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연시 준비할 일이 많아 가까운 곳에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나섰다. 이천 쌀밥을 운운하며 갔는데 쌀밥도 보리밥도 아닌 인도 커리를 먹고 근처 도자기 파는 곳에 들렀다가 몇 년 찾아 헤맨 바로 그것을 발견했다. 인사동 같은 델 가면 우물, 마중물, 펌프... 하면서 돌아다니곤 했었는데 늘 실패. 도자기 가게 아이쇼핑 하고 나오는 길에 우연히 내가 발견했다. "여보, 이거 봐. 당신 이런 거 좋아하잖아." 아이고, 좋아하는 게 아니라 찾던 거라고!!! 두 번도 망설이지 않고 펌프 모형, 옹기, 물을 올리는 진짜 펌프를 샀다.
이천 아울렛에 가서 엄청 싸게 나온 신발을 보고, 마침 신발이 필요하다며 들었다 놨다 결국 놓는 것으로 끝났다. 사라고, 내가 사주겠다 해도 아직 신을만 하다며 결국 내려놓고 말았다. 신발에 열리지 않는 지갑이 신지도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펌프 모형에는 열린 것이다. 나같으먼 신발을 사겠네! 바보! 놀려보지만. 실리보다 명분을, 실용보다 의미를 사는 남편이 고맙고 좋다.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찾아다니는 열정과 기꺼이 사고마는 낭비가 아름답게 느껴진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거룩한 낭비' 때문이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 중 특기할 만한 인물이다. 생존하고, 결국 생존하여 치유자가 된 사람이기에 그렇다. 수용소에서 살아 남은 문학가, 예술가들이 생생한 작품을 남기고도 스스로 목숨을 거둔 일이 많다. 그 생생한 기록을 읽다보면 일상으로 돌아와 계속 살아남는 것이 차라리 기적처럼 느껴진다. 빅터 플랭클을 오래, 결국 살아남게 만든 힘은 무엇일까?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 자신이 던진 질문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왜 어떤 사람은 결국 살아남는가? 삶의 의미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살아 남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 그 의미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이 극한의 사선 앞에서 버티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의미치료'를 창안하였다. 고통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으로 치유 가능하다! 단지 트라우마 생존자를 위한 치료책만은 아닌 것 같다.
일상의 다른 말은 '소소한 행복'이 아니라 '미세 부조리의 축척'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은혜로 덮고, 다 주님의 뜻이 있겠지 싶어 수용하고 살지만 내 뜻대로 되는 일상이 몇 개나 되는가. 부조리한 일상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것은 다른 말로 ‘의미'의 발견이다. 부조리 속에서 조리를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견뎌야 하는 이유가 있음을 알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 의미는 보이지 않는 것이고, 이성과 논리로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실용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 돈이면 옷과 신발을 사서 멋지게 보이는 게 낫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펌프 장식물을 사서 끼고 있는 것이 무슨 유익이람. 돈도 안 되는 일에 에너지 낭비하지 말고 집어 치우라는 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을 위한 희생으로 자기를 소진하지 말라는 조언을 거스르는 바보같음 말이다. 의미를 발견한 사람을 막을 수는 없다. 우리의 신앙은 이렇듯 내가 발견한 십자가의 그분, 그 의미에 대한 깊은 헌신이다.
"자기에게 의미가 있다고 확신할 때 인간은 엄청난 힘을 얻는다...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종교 상징들이 맡고 있는 일몫이다... 자기 존재에 대단한 의미가 있다는 느낌은, 한 인간을 단순히 소유하고 소비하는 존재로부터 보다 나은 존재로 도약하게 한다. 그런 의미를 느끼지 못할 대 인간은 자신을 비참한 존재로 인식한다. 만일 자신을 떠돌아 다니는 양탄자 직공(천막 만드는 사람)에서 더도 덜도 아닌 존로 인식했다면 사도 바울은 실제로 아무것도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미심장한 그의 삶의 진실은, 자신이 '주의 사자'라고 하는 내적인 확신 가운데 존재하고 있었다. 그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비난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같은 의견은 역사의 증언이나 후세의 판단 이전에 이미 퇴색하고 없다. 사도 바울로 하여금 자신을 확실하게 잡아 쥐게 한 신화는, 단순한 직업인 이상의 위대한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신화는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상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
<인간과 상징> 카를 융
의미와 상징은 얼마나 소중한 낭비인가. 인간을 거룩한 존재, 초월하는 존재가 되게 하는. 보이기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내적으로 깊이 품기 위한 상징으로서의 의례와 상징물들. 손에 쥔 연기처럼 빠져가는 낭비, 그러나 이 얼마나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인다. 이 부조리한 일상을 믿음으로 견디게 하는 힘은 지금 여기서 발견하는 '의미' 그것이다.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의 낭비는 과연 무엇인가.
카를 융의 말처럼 인생에 '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종교이고 종교의 상징일 텐데. 인생을 더 천박하고 일천한 것으로 추락시키는 종교가, 교회가 견딜 수 없는 오늘. '실용'을 팔아 '명분'을 사는, 의미와 상징을 사는, 보이지 않는 가치에 자기를 소비하는 바보 하나를 지켜보는 맛이 있다.
12월 16일, 아버지 돌아가신지 38년 되는 날이다. 38년. 38년이라니! 3년도, 8년도 아니고 38년이라니. 하루 전날, 12월15일에 동생 집에서 추도예배를 드렸다. 추도예밴지, 생신예밴지, 명절인지. 아이들은 일 년 중 가장 신나는 날이다. 맛있는 것 먹고, 사촌들과 재밌게 노는 날. 축제 같은 날이다. 남편이 예배 인도를 하고, 내가 기도했다. 툭 나온 첫문장에 이끌려 여러 이야기가 나왔다. 그 이야기에 이끌려 고향 한산에 다녀왔다.
"하나님, 38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날, 그 겨울에는 세 식구가 남아 너무도 추웠습니다." 연이어 마 3:16-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본문으로 남편이 설교를 했다. 주제는 단연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 엄밀하게 아들에게 보내는 아버지의 사랑의 메시지였다. 그리고 신으로 인간이 된 아들은 사람의 몸을 입고 견뎌야 할 고통을 견뎌냈다. 바로 그 한 마디 때문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38년 전에 아버지를 잃은 동생과 내게 아버지 사랑에 관한 기억을 나눠 달라고 하였다. 사춘기 아들이 둘, 우리 현승이 귀염둥이 막내까지 아들 넷이 조르르 앉아 있었다. 나는 원래가 수도꼭지라 기도할 때부터 '고장'이 났지만. 장군인 동생도 말을 시작하자마자 눈물이 터졌다. "아까 누나가 기도할 때 첫 문장이... 아버지 돌아가신 그 겨울이 참 추웠다. 아니,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는 늘 추웠다. 그 전을 생각하면 네 식구가 함께 있고, 한 마디로 따뜻함의 기억이다.'라고 말했다.
예배 마치고 밥을 먹으며 동생은 네 식구가 함께 '십계' 영화를 보고 가족탕에 갔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내게는 없는 기억이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그 이전의 기억까지도 다 검은 칠을 해버린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동생은 자꾸 '전과 후'라는 말을 했다. 같은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지만, 같은 죽음이지만 동생과 내가 기억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구나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내게는 'before' 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인가, 조금 혼란스러웠다.
추도예배 마친 다음 날, 12월 16일. 남편과 속초 하루 여행이 계획되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밤새 꾼 꿈의 연장으로 고향의 그 길에 가고 싶어졌다. 아버지 돌아시고, 엄마랑 동생 바로 서울로 이사하고, 혼자 집사님 댁에 남겨져 있던 몇 개월. 슬퍼도 울지도 못하고, 그리워도 맘껏 그리워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지냈던 시간. 학교 가던 그 논길이 생각 났다. 12월 16일, 그곳은 얼마나 추운 걸까? 맨몸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말 없이 남편이 동행해주었고, 오가는 근 여섯 시간 운전해주었고, 추웠던 날 나의 이야기를 끝없이 들어주었다. 조용히 내 뒤를 따라 걸어주었고, 사진을 찍어주었다. 혼자인 듯, 그러나 뒤를 따르는 남편 덕에 외롭지 않게 38년 전의 길을 다른 마음으로 걸어보았다. 문제는 오직 '추위'로 기억되는 그 겨울을 느껴고자 세 시간을 달려갔는데... 날이 너무 푹해서, 심지어 올라오는 길에 살짝 차 에어컨을 돌려야 할 정도였다. '추웠던 기억'은 떠나보내라고 더운 입김 불어 넣으시는 그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산 다녀온 다음 날 남편의 윗입술이 불룩불룩 하더니 툭 터져버렸다. 뭐 힘든 일이 있다고 입술이 터졌어? 월요일 운전이 힘에 부쳤던 것이다. 장거리 운전, 힘들다 힘들다 했었는데. 말없이 김기사 노릇 했지만 몸이 됐구나! 상처의 치유는 누군가 상처로부터 흐르는 피고름을 빨아 먹어주는 심정으로 견뎌줘야만 치유된다고 한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찌른다면 다뤄지지 않은 상처들 때문일 텐데. 내 인생 치명적 상처로 가장 많이 찔리고 아팠을 사람이 남편이다. 한산에 다녀온 하루처럼, 함께 하는 세월 내내 내 상처로부터 흐르는 쓴 물을 묵묵히 마셔주었다.
아버지와 함께 산 13년의 행복이 그대로 상실감과 결핍이 되어 38년 째 실락원의 방황이다. 내적 여정을 통해 그 기억을 새롭게 써가며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 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 만나 제가 누웠던 들것을 들고 제 발로 걸어 나가듯 이제 제대로 털고 일어나려 한다. 더는 그 추위에 갇혀 있지 않겠다는 뜻이고, 자기연민의 늪에서 나오겠다는 뜻이다.
올라오는 길, 겨울도 봄도 아닌 푸근한 날에 갈대밭을 거닐었다. 남편은 신성리 갈대밭이 참 좋았다고 자꾸 얘기한다. 다행이다. 남편에게도 좋았던 곳이 있어서. 아내의 짐을 함께 지고 슬픔에 동참하는 착한 남편에게 그분이 주신 선물인지 모른다. 배우자 선택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기 이성 부모와의 관계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데, 13년 딱 함께 살아주고 떠나 그리움만 남긴 아버지이지만 좋은 사람이었던 게 분명하다. 가만한 사람, 가만한 사랑으로 함께 하는 저 사람을 보면.
의견의 차이 또는 갈등이라 해도 좋을 상황을 인내로 헤쳐 나가는 시간, 숨을 고르며 남편이 자주 하던 말이었다. 다르다고 생각했고, 다름의 간극이 멀어 다시 손을 맞잡을 수 있을까 싶은 시점에서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거야"라는 말은 달래고 어르는 말처럼 들렸었다. 달래지고 얼러지는 효과가 분명히 있었다. '같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 차분하게 '같은 말을 다르게 하고 있다'고 설득하는 태도 때문에 달래졌던 것 같다.
요즘 자주 속으로 생각한다. "같은 말을 다르게 하고 있구나!" 남편과는 물론이고 아이들과도 그렇고. 많은 경우 그렇다. 3인칭 시점으로 지켜보는 '말'들은 대부분 같은 마음을 다른 언어로 표하고 있다고 느낀다. 같은 마음이란 '평화와 자유' 같은 것들이다. 화해와 연결, 이해하기 이해받음 같은 것들이다. 문제는 언어가 담은 마음이 아니라 그저 언표만을 듣고 볼 수 밖에 없는 우리의 귀와 눈이다. 서로 다른 뜻(마음) 이 아니라 같은 마음 다른 표현이기에 더 어렵구나, 이런 생각도 한다.
적어도 남편과는 '같은 말을 다르게 하고 있음'에 대해 빨리 감지할 수 있다. 그러자 우리의 차이가 보인다. 그러자 내가 보인다. 더욱 또렷이 보인다. 알고도 모르고 모르지만 알았던 내가 잘 보인다. 같은 말을 다르게 하는 지점은 에너지와 속도의 차이이다. 나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고 남편은 부러 천천히 뒤처져 숙고한다. 알고보면 같은 결론, 같은 뜻이다. 나는 '계획 세우기'로 뜻을 향해 나아가고, 남편은 명확한 마침표를 위해 뜻을 갈무리 한다. 말을 하다보면 간극이 엄청나지만 뜻이 같고, 바라보고 있는 곳이 일치한다.
안성의 있는 미리내 성지를 걸었다. 같은 뜻으로 걸었다. 뜻을 담은 소리가 달라도 크게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결국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알아듣는 귀가 생겼다니!
지난 8월 성서한국에서 만난 학생이 하나 있다. 강의 후 개인적인 질문을 해왔는데 바로 다음 강의를 시작해야 해서 답을 할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아니, 단지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 두 마디 답이 아니라 잠시라도 대화가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미리 잡힌 상담 스케줄이 있었지만 틈새 시간을 빼서 만나자고 했다.
내용은 이렇다. 목사의 딸이다.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에 다니는 것이 여러 이유로 고통스럽다. 교인들 시선이 부담되어 불편하고 싫다, 교회를 떠나고 싶지만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으신다. 아니, 그래라 허락하셨다 다시 안 된단 번복하신다고 한다. 목사 딸로 사는 게 부담된다는 그 이상의 마음이 느껴졌다. ‘나답게 진실하게 신앙생활 하고픈 간절함’으로 읽혔다.
부모님이 딸을 설득하며 대는 결정적 이유 중 하나. ‘교회에서 네 등록금을 대는데 네가 다른 교회를 가면 어떡하냐’이다. 이 문장을 들을 때 다리가 풀렸다. 강의에서 이미 말했다. ‘부모를 떠나야’ 자기 발로 서는 신앙, 삶을 살 수 있고 그것은 갈등을 자처하는 일이지만 궁극적으로 더 성숙한 사랑 하게 되는 일이라고. 그 이상의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교회에서 주는 등록금은 아빠 직장의 복지이다. 목회자인 너의 아빠와 교회 사이의 문제다. 그 돈에 대한 채무감은 네 몫이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내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목사 딸인 학생에게도 그 부모님에게도 감정이입이 된다.
우리 아이들에게 늘 말한다. 아빠가 목사인 교회가 힘들면 언제든 교회 옮겨도 된다. 아이는 대번에 그런다. “엄마 아빠가 입장 곤란해지잖아” 곤란함은 엄마 아빠 몫, 엄밀하게 말하면 목회를 선택한 아빠의 몫이니 그 짐을 너까지 질 필요는 없어” 이렇게 말하지만 마음까지 쿨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학생 부모님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아니다. 등록금 얘기에서 읽히는 ‘밥벌이로써의 목회’의 무게 또한 공감이 된다. 그럼에도 우리 아이에게 하듯 확신을 갖고 말했다.
학생은 부모님을 맞서는 게 두렵다고 했다. 설령 자신의 뜻이 관철된다 해도 부모님이 교회에서 겪어낼 시선이나 여파를 상상하면 두렵다고. 거기까지 얘기하고 헤어졌다. 돌아와서 자주 그 학생을 떠올렸다. 떠오를 때마다 기도의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딱 한 달이 지난 9월 첫날 아침에 기적처럼 학생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부모님과 대화를 잘해서 좋은 타협안을 찾았다고. 청년부 예배에는 가지 않고 대예배만 드리기로 했다고. 대화로 얻은 이 결과는 자신의 가족에게 있어 엄청난 도전이고 변화라고! 감동이다.
누가 정해준 답이 아니라 학생 자신이 맞서서 얻은 결과, 얼마나 소중한가. 헤어질 때 그 불안한 표정 잊을 수 없다. 그 불안과 두려움에 머물러 대면할 수 있어서 얻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 목사님 또한 큰 용기를 내신 것일 터. 학생의 말대로 그 결과를 얻기까지의 대화는 가족에게는 큰 도전이며 변화였음을 알겠다. 학생은 물론 그 아버지 목사님, 가족에게 마음의 응원을 보내게 된다.
(‘아이가 견뎌야 할 가장 큰 짐은 바로 부모의 무의식적인 삶이다’라는 제임스 홀리스의 말에 아프게 동의한다. 청년들 만나 상담하다보면 그들이 끙끙거리며 지고 있는 짐은 대부분 부모가 자기도 모르게 지운 집이다. 물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물며 목사의 딸, 후보자의 딸이라는 이름을 달고 대놓고 부모의 짐을 지는 것은)
몇 번째 이사인지 헤아리다 포기했다. 아무튼 오늘, 지금도 이사 중. 내 짐이 마구 풀어 헤쳐지는데 정작 내가 할 일은 없다. 조금 민망하고 마음만 분주할 뿐. 분주한데 심심한 순간이다.
그 어느 때보다 과감하게 책을 정리했다. 30년 보물처럼 끌어안고 있던 여성학 책을 정리했다. 역시나 30여 년 된 ‘기독교세계관’에도 단호하려 했는데. 나란히 꽂힌 같은 책 두 권들에 눈길이 머물어 결국 처분하지 못했다. 남편과 내가 서로를 모르고 살던 시절에도 이미 연결되어 있었다는 증표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