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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는 썩 추진되지 않고,
싱글의 나날이 오래간다 싶을 때
무엇을 할 수 있나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겠지만


책을 읽는 방법이 있습니다.
<오우연애>를 읽고 또 읽고, 읽다가 낡으면 새 책으로 하나 더 사서 읽다보면
어느 순간 일용할 연애가 찾아온답니다.


그러나, 연애서적을 읽는데 눈을 크게 떠보자구요.
종교코너 밖으로 한 번 나가보니 이게 웬 걸!!!
<오우연애>만 좋은 연애서가 아니라는 거죠. ㅎㅎㅎ

소 책을 잘 안 읽는다.
그리고 연애 한 지가 오래다. 이러다 연애세포 다 죽겠다. 
하는 사람들은 일단 소설을 읽읍시다.

박민규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를 읽고 외모지상주의 세상에서 이런 가슴 저린 사랑....꿈꿔보라구요.

알랭 드 보통의  연애소설 <우리는 사랑일까> 도 읽어보시고.
('평소 책을 잘 안 읽는다. 게다가 난 MBTI로 S가 강하다.'
잘 안 읽힐 수도 있습니다.)
책을 읽고 좋은 사람은 G라고도 불리는 '서해인'과 수다 한 판 떨기를 추천합니다.

연애의 인문학 버젼, 고미숙의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읽고 연애의 혁명을 이뤄보시고.
그리하여, 교회오빠 교회언니의 사고 틀을 한 번 쯤 훌쩍 뛰어넘어 연애 생각을 해봅세다.

마리 루티 교수의 <하버드 사랑학 수업> 이 최상급 강추 서적입니다.
'뭐야, 사귀자마자 섹스를 하는 것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여긴단 말씀?' 하면서
사단의 책이라 여기지 말고 분별하며 읽어보면 그 어떤 책보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기 때문에 남성의 심리를 파악하는데(여성의 심리를 파악하는데) 에너지를 투여하는 잉여짓을 멈추고, '나'로 눈을 돌리게 하는 책입니다. 나로 눈을 돌려서 정직하게 내 욕구를 알게되면 사랑의 실패 따위에 진심으로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들을수록 사고의 폭을 좁아지게 하고, 편협한 시각을 가지게 하는 어설픈 크리스쳔 목사님이나 강사들의 강의보다(아, 나도 살짝 여기에 일조하고 있다.ㅠㅠ) 더 심오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래리크랩, 제랄드 메이, 데이비드 베너와 함께 브레넌 매닝은 신간목록을 뒤적이며 기다리게 되는 저자다. 노년의 브레넌 매닝의 회고록 <모든 것이 은혜다>를 오늘 하루 칩거하며 다 읽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눠서 그에 대해서 알 만큼 아는 사이가 된 듯 하였다. 이전의 저서들을 통해서 읽었던 이야기가 많아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노년의 할아버지가 되어 회고하는 그! 이야기들은 내가 알던 그! 이야기가 아니기도 했다.


왜 사람들이 유명해지면 초심을 잃고 거만해지다 망하는 뻔한 길을 자꾸만 갈까? 그러지 않을 수 없을까? 이미 반면교사는 충분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유명해지고도 유명세로 인해서 자아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얼마나 처절하게 정직해져야 하는 지를 노년의 브레넌 매닝이 보여준다. 구구절절 자신의 높아지고 성공했던 이야기가 아니라 결핍되고, 학대받고, 실패한 어두움의 드러내는 일을 누구라서 쉽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것이 은혜다.'라는 결론에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희망의 빛이 비취는 게 아니라, 아바의 자녀로 사는 것이 이렇게 철저하게 정직해지는 길이라니……. 부랑아 복음을 전하며 떠돌던 한 전도자의 인생에 숙연해질 뿐이다.


전부터 브레넌의 책을 읽으면서 냄새가 났었다. <내 안의 접힌 날개> 리처드 로어 신부님과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에니어그램을 통해서 영적여정에 도움을 받으셨단다. 반가워라. (가슴이 떨릴 정도로 반가웠다.)


* 내게 에니어그램을 배운 TNTer에게 일독을 권함. 진심 권함.

 



 

영화란 모름지기 슬픈 여운을 너무 강하게 남기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내가 선택하는 영화의 미덕이다. 부끄럽게도 이것은 슬픔이나 고통을 온 몸으로 거부하는 내 고질병이라는 걸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부끄러움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일천하게도 나는 짜릿함고 경쾌함, 무겁지 않은 정도의 철학적 질문 등으로 런닝타임 동안 그저 온전히 몰입하게 해주면 그만이다. 다행히 가장 영화를 같이 많이 보는 남편의 취향이 그와 반대라 원하는 만큼 편식은 못하지만 말이다.

암튼,  그런 이유로 다큐멘타리류의 영화를 나 스스로는 선택해서 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지금 지절거리려고 하는 이 영화 <신과 인간>은 일단 영화는 누구와 봤는 지가 중요하다. 40이 넘어서 만난 친구 또는 여정의 동반자라 할 수 있는 K다. K는 MBTI로는 (내게 그렇게도 어려운) NF이고, 겉으로는 나랑 참으로  다른 사람같다. 그러나 깊은 속을 꺼내놓고 맞춰보면 이렇게도 나랑 비슷할 수가 있을까 싶은 사람이다. 2년 전 K를 만난 이후로 K랑 나누거나, 그녀가 찔러주는 말에 아프면서 나는 이제껏 넘지 못할거라 생각했던 큰 산을 넘은 느낌이다. 내게 선물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난  감히 아주 신선한 의미를 부여해서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의 초대로 영화를 보았다.






(내 말이 아님)

영화 <신과 인간>은 1996년 실제 있었던 알제리의 ‘프랑스인 수도사 살해사건’을 바탕에 둔 작품이다, 당시 알제리 정부군과 무장이슬람단체(GIA)와의 내전은 최정점에 치닫고 있었다. 무장이슬람단체(GIA)가 자국 내의 모든 외국인들에게 떠날 것을 최후 통첩하자 알제리 정부는 이슬람교 지역의 티브히린에서 수도원생활을 보내고 있던 7명의 프랑스인 수도사들에게 당장 떠날 것을 통보하지만 수도사들은 이를 거부한다. 죽음이 예견되는 극한의 위기 속에서 일곱 명의 수도사들이 왜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는지, 영화는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인물들의 내면에 주목하며 신의 종으로 살아온 이들이 죽음 앞에 섰을 때 종교인이자 인간으로서의 갈림길에서 겪게 되는 갈등과 고뇌를 드라마틱하고 깊이 있게 담고 있다. 

                                                                                               
                                                                             (Daum  영화에서 줄거리 펌했음) 








(다시 내 말)

포스터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읽은 말의 비장함 만큼 영화는 내게 비장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영화 자체가 잔잔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서 있던 지점이 생이냐 사냐? 하는 식으로 절체절명의 순간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영화에서 테러리스트들(결국 이들에 의해서 납치되고 살해되는 것이지만)은 오히려 수도원과 수도사들에게 우호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수도사들의 거룩한 삶터와 일터에 대한 경외심은 오히려 약을 뺏으러 온 테러리스트 대장에게서 느껴졌다. 반면, 수도원을 보호하겠다는 군의 독기어린 눈빛이 내겐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순찰을 하는 군의  헬리콥터가 낮게 비행하며 수도원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장면, 영화를 통틀어 내게 가장 섬뜩한 장면이었다. 수도사들의 얼굴에서 두려움과 공포의 그림자가 가장 짙게 드리웠던 시점도 여기였던 것 같다. 죽음의 위협은 적으로부터만이 아니라 나를 지켜주겠다는 사람들에게서 더 피부에 와닿게 전해졌다. 그렇다면 누가 적이고, 누가 정말 위협적인 존재일까?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도대체 어디로부터란 말인가? 


일곱 명의 수도자들이 선택한 것은 '사(死)'가 아니라 그저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기로 함일 아닐까? 그런 의미로 돌려치자면 그저 어제처럼 사는 '생(生)'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이제껏 살아왔던 삶의 터전과 이제껏 감당해 왔던 소명이라고 했던 걸 유지하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선택한 이제껏의 그 소명의 자리는 '신의 부재만이 충만한 두려운' 곳이라는 것.


굳이 영화평을 장황하게 남기기로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신의 부재가 충만한 곳은 어디 알제리의 그 긴장감 감도는 수도원 뿐이겠는가? 조금만 정신을 차려서 둘러보아도 내 삶과 이웃의 삶은 신의 부재로 충만하다. 신을 찾는 갈망이 클수록 신의 부재는 두려움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고백하건데 늘 도망다녔고, 지금도 도망다니고 싶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고, 나쁜 사람이 여전히 자신의 배를 채우며 약한 사람을 짓밟고 있고,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고지를 점령하겠다는 사람들은 온 몸에 오물이 묻든 말든 결국 고지를 꿰차고 마는..... 이런 신의 부재 충만한 곳으로부터 도망다니고 싶었다. 가장 두려운 곳은 현실이다.


내 안에서 수 년 동안 울렸고 영화가 확인해준  목소리는 이것이다. '지금 여기는 고통이고 두렵고 지겹다. 어디든 도망가라. 도망갈 수 없으면 도망갈 계획이라도 세워라. 상상해라. 여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상상해라' 아주 희미한 부드러운 목소리는 그 반대의 메세지를 내게 들려주곤 했다.


어찌됐든 잔잔하지만 분명한 기승전결의 (주로 내면의)갈등과 해결을 통해서 7인의 신부는 수도원에 남기로 만장일치로 결정을 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내가 흠모하는 사람도, 나랑 닮았다고 느껴지는 사람도, 이래야 한다는 사람도 만난다. 이 영화에서 난 이것을 보았다.






(내가 흠모하는 사람)

주인공처럼 보이는 수도원의 대표신부인 크리스티앙은 처음부터 떠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고, 나이가 드신 두 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런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일상의 크고 작은 어려움과 두려움들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주인공을 보면서 사실 나는 남편을 떠올렸다. 깊은 곳에 보이지 않는 힘이나 신념같은 것을 타고난 듯 보이는 사람들 말이다. 실제 이들의 내면이 어떻든 이런 분들을 보면서 나는 도망가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배우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작아지는 느낌이 들고, 중요한 판단을 할 때 이들을 의지하여 묻어가고픈 어린이로 남고 싶어진다.


(나랑 닮은 사람)

영화 중 한 신부는 떠나는 게 맞다고 하면서 '나는.... 몸이 아픈 사람이니까... 어찌됐든 떠나야 할 것 같애' 라는 이유를 댄다. 약한 모습이다. 내가 자주 그러듯 진짜 이유를 직면하지 않은 채 둘러대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나와 많이 닮았다. 나는 대체로 이런다. 지금 여기의 고통스런 나와 현실을 직면하지 않기 위한 합리화로 말이 많아지고, 무분별한 글을 쓰게 되고, 더 많은 의견을 피력하려들기도 한다.






(이게 맞다 싶은 사람)

여운을 가장 많이 남기는 인물은 이 사람이다. 나는 '떠나야 한다. 나는 이렇게 죽으려고 수도자가 되지 않았다'며 반항하는 허우대 멀쩡한 (이름은 모르겠는) 젊은 신부에 주목한다. 신의 부재에 대해서 가장 인간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다. 모양은 빠지지만 정직하다. 내가 이 사람에 꽂히는 것은 아마도 최근의 경험들 때문일 것이다.


신에 대한 막연한 경외심만을 부추겨 두려움도 의심도 은폐시켜 겉으로는 믿음, 속으로는 참된 불신앙을 가르치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상처와 분노 때문일 것이다. 중간중간 내 생각에 빠져 놓친 장면과 대사들 때문에 이 신부 내면의 변화에 대한 걸 디테일하게 따라가질 못했다. 그러나, 결국 그 자리에 남기로 한 선택에서 선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의 부재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정직한 반응이라 생각한다. 신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는 인간 편에서는 두려움, 의심이 극에 달하는 지점이고 그 지점은 고뇌하는 인간에게는 반드시 '신의 부재'로 경험되는 것 아닐까?
 
  




가장 두려운 곳은 어디인가? 지금 여기의 현실이다. 영화에서 각각의 신부가 자신의 소임대로 밭을 갈고, 장작을 나르고, 음식을 준비하고, 환자들을 치료하는...그림처럼 조용한 일상이 내겐 두려움이 극치가 되는 순간이었다. 지금 여기가 두려워서  나는 과거로, 미래로 끝없이 보따리를 싸서 옮겨다니는 존재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바로 지금, 여기 현재이다. 너무 두려운데 가장 필요한 신의 위안이 없다고 도망가면 영영 신과 만날 순간은 잃게 된다는 것이다.

 

 

신의 부재가 충만한 곳이, 신이 보이지 않아 가장 어둡고 두려운 곳이 그를 독대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 아닐까? 수사들의 고뇌가 깊어질 때마다 깊게 울려퍼졌던 그레고리안 챤트에 내 마음 깊은 곳이 함께 울린다. 보이지 않지만 공간을 가득 채우며 내 마음의 깊은 곳까지 공명시키던 그 성스럽고 단조로운 소리가 말이다. 가득 채운다.   


 

 



 


'육손이는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일세. 그걸 잊지 말게'

김훈의 소설 <흑산>을 읽다가 한 문장이 목에 걸려 다음 장으로 넘어가질 못하고 있다.
정약현이 딸 내외를 서울로 이사시키면서 '육손이'라는 종을 딸려 보낸다.
떠나는 날에  마지막 절을 하며 우는 육손이를 보고 정약현이 사위 황사영에게 이르는 말이다.

'육손이는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일세. 그걸 잊지 말게'

황사영은 이 말의 단순성에 놀랐고,
시간이 지난 후에 이 말의 깊이에 놀라며 육손이를 종의 몸에서 풀어주고 면천해준다.



밖으로 보여지는 것처럼 인간관계가 그닥 원만하지 못한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여전히 쿨하지 못한 관계맺음으로 상처받기가 일쑤다. (상처받기는 그대로 '상처주기'로 읽어도 틀리지 않다는 걸 안다)
아직까지도 내 발목을 잡고 있는 치명적인 관계들이 있다. 수 년 전에 그 엉킨 관계를 풀어보자 나름대로 어설픈 노력을 할 때 있었던 일이다. 그에게 나는 이중인격자에 돈으로 관계를 따지는 사람이었고 그 오해를 풀어보고자 되도 않는 애를 많이 썼었다. 해명하고 애를 쓸수록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 과정에서 나는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그 때 내가 그 사람에게 표현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렇게 되뇌었었다.
'나는 우리 엄마 딸이고, 우리 엄마한테는 내가 진짜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다. 그것 만은 알아달라'라고. 그 사람에 의도했든지 아니든지 내가 받은 느낌은 아무리 해도 내가 이 사람에게 인간으로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없겠구나 싶었었던 것 같다.


육손이는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일세. 그걸 잊지 말게.


그 얘기일 것이다.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있지만 결국 정약현도 황사영도 육손이도 천주귀신이 들린 자로 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이다. 이 모두는 제 부모가 낳은 자식들이었다. 또한 당신도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이다. 제 부모가 낳은 자식임을 인정해 주는 것은 나와 아무리 맞지 않아도, 때로 내게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 할찌라도 마지막 존엄성은 인정해주는 것이다.
부모가 되어 핏덩이 아이를 안아보고, 그 아이가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지어줄 때, '엄마'라고 불러줄 때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사랑보다 더 뜨거운 경이로움을 알기에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이 어떤 존재인 지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
나도, 당신도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이다.
그걸 잊지 말자.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늘 일의 의미에 대한 생각을 해왔다. 엄밀하게 말하면 '일의 의미'란 내게 '일의 기쁨'이었다. 대학 후 첫 직장인 유치원 교사를 그만 둔 즈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자체는 좋지만(그래서 일 자체는 의미가 있었다) 일하는 여건이 그렇게 비인간적인 직장생활은 하기가 싫다는(그래서 환경이 일의 의미를 앗아가고 있었다) 생각이 간절했었다.


그 이후로 새로운 공부를 하고, 그 당시로 하늘에 별 따기인 풀타임 음악치료사가 되어서의(것두 채윤일 낳고 5주 만에 첫 출근) 감동이란... 점심 때 회사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고 앉아 식기도를 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 생애 식사기도 때 감사의 눈물을 그렇게 흘려본 적이 있었던고...

그 감동이 사라진 4년여 후에 퇴직을 하고, 일명 프리랜서 음악치료사로 약간의 강의와 함께 전전해 오고 있다. 작년 성대수술 이후로 음악치료사라는 명함을 내밀기에도 무색할 정도로 일을 손에서 놓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과 종종 '10년 음악치료 했으니 이제 수명은 다 했어. 이젠 카페를 해야해' 라고 농담을 했었다.

최근 집 가까운 괜찮은 곳에서 풀타임 음악치료사를 구하는 광고를 보고 잠시 맘이 흔들렸다. 내 인생 마지막으로 음악치료 한 번 더 해볼까? 이제 나이나 경력 때문에 파트타임으로 일할 곳도 없고.... 그렇게 맘이 흔들리면서 다시 한 번 소명에 대한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즐겁게 일할 수 있을까? 이렇게 여유있는 시간으로 인해서 영적으로 깊이있는 그 분과의 교제가 즐거운데 다시 빡빡한 현대인의 시계 속으로 들어가서도 이 알량한 영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주께 하듯, 성가대 지휘를 하듯,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직장동료들을 대하며 직장생활 할 수 있을까?  매일 아침 출근하는 일이 너무 힘겹지 않을까?
하는 의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음은 조금 불안해졌다. 그 때 눈에 들어온 책이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 이다. 그가 하는 말들과 때로 상관이 있고, 때론 상관이 없는 내 마음과 생각의 길이 그와 더불어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일을 하고 싶은 가장 밑바닥의 욕구가 드러났다. 가장 깊은 욕구는 한 달에 한 번,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에 대한 기대. 그리고 전문직 여성에 대한 불특정 다수의 존경 정도였다.

보통씨가 대놓고 얘기하진 않지만(이 사람은 절대 내놓고 얘기하는 스타일이 아니더군.^^) 일의 기쁨을 앗아가는 많은 이유들 중 하나는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에 목숨 걸고 일하는 것, 그리고 '전문화'라는 것이었다.('전문화'에 관한 부분은 따로 포스팅해 볼 생각) 아차! 싶었다. 이런 저런 명목 좋은 이유를 대서 남편을 설득하고 있었지만 내가 이 풀타임 자리에 마음이 심하게 흔들린 건 99.9% 따박따박 월급이었다는 것. 이러고 입사를 했으면 세 달이 가지 않아서 사직서를 못내서 안달을 할 것이었다.

그럼, 뭐 대부분 돈 때문에 일하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어디 그리 흔하단 말인가?  그래서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다' 라고 하지 않는가? 맞다. 현대인들이 대부분 그렇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기에 다들 월요일만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고, 주말이 가는 소리에 불안증이 고조되고, 출근을 하면 주변 눈치 보면서 싸이하기에 바쁘고... 일 자체에서 기쁨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그러면 어째야 할까? 다시 소명을 생각했다. 소명은 부르심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머~얼리서 '일루와. 아니 아니.... 거기 아니다. 그 옆으루 가. 거기가 니 자리야. 이게 니 소명이다' 이러시는 분이 아님을 안다. 나와 아주 가까이, 아니 내 안에서 계시면서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 행복한 일을 아시는 분이다. 나와 함께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가 주시는 분이다. 그걸 발견해 가는 것이 소명을 발견하는 여정이다. 그래서 <소명과 용기>의 저자 '고든 스미스'는 소명을 20대 진로 선택하면서 한 번 고민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평생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암튼, 결론적으로 이력서를 낼까 말까 하던 고민은 해프닝으로 끝나고 언제나 그렇듯 나는 다시 소명을 생각한다. 확성기를 대로 부르시는 그 어떤 거창한 부르심이 아닐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이제 중년에 들어선 나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떤 행복을 누리고 나누며 여기서 천국의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말이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일상의 기쁨과 슬픔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내 일상은 '그럼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과 다른 것이 아니다. 오늘, 여기서 다시 소명을 생각한다.

소명을 생각하는 나는 오늘 학교 다녀온 채윤이와 현승이를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게 맞아줄 것이고 블로거들의 댓글을 마음으로 받도 대화할 것이고, 회복되어가는 몸으로 인해서 그 어느 때보다 감사할 것이고, 식구들을 위해 정성과 아이디어 가득한 저녁식사를 준비할 것이고,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고, 몇 권의 책을 조바심 내지 않고 마음으로 읽을 것이고, 간간이 커피를 내릴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하고 있는 그 모든 일이 다 소명의 자리임을 순간순간 각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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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중에 가장 기다려지는 택배. 요즘 배송이 점점 느려져서 예스24로 갈아탈까 싶게 만드는 알라딘 택배. 알라딘 배송이 점점 느려져서 당일배송은 고사하고 며칠 씩 사람을 목이 빠지게 하니... 며칠의 티는 안냈지만 목이 빠지는  기다림에 반가운 친구들이 들이닥쳤다.

'부모님이 나보다 당신을 더 편하게 생각하시는 거 같애'
'현승이 이 자식은 지 엄마만 좋아해'
'청년 애들이 나 만나는 거보다 당신 만나는 게 더 좋은가봐'
무덤덤하게 내던지는 남편의 말들에서 희미하게 날락말락 하는 냄새가 질투 비스무리 한 게 아닐까 싶다.

헌데 '요즘은 당신이 나보다 책을 더 많이 읽는 것 같애' 라고 역시 무덤덤하게 말씀을 내뱉으실 때 난 아주 분명하다 못해 강렬한 느낌을 캐치한다. 그건 질투다.

으하하하하.... 그게 질투임이 확인될 때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희열이여.
꼬소해. 꼬소해. 김종필씨가 책으로 날 부러워 하다니..  자꾸 약올리면 책 읽고 싶어서 사역을 그만두겠다 하지 않을까?ㅋㅋㅋㅋ

<일의 기쁨과 슬픔> 제목에 꽂혀 저자와 리뷰를 찬찬히 살펴보니 이거 정말 입맛이 당기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게다가 젊은 블로거 챙과 G가 열광을 하는 저자가 아닌가?

나는야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인!ㅎㅎㅎ 그림자 문제를 유난히 재밌게 다루는 융심리학자 로버트 존슨의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

분석심리학으로 성경의 인물들에 관해서 쓴 인물 에세이 모음, 신경정신과 의사인 이나미의 <성경에서 사람을 만나다>.
 
도사님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하기>를 읽으시고 푹 빠지신 제임스 에머리 화이트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사랑하기>
 
위인전 좋아하는 채윤이 책 두 권
<평화, 인권, 민주주의의 위대한 스승 김대중 대통령>,
<오바마 아저씨의 꿈의 힘>
--- 아, 여전히 상실감에 대한 상처가 깊구나. 김대중 대통령님의 성함을 키보로 두드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려오네....ㅜㅜ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 할아버지에 관한 책을 읽고 질문이 많았던 채윤이. 노무현, 김대중, 오바마 대통령! 우리 채윤이 진정한 리더십, 진정한 인간됨을 제대로 배우렴.

흠.....안 먹어도 배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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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의식이 수면 위에 올리진 못했으나 예전부터 안희정이라는 사람이 궁금했었다.

아마도 일단 그이 가끔씩 화면에서 볼 때마다 느껴진 그의 강한 내향적 포스 때문이었으리라.

노무현 대통령 서거 직후 그가 카메라를 향해서,
'이명박 대통령, 대한민국 검찰, 조중동! 당신들이 원했던 게 진정 이거였습니까?' 하고 내뱉을 때도 사실 강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나 절제된 그러나 결국 감출 수 없는 떨림으로 그저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고나 할까?

저 사람은 누굴까?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저 사람. 배울만큼 배운 사람, 알 만큼 아는 사람이 그 누가 인생을 '측근'으로 살고 싶겠는가? 노무현 대통령으로 인해서 감옥을 사는 것조차 감내하고도 여전히 '측근'인 저 사람을 도대체 누굴까?

대통령 서거 후 미공개 동영상에서 안희정씨의 출판을 축하 메세지를 전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메세지를 전하다 울먹하며 말을 못 잇고, 결국 책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눈물을 쏟아놓은 다음에야 말을 이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 '저를 위해서 그렇게 희생을 했는데 그 희생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질 않아요. 누군가 그렇게 희생을 했으면 그것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당연히 부담이 되는 것이거든요. 근데 이 친구는 그렇게 하지 않는 법을 아는 사람이예요'

그 영상을 보고나서 더 궁금해졌다. '자전적'이라는 분위기의 책들을 그다지 즐겨 읽는 편이 아닌데 얼른 이 <담금질>을 주문했다. 읽어달라고 기다리고 있는 책들이 줄을 서 있지만 얼른 집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강한 사람이었구나. 광주항쟁을 접하면서 '이대로 두면 안되겠다(사람 죽이며 정권을 잡은 사람들)' 싶어서 대학생들을 찾아가 따라다니다 결국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던 때가 고딩시절이었다. 강하고 강한만큼 뒤를 돌아보거나 타협을 하는 것, 또 자성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청년 안희정의 인간 담금질 이야기. 가장 쎈 '담금질'은 대학생 시절 잡혀가 고문을 받으면서, 결국 거기에 굴복하여 친구들의 이름을 대고 나왔던 그 때라고 여겨진다.

그 때 이후로 안희정은 깨닫는다.  자신이 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자신에 대한 실망, 자신이 대단한 줄 알고 달려왔지만 결국 별 거 아니라는 인식 끝에 방황하고, 나락에 떨어지고, 희망을 잃은 채 생각없이 사는 세월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로인해 가장 안희정다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후로 그 자신의 말대로 '양심 찾고, 의리 찾고, 돈이 안 돼도 함께 걸어가야 할 사람의 도리를 강조하는 길'을  걸으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행복했을 것이다. 비록 가난했고, 고난이었고, 희생과 포기의 길이었겠지만.  '측근'일 뿐이었지만...
안희정에 대한 내 의문은 여기서 풀렸다. 그가 어떻게 '측근'으로 만족하고, '측근'으로 충실하게 일관되게 그 자리를 지키며 살 수 있는지 말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무리 훌륭해도 '나는 결국 대단하지 않다. 나는 내가 그렇게 싫어하고 비판하는 저 사람과 결국 본성상 크게 다르지 않다' 라는 뼈아픈 자각 없이는 정말 훌륭한 인격이 될 수 없다. 그 자각이야말로 측근으로서의 정치인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무엇보다 하나님을 찾아가는 신앙의 여정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남편이 신학을 시작하기 직전에 느헤미야를 묵상하면서 그랬다. '여보, 여태까지 나는 모두들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헌데 생각해보니, 나는 성벽의 여기서 저기까지 한 구역을 맡은 벽돌 쌓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이름 없는 한 사람의 노역꾼. 그거면 되지 않을까?' 자신의 길에 확신을 가지고, 지금 자신이 하는 벽돌쌓기 단순노동이 무너진 하나님의 성을 쌓는 일임을 잊어버리지 않으면서, 끊임없는 역사의식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면, 그것이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쓰면 마치 내가 이 책을 다 읽은 것 같지만 사실 결정적인 부분은 아직 읽지 못했다. 그리고 언제 읽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페이지 83 쪽에서 노무현 대통령과의 만남이 시작되는데 이 장의 제목만 보고도 울컥하여 차마 눈이 가는 한 걸음을 뗄 수가 없다. 언제쯤 이 슬픔이 내면에서 가라앉아 83쪽 페이지를 넘길 수 있을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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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가을.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하던 가을의 초입에 마법의 보자기를 뒤집어 쓰고 영화같은 사랑이 시작되었다. 단풍이 무르익어 절정에 다다랐을 때 광릉수목원에서의 데이트는 단풍과 함께 로맨스의 절정이었다. 단풍색이 바래고 하나 둘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둘 사이는 불안과 두려움의 먹구름에 가려 앞이 흐릿해졌다. 그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몇 잎의 나뭇잎마저 모두 쓸어버릴 듯한 찬바람이 불던 11월이 때이른 추위가 기승을 부린 어느 날. 헤.어.졌.다.

1998년 봄.
4월20일. 월요일. 저 나무가 겨울의 그 쓸쓸한 그 나무였나 싶게 거리거리의 나무들은 물이 오르고 연하디 연한 생명의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녁 8시경 고덕도서관에서 운명처럼 그를 만났다. 운명의 그림자는 실은 그 전날부터 둘 사이를 어른거리고 있었다. 우연히 다시 만나 차를 타고 가면서 내가 그에게 '요즘 나뭇잎 색깔이 너무 이뻐. 연두빛이 참 예쁘지?'였다.
그리고 1년 후 5월, 푸르름이 더 짙어진 도산공원의 신록 속에서 우리는 웨딩촬영을 했었다. 웨딩앨범은 온통 초록세상이다.

2009년 4월 20일.
오랫만에 둘만의 데이트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영화표를 예매하고 식사하러 가는 차 안에서 그가 말했다. '나는 요즘 나무색이 참 좋아. 거무스름한 나뭇가지에 연녹색 잎이 정말 멋진 것 같아' 라고..
'그거~어, 11년 전 오늘 내가 한 말인 거 알아?ㅎㅎㅎ'



함께 본 이 영화는 인도 인권에 대한 얘기도, 돈에 관한 얘기도 아니다. 퀴즈쇼에 관한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이 영화는 운명같은 사랑 얘기이다. 이 한 마디가 정리해준다. 그들의 사랑, 그들의 운명같은 사랑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It is written!
11년 전 오늘. 우리도 5개월의 방황 끝에 운명같이 만났었다. 내 인생에 그렇게 운명같은 날은 없었다. 아핫~~~


하지만 우리의 운명같은 사랑의 쟝르는 로맨틱 코미디!
점심식사를 하면서 후식으로 키위를 한 입 베어물었는데 마주 앉으신 그 분께서, 웃을 때 소리도 나지 않는 그 분께서 함지박 같은 웃음을 지으신다. 한 입 베어 분 키위에 내 돌출치아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았다는 것이다. 너무 좋아하시며 '사진 찍어. 사진 찍어' 하시는 통에 운명같은 사랑의 날을 기념하는 이 세러모니는 코미디 한 점으로 마무리 된다. 화룡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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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대 음악치료 대학원 홈페이지에 가면 '최고로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는 제목의 칼럼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음악치료라는 학문을 들여오고 음악치료 대학원을 만들고, 음악치료사를 양성해낸 교수님이 쓰신 것입니다. 대단한 내용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치료로 뭔가 대단한 것이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얘깁니다.
저는 음악치료대학원 2기이기 때문에 공부하던 시절에 직업에 어떻게 창출될 지에 대해서 안개 속 같았습니다
그 때 마다 교수님의 약간은 선동적이 구호 한 마디로 희망에 부풀곤 했었지요.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숙대 음치대학원 홈피에 가면 저런 문구가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았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가서 봤습니다. 스포츠에 워낙 관심이 없는 저로서는 그 대단했다던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경기에 대한 기억이 전무합니다. 남편이 어렸을 적에 핸드볼 선수였다는 것 정도의 관심으로 영화를 보러 간 것입니다.
연장전에 연장전을 거듭하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남편에게 속삭였습니다. '이기겠지? 해피앤딩을 해주겠지?' 남편이 그랬습니다. '글쎄 실화를 바탕으로 한 건데 그렇게 할라구. 실제에서는 졌잖아' 이러는데 처음으로 이게 실화를 근거한거구나 알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무식하다니깐요.

그래도 저는 영화가 슬프게 끝나면 도무지 거기서 며칠을 헤어나오질 못하는지라 이기기를 바랬습니다. 마지막 연장전 직전에 가 까칠하던 감독이 선수들에게 그랬습니다. '여러분, 약속 하나 합시다. 혹시 이 경기에서 지더라도 울지맙시다. 여러분은 이미 여러분 생애 최고의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요.
그리고 결국 문소리가 넣은 마지막 패널티킥(이거 이름 맞나?^^;)이 실패해서 지게 되었습니다. 하필 영화 속에서 그렇게도 지지리 일이 안 풀리던 문소리가 실패의 골을 던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한 마지막 골이 들어가던 장면이 인상깊게 그려져 있습니다. 골이 어떻게 들어가서 상대편 골키퍼가 어떻게 막아냈는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홍명보가 승부차기를 할 때처럼 카메라가 공을 따라가지 않고 카메라는 계속 문소리를 비치고 있었습니다. 골이 안 들어간 것은 문소리 뒤에 있던 상대편 선수들이 좋아라 부둥켜 안는 것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에는 사운드도 다 죽였습니다. 그저 흐릿하게 보이는 상대 선수들과 문소리의 표정이 골의 운명을 보여주었습니다.

참 인상이 깊었습니다. 빚에 찌들고 남편은 자살을 기도한 상황에서 마지막 던지 자신의 골로 경기에 지고 말았는데 '생애 최고의 순간'은 이미 경험했다고요. 이제 영화는 끝났고 문소리는 금메달의 포상금도 못 받을테고 이미 끌어다 쓴 돈을 갚을 수도 없는데 '생애 최고의 순간'을 경험했다고요?

남편의 지난 학기 성적이 나왔습니다. 참으로 인간적이지 않은 성적입니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한 문자만 줄을 서 있는 성적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지난 학기는 여러가지 일로 공부에 전념할 수 없어서 거의 '학점 포기' 선언을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참으로 은혜다' 하는 말에 남편이나 저나 백 배 공감했습니다. 물론 열심히 공부하는 것 알지만 남편보다 탁월한 분들이 참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내는 것 같아. 원 없이 공부하고, 이렇게 좋은 학점으로 보상을 받고....' 남편이 그럽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남편이 목회자의 길을 가겠다며 신학공부를 시작하고 지난 2년 동안 경험한 은혜는 사실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남편 생애 최고의 순간은 이미 경험했는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인정하며 감사하고 앞으로 펼쳐질 날들에 대해서는 '받은 복을 세어보아'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할 일인 지모르겠습니다.
이미 최고의 순간을 경험했다고 믿으며 모든 성공에 대한 욕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는 참 목회자의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고로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 말도 좋고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이미 경험했다' 이것도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앞만 보고 달려가며 '최고의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사는 삶은 별로 땡기지가 않습니다. 아이 둘을 키우지만 두 아이로 인해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은 과분할 만큼 누렸다고 믿으며, 그것만으로 두 아이에게 고마워하며 살고 싶습니다. 결혼 8년 동안 내 부족함을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면서도 기다려준 남편으로 인해서 최고의 사랑을 이미 받았다고 믿으며 감사하며 살고 싶습니다. 입도 뻥끗하지 않던 녀석이 내 기타 소리만 나면 활짝 웃으면서 뭔가 소리를 내보려고 입을 오물거리는 그 모습으로 감격하여 가슴이 뭉클하던 그 순간에 저는 이미 음악치료사로서 최고의 순간을 경험한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이 나이에 뭔가를 차려야 하지 않을까, 공부를 더 해서 이제는 더 영향력이 있는 위치로 올라서야 하지 않을까? 하는 욕심도 내려놓고 싶습니다.

영화 한 편을 보고 웬만한 설교를 들을 것보다 더 많은 도전과 묵상을 건져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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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쿵푸스> 읽고 필 받아서 <호모 로퀜스, 언어의 달인>을 다 읽어버렸다.
또 다른 제목은 <읽고, 쓰고, 말하기>.

최근에 사랑하는 친구 하나가 블로그를 시작했다. 내가 싸이 클럽에 글을 쓰면서 나를 정리하고 그러면서 좌충우돌 하고 결국에 일종의 자유를 얻은 것처럼 그 친구에게도 자유의 선물을 받을 걸 생각하니 기뻤다. 친구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내면에 정리한 후 글쓰기를 시작했으니까 나만큼 좌충우돌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글쓰기, 책읽기, 말하기.
언어와 관련된 이 세가지는 채윤이의 국어 교과서 제목이기도 하다.
(채윤이가 그 교과서로 배우고 읽기, 쓰기, 말하기를 제대로 배우리라는 긍정적인 기대는 많이 접었지만서도)

어쨌든 사람들이 참 대단하다. 내 머릿속에는 정리되지 않을 채 왔단 갔다 잡힐 듯 말 듯 한 얘기를 저렇게도 쉽게 잘 정리해서 풀어놓으니 말이다. 왜 이리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이 많을까?
그래. 그 똑똑한 사람들 덕에 우리같은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넓히기도 하고 마음을 넓히기도 하니 참 고마운 일이다.

세 번에 걸쳐서 독후감을 쓰려고 한다.

그 첫 번째 얘기. 언어!

*********************************
지난 여름 너무 혼란스럽고 아파서 음식이 입에 넘어가지 않았던 아프간 피랍 사태를 겪으면서...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언어의 강이 네티즌과 샘물교회,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네티즌과 우리 기독교인 사이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죽을 것 같이 힘들었다.

박은조 목사님이나 피랍자의 가족들이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네티즌들을 광분하게 하고 휘발유를 붓고 했으니 말이다. 기본적으로 이해하겠다는, 듣겠다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튕겨져 나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분명 사용하는 언어의 문제가 있었다.
어느 어머니가 '피랍은 신나는 일' 이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그 뜻을 미루어 짐작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일의 전후 좌우는 물론 대체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는지 조차 모르지만 이 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기에 그 분의 일하심을 믿을 때,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믿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면서 '신나는 일' 이라고 했음직 하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네티즌들은 다 뒤집어졌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고 했다. 아무래도 정신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럴 것이다. 신앙의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저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냐 말이다. '선교'를 계속하네 마네 하는 말에 대한 오해도 그 언저리 어디에 있는 문제일 것이다.

나는 놀랐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우리가 구원해야할 대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너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말이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경직되어 있다는 것.  '죄인'이라고 '구원할 영혼' 이라고 마음 속으로 규정해버리고는 행동만 고상하게 하려하고 있다는...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라고 찬양을 할 때 훨씬 더 많은 경우에 '죄 있는 자'의 자리에 자신의 얼굴이 어른거려야 할텐데 익명의 많은 세.상.사.람.들.이 어른거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닌가?

우리가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단지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전도에 열심이지만 분명 그 열정이 하나의 쉽사리 건너지지 않는 언어의 강을 만들어 낸 것은 분명하다. 강 건너에서 손짓한다. '이리로 건너 와. 그 땅은 죽음의 땅이야. 이 거룩한 땅, 이 고상한 땅으로 오라니깐. 아~놔!'

이런 생각이 들면서 더 무서운 건 우리 부부가 하나의 강을 더 건너려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의 언어의 단절이 심하다면 우리는 이제 전임사역자의 땅으로 건너가려 하고 있지 않은가? 그 땅은 이제 평신도들이 사는 땅에서 한 단계 더 홀리해진 땅이 아닌가?
요즘 내 마음이 이렇게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여기에 있는 지 모르겠다.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의 언어를 버리고 천국의 언어만을 말하는 것이 여기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의 신분이 그렇게 우리를 단절시켜 버리면 어떡하겠나? 그런 목회자가 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왜냐면 그런 면에서 존경할 만한 선배 목회자를 잘 찾아보지 못했다. 평신도든, 불신자든, 자기 아래 있는 부교역자든 모든 사람에게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즉 같은 마음으로 대하는 목회자를 말이다. 그건 예수님이나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면 최소한 그렇게 노력하는 분들을 잘 보지 못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  돈 걱정, 아이들 걱정, 관계 걱정...그 모든 일상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진짜 자기의 하나님이 된다고 믿는다. 그럴려면 복음은 그 일상을 뛰어 넘을 수 있도록 우리의 일상을 파고들게 전해져야 하는데....이미 일상을 잃은 언어를 가지고 어떻게 일상을 이기게 하는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내가 설교하고 내가 목회할 것도 아닌데 고민이 너무 심각한 것 같다는 생각도 하면서...
지난 겨울방학 남편이 첫설교 할 즈음에 내게 그런 부탁을 했었다.'여보! 내가 설교할 때 쓰는 용어들이 일상의 언어여야지 돼. 일상의 언어와 분리되면 안 돼. 그런데 설교를 자꾸 하다보면 그런 오류에 빠지기 쉬워. 그러니 당신이 잘 감시해줘야해'
나는 설교자, 목회자가 되는 남편의 감시자가 되어야겠다. 남편의 언어들이 또 하나의 강을 건너가지는 않는지? 남편의 설교와 사역에 성도들의 일상에 대한 고민과 그것을 영원에 잇대고자 하는 다리놓음이 허술하지는 않는지...

그런데 내 언어는 누가 감시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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