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윤이가 이유식으로 두유를 먹던 시절이었다. 밥은 물론 뭐든지 잘 먹는 아가였지만, 출근하는 엄마와 안녕하고는 할아버지 댁에 가면 치르는 의식이 있었다. '푸빵'이라 불리는 인형용 유아차에 누워(물론 크기가 작으니 꼭 끼어 누워 유아차가 터질 지경)서 비디오로 '벅스 라이프'를 틀고 '쮸쮸'라 불리는 두유를 우유병에 넣어 빠는 것이었다. "쮸쮸 한 통을 코끼리 비스께트 먹는 순식간에 치워버려" 어머님 말씀이다. 꽉 끼는 코끼리처럼 유아차에 한 병 뚝뚝하고는 바로 잠이 들어 버리는 것이다.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쪽이 새롭게 무너지는 장면이다. 아침마다 엄마랑 헤어지는 것 싫은데, 울어도 떼써도 바꿀 수 없는 상황인 것을 받아들이는... 아니 받아들이기는! 좌절하고 만 아기의 텅 빈 마음이다. 

 

마지막 남은 두유 얘기인데. 그렇듯 두유는 그저 이유식이 아니라 엄마를 대신하는 정서적 대용물이었다. 한 박스 씩 사다두고 먹었는데 다 먹고 한두 개 남으면 애가 불안해서 어쩌질 못한다고 부모님이 보고하셨다. "하부지, 쮸쮸 사러 노넙(농협) 가자죠. 하부지, 노넙 가요." 그리고 할아버지 손잡고 노넙에서 쮸쮸 한 박스를 사서 집에 오는 길에는 기분이 좋아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고 하셨다. 그 말씀 전해주시던 아버님 모습도 눈에 선하다. 돌아보면 너무나 귀엽고, 한편 가슴 어디가 새롭게 무너지기도 한다.

그때 채윤일 보면서 젊은 시절 담배 피우는 친구들이 마지막 남은 담배 한 대를 향한 지나친 집착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걸 두고 놀리고 장난도 치곤 했었다. 마지막 남은 하나. 

 

찌개로 찜으로 볶음밥 재료로, 정말 소중한 묵은김치가 끝났다. 한 포기가 덜렁 남아 있었는데, 아끼고 아끼며 몇 잎씩 떼서 먹다가 마지막으로 털어서 오리고기 넣고 김치볶음을 했다. 김치볶음, 김치찜, 김치찌개에 열광하는 사람은 현승이다. 집밥을 가장 충실히 먹는 구성원이기도 하고. 며칠에 한 번씩은 김치 들어간 음식을 복용해 주어야 하는 몸이기도 하다. 닭으로 하는 김치찜을 개발하여 '닭치찜' 작명을 한 것도 현승이다. "현승아, 오늘 김치찌개?" "오오, 좋아! 그러잖아도 갑자기 김치찌개 생각이 났었어." 

 

마지막 김치를 자르는데 옆에 있던 현승이가 "엄마, 정말 이게 끝이야? 어떡하지?" 제 딴에 반은 농담인데, 한 개 남은 두유를 확인하고 불안해 하는 아기 채윤이가 떠올랐다. "어, 이거 마지막 잎새야. 너의 행복한 김치찌개 식사는 끝이야. 낄낄." 놀리기 시작했더니 진짜 좀 불안해한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더니 묘책이 나왔다. "엄마, 제천 갔다 와. 선 이모한테 가서 김치 좀 얻어 와. 선 이모 만나러 안 가?" (선 이모야, 제천 갈게,ㅎㅎ)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지막 잎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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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와 온라인 말씀 묵상, 심방도 하고

온라인 수업도 하며, 숙제도 하고, 독서도 하고

피아노 연습에 수강신청 하며 2학기 계획도 세우고

원고 쓰고, 강의안 다듬고, 공부도 하고

 

뭔가 열심히 하는데도 백수 느낌이 난다.

나돌아 다녀야, 얼굴이 안 보여야 안심이 되는 건 아닐까.

내 눈에 안 보일 때 어딘가에서 열심히 뭔가 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일까.

백수 넷이 뒹굴다 백숙을 해서 먹었다.

 

휴가를 맞은 남편은 4박5일 올레길을 걷고 왔다.

더위에 무리하지 말라고 부탁을 했건만,

하루 3만 보, 2만 보를 걸어서 뻘건 타조알 종아리를 하고 돌아왔다.

냉동실에 모셔두었던 전복까지 넣어 끓인 백숙의 힘이었나.

 

다시 백수 넷의 하루.

한 공간씩 차지하고 앉아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만 들리는,

집안이 꽉 찬 또 하루가 시작했다. 

오늘은 뭘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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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라면"

푹푹 찌는 방에서 설교 준비하다 나와 에어컨을 껴안고 있는 남편 등에 대고 "저녁 뭐 먹지?" 혼잣말처럼 물었다. 더위에 쩔고, 설교 준비로 저 세상으로 간 정신 탓이리라. ‘아무말'이 나왔다. '아무말'에 응답하여 저녁 메뉴를 정했다. 냉라면. 검색하면 다 나오니까! 낮에 끓인 김치찌개로 일찍 저녁식사를 마친 현승이가 골뱅이 캔을 사러 냉큼 다녀왔다. 이래저래 저녁은 남편 혼자 먹는 거였다. 냉라면 일 인분 만든다고 난리를 치고 있는데, 라면 양이 적어 부족할 것 같다며 채윤이가 물만두를 하겠단다. 물만두 한 접시 추가요! 

"만두"

믿기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남편이 전에 어느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있을 때, 담임 목사님 없는 점심식사 자리였다. 갈비탕인지 뭔지를 먹으면서 후배 전도사님들이 "만두 하나 시켜도 되겠습니까?" 하는 말에 당연히, 기꺼이 만두를 추가해서 먹었다. 나중에 담임 목사님에게 혼났다. 정말, 만두를 추가했다는 이유로. 만두가 죄는 아니었겠지. 내가 당한 것처럼 민망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여보, 앞으로 언제 어디서든 만두를 보면 내가 무조건 추가 주문해줄게!"

"만두도 있겠지"

만두에 관한 김종필스러운 에피소드가 하나 또 있다. 얼마 전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주일 점심이 없는 날. 예배 마치고 오는 길에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채윤이와 내가 한 차에, 남편은 뒤늦게 혼자 출발한 차에서 메뉴 선정을 위해 통화를 하고 있었다. 두 여자는 이미 냉면으로 합의를 본 상태고. 남편은 세 번 예배, 세 번의 설교를 한 상태라서 든든한 밥 같은 것을 먹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그래? 그게 좋겠어?" 이런 후렴구에 돌려 말하는 것으로 충분히 유추 가능. 나름대로 몇 번 소심한 주장을 하다가 "그래. 냉면집 가자. 만두도 있겠지." 하는 말에 이쪽 차에 나란히 앉았던 둘이 빵 터졌다. 욕구를 내려놓는 남자의 자기 설득, 또는 자기 위안이랄까. 이후로 "만두도 있겠지"는 김종필 아빠 특유의 정서와 태도를 표현하는 관용어구가 되었다.

"물만두"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물만두를 데쳐주는 채윤이 마음은 착한 아빠 마음을 알아주는 착한 딸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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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떡소떡을 참 좋아하는데,

채윤이도 좋아하고 나도 참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소떡소떡을 건강하게 만들어봤다.

현미가래떡과 야채소시지를 재료로,

기름에 튀기지 않고, 말랑하게 데우고, 끓는 물에 데쳐서.

소스에는 물엿 대신 조청을 넣었다.

소떡소떡소떡을 두 줄 만들어 한 줄씩 먹었다.

더 먹고 싶다는 채윤이에게 추가로

소.떡.을 리필해주었다.

다음부터는 채윤이 몫으론 소떡소떡소떡소떡이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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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추와 호박을 최대한 많이 넣어 부침가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빡빡하게 반죽을 한다. 하루 지나면 호박이 제 모양을 잃고  반죽에 녹아든다. 얄팍하게 부치기 딱 좋을 반죽이 된다. 들기름 두르고 부치면, 고소한 냄새가 빗소리와 어우러진다. 간이 딱 맞는 통마늘 장아찌 국물에 찍어 먹거나, 마늘 한 알에 싸서 입에 넣으면 고소함과 개운함의 조화는 말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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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볶음을 밥 둘레에 두르고
부추를 쫑쫑 썰어 뿌려서
닭 부추 덮밥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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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일동 살 때 좋아했던 <묘향 손만두>의 오이소박이 국수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

밥도 없고, 식재료도 없고, 장 봐야 할 각이지만 어떻게 한 끼 넘겨보자, 하는 뜻을 세웠다.

 

냉동실에 얼려 놓은 냉면육수 정도는 있고, 

각종 신김치 국물 모아서 체에 밭쳐 모셔놓은 것도 있고.

푸욱 삭은 오이소박이 몇 토막을 심폐소생시켜 신박한 국수가 창조되는 길이 열렸다. 창조 경제!

 

새 뜻을 세워본다.

국수에는 기름진 전이나 수육 한 점 곁들여줘야 하는데.

 

부추전 반죽 이따만큼 해놓고 어제저녁까지 먹고 털었고.

냉장고는 텅 비었...... 아, 계란!

계란 다섯 개 풀어서, 파 듬뿍 넣고 계란말이를 만들었다.  

맛이 없을 수 없지.

 

원고 하나 탈고한 수준의 성취감, 만족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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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끗한 머리칼, 흐릿한 시력, 흐물흐물한 살.

거스를 수 없는 늙은 몸의 신호, 3종 세트다.

흐물흐물한 살들이 복부에 모이고, 두둑해진 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먹어도 살은 찔 것 같지 않았던 남편의 배가 두둑해졌다.

"탄수화물 먹지 말래. 나 이제 저녁 안 먹을 거야. 닭가슴살 먹을 거야."

그 답지 않게 신경을 많이 쓴다.

 

그 어떤 욕구보다 식욕이 낫았었는데, 

절제하려 하면 이상하게 더 치솟는 것이 우리의 욕구다.

"아, 여보. 어떡해. 이것밖에 안 남았어. 밥이 자꾸 없어져. 맛있는데 너무 빨리 없어져."

 

금요일인데, 저녁으로 닭가슴살 하나를 먹겠다고 한다.

그러고 기도회 다녀오면 분명 또 냉장고 문을 열고 서서 고민에 빠질 것이다.

"현승아, 라면 먹을까?"

여드름 때문에 인스턴트 끊겠다는 아이까지 끌어들여 라면을 끓일지 모른다.

 

닭가슴살 대신 떡볶이를 먹기로 했는데.

떡은 딱 한 주먹 넣었고, 

양배추, 마늘쫑, 파프리카, 브로콜리, 양파를 산더미 같이 넣었다.

저탄수화물 떡볶이라고 하자. 

떡볶이라기보다는 족보가 야채 볶음 쪽인 것 같지만.

배부르게 맛있게 먹었다.

 

등교날이라 학교 다녀온 현승이가 떡볶이 재료를 보고 기겁을 했다.

"와, 이걸 다 넣었다고? 최악이다. 최악의 떡볶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더 늙어서 이까지 못 쓰게 되면 떡볶이 죽을 개발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부부, 떡볶이를 참 많이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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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도 있고 마음의 여유도 있으니 살뜰히 먹게 된다. 알타리김치를 먹고나면 꼭 김치통에 무청만 남게 되는데, 나는 이것도 좋아하지만 혼자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니다. 익고 또 익도록 냉장고 안에서 굴러다니게 뒀다 오늘같은 날에 고등어조림을 하면 아주 그만이다. 생물 고등어 한 마리, 양념장 만들고, 무청만 남은 김치를 참기름 등에 무치고, 양파 채썰어 함께 얹어 조림을 하면 새롭게 맛있는 맛. 바닥에 감자 썰어서 깔아주면 이 또한 맛있지. 살코기 위에 김치 한 가닥, 양파 몇 가닥 얹어서 한 입에 넣으면 밥 더 들어와라, 더 들어와라, 한다. 냉장고 저 안쪽에 있던 오래 묵은 무청만 남은 김치를 살뜰히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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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네 2번, 3번이 와서 이틀 자고 갔다. 고모집에 오면 맛있는 것을 주고, 특히 고기를 맛있게 해줄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온다. 기대에 부응하되 최선을 다해서 부응할 작정으로 아이들을 불렀다. 마침 집에 유배되어야 하는 상황이라 여러 끼니를 챙겨 먹일 수 있었다. 

 

 

맛으로든 양으로든 메뉴 선정의 신박함으로든 기대 그 이상을 해주리라 마음 먹었다. 동생은 연년생 1번, 2번을 포함하여 삼형제를 키우고 있다. 워낙 잘 먹고, 특히 고기를 잘 먹는 남자 아이 셋이서 먹는 것 포함 모든 것을 경쟁하며 자라고 있다. 그러니까 조카들을 한 놈, 두 놈씩 따로 우리 집에 부를 때는 그 경쟁의 일상에서 생긴 결핍감을 보상하려는 뜻이 있는 것이다. 

 

 

'결핍'이 아니라 '결핍감'이 문제라면 문제다. 충분히 먹었는데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결핍감. 모든 심리적인 문제, 중독도 결국 결핍감에서 기인한다. 무엇을 먹어도, 무엇을 누려도, 셋이 나누어야 하는 구조가 조카들 사이의 역동을 유발한다. 게다가 연년생 두 녀석은 사춘기. 작심을 하고 집에 오게 하여, 뭐든 맛있게 만들어서 충분히, 물리도록 먹게하고, 놀게 하는 것이 이 아이들의 고모된 기쁨이다. 말 안 듣는 사춘기 녀석들이 고분고분 착한 말로 "아니요. 배불러요. 그만 먹을래요" 라고 말하는 걸 보는 기쁨.

 

 

애정이든, 물건 집착이든, 결핍감의 치유는 충분히 채워져서 흘러 넘치는 경험이 전제 되어야 한다. 오랜 심리치료와 내적 여정을 통해 몸으로 배운 진리이다. 영혼의 결핍감을 밑 빠진 독이라 비유할 때, 어떻게 해도 그 독은 채울 수 없는 것인가? 유일한 방법은 빠져 나가는 물보다 들이붓는 물의 양이 더 많으면 잠시라도 채워지는 것이다. 항아리 뚜껑 열고 쏟아지는 소낙비를 맞는다면. 그것이 잠시 잠깐이라도 채워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어쩌면 영성적 치유의 본질이다. 근본적으로 그 항아리를 큰 물에 던지는 방법이겠고, 그것이 헨리 나우웬 신부님 등이 말하는 '사랑받는 존재'에 대한 깨달음일 터. 피부를 입은 하나님으로 이웃에게 다가가라 우리를 부르셨다면, 사람 사람의 밑빠진 독을 맡기신 것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근본적으로 큰물(무한한 아가페 사랑의 샘)이 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인간이지만. 쉬지 않는 바가지 질을 하더라도 찰나라도 누군가의 마음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 하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20여 년 아이들 치료를 했고, 내적 여정을 이끌고 있다. 물론, 내 바가지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마음성장연구소 열고 1년, 내 마음 바가지의 크기를 처절하게 확인하고 좌절도 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에 대해 몸으로 배우도 했다. 적어도 이틀 정도, 우리 조카들 위와 마음을 맛있게, 멋지게, 물리도록 고기로 채워줄 수 있었다. 고모 자부심 뿜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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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좋은 시간 

이 좋은 공간


혼자 집구석 지키는 토요일 

점심으로 뭘 먹지?


냉장고 뒤적뒤적

떡볶이 떡 0.5인분


그럼 떡볶이지


고추장 말고 다른 재료 제로!

뭐라고 있지 않겠쓰?


엊그제 속초시장에서 사 온 하얀 명란

뙇!!!!!!!!!!!!!!!!!!!!!!!!!!!!!!!!!!!!


올리브유 두르고

조랭이 떡 한 줌에 통마늘에 명란


으아 뭘 더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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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웬만하면 질리고마는 거 알지? 나 잘 빠져들고 빨리 질려. 그런데 김종필은 안 질려.  김종필의 창의력을 사랑해. 내 인생 유일하게 안 질리는 건 김종필이야."


손잡고 산길을 걷다 툭 뱉은 말인데, 툭 튀어나온 진실인 것 같긴 하다. 물론 맥락은 있다. 몸의 한계를 느끼면 아이들 치료하고 들어온 날인데 거실 구도가 바뀌어 있는 것이었다. 안쪽이 있던 소파가 창문 바로 앞, 화분들 코 앞에 가 있는 것. 장 본 것, 가방, 다 팽개치고 소파에 앉아 앞산을 보다 피로가 다 사라져버렸다. 


이런 얘기하면 조롱거리 되기 십상이던데. 나는 남편 설교에 거의 매주 은혜받는 남편 중독자 또라이 목사 아내이다. 남편 설교의 관점이 진부하지 않은 탓에 매주 감동이다.  대학원 리포트 하나도 자기 말이 아니면 쓰지 않았던 사람이니 자기 안에서 나온 것만 말하는 사람인 것은 알지만. 어쨌든 자기 몸을 통과한 말만 하려 애쓰는 것이 좋다.


진부한 반응을 못 견디는 병이 있는 내게 딱 맞는 짝꿍이다. 그러니 세상 모든 것이 그렇게 빨리 심드렁해지는데 20년 살아도 새롭다니까. 그러니 그의 최애 푸드 떡볶이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들더라도 같은 떡볶이는 없다. 같은 강물을 두 번 몸을 담글 수 없는 것처럼 질리지 않는 남편 헌정 떡볶이는 새로워야 한다.


아, 나 자신 헌정인지도 모른다. 남편은 쉽게 빠져들지도 않지만 쉽게 나오지도 않으니 매일 같은 떡볶이라도 맛만 있으면 좋을 터. 하다하다 파와 마늘을 과도하게 투입한 떡볶이를 만들어봤다. 물론 '마늘 떡볶이'라고 온통 마늘향 가득한 떡볶이를 먹어본 적이 있다. 착안하여 파까지 듬뿍 넣어 만들었는데, 쉽게 질리지도 않고 향신료 구별도 못하는 남편은 그저 맛있으면 되니까 좋아라 먹었고. 마늘 좋아하는 내겐 최고였다.


평생 이렇게 떡볶이를 만들면 1000 가지 떡볶이는 일도 아니겠다. 웬만하면 빨리 질리고마는데 떡볶이는 만드는 것도 만들어 먹는 것도 질리질 않는다. 떡볶이 좋아하는 김종필도 질리질 않고, 떡볶이와 김종필을 좋아하는 나 자신은 특히나 질리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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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자타공인 별명이 '삶은 요리'였었었었었는데.

삶이 온통 요리 하는 기쁨으로 충만하진 않았지만, 

요리하여 손님 맞이하고, 사진 찍어 포스팅 하는 낙이 아주 큰 낙이었던 적이 있었다.

지난 날을 떠올리며 흔히 말하 듯 "그땐 어떻게 그랬지? 젊긴 젊었어." 라는 말로 퉁칠 수 있는 시절.


흔치 않은 일정, 연달아 3일 강의가 있고, 장례 예배까지 있었던 주일에 식사 초대가 있었다.

즉흥적으로 있는 것 다 때려 넣어 하는 요리를 좋아하지만,

몇 달 전부터 약속된 식사를 위해 몇 날 며칠 고민하는 것도 괜찮은 창의활동이다.

몸은 피곤한 토요일 오후였지만, 양손 가득 장을 봐서는 집안 가득 멸치향 날리며 육수 끓이는 맛.

맛 아니고 향기?

멸치 육수향은 그 꼬리리함과 구수함이 어우러져 유난히 내겐 치유의 향기이다.



메인은 묵사발이었다.

전날 멸치육수 내서 냉장고에 넣었고, 먹기 두어 시간 전에 냉동실에 넣어 살얼음 얼렸다.

일단은 날이 더워 선택한 메뉴이다. 

손님 중엔 대입 수험생이 둘 있어서 두 친구 (고기 먹고 힘 내라고) 등갈비찜은 일부러 했다.

그런데 수험생 중 하나가 묵사발을 한 그릇 먹고 수북하게 한 그릇 더 추가로 맛있게 먹는다.

엄마 얘길 들어보니 그 아이 임신했을 때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이라고, 

어디서 구하질 못해 결국 못 먹었다고, 그랬더니 아이가 태어나 묵사발을 그렇게 좋아한다고!

보람 돋았다! 이게 요리하는 맛이지! 이 묵사발은 수험생 지우와 지현이를 위한 기도 한 사발이다.   


맛있다는 말에 기분 좋고, 요리 잘한다는 칭찬도 어깨를 으쓱게 하지만 

내가 알아주는 내 요리, 그걸로 충분한 요리이다.

아이들 어릴 적에 일부러 피했던 학부모 모임, 엄마들 모임이었다.

만나서 떠들어 봐야 불안만 커지고 집에 오면 공부 못하는 아이 닦달하게 되고 도움이 안 된다고 여겼기에.

아이들은 그걸 엄청난 결핍감으로 갖고 있다.

우리 엄마는 친구들 엄마랑 친하지 않았어! ㅠㅠ

중학교 졸업하고 만난 '꽃다운 친구들' 가족은 아이들에게나 내게나 결핍감 치유의 만남이다.  

좋은 사람들을 위한 식사 한 끼, 여기에 담는 마음과 정성을 내가 알아준다. 

참 선하고 아름다운, 준비만으로 족한 나의 요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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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갑자기 무엇을 먹고 싶고,

먹고 싶은 그것을 내가 만들 수 있는데

재료가 모두 준비되어 있다면

갑자기 벌떡 요리를 하는 것이 내게는 기쁨, 예기치 않은 기쁨이다. 


갑.자.기.

갑자기 일어나는 즐거운 일이 나의 살아있음을 확인시키는 에로스 에너지라는 것을 알았다, 기보다는 알고 있었다.


늦게 들어온 남자 JP가 "여보, 떡볶이, 떡볶이 해줘."

이 말에 빛의 속도로 일어나 오리고기 한 팩을 뜯어 후라이팬에 펼쳐 널었다.

떡볶이는 언제 먹어도, 언제 들어도 거부할 수 없는 음식인데, 갑.자.기. 떡볶이 주문이라니.

오리고기를 펼쳐 널기 무섭게 "빨간 떡볶이야!"라고, 평소답지 않은 구체적인 주문이다.

어, 빨강? 펼쳐 널부러진 오리고기 위에 고추가루를 일단 뿌리고, 되는대로 양념을 쏟아 붓고

마늘을 과하다 싶도록 넣은 다음 떡을 투입하니 빨간 오리 떡볶이가 되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오후부터 얼큰한 국물이 먹고 싶었지, 라는 자각이 오자마자

한 컵 철철 넘치게 물을 붓고 끓이니 빨간 오리 '국물' 떡볶이가 되었다.


고기 좋아하는 현승이,

빨간 떡볶이 좋아하는 JP,

국물 빼놓곤 다 좋은 채윤이,

국물이 좋은 나.


갑자기, 야식 타임이 되었고,  모두 만족하는 야식 메뉴가 되었다.


내가 당신처럼 계획한 것을 계획한 시간에만 하는 사람이었다면

당신이 이 환상적인 야식을 즐길 수 있었겠는가. 

갑.자.기. 분출하는 식욕과 발생하는 일을 즐거워지 않는다면,

예기치 못한 기쁨을 맛볼 수 있겠는가.


갑.자.기. 

갑자기 발생하는 욕구와 욕구에 부응하는 기쁨, 예기치 않은 기쁨을 그대 아는가?



- 지구의 반 J님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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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승이는 전 종류를 싫어하지만. 딱 한 장 분량의 부추전 반죽을 치워야 하겠고. 아침으로 줄 게 딱히 없기도 하여. 전을 부쳐서 달달한 오리엔탈 드레싱을 뿌리고 포크와 나이프를 함께 내놓으며 "오리엔탈 피자 스테이크야!" 하니 말을 못 하고 처묵처묵 하였다. 



냉장고 앞에만 서면 죄책감이 밀려오는 것은 한 줌 씩 남은 식재료를 두고두고 간직하다 결국 음쓰로 버리고마는 범죄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내탓만은 아니다. 김씨 일가의 짧은 입들 탓이다. 로제 파스타 먹고 싶다고 노래를 하는 채윤이를 위해서(라는 미명 하에) 냉장고에 남은 로제파스타 소스, 냉동실의 떡볶이 떡, 주말에 먹고 어정쩡하게 남은 통삼겹살을 어떻게 어떻게 대동단결 시켜보았다. "구운 삼겹살을 곁들인 로제 떡볶이야!" 딸아들이 감탄하며 먹었다. 



우린 음식이 아니라 그럴듯하게 지은 '이름'을 먹는 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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