 길 가는 맛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 시내 도로 사정이 나아졌는지 티맵이 올림픽대로를 경유하여 경부고속도로를 타란다. 알겠다, 하고 출발하려는데 상세경로에 '양화대교 북단'이 보인다. 양화대교 북단, 양화대교 북단. 거길 지나기 싫어서 다시 톨비 많이 내고 돌아가는 길 외곽순환을 선택했다.


굳이 피할 곳도 아닌데 피하게 되었다. 이유는 그리워서. 그리운 곳을 지나치다 너무 그리워 슬퍼질까봐. 합정동 살 때 강동 하남 쪽에서 일을 하고 집으로 가는 길, 올림픽대로를 달리다 양화대교를 타러 올라가는 길을 좋아했다. 집이 가까워 오고, 다리로 올라가는 짧은 길에 키가 큰 나무들이 서 있는데 그 지점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그리 푸근할 수가 없었다. 티맵에서 '양화대교 북단'이란 글자를 보는 순간 그 길이 떠올랐고, 그리움이 사무쳤다. 망원시장, 절두산 성지, 성산대교 아래 벤치..... 짧은 순간 불쑥불쑥 소환되는 나오는 장소들. 강북강변을 거쳐 전에 살던 집 옆을 지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돌아돌아 집에 왔다.


뜬금 없는 감정이다. 새삼스런 그리움이다. 며칠 전, 갑자기 부른 '광화문 연가' 때문일까. 광화문 가까운 합정동이었기에 마음 먹을 때마다 달려갈 수 있었다. 울고 있는 이땅의 '을'들과 연대하기 쉬웠던 동네, 참으로 '을'스러웠던 동네, 그리하여 나도 을이지만 혼자는 아니라고 느꼈던 시절. 참 좋았구나. 광화문이 가까운 합정동, 참 좋았었구나.


현승이가 초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에 쓴 시가 떠오른다. 명일동 살다 합정동으로 이사하고 쓴 시이다. 할머니 댁에 가느라 명일동 근처를 지나노라면 마음이 이상하다며 쓴 시이다. 생각해보면 여기저기에 두고 온 마음이 많다. 과거는 '두고 온' 것들, 두고 와서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엉킨 어떤 덩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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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커피 내리는 사이.

그 짧은 시간, 김씨 셋은 각자 취향 놀이에 빠져든다.


아빠 김씨는 새로 온 책에 빠져 의지인지 테이블인지 구분도 못하고 앉아 있고,

딸 김씨는 워너원인지 아이돌인지 돌아이인지에 빠져 스마트폰에서 헤어나올 줄 모른다.

아들 김씨는 수련회 휴유증으로 기타 들고 교회 노래 아무거나 치기, 딩가딩가 딩가딩가.


혼자 찬양 집회 하던 변성기 아들 김씨는, 

잠시 고래고래 꽥꽥 개굴개굴 하다 제가 듣기에도 거북했는지 노래를 멈추고 잠시 생각에 빠진다.

음정 유연성이 녹록치 않은 제 목소리에 맞춰 즉석으로 노래의 키(key)를 낯춘다.

다시 딩가딩가딩가딩가 꽥꽥꽥....... 뚝!

덜컥 낮춰 놓은 key로 코드진행이 막혀 노래는 다시 멈춰서다.


스마트폰에 빠진 누나가 미동도 하지 않고 

"씨샾마이너!" 던져준다.

와, 이것은 음성지원 악보다.


씨샾마이너 잡고 다시 딩딩가가가딩가딩딩가딩........

노래는 계속 가는데 뭔가 재미가 없다.


테이블 위에 올라 앉은 아빠가 책에 꽂은 눈동자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스윙이지, 스윙으로 쳐!"

와아, 살아 있는 기타 교본이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 아름다운 하나님의 열매....... 딩가딩가 딩가딩가


'주를 향한 나의 사랑 멈출 수 없네, 멈출 수 없네........'

변성기 꽥꽥이 노래는 이제 멈추지 않는다. 앗싸앗싸 뽕짝뽕짝.


"어머, 이건 찍어야 해!"

드립포트 던져놓고 카메라 들고 설치느라 커피는 과추출 되었지만.

이것은 득템. 가족 악보, 득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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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 사랑> 리뷰이다. 정성들여 길게 쓸 생각은(자신이) 없다. 영화보다는 관람 후 뒷풀이(사실 앞풀이 뒷풀이 뒷뒷풀이)의 여운이 진했던 날이라 영화와의 만남은 실제 만남에 묻힐 수 밖에 없었다. '영화 좋은데 언니들 만나서 더 좋네'로 끝났다. 관람 후 일주일, <덩케르그>를 봤는데 관람 후 한두 시간은 스크린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바닷속에 잠긴 듯했고, 전투기를 조종하느라 창공을 헤집고 다니는 듯했다. 저녁 먹고 앉아서 (아들) 현승이가 '엄마, 덩케르그 영화 좋아?' 하는데 '그냥 그래' 하는 대답이 나왔다. '아까는 나도 보라며?' '어, 처음에는 뭔가 강렬했는데 지금은 엄마가 그 영화를 봤는지 조차 기억이 안 나. 오히려 지난 주에 본 영화 <내 사랑>이 자꾸 떠올라. 그 영화가 좋았나봐. 엄마한텐 이런 게 좋은 영화야'라 말하고 보니 그제야 <내 사랑>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래도 리뷰 쓸 에너지는 없었다. 교회 수련회며 강의 일정도 많았고, 읽어달라는 책이 유난히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터라. 그런데 못내 이렇게 어설픈 끄적임을 시작한 것은 순전히 홍보문구 때문이다. [한 여름 밤의 사랑 이야기, 에단 호크*샐리 호킨스] '아닌데, 로맨스 영화 아닌데' 처음엔 그냥 지나쳤다. 극장과 뉴스 밖에 안 뜨는 페북 뉴스피드에서 '한 여름 밤의 사랑, 한 여름 밤의 사랑......' 자꾸 보니 신경질이 났다. '아니라고오! 로맨스 영화 아니라고오!' 하다 결국 블로그 글쓰기를 클릭했다. 고아 출신의 괴팍한 외톨이 남자와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신체적 핸디캡을 가진 천재 예술가의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뭐, 그저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한 발 양보하여 결과론적 로맨스 영화라고 하자. 


모드의 얇고 틀어진 다리, 그 다리를 삐칠삐칠 걷는 뒷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가정부 일자리를 찾아 아슬아슬한 걸음걸이로 에버릿의 작은 집을 찾아가고, 거절 당하고 돌아서 삐걱삑걱 또 걷는다. 그 성치 않은 다리가 편히 쉴 곳이 있었으면 싶은데 내내 그러질 못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영화 마지막 에버릿이 했던 말처럼 나는 내내 모드를 '부족한 사람'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바라보았다. 감독의 낚시질에 보기 좋게 걸려든 셈이다. 영화의 스토리를 이끌고 가며 동시에 모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열어 나가고 궁극적으로 에버릿을 다른 세계로 끌고 가는 것은 그녀의 부족해 보이는 걸음이다. 그러니까 에버릿이(우리가, 내가) '부족함'이라고 보는 모드의 부족함이 그녀 자신에게는 치명적 핸디캡(부족함)이 아닌 것이다. 영화 초반부 고모집에서 눈칫밥 먹으며 사는 중에 클럽에 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장면은 엄지 척이다. 손에 손을 잡은 커플들 사이에서 어눌한 몸 그대로, 흥에 겨워 흔들거리는 슬프도록 당당한 모습이라니. 파트너가 없거나 자유롭게 춤출 수 없는 몸 같은 것들이 아무 문제 되지 않는 클럽의 밤이다.


고모의 핍박, 친오빠와 고모의 파렴치한 계략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발로 걸음을 멈추지 않는 모드. 시키는대로 하면 편안히 앉아 밥 얻어 먹을 수 있는 고모집을 떠나 가정부로 들어가는 모드. 그런 모드는 (아무리 딱해 보여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모드'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내 사랑'이 아니라 '나 사랑' 모드라고 말하고 싶다. 결국 이 영화는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 처절한 이야기, 모든 인생이 그러하듯 해피앤딩인 듯 새드앤딩인 듯 해피앤딩 같은 먹먹한 결말의 이야기이다. 서서히 모드를 대하는 모드가 바뀌는 에버릿의 모드는 모드 자신의 자기 사랑 모드에서 비롯한 것이다. 신체적인 장애에 굴하지 않고 느릿느릿 가정부 일을 하며, 인간적인 모욕에 굴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며 자존심을 지켜내는 모드의 '나 사랑'이 결국 에버릿을 구원하는 것이다. 고아로 태어나 '사랑'이라는 기반을 가지지 않은 에버릿에게 사랑의 실재, 사랑의 가능성, 사랑의 희망 같은 것을 전염시키는 것. 





'자기사랑'이라는 기반 없이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 예수님도 말씀하시지 않았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정희진 선생은 '나를 경유하지 않은 타자의 시선은 없다'라고 한다. 같은 얘기이다. 나를 수용하는 만큼 타자 수용이 가능한 것이고, 자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타인을 품어 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누가 부족하고, 누가 온전한 사람인가. 영화에서 죽음에 임박한 고모가 말한다. '네가 우리 가족 중에 가장 잘 되었구나(잘 살고 있구나? 행복하구나? 온전하구나?)' 젊은 시절, 모드가 낳은 아이를 모드의 동의없이 입양시켜 버린, 모드의 존재 자체를 부족함으로 규정했던 고모의 말이라니! 


'나는 왜 당신을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 했을까' 에버릿의 회한 가득한 고백에 나의 마음도 담는다. 모드는 예쁜 구두를 좋아한다. 예쁜 구두를 보고 눈을 떼지 못한다. 틀어진 다리, 볼품 없는 걸음 걸이에 '예쁜 구두'를 욕망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눈길로 바라봤던 것을 고백한다. 보이는 것의 '번듯함'에 매인 나로서는 시각적 부족함 너머를 보는 것이 어렵고 부끄러운 숙제이다.  나 자신이 되어 연애하기(사랑하기, 엄마하기, 신앙하기) 동어반복을 하며 강의하고 떠들고 다닌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나는 자주 실패한다. '보이는 번듯함'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모드의 걸음걸이가 자꾸 떠오르는 이유이다. 싫고 거북하여 자꾸 그리로 향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가장 인상 깊었다고며, 엄지 척이라며 추켜세웠지만 한편으론 거북하고 싫었던 장면. 삐뚜룸한 몸으로 흔들어대던 클럽에 간 모드를 자세히, 오래 바라볼까. 예쁘게 보일 때까지? 그러다보면 '너도 그렇다. 부족하지만 너도 예쁘다' 내게 말해줄 수 있을까.



 







거짓자아,
설명하기 어렵고 불편한 말입니다. 아홉 개의 성격유형을 '거짓자아'라 이름붙이며 내적여정을 떠나는 에니어그램이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입니다.


'거짓'이라 말하니 누군가를 속이는 것 같지만 무엇보다 스스로 속는다는 의미에서 그 파괴력이 있습니다. 거짓자아의 반대 자아는 무엇일까요? 참자아? 이 역시 뭔가 (상당히 오염되어) 불편한 말입니다. 브레넌 매닝는 '아바의 자녀:사랑받는 자'라는 말로 '거짓자아' 아닌 자아를 대치합니다. 정말 적실합니다.


에니어그램 공부에 입문하여 혼란에 빠진 시기(그러니까 내 성격유형을 다 갖다 버리라는 거야 뭐야, 나는 이제껏 잘못 살아았고 잘못 믿어 왔는데 이걸 다 교회에서 배웠으니 더 이상 소망이 없군, 콱 죽어 버릴까?)에 저를 구원한 두 권의 책이 브레넌 매닝의 <아바의 자녀>와 안셀름 그륀의 <아래로부터의 영성>입니다. <아바의 자녀>를 읽고 노트에 이렇게 적어 놓았더군요.


타인의 불만이나 분노 무관심에 놓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내 거짓자아는 벌벌 떨고 있구나!


거짓자아는 회피하거나 미워하고 혐오할수록 힘이 세어지고, 그것을 인정하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때에만 작아집니다. '아바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끌어안을 때만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요. 내적여정은 그 지난한 길, 고통스럽기에 자유로운 길, 알 수 없는 신비를 따라 가는 평생의 여정입니다.


토마스 머튼, 헨리 나우웬, 칼 융, 플래너리 오코너, 죤 브레드 쇼, 마이클 야코넬리, 앤서니 드멜로, 리처드 로어 등 영성의 대가들과의 만남을 자신의 솔직한 경험에 농축시켜 풀어낸 절절한 글입니다. 일독, 십독, 필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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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수련회의 계절입니다. 수련회의 계절에 만만한 프로그램 MBTI 얘기입니다. 어찌나 만만해졌는지 수련회 스태프들이 검색으로 공부하고, 셀프 강의까지 하는 간편 MBTI가 만연합니다만. 그래도 꿋꿋하게 MBTI 전문가 자격으로 몇몇 교회 전교인 수련회에 초대받아 강의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검색해서 아무나 검사하고 강의하는 MBTI도 있지만, 10년 넘게 그걸 붙들고 물고 빨고 공부하고 살고 좌절하고 깨닫는 집착 강사의 MBTI도 있지요. '그깟 MBTI, 그깟 성격유형' 하찮게 여김당함을 무릅쓰고 검색으로도 할 수 있는 MBTI 강의를 장인 정신으로 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에는 왜곡된 말과 생각이 들러붙기 마련입니다. 신기하게도 왜곡된 경구는 귀에 쏙쏙 들어와 꽂히지요. ("목사를 대적하면 어떻게든 댓가를 치룬다. 자녀가 잘 안 되든지 누가 병에 걸리든지" 귀에, 마음에 콕 박히지 않느요?) MBTI는 어마어마한 자기중심성에 빠져 사는 사람들에게 자기이해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참 좋은 도구인데, 그럴듯 하지만 왜곡된 설명으로 본질이 흐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검색으로도 전문가가 되는데요.

요즘은 MBTI에 대해 잘못된 루머를 바로잡는 것만으로도 강의가 재밌고 풍성합니다. 그중 하나는 오직 둘 중에 하나라는 강박을 깨는 것입니다. 외향과 내향, 감각과 직관, 사고와 감정, 판단과 인식형 대극으로 설명하는 지표 중 '오직 외향! 오직 직관!' 하나만 내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MBTI가 근거하고 있는 Jung의 심리유형론에서는 외향형의 무의식에는 내향이, 감각형의 무의식에는 직관이 의식으로 떠오를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Carl Jung 심리학의 중요한 핵심은 '통합'입니다. 외향 안에 내향이 있고, 직관형 안에는 감각형이 있으며, 여성의 내면에는 남성의 내적인격이 남성 안에는 여성의 내적 인격이 살아 있다고 합니다. 그 둘이 통합되는 것이 개성화 과정이고 인격의 발달이라고 합니다. 페르소나와 그림자의 통합은 물론이고요. MBTI 유형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의 true type이 외향이라면 나는 죽으나 사나 외향형이 아니라 내 안에는 내향의 모습이 숨어 있고, 중년을 지나며 자연스럽게 떠으르며 통합된 인격으로 가는 것이 건강한 성격의 발달입니다. 

요즘은 청년보다는 장년 대상으로 MBTI 강의하는 일이 많은데, 이런 관점을 전하면 찰떡 같이 알아듣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면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씨름한 경험과 세월로 얻은 깨달음일 것입니다.  강의 마지막에 질문합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셨던 예수님은 MBTI로 무슨 유형이실까요?"

온전한 인간이셨던 그분의 유형은 EISNTFJP 아닐까요?

회중 앞에서 거침없이 마이크 잡고 가르치시지만(E) 홀로 고독의 시간을 위해 물러나시고(I), 민중들의 배고픔의 현실, 실재하는 고통을 감지하여 먹이시고 구체적인 필요를 채우시며(SF) 그 어려운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비유로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 해주시고(NF), 바리새인과의 논쟁에서 빈틈 없는 논리로 한 치도 밀리지 않으시는(NT) 예수님. 구약의 예언(전통)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완벽하게 성취하시며(ST), 임기응변에 능하시고 어떤 것도 품으시는 융통성의 예수님(P).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입니다. 내 유형을 제대로 파악하고 좋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온전히 좋아하면 자연스럽게 그 이면이 보입니다. 내게 익숙하지 않은 열등기능이 새롭게 보이고, 겸손한 태도가 됩니다. 아무리 애써도 내 유형이 넘어서지지 않을 때, 더욱 겸손해질 것입니다. 반대유형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서로우 부족을 채우며 더불어 사는 것의 아름다움을 깨닫는다며, 이보다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제각각 다른 모양의 인격이 어우러져 이뤄가는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 


어렵사리 손에 넣은 중2의 시를 공개한다. 특히 두 번째 시에는 깊은 빡침과 함께 한 사람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이 절절하게 담겨 있는데, 그 대상은 시인의 엄마이자 첫 번째 독자이며, 시인의 시를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자처하는 바로 '나'이다. 일기 쓰 듯 감정을 토해낸 시가 엄마 눈에 띄었다는 것을 알고 시인은 아노미 상태가 되었다. 없는 데서는 누구 욕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마음으로 썼는데 당사자에게 들켰으니, 그것도 (가끔은)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는 엄마와의 필화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왜 마음대로 봤냐!'며 [웃고 있는 가면]을 시노트에서 부~욱 찢어내고 말았다. 엄마로서 동시에 시적 타깃으로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지만 정신줄을 가다듬었다. 혼미해진 정신을 가다듬고 허벅지를 찌르며 참고 사과하고 대화하여 화해에 이르렀다. 그리고 어느덧 여름방학(두 편의 시는 각각 1학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시즌에 쓰여진 것이다). 느슨해진 틈을 공략하여 작품의 블로그 게재 허락을 받아냈다. (어떻게든 아들 시라도 팔아서 인기를 얻어보려는 현시욕의 승리!)  쉽게 볼 수 없는 질풍노도의 중심에서 쓰인 시 두 편을 공개한다.      





[그렇게 된다는 건]


철이 든다는 건 가방을 진다는 것이다.


아래는 소박하지만 꿋꿋한 드넓은

초원이 있지만 인간은 탁한 하늘의 끝을

보기 위해 더 무거운 짐을 메고 산을 오른다.


나는 산을 오르고 있다.

나는 나를 깎으며 한 발 한 발 내딛던 그것을

시간이 갈수록 더 무거운 가방을 드려 올라갔던

그 불안함의 안대를 벗고 초원을 향해


뛰어 내려갈 것이다.

그 산을 내려가며 난 내 사람들에게

속삭여 줄 것이다.



어린 시인, 꼬마 철학자에서 본격 청소년 시인 돌입을 알리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마포 한강변을 추억하고 그린다. 자전거를 달리고, 비밀 기지를 만들고, 거기 숨어 들어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염탐하던 어린 시절을 그린다. 아무 걱정 없이 놀기만 했던 시절, '엄마, 나 정말 학원 안 보낼거야? 중학교 가기 전에 수학 같은 걸 배우고 가는 거래? 나 학원 좀 보내고 그래' 했던 천진난만 했던 시절. 

천당 밑 분당의 교육열 속에 내던져진 시인은 난생 처음 보는 중간고사, 기말고사 앞에서 철이 들어버린다. 소박하지만 꿋꿋했던 어린 시절의 초원을 떠나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 덮치고 있음을 받아들이려 한다. 한 시간 정도 엄마를 앉혀 놓고 자신이 살고 싶은, 살고 싶지 않은 세상에 대해 토로한 후에 써내려간 시이다. 시를 내밀며 시인은 눈물을 글썽였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며.......



[웃고 있는 가면]


결국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떠들어대는 것이다.


결국 아닌 척하고 싶어서

베베 꼬아서 말하는 것이다.


다르지 않다는 걸, 결국 다를게 없다는 걸

알게  될 때 난 더 비참해지고

그는 더 뻔뻔스러워진다.



[철이 든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시인은 1학기 중간고사를 쳤다. 나름대로 어떤 과목에선 좋은 성적을 냈고 어떤 과목은 많이 부진했다. 어, 하니까 되네! 하는 기쁨과 역시 안 되는구나! 두 가지 감정을 다 맛 본 듯한 시인은 기말고사에는 더 열심히 해보겠다고 말했다. 기말고사가 다가오자 시인은 태도를 바꿨다.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로 '왜, 도대체 공부를 해야 하냐?' 새롭고도 뜬금 없는 분노를 터뜨렸다. 시험기간이 다가와도, 막상 시험기간에도 그다지 공부하지 않았다. 공부를 종용하면 '내가 지방이 1그램에 몇 칼로리인지, 이런 걸 왜 외워야 하냐?며 의미를 따져 묻는다. 10시만 지나면 내일 시험공부 다 끝났다며 잠자리에 들었다. 마지막 날 시험을 앞두고 엄마는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우려는 반발을 낳았고 반발을 설화(舌禍)를 낳았으니. '그래도 시험 기간만이라도 최선을 좀 다해야 하지 않을까? 솔직히 말하면 네가 대충 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싫어.' 그러자 시인은 '대충 사는 게 왜 나쁜데? 나는 최선을 다해 살고 싶지 않다고! 대충 살고 싶다고!' 선언했다. 대화 또는 우려표명의 협상은 결렬 되었다. '그럼 대충 살아! 니 인생이니까 니 맘대로 살라고!' 그리고 시인은 제 방으로 들어가 시험공부 대신 시를 썼다. [웃고 있는 가면]  고상한 척 하면서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기를 바라는 보통 엄마와 다를 것 없는, 나는 그런 엄마이다.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 사실 나는 더 뻔뻔해진 것이 아니라 너보다 더 비참해졌다. 임뫄! 짜식아!





시험 시즌이 지나고 널널해진 여름 방학. 아침 일찍 일어난 시인은 갑자기 '엄마, 나 도시락 싸 줘' 읭? 도, 도시락이요? '나 자전거 타고 나가서 탄천 어디에 앉아서 엄마가 싸 준 샌드위치 같은 걸 먹고 싶어' 여유부림 끝장판을 보여준다. 싸주기는 어렵고 사줄 수는 있다. 가는 길에 빠바에 가서 샌드위치 사라, 했더니 기분 좋아 하신다. 극도로 좋아진 기분에 '현승아, 그런데 그 시들 말이야. 블로그에 올려도 돼? 네가 결국 시는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면서 쓰는 거라며' 했더니 '엄마, 내 시가 옛날하고 달라져서 블로그 오는 사람들이 좀 그럴 걸' (무슨 독자 걱정?) '그래서 엄마가 올리고 싶은 거야. 사춘기의 복잡한 마음을 시로 쓸 수 있는 애는 거의 없어. 정말 보기 드문 시지' (비굴비굴, 취향저격 설득) '그래? 뭐 그러면 올리든지!' (의외로 쉽게 허락)


이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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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 때 기대와 설렘 가득 안고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집>을 집어 들었었다. 미국 오가는 비행기 독서용으로 선택했는데 결국 1년째 미완의 독서로 남아 있다. 야금야금 하나 씩 어쨌든 눈팅은 다했다고 볼 수 있다. 750 페이지 30여 편을 차례차례 꼼꼼히 읽었다 해도 '미완'의 느낌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내내 '흠..... 긁적긁적.....' 하는 읽기였으니까. 그러면서도 딱 내려놓을 수 없는 매력으로로 일 년째 '읽고 있는 중'의 도서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와중에 장편 <현명한 피>가 IVP에서 번역돼 나왔다. '다 읽고 사기'의 책구매 원칙을 지키고자 허벅지를 찌르고 있었으나 단편집에서 만난 인생소설 <좋은 사람은 드물다>의 감동을 복기하고는 홀린듯 장바구니에 담고 말았다. 


내가 이걸 읽으려고 작년에 그렇게 화장실 들어갔다 뒷처리 안 한 느낌으로 플래너리 오코너를 끼고 있었구나! 어쨌든 오코너와의 라포 형성이 충분히 된 덕에 시간적, 정서적 낭비 없이 <현명한 피>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일이 되려면 이렇다. 가방에 든 <현명한 피>의 마지막 챕터 쯤에 책갈피가 꽂혀 있는 시점,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이 이름을 발견! 플래너리 오코너? 장거리 운전으로 몸이 뒤틀릴대로 튀틀리는 순간 팟빵을 털다 얻어 걸린 꿀잼이었다. 이동진은 내게 가끔 새로운 '정보'를 주는 고마운 '님'이지 '페이보릿'은 아니다.  피상적 차원에서 척척 대화가 통하지만 깊은 공감의 대화는 어려울 듯한 친구. 아는 것이 많아 입을 헤 벌리고 듣게 되지만 돌아서면 조금 공허한 그런 친구 같다. 동질성보다 이질성에서 더 많이 배우는 것을 알기에 가끔은 애써서 참으며 듣곤하는데 이번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들었다. 우주가 도와서 플래너리 오코너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느낌이다.


옮긴이의 말처럼 이 책의 주제는 '죄와 구원'에 관한 문제이다. 죄와 구원의 문제는 종교인들의 고민이다. 아니다. 정작 종교인들은 죄와 구원이라는 본질을 고민하진 않는다. 그로 인해 파생된 두려움에 사로잡혀 엄한 곳에서 허튼 희망을 찾는 사람이고, 그 환상을 밑천 삼아 입에 풀칠 하는 사람이다. 죄와 구원의 문제를 고민하는 자는 구도자, (필연코) '외로운' 구도자일 터.소설의 헤이즐 모리츠는 (아무리 봐도 약간 돌아이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구도자이다. 순회 설교자인 할아버지(독침을 숨기고 다니는 말벌같이, 머릿속에 예수를 담고 세 개 군郡을 운전하며 다녔던 성마른 노인)을 따라다녔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두 살 이 될 때까지는 자신도 역시 설교자가 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의 모리츠는 '예수를 피하는 길은 죄를 피하는 것'이라는 깊고 검은 침묵의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의 설교자가 된다. 자칭 '현명한 피'를 가진 에녹은 또 얼마나 부적응적이고 멍청한 인간인가. 돈을 위해 가짜 맹인 설교자 행세를 하는 호크스가 설파하는 죄와 구원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종교이다. 등장인물 중 적응적 인간은 단 한 명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현명한 피> 안의 죄와 구원은 모두 뒤틀려있다. 각자 나름대로 죄와 구원을 독해하고 배역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현명한 인간이라곤 없다. 현실 속 죄와 구원, 그것을 아우르는 신앙은 어떤가.


대학 친구들 모임에서 목회자인 남편과 관련 우리 부부의 이야기가 수다의 주제가 된 적이 있다. 숨통을 트기 위해 현실도피용으로 가지고 있는 나의 장래희망 카드를 하나 내놓았다. 마침 장래 계획에 관련된 전문가 친구가 둘이 앉아 있었다. 둘 다 크리스천이었는데 한 친구는 자칭 기복신앙에 보수적 신앙관을 가졌다. 목회자에게 잘 하고, 교회 봉사는 일단 열심히 해야 복을 받을 것 같단다. 다른 친구는 개인적 경험으로 인해서 목회자(부부)에 과도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천하에 상종 못할 부류가 목회자인 것처럼. 재미있는 것은 우리 부부의 조금 파격적인 장래 목회 계획을 들은 두 친구의 반응이다. 자칭 기복주의에 보수적인 신앙을 자처하는 친구는 '너희 자신을 믿지 마라. 너의 남편도 결국 사람이다. 사람 어떻게 별할 지 모르고, 사람 욕심이란 끝고 없다. 쉽게 생각하지 마라.' (집에 있는 뭣도 모르고 단잠 자고 있었을 우리 남편은 의문의 1패)  반면 목회자 알러지 있는 친구는 '신실아, 너라면! 네 남편이라면 무조건 잘 할 거야. 무조건 잘 할 것 같아'였다. (남편 의문의 2패?)


목회자에게 무조건 복종하기로 결정한 친구는 제 친구 남편인 목사가 무조건 미덥지 않다. (근거는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이기에) 세상 모든 목사들을 일단 의심하고 보는 친구는 내 친구의 남편인 목사는 무조건 믿을만 하다. (근거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의 남편이니까)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엉뚱하게도 나는 소설을 읽으며 두 친구를 떠올렸다.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를 설파하고 예수를 부정하기 위해 부러 죄를 짓는 사람과, 그에게 죄의 냄새를 맡고 회심을 종용하는 거짓 맹인 설교자. 목사님은 주의 종이니 언터쳐블의 존재라 믿는 것과 모든 목사를 잠재적인 장사꾼으로 보는 것이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두 친구에게서 나는 본다. 맹신 이면의 냉소와 불신, 극단적 불신 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어찌하여 볼 수 있는가, 내 안에 맹신과 불신 / 극단적 불신과 두려움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오코너의 소설이 불편한 이유는 이것이다. 인간 내면의 이 불편하고 불온한 공존의 감정을 확인시키고 또 확인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아니, 해결해준다. 충격적인 방식으로! 단편으로부터 이어지는 오코너 소설의 충격적 결말들은 다시 확인시킨다. 모순과 역설은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두 친구는 물론 소설 속 등장인물은 모두 내 안에 있다. 역자의 말대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내가 이렇게 살다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를 좇는 헤이즐 모리츠의 그로테스크한 삶과 죽음을 따를까 겁이 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오코너가 동시대 개신교의 빗나간 열정을 풍자한 소설이라는 평이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신교 천주교가 아니라 '종교'라는 이름으로 눈 먼 사람, 종교라는 이름으로 오직 자아숭배에 몰두하는 사람을 직접, 가까이서 경험하지 않고는 이런 인물설정은 가능하지 않다. 아니 결국 자기 안에서 발견했을 테지. 충격적인 소설 <좋은 사람은 드물다>의 할머니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앎, 자신의 모든 것에 '성찰'이란 할 줄 모르는,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편견을 종교의 이름으로 스스로 세례주어 합리화 한 좋은 나쁜 사람이다. 모든 것을 안다는 무지, 그 어마어마한 자기중심적 무지를 한 시도 쉬지 않고 입으로 떠벌떠벌하는 자가 불러온 끔찍한 화를 보며 놀라면서도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심지어 마지막 세 방의 총은 내가 쏘아도 좋았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마치 평생 한 번쯤 해보고 싶은 바로 그 일을 부적응자를 통해 대리만족한 느낌. 그녀의 입에서 더는 착한 나쁜 말이 나올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 "평생 누가 옆에서 1분에 한 번씩 총을 쏴 주었다면 좋은 여자가 됐을 거야"라는 부적응자(범죄자)의 말에 동생의 농담이 떠올랐다. "맞으면 돼. 몇 대 맞으면 돼." 치기 어린 비행청소년의 말을 세기의 소설가가 그로테스크하게 읊는다면 저 대사일 듯. 


헤이즐 모리츠이며, 호크스이고 동시에 착한 나쁜 할머니이며, 그를 쏜 부적응자인 나는 누구인가.

소설가 정이현의 추천사가 이렇게 답한다.


차갑고 가차 없는 시선으로 인간의 모순적 내면을 파헤치고, 읽는 이의 마음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후벼 판다. '어마어마'하다에는 매우 엄숙하고 두렵다는 뜻도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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