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선교여행을 가는 JP이 떠나기 전날에 꽃을 사 왔다. 자기 없는 사이 자기 본 듯 보란다. 왠지 당신이 싫어할 조합이지만...이라고 했다. 어, 완전 내가 좋아할 조합인데! 꽃아서 식탁에 두었다. (미안해, 여보. 밥 먹으며 꽃을 보는데 꽃이 꽃으로 밖에 안 보여. 당신 생각은 꺼졌나 봐...)

 

캄보디아에 함께 간 남자 둘 생각을 더 많이 했다. 속속 보내오는 세 남자 사진을 보면 왜 이리 기분이 좋은지. 왤케 대견한지...라고 말하다가 깨달았다.  "아, 조장 누나 마인드구나!" 근 30여 년 전에 저기 두 남자의 청년부 조장 누나였었다. (지금은) 남편을 캄보디아에 보낸 (한때) 성경공부 조장이었던 누나 둘이 간절하게 기도하며 며칠을 보냈다. 두 조장 누나 각각의 오랜 (또는 그리 오래지 않은) 기도응답에 대한 기도일 수도 있고. 

 

세 남자의 비행기 안 셀카를 보고 채윤이가 "셀카 각도 실화?" 했는데. 내 눈엔 예쁘기만 한데. 세 남자가 꽃보다 더 예쁜데!  했더니 "셋이 뭔가 비슷한 느낌이긴 하다. 셋 다 뭔가 착하잖아."라고 했다.

 

꽃보다 예쁜 남자들 인천공항에 내렸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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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가 저녁으로 삶은 계란을 싸가고 있다.
반숙, 반완숙 등을 주문하면 내가 또 기가 막히게 삶아서 주는데...
잘 삶아진 계란을 유리그릇에 담다가…
이것 말고 냉장고에 있는 날계란을 넣어 보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맛있게 먹을 생각에 두근두근 계란을 탁 깼는데 주르륵....
"으.... 정신실!!!!!" 
남편 표정이 보이는 듯하다.
생각만 해도 웃기고 신이 난다.
이게 '감동란'이지.
 
고난주간인데, 고난주간 저녁기도회를 인도하고 있는데...
참았다.
언젠가는 꼭... 감동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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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니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16강 진출!! 김종필 메롱~" 식탁에 아이패드 놓고 그 역사적이고 짜릿한 포르투갈 전을 혼자 관람한 채윤이 작품이다. 16강 진출의 기쁨과 '축구 친구 김종필'에 대한 배신감이 고스란히 담긴 몇 마디이다. 현승이는 친구들과 보러 가고, 엄마는 원래 축구에 관심이 없는데... "아빠는 안 봐. 내가 보면 져."라고 말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버린 아빠, 결국 이 재밌는 순간을 주먹으로 입 틀어막고 보게 한 아빠에 대한 배신감과 복수심이다. 축구에 너~어무 진심인 아빠는 '보면 질까 봐'가 아니다. 설교를 향해 몸과 마음을 만드는 금요일의 리듬이 깨질까 피한 것이다. 몸은 물론이거니와 축구 승패로 마음이 요동칠까 하여 미리 피한 것이다. 축구할 때 보면 김종필이 아니라 그냥 아저씨다. "야아, 그걸 왜 그쪽으로 보내. 에휴... 저런 멍청한... 안 돼, 안 돼. 우리나라는 안 돼..." 평소 김종필에게 볼 수 없는 아저씨 본능이 그대로 나온다. "그렇게 잘하면 니가 가서 해!" 나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일종의 아바타 같은 거란다. 자신의 승부욕을 투사받아 대신 싸워주는 게임 같은 거라고 생각하란다. 아, 그렇다면 이해되지.


축구보다 설교에 진심이다. 그의 일주일 시계는 설교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설교하는 직업이 아니면 삶이 훨씬 더 여유로울 것이다. 뉴질랜드 코스타에서 맡은 설교는 콘퍼런스 마지막 날 오전이었다. 지난여름 미주 코스타에 참석했던 채윤이가 "아빠, 어떡해. 그 시간은 애들이 거의 다 자. 마지막 날 새벽까지 놀고 얘기하고, 설교 듣는 애들이 없을 걸." 했다. 게다가 새벽에 월드컵 우루과이 전까지 있었으니 청중은 거의 사망이라고 봐야... "마음을 비우고 해. 한 사람은 깨어 있을 거야. 그 친구만 보고 설교해. 나도 전에 어느 청년부 수련회 마지막 날 오전 강의에서 회장만 깨어있는 강의 한 적 있어. 그냥 당신 자신을 위해 진심의 설교를 해." 본인도 충분히 각오했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상황은 정반대. 설교자로서 근래에 경험해보지 못한 충만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청중과 함께 뜨거워지는 그 맛, 영혼이 살아나는 그 느낌을 나도 좀 안다. 역전골을 넣는 순간, 16강 진출이 확정되는 순간 너와 나 구별 없이 모두 얼싸안고 뛰는 느낌에 비할 수 있을까?

축구에 진심이고, 축구보다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설교에 진심인 JP(‘제이피’ 아니고 ‘종필’로 읽어야 함) 은 달라스 윌라드에 진심이다. 목회는 유진 피터슨 목사님께 배우고, 영성은 달라스 윌라드께 배우는 모범학생이다. 연구소에 오는 목회자들을 위해 달라스 윌라드의 <마음의 혁신> 읽기 모임을 이끌어주었다.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정성을 들여준 것인지 잘 안다. 그에게 시간은 내게 정말 마음에 드는 정장 원피스처럼 소중한 것인데, 매주 꼬박꼬박 시간을 내어주었다. 시간뿐 아니라 진심을 담아주었다. 보상도 없이 내어준 모든 것에 감사하다. 모임 후기를 남겨두고 싶다. 설교에 진심인 JP에 주신 위로와 격려가 코스타의 경험이라면, 목회에 진심이고 싶은 JP에게 주신 기회와 성취감이 이번 책모임이 아닐까 싶다. 2022년 가을, 늦가을의 소중한 경험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고, 메마른 일상의 설교에 지칠 때 꺼내볼 수 있었으면. 자신의 진심을 믿어줄 수 있었으면.

 

 

 

 

❝혼자서는 버거웠을 ‘마음의 혁신’이라는 산을 넘을 수 있도록 월요일 저녁마다 마음으로 함께해준 벗님들께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달라스 윌라드를 닮으신 가이드님의 친절한 안내덕분에 여기까지 올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역자로서 잔꾀와 산만함을 버리고 제자로 살고, 제자 삼는 일에 집중하고 싶은 열망이 커졌습니다. 가장 단순하고 하찮은 일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며 사는 인생 후반이 되기를 꿈꾸어 봅니다.❞
 
❝요 몇년은 제게 무척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이 때에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꿈모임, 꿈 북스터디, 그리고 "마음의 혁신"을 귀한 분들을 통해 만났고, 다시 저를 살려내는 여정이 이어지고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뽀이님,소장님, 그리고 친구님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저의 내적 여정은 조금씩 계속됩니다. 기대하기는 여려분과 함께 다시 볼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혼자 읽었더라면 평면적으로 밖에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인데, 함께 스터디를 함으로써 입체적으로 보는데 도움이 되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캐릭터가 다르면서 고뇌하는 목회를 하시는 세 분의 젊은 목사님들의 진솔한 이야기는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울림을 주었구요. 특히 이 책이 주는 느낌과 이미지가 비슷한 뽀이님의 균형잡힌 설명과 목회 현장의 이야기들은 마음의 혁신을 이루어가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모두 감사했습니다.❞
 
❝영성이라는 모호함을 정리해주고 알게해주는, 그래서 삶으로 도전할 수 있도록 응원해주는 책모임이었습니다. 삶의 자리는 다르지만 함께 고민하고 공감해줄 수 있는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특별히는 이해를 위해, 소화를 위해 노력해주신 뽀이님 감사합니다! 비록 앞으로도 시스템 속에 살아가겠지만, 시스템에 매몰되지 않고 시스템이 아닌 영혼에 주목하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길 소망해봅니다!❞
 
❝어려울 때마다 달라스 원정대를 끝까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주신 간달프 뽀이님께 감사드리고, 일주일의 고단함 속에서 오아시스같은 모임으로 함께 해주시는 소중한 분들이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달라스의 여정이 끝나지 않길 바라며, 다음엔 함께 하나님 음성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
 
❝‘마음의 혁신 스터디’는 저에게 ‘고급 한정식 코스요리’였습니다. 한정식 중에 더러는 처음 먹어보는 맛도 있지만, 대부분 먹어본 음식입니다. 마음의 혁신의 내용도 그러했습니다. 한 때, 심취했던 ‘개혁주의 성화론’과 내용상 겹치는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묘했습니다. 한계를 맛보고 떠나왔던 그 음식을 하나님이 다시 먹으라고 하는 느낌!
 
그런데, 맛이 고급이었습니다. 이전에 먹어봤던 음식이지만, 대가의 손길을 거친 음식은 역시 맛이 달랐습니다. 또한,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맛 또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코스요리였습니다. 분리될 수는 없지만 구분되는 인간의 자아의 다양한 차원들을 코스요리처럼 찬 챕터씩 서빙해주었습니다. 총체적이고 통전적인 요리였다는 점에서 이번 식사는 특별했습니다.
 
늘 새롭고 특별한 음식을 맛보고 싶어하는 저에게... 하나님은 이제 다시 건강한 ‘한정식’을 먹자고 하십니다.
그 동안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추구하며... 놓아버렸던 ‘위로부터의 영성’을 다시 붙들게 하십니다. 저의 내면 안에는 이 둘의 충돌이 여전한 것이 사실입니다. 제 안에서는 아직 달라스 윌라드와 안셀름 그륀이 약간 싸우고 있습니다. 둘의 잘 연결되고 통합되었으면 좋겠는데, 아직 저에게는 진행중입니다.
 
그래도, 뭔가 한 고비를 넘어간 느낌입니다. ‘위로부터의 영성’을 놓아버릴 자유를 허용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다시 이것을 잡고 싶어졌습니다. 버리지 않고, 포함하여 뛰어넘고 싶어졌습니다. 스터디를 통해, 이 갈망을 심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들게 얻은 이 씨앗...잘 키워가겠습니다. 귀한 스터디를 열어주시고, 가이드해주시고, 함께 동행해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오래전에 알았던 책이었으나 읽고 싶어도 어렵고 어려워 고이 모셔놨던 책을 이렇게 멋진 인도자의 도움을 받고 친구님들께 배워 완독을 했다는 기쁨이 큽니다!이제 여정이 비로소 시작된거 같습니다. 이 모임을 통해 얻은 갈망을 붙잡고 또 한걸음 전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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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뉴질랜드 코스타 참석하느라 집을 비웠다. 현승이 수능 날에 출국하여 마지막 논술시험 마치는 날에 들어오는 일정으로. 일정도 어쩌면... "중요한 때 아빠가 액운을 싹 몰아가지고 바다 건너갔다가 끝나고 오는 거라고 쳐. 어쩌면 아빠 자신이 액운... ㅎㅎ"


월요일 아침 현승이와 둘이 밥을 먹다가 말했다.
월요일인데, 월요일엔 아빠랑 같이 보내는 안식일이거든. 걷고, 밥 먹고, 카페 가서 책 보고.... 그렇게 쉬는 날인데. 아빠가 없으니까 어쩐지 월요일이...
허전해?
아니. 휴가받은 느낌이야. 쫌 좋아. 월요일에 아빠랑 쉬는 거 진짜 좋아하거든. 그런데 오늘 여유 시간이 생긴 것 같고 막 뭔가 홀가분하고 그러네.
아,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구나. 엄마 아빠....
(015B 노래 '아주 오래된 연인들' 맞다. 현승이 태어나기도 전 노래지만, 이걸 말하는 거 맞다. 얘는 어렸을 적 장래희망이 '옛날 가수'인 애라서 그렇다.)
일종의... 그런가 봐.

낮에 '아주 오래된 연인들' 가사를 찾아보았다.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지 / 가끔씩은 사랑한단 말로 서로에게 위로하겠지만 / 그런 것도 예전에 가졌던 두근거림은 아니야 / 처음에 만난 그 느낌 그 설레임을 찾는다면 / 우리가 느낀 싫증은 이젠 없을거야~이야

 

아닌데... 아직 두근거리는데. 설렘도 있는데... (빡침과 싫증이 없다고는 안 했음)

저녁에 현승이에게 다시 말했다.
현승아, 엄마빠 '아주 오래된 연인들' 그거 아니야. 가사 다시 찾아봤는데. 아니야. 엄만 아직 아빠한테 설레. 아침에 말한 느낌은 좀 다른 거야.
아, 그런 거구나! 나도 시험 때 아빠가 없으니까 뭔가 편한 게 있어. 아빠가 죽은 것도 아니고... 시험 끝날 때 올 거고. 아빠는 노력해서 한 마디 하는데, 내가 예민해 있을 테니까 또 짜증 낼 수도 있잖아. 그러면 또 아빠가 엄청 신경 쓰일 거고, 그런 아빠를 아니까 나는 더 신경 쓰이고... 그래서 뭔가 마음 편한 게 있어.
그치? 그치? 그 비슷한 걸 말하는 거야.

MBTI로 NT 아빠-NF 아들, 에니어그램으로 5번 아빠-4번 아들 사이 긴장이 있다. 서로 사랑하는데, 가끔씩 도통 이해 못 하는 그런 지점이 있다. 그걸 말하는 거다. 아무튼, 그가 오늘 돌아온다! 현승이 논술 입시도 오늘이면 끝이다!

 

와이카토 대학 캠퍼스에 선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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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해. 그만하라고 했잖아.
가르치듯 그렇게 말하면 당신은 기분 좋아?
설명하고 가르치는 거 싫어하잖아.
토요일은 설교준비 하니까 말 못 하고.
주일은 설교하고 힘드니까 말 못 하고.
월요일은 긴장 풀고 느슨해져야 하니까 말 못 하고. 언제 말해?
그냥 이렇게 하면 좋겠다고 말해도 되잖아.
좋은 뜻으로 말하는 거였어.
그럼 그렇게 말하는데 잘 들어져?
도와주고 싶어서 하는 말이었다고.
상투성이 악이야. 한나 아렌트가 말했어.
악이라니! 그런 말을 함부로 해?
베드로한테 사탄이라고 하는 거랑 똑같애.
(침묵.......)
아우, 기분 나뻐.
나도 기분 나뻐.


월요일, 기분 좋게 걸어서 보정동 카페거리로 점심 먹으러 갔다가, 맛있는 편백나무 찜을 앞에 두고 설전을 벌이고 말았다. 누가 쏜 총알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피차에 쏘았다. 기분 좋게 식당에 들어갔다가, 말 한마디 없이 먹고 나왔다. 한 몸처럼 가깝고 친밀했던 사이가 1km로 멀어지는 것은 순간이다.

커피 마실 거야? 됐어. 집에 갈 거야. 스콘 사 가지고 집에 갈 거야. 나란히 걷지만 마음은 그새 2km 멀어져서 퉁퉁퉁퉁 걷는 길이었다. 탄천 길 버리고 산길을 선택했는데, 어머 산 입구 공원에 단풍이 왜 이리 예쁜 거야? 감동인데, 뚱한 얼굴에 감동을 담기는 그렇고... 카메라 들고 사진 찍어댔다. 예쁜 풍경 담다 보니 표정이 자꾸 풀리려고 해서 민망하다. 어, 새다! 박새로 추정되는 작은 새 두 마리가 폴짝폴짝 놀고 있는데 표정관리는 다 틀렸다. 헤벌쭉.... 그렇게 단풍 아래서 머물고 다시 걷는 길에 쓰윽 손을 잡아 버렸다. 새는 내게 하늘의 메신저인데, 이 순간 사랑에 깨어나라고 하시는 그분의 메시지인데 거부할 수가 없다.

손 꼭 잡고 집에 와 마음 상한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은 스콘과 함께 커피를 마셨다. 서쉐숵 목짠님께서 이태리 여행에서 사다주신 에스프레소용 원두로 모처럼 모카포트에 커피를 만들었다. 다시 마주 앉으니 조금 민망하고, 아까 그 기분 나쁜 느낌이 다시 살아나긴 했지만, 스콘이 맛있고, 커피가 좋아서 그럭저럭 괜찮은 시간이었다.

위의 사진은 가을 초입의 어느 비 오는 월요일에 운치 있는 카페에서 달달했던 순간이다. 달달한 순간에 읽기 딱 좋은 책 제목이 <악>이었다. JP의 책이지만, '악'은 우리 둘 모두 관심 있는 주제이다. 악에 관한 많은 책 중 내겐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 만큼 깊이 있고 실용적인 책이 없다. 성경만큼 가까이 두고 있는 책이다. 해마다 연구소 지도자 과정에서 함께 읽는 책이기도 하고. 마침 이번 주 지도자 과정이 이 책 나눔이다. 많은 이들을 만나 상담했던 스캇 펙은 악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으며 대부분은 그냥 피상적으로만 관찰하더라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악을 치유하려는 씨름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자기를 깨끗게 하는 것이야말로 언제나 최대의 무기가 될 것이라고. 늘 가슴에 새기고 있는 말이다. 마틴 부버의 말을 인용하여 두 유형의 악인을 구분한다. 하나는 악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 또 하나는 본질적으로 악에 먹혀 추락한 자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늘 악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과정 앞에 선다고 생각한다. 미끄럽다. 그 길이. 여차하면 미끄러져 들어간다. 악에 대한 여러 정의 중 "악한 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생명과 성장을 거스르는 일에 자신을 헌신한다"는 말은 연구소 이름에 '성장'이라는 말을 넣은 이유이다.

사랑은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의 문제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 두 사람이 성장하려면 투명한 소통이 있어야 하고, 갈등을 피하지 않고 마주해야 한다. "화해한 상태"에서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단풍나무에서 노닐던 두 마리 작은 새는 내 입으로 뱉은 말들을 순간 떠오르게 했다. 말이 아니라 태도를 생각나게 했다고 하는 게 맞다. 늘 '화해한 상태'를 유지하고, 언제든 화해하려 하는 사람은 JP이다. 나는 어떻게든 싸우려 하고, 더 싸우려 하는, 화해할 수 있는 상태에서 더 강퍅해지는 그런 부류이다. 내 약점이다. 약함이 여차하면 악함이 된다. 악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된다. 약함과 악함의 기로에서 어설픈 '성장'을 선택하는 것이 덜 악한 자로 사는 노하우이다. 내게는 그렇다.

같은 사람들과 같은 음식을 하고, 똑같은 갈등을 반복하는 명절 수십 년이다. 명절만 없었다면, 저 사람만 없었다면 하던 시간들이었는데 주변에서 사람들이 사라지고 명절도 힘을 잃었다. 어머니의 명절 이야기이다. 몸의 한 부분으로 기울어 수십 년 살아와 틀어져 고착된 관절 같은 명절이다. 같은 사람과 같은 음식을 하며 같을 갈등을 겪느라 마음 어디가 기울어 틀어져 버렸지만 명절이 사라졌다. 명절과 함께 사람들도...

명절 전날 여자들이 모이는 시간, 만드는 음식, 일이 끝나는 시간, 명절 당일 아침에 모이는 풍경, 어정쩡한 예배, 식사, 그리도 점심, 또 저녁 손님... 어쩌면 그렇게 어느 해 명절을 따로 특정할 수 없을 만큼 똑같이 찾아왔었다. 명절 전후의 걱정 근심, 그리고 분노와 피해의식도. 매 명절마다 같았다. 그런데 이제 매 명절마다 "어떻게 모이지? 뭘 먹지?"를 아주 새롭게 고민하고 창의적으로 계획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 채윤이 현승이가 각각 공부로 시간을 낼 수 없다는 특별한 상황을 백분 활용하여 또 다른 모양의 추석이다. 어머니 모시고 셋이 비싼 식사하고, 걷고, 차 마시는 추석 전야를 보냈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북적대는 식구가 싫었고, 그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이 고통스러웠던 어머니, 조용히 단출한 음식을 하고 싶었던 어머니에게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고 단출해도 너무 단출한 노년의 시간이 왔다. 혼자 지내시는 것이 외롭고도 외로우시다. 최선을 다해 도와도 어머니 일생의 서사가 담긴 그 외로움과 서러움을 해결할 수 없으니 근심이 쌓여가고. 그래도 힘을 내어 할 줄 모르는 너스레를 떨고, 농담을 하여 웃겨 드리고, 토닥여드리는 모습이 아름답다.

야야, 나는 먹기 싫으면 안 먹고, 그냥 바나나랑 견과류 넣어서 휘리릭 갈아서 먹으면 아침 땡이야. 혼자 밥 먹기가 너무 싫어. 어머니, 저는 아침 세 번을 차려요. 각각 시간대 별로 일어나서 먹는 것도 다 달라요. 현승이는 꼭 국에 밥 말아먹어야 하고요....(셋 다 각자 알아서 먹는 편이지만 과장해 봄) 그렇지, 세 식구 따로따로 먹으면 힘들지... 그렇지...

젊은 부부들이 육아전쟁으로 부부전쟁도 치르고 내면의 전쟁을 치르는 것을 들으면 "그래도 다시 안 올 아름다운 시간인데. 힘들어도 지금이 제일 예뻐..."라고 가닿지 않을 말을 하(거나 삼키)곤 한다. 돌아보면 육아로 힘들 때 "언제 우아하게 외식 한 번 해보지?" 막막했던 어떤 날이 있었는데. 그 힘겨웠던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그리운 시간이 될 줄이야. 우리 어머니는 수십 명 모여 북적이던 그 명절의 시간이 그리우실까? 여전히 지긋지긋하셔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실까? 그런 회한이 좀 있으시면 좋겠다. 약간의 회한 끝에 단출하여 외로운 오늘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발견하셨으면... 이렇게 단 한 번의 새로운 추석이 가고 있다.

현승이가 일어났다. 단 한 번의 아침 식사를 챙겨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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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러 서울 갈 계획은 오지도 않은 태풍과 굵은 빗방울로 접어 버렸다. 서울 가는 길은 멀다. 분당으로 처음 왔을 때 교회 집사님들이 "서울 갔다 왔어요. 서울 갔다 와서 피곤해요?" 하시면, 여기서 서울은 서울에서 서울보다 가까울 수도 있는데 저러시나 싶었었다. 살다 보니 알겠네. 서울 가는 먼 길을... 합정동 살 때 참 좋았는데. 씨네큐브, 아트하우스 모모, 상상마당, 필름포럼이 죄다 버스 한 번에 30분 거리였었다니! 여하튼 이러다 포기하는 영화가 대부분이다. 나중에 네이버에서 봐야지, 잠깐의 위안을 위한 결심을 해보지만 노트북 작은 화면으로 보게 되질 않는다.

밥 먹고 카페 가서 공부나 하자! 그래서 간 집 근처 유명 카페다. 유명 카페라서 낮에 가면 도떼기시장이라 테이크 아웃 한 잔으로 만족하고 빠져나오기 바빴었다. 소문만 무성한 태풍과 굵을 빗방울로 어째 여기가 다 한산하네. 논 한가운데 있는 카페라 창밖 뷰가 저렇다. 비 오는 날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비멍' 하며 하염없이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뷰가 저러니 정말 감동이다. 막 모내기 마친 논, 초록 벼로 빽빽한 논, 황금물결 넘실거리는 논, 텅 빈 겨울 논... 다 좋아한다. 어릴 적 익숙한 풍경이라서인가. 이거 정말 경치가 유혹이네! 공부에 집중이 안 되는 것.

 

남편도 영화 좋아하지만, 합정동이 아니어서 크게 아쉬울 것이 없다. 서현, 오리, 동백... 근처에 멀티 영화관이 쎄고 쎘으니까. 취향 존중의 미덕을 발휘하여 내 영화를 함께 봐주곤 한다. 취향과 취향이 충돌할 때 그는 이기는 법이 없다. 영화도, 점심 메뉴도, 카페도 그의 선택은 하나다. "존중입니다, 취향 해주세요!" (온전히 나, 오직 내) 취향 저격 카페에 앉아 각자 읽을 책을 펼쳤다. 조직신학과 영성신학이 펼치고 마주 앉았다. 이번 주 수업 주제이기도 하고, 책을 읽다 궁금하기도 하여 조직신학, 교의신학, 윤리신학과 영성신학의 관계에 대해 무언가 질문을 던졌다. 남편 입의 봉인이 풀렸다. 술술술술, 네버앤딩, 네버앤딩, 술술술술.... 우이씨, 아는 것도 많아! (나는 토론을 하자는 게 아니라 책에서 본 한 마디를 한 거였다고오....) 그냥 인신공격 전술로 판을 엎어 버릴까?

 

조직신학과 영성신학이 싸움 붙으면 이기고 지는 편이 뻔하다고오! 영화 <헌트>와 <베르히만 아일랜드>가 흥행으로 싸움이 되냐고. (라고 비유하면 블친 둥절인가요?) 보편적 개념들로 견고한 틀을 갖춘 '조직' 신학과 개인의 '체험'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신비(영성)' 신학이 싸움으로 붙으면 되겠느냐고!

남편이 연구소의 가을 프로그램 하나를 맡아 주었다. 달라스 윌라드의 <마음의 혁신> 읽기 모임이다. 달라스 윌라드 덕후로서 전작을 읽었을 뿐 아니라 <마음의 혁신>은 여러 차례 읽었고, 책모임도 한 번 했었다. 저작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구글 맵으로 달라스 윌라드가 나고 자란 곳, 살았던 곳 골목까지 따라다닌 '광' 덕후이다. 내가 <내적 여정 세미나>를 이끄는 방식은 다소 직관적이고 영성적이다. 그래서 어려워하는 분들이 있다. 조직신학에 익숙한 목회자들에게는 '내적 여정'을 위한 다른 언어가 필요하단 생각을 해왔다. 그래서 목사님, 전도사님, 선교사님이 많았던 작년 지도자 과정에선 여름방학 모임으로 <마음의 혁신>을 읽었었다. 달라스 윌라드는 철학자이며 신학자로 개신교 안에서 '영성 형성'을 꾸준히 연구하고 틀을 세운 분이다. 그러니까 영성을 풀어내는 그의 언어가 철학적이고 신학적이다. 김종필과 찰떡이다.

조직신학과 영성신학을 마주 펼쳐놓고 약간의 논쟁을 하다 김종필의 이 말에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았다. (실은 꺼내지도 못했다.)심지어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마음의 혁신>의 결론은 결국 사랑이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는 말씀에 대한 해설이야.


많은 싸움이 취향과 취향의 대결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누가 이길까? 취향을 존중하는 자? 존중받는 자? 나는 '조폭신실'이고 항상 승자이다. 현상적으론... 그런데 늘 어딘가 모르게 진 느낌이 있다는 건 그냥 없는 느낌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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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게 텀블러를 선물했다. 카페에 갔는데 “텀블러 예쁘다.” 하며 만지작거리는 걸 봤다. 그런가 보다 하고 나왔는데, 아까 그 텀블러가 예쁘지 않았냐 묻는다. 어머, 이건 사줘야 해! 다음 날 그 카페에 가서 바로 그 텀블러를 샀다. 물욕이라곤 없는 사람(이 세상에 있겠냐만)이라 자신을 위해 뭘 살 줄을 모른다. 소유하려 하질 않아서 그렇지 미적 감각은 있다. 예뻐라, 하는 걸 가지도록 하고 싶었다.

이 얘기를 들은 채윤이는 "촴나, 뭐 운전해 줘서 대가로 주는 거야? 자기 휴가에 무슨 운전을 해주고 그래." 했다. 남해 여행 후 이틀이 남았었고, 그 이틀 저녁 모두 나는 강의 약속이 있었다. 금요일 밤에 비가 오고 운전할 길은 멀어서 부담이 컸는데 남편이 운전해서 같이 가주겠단다. 몸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 편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다음 날 저녁에도 "또 같이 가면 안 돼?" 했더니 선뜻 그러겠단다. 휴가엔 늘 하루 이틀을 남겨 자기만의 시간을 갖곤 하는 JP이다. 은사님을 찾아뵙든지, 다니던 신학교 도서관에 가 앉아 있다 오든지, 혼자 드라이브를 가든지. 하반기 목회를 위해 나름의 골방 시간을 갖는 것이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생긴 피부 발진으로 여의치가 않았다. 약기운 때문인지 밥 먹고 책 좀 보다 자고... 이렇게 보내다 저녁 시간은 김기사를 자처한 것이다. 고마웠다. 큰 힘이 되었다. 정말 고마웠는데, 단지 그 때문에 텀블러 선물을 한 것은 아니다.

내가 강의하는 동안 근처 카페에서 책을 보며 기다리곤 하는데, 둘째 날 강의 마치고 만났는데 양손에 검은 봉지가 한 가득이다. 뭣인가 했더니... 작은 시장이 있어서 장을 봤단다. 와, 김종필이 스스로 장을 봤다고? "당신한테 혼날 수도 있어. 수박이고 뭐고 다 너무 싸서 안 좋은 것일 수도 있어." 안 좋아도 좋아할 거다!!! 내가 좋아하는 수박, 체질 식단 하느라 본인이 먹을 단호박... 등을 알.아.서. 사다니. 어떤 남편들에겐 흔한 일일 수 있으나, 김종필에겐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였다. 몇 년 전 집안을 휩쓸었던 페미니즘 논쟁, 집안일 논쟁 때가 생각난다. 아침 식사, 장 봐서 식재료 준비하는 일 같은 걸로 시작하여 속초 1박 여행을 갔다 싸우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여성과 남성의 일이 구별 없다는 원칙에 100% 동의하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하지만(나도 그건 100% 인정), 몸에 밴 것은 원칙과 상충하니 본인도 답답하고 나는 화가 났었다. 이제야 이렇게 몇 문장으로 할 수 있지만 보통 복잡한 감정이 아니었었다. 눈앞의 시장을 놓치지 않고, 싼 가격에 장 볼 기회를 놓치지 않는 정신! 이것은 정말 엄청난 변화이며 성장이다.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일이다.

얼마 전에는 그런 일도 있었다. 묵은지를 주문했는데, 내가 1박으로 어디 다녀오는 날에 택배 도착 문자를 받았다. 스티로폼 박스에 담겨 왔을 텐데, 내가 집에 가야 냉장고에 넣을 수 있을 텐데... 조금 조바심이 났다. 집에 돌아와 자기 전에 생각해 보니 김치 택배가 안 온 것이다. 뭐야? "낮에 택배 온 것 없어? 스티로폼 박스!" "김치 택배 와서 내가 통에 담아 김치 냉장고에 넣었는데..." 와, 거기서도 한 번 감동! 어려운 철학 책 읽는 지적 감각은 뛰어나지만 그에 미치지 못하는 생활의 감각으로 내 얼마나 속을 끓였던가. 끓이다 끓이다 남편를 볶아대고… 아, 끓이고 볶던 시간들이여. 이 역시 사소하지만 사소한 일이 아니다.

함께 쓴 책 『와우결혼:와서 보라 우리의 결혼을』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을 함께 했었다. 결혼 5, 6년 차 때였던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면,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도 사랑이다. 사랑의 시작이다. 변하지 않으면 사랑이 사람 죽이는 사달이 난다. "내가 줄 수 있고, 주고 싶은 것"에서 "네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으로 관점이 변하지 않으면. 결국 성장의 문제이다. 사랑은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의 문제이다. 사랑 안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은 객관적이기 어렵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관계 안에서 감지되고 측정되는 양과 질이 있는 것이다. 남편의 성장에 감사한다. 쓰다 보니 텀블러 하나에 이런 마음,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 여자에게 괴롭힘 당한 한 남자의 성장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무려 23년 동안.



저녁 먹고 zoom 모임 전까지 걸을 시간이 있었다. 오랜만에 남편과 함께 걷기로 했다. 식탁에 앉아 노닥거리다 창밖을 보니 하늘이 붉다. "어, 지금이야. 지금 나가야 돼." 하고 일어났다. "아, 지금? 개와 늑대의 시간! 빨리 나가." 아침 설거지도 했다며 저녁 설거지는 아빠가 하라던 채윤이가 말했다. 투덜투덜, 기꺼이 저녁 설거지 당번을 맡아 주면서.

해가 지는 시간, 해지고 어두워지며 개와 늑대가 구분이 안 가는 시간이라고 한다. 노을이 물드는 시간이기도, 밤으로 가는 시간이기도. 참 좋아하는 때이다. 단지를 빠져나가는데, 저 녀석! 개도 아니고 늑대도 아닌 고양이가 길 한복판에 드러누워 있다. 성원, 금호, LG 아파트의 귀여움을 관활하는 놈이다. 번듯한 집을 짓고, 오가는 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 살이 디룩디룩이다. 팬서비스도 수준급이라 사진 포즈 기가 막히게 잡아준다. 개와 늑대와 고양이의 시간.

탄천에는 아무렇게 피어있는 개망초가 한창이다. 오늘은 개망초가 참 예뻐 보인다. 어스름한 빛이라 흰색이 도드라져서 인 듯하고. 무더기 무더기 피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참 예쁘다. 개와 늑대와 개망초의 시간이다. 두툼하고 뭉툭한 JP의 손을 잡고 개망초 옆을 걷는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우리라서 좋다. 개와 늑대와 JP&SS의 시간이다.

벚꽃이 예쁘다는 은이 성지를 찾았다.
말로도 사진으로도 담을 수 없는 빛깔의 봄 산,
그 배경의 흰 건물인 성당이다.

벚꽃 엔딩 즈음이라 바람 한 번 불 때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흩날리는 벚꽃 잎.
그 배경의 십자가 길이다.

십자가 길을 천천히 한 바퀴 걷고 근처 카페에 갔다.
벚꽃 아래 야외 테이블에 앉아 독서의 시간.

마음에 드는 근사한 사진을 여러 장 건졌다.

'마기꾼'이라는 말이 있단다. 마스크 사기꾼이라고. 마스크 벗은 얼굴에 실망하여 붙인 이름인 것 같은데. 마스크 낀 얼굴로 사귀기 시작했다면 나중에 실망하지 않을 방법이 없지 싶다. 보이는 눈을 근거로 보이지 않는 코와 입과 턱을 가장 조화롭게 상상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운동하는 곳에서 물 먹느라 잠깐 마스크 벗은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며 내린 결론이다. 보이는 것을 근거로 주변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채워 넣어 완전체로 상상할 때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마기꾼이라는 말이 딱 맞고. 멋진 사진 한 장도 그와 다르지 않다. 앵글 밖은 상상과 다르다. 일단 저 카페, 커피 맛이 너무나 좋지 않아서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책 보는 게 설정은 아니지만, 셔터 누르는 소리에 살짝 얼음 상태를 유지했던 것 사실이고. 주변의 지저분한 곳은 이렇게 자르고 저렇게 잘라서 멋진 부분만 남긴다는 건 선수끼리 다 아는 거고. 앵글 밖은 다르다. 앵글 밖은 심지어 위험하다. 사순 기간이라 십자가 길을 걸으며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은 참 좋았다. 한껏 고양되고 경건해진 마음으로 동산을 내려오다, 아아아아아악!!!!! 나는 소리 질렀고, 남편은 그 소리에 더 놀라 펄쩍 뛰며 나를 마크하려 들었다. 유유자적 꼬불거리며 가는 뱀 한 마리 발견! 십자가 밑에 뱀 한 마리.

앵글 밖은 이렇다.

벚꽃 머리에 이고 걸을 수 있는 나날이다. 월요일로 치면 두 번 정도 될까. 여기저기 벚꽃 길 검색을 하다 동네 보정동으로 정했다. 산책하며 지나는 길이지만, 벚꽃 명소로 치고 가 보기로. 여러 아파트를 통과하고 작은 언덕 같은 산을 넘어 3,40 분 걸으면 보정동 카페 거리다. 인도 카레 좋아하고, 따뜻한 난을 특히 좋아하는데, 활짝 열어젖힌 창문을 좋아하고, 노천카페도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것을 다 갖춘 식당에서 기분 좋게 식사했다. 날이 뜨거워서 해가 나는 쪽으론 걸을 수가 없다. 커피 한 잔 테이크 아웃해서 정자 벤치에 앉았다. 

 

월요일 밤에 나는 거실에서 대학원 수업하고, 남편은 안방에서 <마음의 혁신> 책모임을 한다. <마음의 혁신>은 내 인생의 카타콤 안에서 만난 인생 책 중 한 권이다. 신앙 사춘기의 숲이 아직 캄캄할 때, 카를 융과 안셀름 그륀, 아빌라의 데레사를 시각 장애인 수준으로 더듬던 때였다. 우레와 같은 깨달음을 주지만 너무나 낯선 저자들이라 정신이 혼미해지곤 했었다. 그 시절 유일하게 익숙한 세계 안의 저자가 달라스 윌라드였다. 이제 읽어보면 그렇듯 철학적이고 신학적이고 딱딱한 책인데, 그 책을 읽고 그렇게 마음이 뜨거워졌으니, 참 신비한 일이었다. 작년 에니어그램 지도자 과정 여름 방학 중에 <마음의 혁신>을 함께 읽었다. 감개무량했지. 나는 <마음의 혁신> 한 권이지만, 달라스 윌라드의 전작을 읽고 제대로 빠져 있는 남편이 최근 목사님 집사님 세 분과 월요일 저녁 책모임을 하고 있다. 달라스 윌라드의 인생은 물론 살았던 동네나 집(구글 지도로 다 찾아감)까지 꿰고 있는 김종필이다. 달라스& 종필, 어쩐지 성향과 기질이 비슷한 구석이 있다. 

 

나란히 앉아 벚꽃 흩날리는 장면을 바라보며 이 얘기 저 얘기 경유하다 '달라스 윌라드' 역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어느 날 아침 남편이 "머리를 감다가! 내 영혼을 느꼈어. 달라스 윌라드가 말하는 그 영혼, 내 영혼의 상태 같은 걸 느꼈어."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물론 알아들어진다. 관상기도나 침묵의 시간이 아니라 머리를 감다가인 것은 조금 의외이지만, 충분히 끄덕끄덕. 또 <무지의 구름>이나 <영혼의 성>이 아니라 그 철학적이고 딱딱한 <마음의 혁신>을 읽다가 자기 영혼을 '느꼈다'니! 그건 좀 갸우뚱... 이지만 김종필이니까! 아, 나도 오래 전에 그랬었었었었지!!! 

 

같은 걸 같이 읽고, 같은 생각을 하고, 모든 생각을 나누되 깊이 나누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불행을 달리던 때가 있었다. (있었다, 아니고... 지금 이 순간만 빼고 늘 그렇다.) 말하자면 영적 여정에서 내가 큰 덕을 보고 있는 신비신학이나 기도를 남편도 똑같이 알아야 한다는 조바심 같은 것이다. 내게 좋은 것은 좋고 옳은 것이니, 남편도 나와 같아져야 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페미니즘이고, 어떤 때는 심지어 수영이나 PT 같은 운동일 때도 있다.) 그의 길이 있는 걸. 그와 나의 다름을 평생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살면서도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집착이다. 너의 길과 나의 길이 다름을 새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모처럼, 아니 난생처음인가? 네 길을 버리고 나의 길로 오르라고 얼마나 강요하고 압박을 주었던가. 동네 정자 벤치에 앉아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다. 내일이면 다시 설교 논평을 하고, 말투를 트집 잡으며 나의 길을 강요하고 말 것을 알지만, 피고 금세 지는 벚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잠깐 착한 마음을 가져보는 것으로! 잠깐 왔다 가는 마음이지만, 내게 있는 마음인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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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 쉬며 걷는 날 월요일. '박두진 둘레길'을 걸었다. 박두진 시가 구석구석 '이발소 그림' 버전으로 걸려 있다. 박두진 시를 읽으며 걷다 윤동주 시가 입에서 나왔다. 시 낭송 놀이를 하며 걸어봤다. 한 시간을 걸어도 요즘은 거의 말없이 각자 자기 길을 걷게 되는데, 새로운 놀이 재미있다.

새로운 길_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저녁에 대학원 수업이 있어서 여유 있게 먼 곳으로 가지는 못한다. 월요일 아침이면 JP가 검색 기술 발휘해서 적절한 곳을 찾는다. 어디든 좋다. 요즘은 계속 숲과 물이 함께 있는 곳을 찾게 된다.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물이 있고, 조금씩 오르고 내리는 길이 있다. 어디든 그렇게 비슷한 것들이 있지만 똑같은 길은 없다. 계속 걷는 그날의 길조차도 순간순간 새롭다. 윤동주의 <새로운 길>이 마음에서 튀어 오른 이유일 것이다. 나무 사이 한 그루 나무처럼 섰는 사진도 참 좋네.

밤 10시까지 수업을 듣고, 발표를 위한 스터디 모임까지 마치니 11시가 다 되었다. 기나김 월요일 하루다. 20대 끝자락에 음악치료 공부할 때도 참 좋았는데, "대학원은 이렇게 절실할 때, 꼭 하고 싶은 걸로 해야 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20년 훌쩍 뛰어넘어 공부하면서 "대학원은 살만큼 살고, 혼자 공부할 만큼 하고, 이럴 때 해야 해."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월요일 수업이 참 좋았고, 그 기분을 안고 잠에 들었다. 화요일 아침, 오랜만에 꿈을 기억하며 잠에서 깼다. 어서 적어야지! 꿈일기장을 펼치니 와핫! 맞아, 노트 다 썼지. 새 노트다!!!! 꿈일기장으로 쓰려고 간직한 '나리 노트' 드디어 개시다.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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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반대까지는 아니라도 아주 많은 부분이 다르지만, 서로를 사랑하는 만큼 각자 책을 사랑하는 것은 비슷하다. 그러니까 생각해보니 함께 다니기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함께 다니되 각자 읽고, 또 나란히 걷되 각자 걸을 수 있기에 독립적이지만 외롭지는 않은 시간이 된달까.

여행지에 가면 독립서점 찾는 일도 즐겁다. 내 알라딘의 알고리즘으로는 만날 수 없는 책을 만나는 기쁨이 있다. 작은 서점들은 흔히 주인의 취향이 꽉꽉 채워져 있는데, 목포에서 만난 책방 주인은 미술에 조예가 있는 분인가 싶다. 고흐, 에곤 쉴레에 마음이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살 책이 있지는 않겠다 싶었는데. 웬걸.  내 알리딘 알고리즘 밖의 좋은 책들이 한둘이 아니고. 에릭 프롬의 미발간 작품집을 만나서 여행 내내 맛있게 읽었다. 취향이 뚜렷한, 취향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이 참 좋아 보인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과 교차할 때 예기치 못한 책을 만나고 기쁨을 만난다. 자기로 사는 것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다.  

아침에 서점에 들러 산 책을 가방에 넣고 하루 종일 걷는데, 등 뒤 가방에서 아우성이 들렸다. 읽어줘, 읽어줘, 나 좀 읽어줘. 춥고 어스름한 저녁 시간에 들어간 카페도 꾸민 이의 정체성을 바로 알겠는 멋진 곳이었다. 구석구석 테이블과 의자 배치며 장식들이 정성스러워서 앉고 싶은 자리가 한둘이 아니었다. 읽고 읽고 또 읽을 삶을 돕고 격려하는, 자기로 사는 이들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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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전하고

참하고

조신하고...

 

천상 남자가 깎아 담은 과일

 

만다라 모양이라 더욱 치유적이다.

 

그리고

저 곱디 고운 과일 만다라를 만드는 섬섬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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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때문이야! 종끼아빠!

윤채김!

으, 종끼아빠!

윤채김!

 

아빠와 딸이 사랑과 신뢰와 애정을 확인하는 소리. 하루에 열 번은 맥락 없이 하는 소리. 저녁 안 먹고 늦게 들어온 아빠와 딸이 야식을 두고 마주 앉았다. "윤채김! 너는 왜 니 꺼만 가져와. 아빠도 챙겨줘." "으으... 종끼 아빠... 이게 다 아빠 때문이야!" 그리고 뭔가 조화로운 듯 아닌 듯 이어지는 저들의 대화.

 

아빠가 달라스 윌라드 다시 읽거든. 이번이 세 번째야. 아, 아빠는 영어를 못하는 게 너무 한이 돼.

왜애?

유튜브에 달라스 윌라드, 유진 피터슨 영상이 많거든... 잘 들렸으면 좋겠어.

아빠는 우리말도 잘 못 알아듣잖아. 

맞아... ㅠㅠ 그렇지. 그래도 영어 잘하고 싶다.

(엄마 난입) 내가 그 마음 알지. 나 코스타에서 마르바 던이 바로 앞에 계신데,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고, 심장 뛰고 그러는데... 말을 할 수가 있어야지... 그 심정 내가 잘 알지.

당신은 표정으로 다 말하잖아. 표정으로 하지 그랬어? 암튼 난 그래서 빨리 천국에 가고 싶어.

뭐라고? 아빠! 영어를 못해서 빨리 죽고 싶다고?????? 

 

 

언어로 막힌 담이 허물어져 모든 영혼과 프리 토킹 하는 천국에 가고 싶다는 뜻인데...

일단 거기 가면 아빠와 딸의 소통부터 막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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