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8. 24. 신실누나가 줌


97. 9. 10 다 읽음

불안한 세상. 하나님의 허위와 견고한 평화


책 정리하다 표지 안쪽의 메모 들춰보는 재미가 좋다.

97년 8월에 신실 누나가 준 책을 다 읽은 종필이 저런 메모를 남겼다.

신실 누나는 종로서적에 간다는 종필에게 마침 사야할 책이 있다며 같은 책 두 권을 사다 달라 부탁했다.

두 권을 사다주니 한 권을 종필에게 줬단다.

이건 딱 봐도 작업이구만.


성공한 작업이라 더는 심장 쿵쿵거릴 일 없지만,

20년 전 20대의 신실과 종필에게 불안했던 그 세상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 시절에도 하나님의 허위를 감지했다니 맹랑한 20대였구나 싶고,

견고한 평화라니 믿어지질 않는다.


괜히 작업을 건 것이 아닐 것이다.

불안한 세대에 불안 해소의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고

차라리 불안의 바람에 흔들리고 방황하는 정직함에 마음을 빼앗겼을 것이다.


흔들리는 세대의 연인이 되어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었으니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엇 하나 번듯하게 세운 것이 없지만

그때 책 두 권을 부탁한 것은 잘한 일인 것 같다.

작업 걸기를 잘했다.

죽을 때까지 흔들리겠으나 

흔드는 바람이 거셀수록 조금씩 조금씩 평화의 뿌리는 견고해지지 싶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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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째 이사인지 헤아리다 포기했다. 아무튼 오늘, 지금도 이사 중. 내 짐이 마구 풀어 헤쳐지는데 정작 내가 할 일은 없다. 조금 민망하고 마음만 분주할 뿐. 분주한데 심심한 순간이다.


그 어느 때보다 과감하게 책을 정리했다. 30년 보물처럼 끌어안고 있던 여성학 책을 정리했다. 역시나 30여 년 된 ‘기독교세계관’에도 단호하려 했는데. 나란히 꽂힌 같은 책 두 권들에 눈길이 머물어 결국 처분하지 못했다. 남편과 내가 서로를 모르고 살던 시절에도 이미 연결되어 있었다는 증표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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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9시는 

7시에 켰던 클래식FM 라디오를 끄고,

설거지와 정리 마친 깔끔한 거실에 커피 한 잔 내려 앉아서

메시지 성경을 읽고, 기도 시간을 갖는

묵상하기 딱 좋은 시간이............었었었었었었다.


아침 9시는 

클래식FM의 새 진행자, 오래 전 세음 진행할 때보다 말이 훨씬 많아진 김미숙의 목소리 반,

식구들 목소리 반,

시끌시끌한 거실과 한 통속인 주방에서 반찬 만들기 딱 좋은 시간이다.


어쩌다 점심 도시락까지 싸들고 나가게 된 1인 사원인 직장에 가는 종필, 입시생 채윤이.

돌고래상가에서 사 온 김치가 있고, 비비고 새우 볶음밥도 있지만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으니.

한참 키가 크고 있는 현승이도 있으니. 

날날이 주부라도 반찬을 안 만들 수 없다.

그나마 가장 시원한 시간, 어차피 조용히 보낼 수도 없는 아침 9시에 반찬을 만든다.


미역냉국에 넣다 깨가 쏟아져버렸다.

깨가 쏟아져서 엄청 들어갔다.


82년생 김지영을 온 가족이 읽은 후, 

식구들이 나름대로 너도 나도 가사에 참여한다.

현승이도 밥을 하고 채윤이는 늘 설거지를 하고, 남편은 그 모든 걸 하고 허드렛일 도맡는다.

다들 그렇게 알아서 열심히 하는데도 땀 뻘뻘 흘리며 반찬 몇 가지 하다보면 짜증 지수 점점 상승.


도시락 싸들고 다들 나간 후에 마음이 고요해지면

미안함이 밀려온다.

점심 잘 먹었다는 남편 톡에 내가 얼마나 힘든지 토로하다 고백한다.

"어쩌구저쩌구 블라블라 나불나불........ 그래서 예민하게 굴었던 거야.

어차피 하는 것 이러고 짜증 내고 싶지 않은데."

돌아온 답신.


"그러면 수고한 줄 몰라. 고마워 하지도 않아. 정신실은 완벽해."


그 짜증을 수고로 번역하여 다 받아주시니 이 사람, 참! 참으로 참한 사람, 착한 사람.

착한 남편과 주고 받는 메시지에 깨가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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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 때문에 잠을 자도 자는 게 아닌 밤이다.

환경의 영향을 직방으로 받아 감정이고 행동이고 널을 뛰는 나는 안방-거실, 침대-소파를 오가는 밤이다.

잠결에 에어컨을 틀었다 껐다, 스마트폰을 들어 뉴스를 봤다 말았다 하는 밤이다.


새벽이 되어야 더운 공기도 진정이 되고 나도 진정이 되는 것 같다.

5시쯤 되면 제대로 잠을 자기 시작한다.

침대에 안착하여 제대로 잠이 들기 시작하는데 '끙끙' 본능적으로 안 듣고 싶은 소리가 들린다.


눈을 반만 뜨고 보니 죽은 듯 자던 남편이 일어나 엎드려 끙끙거린다.

여보, 아파?

아니야. 가슴이.....


'아니야'까지만 접수하고 잤다.

잠이 들자 꿈이 널을 뛰었다.

잠들기 직전에 회피한 것을 꿈이 정직하게 이어 받았다.

남편이 죽을까 봐 두렵다.


신혼 초, 내가 정말 김종필과 결혼 했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할 때 매일 걱정하고 매일 확인했다.

김종필, 죽으면 안 돼! 죽어도 죽으면 안 돼!


가장 사랑하던 남자를 죽음으로 잃어버린 여자의 병 짓이다.

가장 행복하던 순간에 행복을 빼앗긴 자.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중학교 1학년 12월.

그 12월의 1일, 일기는 이렇게 시작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행복이 극에 달했던 신혼 초, 그 트라우마가 되살아 와 매일 확인했다.

그럴 때마다 '죽음'은 입에 담지도 말라고 김종필이 화를 냈다.

그럴 때마다 '아, 당신은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모르는구나,

입에 담지 않는다고 피해지지 않아. 당신은 죽음을 모르는구나.'

좌절했다.


2011년. 

아버님과 한솔이를 한 달 사이에 잃은 남편은 비로소 죽음을 알게 된 듯 했다.

2012년 봄, '죽음을 짊어진 삶'이란 글을 쓴 남편은 나보다 한 걸음 앞서게 되었고 든든한 사람이 되었다.


오늘, 써야 할 원고가 두 개.

집중하고 싶었다.

식구들이 모두 나가자 얼른 정리하고 늘 드리는 '향심기도'부터 시작했다.


향심, Centering prayer인데.......

한 곳으로 향하지 않는 마음으로 침묵 가운데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다

입을 열었다. 예상치 못한 말이 방언처럼 터졌다.

 

주님, 노회찬 의원 돌려주세요. 이럴 수는 없어요!

그리고 바로, 

'주님 채윤이 아빠 죽으면 안 돼요. 죽음이 얼마나 가까운지 알지만 저는 견딜 수 있지만

채윤이와 현승이 좀 봐 주세요. 저처럼 아버지 잃은 상실감에 청소년기 보내지 않게 해주세요'


향심기도 드리다 중간에 포기한 것 처음.

그러다 밑도 끝도 없는 기도가 터져나온 것도 처음.

이게 내 본 마음인 것은 자명한 일.


한참 기도하다 눈물 끝에 웃음이 좀 났다.

가장 행복한 때에 사랑을 잃는 법이니, 다소 불행한 지금 사랑을 잃을 리 없을 거야. 

이럴 때가 아니고 원고를  쓸 때지!


원고, 채윤이 입시, 선교 여행 가 있는 현승이, 설교 준비하는 종필,

마음에 살아 있는 여러 벗들을 떠올리며 기도하다 눈을 떴다.


-----------


김종필, 죽어도 죽지마. 

죽으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

라고 했더니,

알았어. 당신한테 죽으면 두 번째 사망이야? 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에 빼앗기는 일은,

내가 죽은 자처럼 사는 것과 같다.

두 번째 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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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식사 한 번 하시자고 조르고 졸랐다.

몇 달 졸라 허락하시더니 결국 저녁식사 후 잠깐 들러 차 한 잔이다.

시 또는 기도문 한 편을 써오셔서 낭독하셨다.

딱 한 시간 앉아 계시다 일어서시며 폐를 많이 끼쳤다 하셨다.




현승이 왔구나,

이름을 불러주시고 흰 편지봉투를 쥐어 주셨다.




사랑하는 채윤아,

교회에선 늘 무섭게만 보이는 장로님께서 

제 이름을 기억하고 다정하게 부르며 쓰신 편지에 감동 크게 먹은 채윤이다.



생은 어쩌면 이렇듯 기대와 다른, 예상을 빗나가는 만남과 위로투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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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오전, 느릿느릿 하루 스케쥴 짜는 중 띵똥띵똥 전화가 왔다. 

갑자기 생긴 점심 약속으로, 일사천리 스케쥴이 정해졌다.

정겨운 식사와 커피타임까지 마치고 자동차 바퀴 굴러가는대로 드라이브를 한다.

중미산, 채윤이 가졌을 때 휴양림 놀러갔다 야호 대신, "푸으르으마아!!!" 고래고래 외쳤던 곳.

양수리, 문 닫기 직전 클라라 커피에 들러 커피를 샀다.





퇴촌을 거쳐 광주로 돌아 집으로 가자, 가자, 가자 하다 습지 공원을 하나 만나 들어갔다.

우연히 찾아들어간 공원에서 예기치 못한 기쁨을 만나고 찰칵찰칵 사진도 많이 찍었다.

생태습지 걷자니 매일 걷는 율동공원이 인위적이라고 느껴진다.

지는 해와 푸른 숲, 새소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 종합선물인데!!!!





그가 배경이 되고 내가 찍는 셀카에서도 그는 나를 봐야 한다. 나만 봐야 한다.

여보, 이거 좀 한 번 읽어봐바. 여보, 이거 같이 하자.

그리고 스포트라이트는 나만 받기. 




그가 찍는 셀카에서 나는 길가의 꽃과 나무처럼 있으면 된다.

자기를 보라 하지도, 자신에게 맞추라 하지도 않는다.

금계국 한 송이에 내려앉은 열일하는 벌과 노는 것으로,

내 하고픈 일을 하고 나 자신이 되는 것으로 족하다 하니. 그의 인생 배경되는 것, 쉽고 가볍지 아니한가.




점심에 만난 선배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솔직히 보수적이야. 나는 연상연하 커플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남자가 나이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너희 커플을 유일하게 괜찮아. 내가 봤을 때 너희는 괜찮아.

사실 너희 결혼할 때는 마음에 들지 않았어. 딱 하나 나이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런데 지켜보니까 너희는 괜찮아.

내가 보수적인 사람이라 생각이 바뀐 건 아냐.

우리 딸들 연하를 데려온다면 반대는 할 수 없지만 환영은 안 해. 그래도 너희 커플 만큼은 괜찮아"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자꾸 들으면 괜찮다는 바로 그것도 괜찮아지고

존재까지 괜찮아지는 느낌이 든다. 

천상병 시인의 산문집 제목처럼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괜찮다는 말의 치유성은 지금으로 족하다는 의미 때문일 것이다.

지금과 다른 어떤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는 압력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충분하고, 당신으로 충분하다는.




이십 여년 전 추억을 떠올리며 마음이 몽글몽글,

아팠던 과거를 떠올리며 목에 핏대가 섰다가,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 싶어 뭉클하다.





여보, 내가 시 하나 읽어줄게.

싫어.

나도 싫어. 읽어줄 거야.

석양 옆에 끼고 돌아오는 길에 읽었다.




못 들어선 길은 없다_ 박노해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슬퍼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삶에서 잘못 들어선 길이란 없으니

온 하늘이 새의 길이 듯
삶이 온통 사람의 길이니

모든 새로운 길이란
잘못 들어선 발길에서 찾아졌으니

때로 잘못 들어선 어둠 속에서
끝내 자신의 빛나는 길 하나
캄캄한 어둠만큼 밝아오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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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가고 그는 들어오는 길에 마주쳤다.

저기 느릿느릿 걸어오는 기다란 그의 몸땡이가 보인다.

손에 든  늘 제 몸처럼 붙어 있는 한 두 권의 책, 그리고 검은 비닐봉지가 멋 없이 흔들린다.

검은 비닐봉지든, 반짝반짝 쇼핑백이든 손에 든 그것들은 약간 설레게 하는 것들이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작은 비닐봉지에 꽃 화분 세 개가 미어 터지게 들어 앉았다.

참말로 담긴 품새가 멋이라곤 없다.

나도 지나치면 봤는데 교회 앞에 꽃 파는 트럭이 서 있었다.

나도 좀 살까 했는데, 차를 세우기가 뭐해서 그냥 들어왔다.


밤늦게 들어와 친구가 만들어준 도자기 화분에 꽃 포트 세 개를 꽂으려 각이 나오질 않는다.

색이 조화롭거나, 크기가 알맞거나 해야 하는데 도통 어우러지질 않는다.

이렇게 막 고를 수도 있나, 부조화를 컨셉으로 선택한 것인가?

주일 아침 일어나 다시 한 번 이리 만지고 저리 만져보지만 안 되겠다.


글을 읽고 쓰고, 논리를 만들어 내고, 지식을 정돈하는 일에는 진화된 사람.

멋을 부리고, 폼을 잡고, 자기를 드러내는 일로 가면 다섯 살 아이 같다

공평함의 덕, 객관적 판단의 덕이 차고 넘치는 사람.

그것을 나는 얼마나 버거워 하고 차겁게 느꼈던가.

빈말로라도 편 한 번 들어주면 될 텐데, 그걸 못해서 내게 받은 구박과 설움은 말할 수 없다.


반면, 간섭하거나 강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그의 태도는 내게 너무 좋은 약이 되기도 했다. 

엄마의 폭풍 잔소리와 간섭으로 형성된 나의 아픈 그림자를 치유하는 힘이 되었으니.

그저 그의 마음 생김새가 내게는 선물이 되었다.


피차에 타고 난 모양으로 서로에게 선물이 된 지점이 있다.

MBTI든 에니어그램이든 어떤 성격유형을 갖다 대도 정반대 성향을 가진 한 쌍의 바퀴벌레.


애초 생겨먹은 모습과 태도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시도로 서로에게 다가갈 때가 되었다.

그것을 중년이라 부르고, 

인생 제 2막이라 부른다.

싸구려 꽃 화분을 구겨 넣은 검은 비닐봉지 든 손에 뭉클하다.

잘 다루는 글이 아니라, 평생 '객관성'에 사로잡혀 거리 두고 싶었던 것들에 다가가는 모습.


꽃을 든 이 남자, 이 남자의 서툰 몸짓,

자기를 넘어서는 미미하지만 큰 변화를 기리는 부활절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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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4년차, <복음과 상황>에 'JP&SS의 사랑과 책'이란 꼭지로 남편과 함께 신혼일기 비슷한 것을 연재했다.책 얘기 반, 투닥거림 반 주거니 받거니 썼다. 몇 년 후에 단행본으로 묶어서 출간한 것이 [와우결혼:와서 보라 우리의 결혼을]이다. 연재를 계기로 여기저기 강의에 초청 받게 되었다. 처음엔 연재한 글처럼 남편과 함께 다니곤 했는데, 워낙 마이크 잡는 것을 싫어하고 동시에 두 가지를 할 수 없는 사람이라 서서히 뒤로 빠지고 말았다. 그렇게 시작하여 나는 본업 음악치료를 거의 접고 강의하고 글 쓰는 일로 살고 있다.


6주 강의로 교회 젊은 커플들과 함께 남편과 함께 결혼 세미나를 진행한다. 가끔 여러 회기의 연애 강의에 비싸게 구는 남편을 구슬러 같이 하기도 했지만 둘이 함께 이끄는 세미나는 처음이다. JP&SS의 결혼 세미나 론칭이다. 책 제목이 [와서 보라 우리의 결혼을]인 것은 가끔 행복하고 자주 갈등하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를 보라는 뜻이었다. 연애와 결혼에 관한 한, 신뢰하는 선배 부부와의 관계에서 배우는 것이 제일이라 생각한다. 또래 커플들과 솔직하게 대화하는 것도 스스로를 비춰보고 객관화 하는 좋은 거울이 된다. SNS에 올리기만 좋은, 잘 포장된 부부가 아니라 함께 하는 일상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끌어 안는 관계가 관건이다. 딱 이런 생각을 담은 세미나로 계획하고 있다.


강의는 최소화 하고, 각 커플의 사는 얘기를 더 많이 나누려 한다. 오늘 첫모임 시작하며 '우리 커플 어떻게 만나고, 프러포즈 했는지' 나누는데 빵빵 터지는 즐거움이었다. 첫 만남과 고백의 기억을 꺼내보는 것은 오늘의 사랑을 지속시키는데 유익하다. 처음 이 사람에게 빠져들었던 그 매력을 확인해보는 것도 마찬가지. 결혼 19년 차가 되었는데도 다른 커플의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롭게 재미있다. 제 방에서 참석한 부부의 아가를 봐주던 열아홉 딸이 '사이사이 듣는데 처음 만난 얘기들 너무 재밌어. 나도 계속 듣고 싶다' 했다.


커플이든 개인이든 포장지 조금 벗겨내고 가슴을 열고 만난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참으로 흥미로운 존재, 가르침을 주는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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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강의가 있어서 1박2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일타쌍피의 효율을 좋아하는데다, 늘 재미와 신나는 걸 꿈꾸는 닝겐으로서 여러 가지를 엮었다. 일단 홀로여행을 꿈꾸는 채윤이를 여행에 끼웠다. 혼자 여행 가고 싶다는데 미성년자 딸을 혼자 보낼 수는 없는 터에 이거다! 오가는 기차만 같이 타고 나머시 시간을 혼자 보내도록 했다. 덕분에 나도 저녁에 강의를 마치고 강사 숙소에서 혼자 하룻밤 보내고 부산 하루 여행을 즐겼다. 해운대로 내려간 망원동 우리 맘을 만나기로 했다. 광안리 어느 카페에서 만나기로 해서 일찍 가 앉았는데 수 년 전 가족여행이 떠올랐다.


2011년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마어마한 해였다. 여러 일을 겪고, 무엇보다 6월에 아버님을 천국에 보내드리고 중대결심을 했다. 늘 막내 아들 먹고 살 걱정을 하시던 아버님 편히 보내 드렸으니 할 수 있었던 결정이었다. 늦은 여름 휴가를 부산으로 갔다. 그해 1월 아버님의 마지막 여행이 부산었고, 숙소가 광안리였다. 그 여행에 함께 하지 못했지만 그저 할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으로, 할아버지가 묵으셨던 그 숙소에서 일박하고 싶어서 그리 결정한 것이다. 


2018년 1월 17일. 혼자 광안리 카페에 앉아 있자니 격세지감이 밀려오던 차. 카톡에 사진이 하나 들어왔다. 혼자 국제시장 근처에 있던 채윤이의 점심 메뉴가 띡 올라왔는데 '돼지국밥'이다. 2011년 그냥 어렸던 채윤이가 혼자 돼지국밥 먹는 청년이 다 되었다. 아, 그러고 보니 현승이도 1월 한 달 집을 떠나 있다. 아, 그러고 보니 네 식구가 각자 다른 공간에 흩어져 밤을 보낸 것이 처음이다. 블로그의 옛날 글을 들췄다. 아, 열심히 써댄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가. 7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변한 것, 변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이 흘러가고 있다.



부모, 폭탄선언을 하다_2011년 휴가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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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당신은 앞으로 새로 산 이 통에 넣기만 해. 

음식 쓰레기 나오면 여기에 넣어. 쓰레기 봉지에 담고 치우는 건 내가 할게.

그냥 여기에 딱 버리고, 밑에 있는 음쓰 봉투에는 손대지 마. 알았지?


어머, 뭐야 뭐야. 아침부터 '꽃길만 걷게 해줄게' 영화 찍는 거? 나 사랑받는 여자야?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의 저자가 이름 값 못하게 만드는 주방의 구조와 환경이었습니다. 

싱크대 앞에서 설거지를 할 때면

앞으로 자꾸 꼬꾸라지는 수전 때문에 쌓이는 스트레스로 지옥문이 열릴 지경이었지요.

좁은 주방, 보기 드문 오래된 낡은 싱크대이지만 옆으로 난 창문이 있기에,

그 창으로 멀리 불곡산이 보이고, 해질녘에는 노을빛이 쏟아지곤 하기에,

창틀에 작은 화분을 두고 키우는 맛으로 근근이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을 유지하고 있는데

고정 안 되는 수전은 정말!


이렇게 손 대보고 저렇게 만져보던 남편이 '사람 불러야 돼' 하는 말도 집어 넣고 직접 해결했습니다.


'당신은 전문 연애강사도 아니고, 에니어그램 전문가도 아니고, 전업 작가도 아니고

일상 전문가야! 정신실은 일상 전문가!'

평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었으니 일상 전문가의 주요 연구실 환경의 열악함에 적잖이 신경이 쓰였을 테고.

손수 수전을 갈아 끼우더니 불편한 쓰레기통도 개비, 음식쓰레기 처리 방식도 바꿔놓았습니다.

그렇게 며칠 주방환경 정비에 혼신을 다하더니 급기야 오늘 아침의 감동 발언입니다.

[나의 성소 싱크대 앞] 저자의 자격 있는 남편 같으니라구!



여보, 당신은 앞으로 새로 산 이 통에 넣기만 해. 

음식 쓰레기 나오면 여기에 넣어. 쓰레기 봉지에 담고 치우는 건 내가 할게.

그냥 여기에 딱 버리고, 밑에 있는 음쓰 봉투에는 손대지 마. 알았지?


어머, 아침부터 '꽃길만 걷게 해줄게' 영화 찍어? 

나 당신의 애기! 나 사랑받는 당신의 애기! 아, 나는 사랑 받는 여자!

(감동감동, 황홀황홀)


뭔소리야. 당신이 음쓰 봉투에 손대면 여기저기 묻히고 더러워져서 안 되겠어. 

(손으론 부지런히 쓰레기 정리하는 중)

(버럭) 아놔, 진짜 이거 누가 재활용 분류 안 하고 여기다 넣었어. 당신이야? 진짜, 정신실.

앞으로 음쓰 봉투에 절대 손대지 마.


야! 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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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휴가를 다녀왔다.

몇 년은 '휴가' 아니라 '피정'을 다녔었다.

일주일 쉬는 것은 같은데 어디서는 '휴가'라 부르고 드물게 '피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어차피 쉬는 것은 같으니까 그게 그것이기도, 말은 단지 말이 아니니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딱 일 년 전, 둘이 다녀왔던 '인생 피정'을 복기하고

아이들 어릴 적 함께 했던 여행들을 추억하며

여러 번 계획을 바꾸다 결정 또는 지른 것이 제주 가족여행이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여행을 가면 더욱 너그러워지는 아빠, 또는 남편.

견주어서,

평소에도 그렇지만 어딜 나가면 더욱 잔소리가 많고, 쪼잔해지고는 엄마, 또는 아내.

넉넉한 아빠를 누리는 아이들을 은근히 질투까지 하는 엄마 또는 아내는

의문의 일패, 이패, 삼패를 당하다 왕따를 자처하여 '스따'가 되기도 한다.

가진 어둠이 많은 엄마는 늘 그렇다.

통과의례처럼 지나는 감정에 이름 붙이고, 흘려 보내야 비로소 칠렐레팔렐레 에헤랴디야 제대로 놀기가 시작된다.



제주도는 숲이지.

여행은 걷는 거지.

는 엄마 아빠 생각이고, 중2는 그러려면 나를 왜 데려왔냐!이다.


좋아, 비자림, 사려니숲, 곶자왈...... 나도 걷고 싶어.

 흔쾌히 따라나서는 딸은 다 컸네, 다 컸어.

하긴 검정고시 합격하여 당당한 고졸이 되었고, 곧 민쯩도 나오니 다 컸지.




결국 중2는 숲을 걷는 대신 비자림 입구 카페에서 혼자 영화를 보기로 했다.

차에서 보겠다는 걸 '영화 보다 더워서 죽는다' 설득하여 아이스티 한 잔 사주고 카페에 집어 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헤어지고 10분 띠리링 문자 메시지가 왔다.

'엄마, 나 그냥 차에서 있을래. 안 더워'

도대체 왜? 그 시원하고 편한 카페를 두고 땡볕 아래 찌는 자동차 안?

이유는 하나다.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서 쪽팔려서'

카페에 들어온 사람, 길을 걷는 사람, 세상의 모든 사람이 '너님'에게 1도 관심이 없단다.

이걸 납득시키려다 속에서 천불이 나는 블랙홀에 빠지고 말테니 입을 닫자. 




하긴 중학교 입학식에서 '단지 사진 찍었다'는 이유로

그래서 쪽팔린다는 이유로입이 댓발 나왔던 딸이 폰카를 붙들고 살고 있지 않은가. 

사춘기 블랙홀, 걱정할 일은 아니지.

이~이리 오너라 앞태를 찍자,

저~어러리 가거라 뒷태를 찍자,

들이대거라 셀카를 찍자.

우리 딸은 사진 100장 찍어 한 장 건지는 것으로 행복한 여행이다.

  


아, 사진 얘기가 나왔으니 고발하고 지나갈 일이 있다.  

중딩은 벌써 개학을 했고 학기 중이다. 해서 '체험학습'을 내고 합류한 여행이다.

(이걸 결재하며 또 얼마나 뻣뻣하게 굴던지!

이유는 친구들 다 등교하는데 학교 한 가는 것이 튀니까,

튀는 건 쪽팔리니까!)

체험학습 보고서를 써야 하고, 거기엔 꼼꼼하게 사진을 붙여야 한다.

이 중2가 삐딱하게 굴다가도 간판만 보면 '나 사진 안 찍어?' 하고 차렷자세로 선다.

이 국회의원 같은 놈을 보게! 




비행기 시간 기다리며 공항 근처를 맴도는 마지막 날 오후에는 해변의 카페다.

꺼내 놓은 책들을 보니 책 제목으로는 임자 찾기기 쉽지 않다.

음료 종류를 살피는 것이 더 빠르겠다.

그러고 보니 마법천자문, 메이플스토리, 슈가슈가 어쩌구저쩌구...... 하는 책들이 눈앞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책만 보면 성인 넷이구나.

우리가 이렇게 되었구나.

이렇게 커버린 아이들을 두고 자꾸 어릴 적 추억만 떠올리며 그리워 한다.

어린 아이 취급하며 잔소리 하는 엄마, 아직 '어제'를 살고 있는 엄마를 좋아할 리가.

유유유.



꿈같은 시간 보내고 돌아왔다.
삼 시 세끼 밥 할 걱정
없는 시간이었다.
거실 탁자에 소국 화분 하나가 우리를 기다린다.
지난 주일 쭈네 가족이 우리 교회 예배 드리러 오며 들고 온 것이다.
화분이 너무 예뻐서 이걸 두고 휴가를 가기가 아쉽다며 물 듬뿍 주고 아쉬운 발걸음을 했었다.
쭈가 미리 들고 온 가을이, 가을바람이 기다리고 있는 일상이다.

여름의 끝을 잡고 충분히 놀았으니
떠나야 할 여름 떠나게 두고
코앞에 다다른 가을을 온전히 받아들여 살아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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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 마법학교 강의실은 아니다. 빨간 물은 그냥 허브티, 파란 물은 블루 레모네이드, 검정 물은 독극물 아니고 커피일 뿐이다. 저녁 먹고 야근 출근하는 남편이 '수요 성경공부 종강' 날이라며 커피 배달 안 되냐고 했다. 일 잔당 천 원씩 쳐주겠다니 남는 장사이긴 한데..... 어르신들이 밤에 무슨 커피를 드셔? (딱히 커피로 밤잠 못 주무실 어르신들은 아니지만서도 일단 연배가 높으시니)  그리고 나 피곤해..... 일단 튕겨는 보았다. 


말에 신중한 사람이라, '커피 해줄 수 있어?' 말로 나왔을 때는 백 번 생각한 것일 테니 응해주고 볼 일이다. 야밤에 커피는 좀 그렇다 싶고. 다른 음료가 없을까 생각해 보니, 현승이랑 장보면서 산 저칼리 블루 레모네이드가 있다. 시원~한 푸른 색이 일단 좋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강의 하고 선사 받은 허브티의 붉은 색도 있다. 청홍의 조합이 딱이네! 여기에 생각이 마치자 소파에 달라붙어 있던 몸에 힘 빡 들어간다. 끌어안고 있던 쿠션 집어 던지고 급히 빨간 약과 파란 약을 조제하였다.


그리고 우리 특급 도우미 채윤이. 힘이 세서 무거운 것 잘 들어, 엄마 닮아 이벤트 좋아해, 이런 채윤이와 함께 배달에 나섰다. 콩알 만 한 쿠키도 가져갔는데 옥수수 쪄오신 집사님 계셔서 짧고 가볍게 풍성한 시간을 보내고 왔다. 


커피 내리며 채윤아, 사진 찍어! 했더니. 엄마 또 블로그에 '커피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올릴 거지?' 한다. 눈에 힘 딱 주고 '아니, 커피 어쩌구 저쩌구 하지 않을 거야. 이 사진 제목은 영부인 따라잡기야.'라고 했다. 그렇다. 이 포스팅의 주제는 대외적으로 '김정숙 여사 코스프레'로 하겠다. 실은 두어 주 전 금요일에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대학 친구들과 일박 여행을 작당한 날이었다. 한참 전부터 정해진 약속 날인데 남편이 '사랑방(구역)모임 종강파티'를 한다며 커피 안 되겠냐고 했다. 당연히 안 되지!


친구들 일박 숙소가 여차저차 하여 에버랜드 근처가 되었고, 이러쿵 저러쿵 끝에 다섯 명 완전체로 모이는 시간이 밤이나 되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요리조리 머리 굴려보니 에버랜드에서 교회까지 달리면 20분인데다 아침부터 가장 성실하게 풀타임으로 놀며 운전수로 몸도 바쳤기에 저녁시간 잠시 나왔다 들어가도 되겠다. '그래, 여보. 커피, 콜!' 하고 받았더니, 같이 노래도 하자, 잠시 게임도 인도해라 요구 사항이 많아졌다. 한 학기 수고하신 사랑방장(구역장)님들 위로하는 의미로 모든 프로그램을 혼자 준비하려고 한다니. 목사의 마음이 갸륵하여 허락했다. 핸드드립 하고, 율동도 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듀엣도 했습니다. (네네, 목사 부부가 특송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불렀습니다. '그대 고운 목소리에' 시작하자마자 아멘, 아~아멘! 은혜 충만이었습니다.)


미션 클리어 하고 그제야 다 모인 친구들에게 달려갔다. 칭찬쟁이 친구 하나가 '신실아, 너 김정숙 여사 같애.' 뭐라고? 김정숙 여사라고라? 다짜고짜 기분 좋은 이 말, 가슴에 품어두었던 것이 확실하다. 게다가 그날 낮부터 만나 놀던 친구가 내가 신을 쪼리 예쁘다 예쁘다 해서 줄까? 하고 벗어준 터였다. 세상에! 다음 날 친구들과 헤어져 집에 와 뉴스 보는데 우리 김정숙 여사님, 미쿡 가셔서 예쁘다 예쁘다 하는 말에 옷을 벗어주고 오셨더라. 아, 나는 진정 분당의 김정숙 여사로구나! 그렇구나! 셀프 감동, 셀프 추앙이었다. 혼자 김정숙 여사처럼 웃어보았다. 오호호호호호홍....... 라면이라도 먹고 가야지. 종피리 너 나랑 결혼 할 거야, 말 거야. 빨리 말해!


영부인이라서, 오직 남편에게 맞춘 역할로서의 행동만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한다. 역할에 맞춘 연기로서의 삶에는 '기쁨'이란 없는 법이다. 기쁨 없이는 '자발성'도 없다. 기대역할에 부응하려는 동기가 없지 않겠지만 내 나라, 내 민족, 민주주의에 대한 개인적 열망과 사명감이 없을까. 나는 김정숙 여사의 예측불허 미담행보를 그렇게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의 남편, 우리 이니님이 평생 보여준 삶에 대한 신뢰도 자발성과 기쁨의 원천일 것이다.


내조니 외조니 하는 말이 와닿지 않을 뿐더러 가끔 거부감까지 느껴진다. 무엇이 안쪽의 도움이고 누구의 도움은 바깥의 도움인가? 내가 밖에서 하는 강의와 쓰는 글을 시니컬하게 비평하고 검증해주는 그의 도움은 내조인가? 외조인가? 그가 안방에서 설교준비 하는 동안 집안을 고요하게 만들고, 간식을 챙기고, 거실에 앉아 기도하는 마음으로 돕는 것은 내조인가? 외조인가? 믿음이 가는 사람이 하는 일에 도울 일이 있다는 것이 기쁠 뿐이다. 엄밀히 따지면 그의 일도 아니다. '내 공동체, 내 교회'의 일이다. 해리포터, 아니 파파스머프의 발명실에 있을 법한 빨간약과 파란약을 발명한 여름 밤, 보람과 기쁨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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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의 더위는 언제 끝나나? 여름 내 여름의 끝을 기다리지만 막상 보내려면 아쉬운 이유가 있었다.

더 이상 수박을 먹을 수 없다는 아쉬움은 더위와 싸우지 않아도 되는 안도감의 크기와 막상막하였다.

('이다' 아니고 '였다'임)

수박을 향한 열정이 서서히, 인식도 못할 만큼 식어가고 있었다.

오늘에야 식어버린 수박 열정에 대하여, 그 이유에 대하여 깨달음이 온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도 수박 한 통을 사서 나르는 일이 버겁다고 느꼈지만,

이젠 수박 들고 집 계단을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아 살 생각을 못한다.

돌쇠 1,2,3이 함께 장을 봐줄 때 한 통씩 또는 반 통씩 사기도 하지만

계단 등반에 성공하여 싱크대 앞까지 운반했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이 무겁고 딱딱한 놈에 칼을 집어 넣어 반으로 가르고, 먹기 좋게 썰어서 통에 담아 놓기.

계단 오르는 일이 다리의 수난이라면 썰기는 팔목의 노역이다.


팔 다리의 힘이 노역에 부응하지 못한 탓으로 수박 먹는 즐거움을 알아서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한 5년, 삼시세끼를 밖에서 해결하는 베스트 허즈밴드로서 아내에게 최상의 가사 복지를 제공했던 그가,

그랬던 그가! 삼시세끼를 집에서 먹는 三食이 세끼 님이 되신 것이다.

심지어 지병을 하나 얻으셔서 빵이나 씨리얼도 아닌 섬유소 많은 반찬에 국에 밥을 챙겨 드셔야 하는......

그러니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은 땀뻘뻘 '체험 삶의 현장'이 되었다.

수박의 단물이나 빨던 시절은 다 지나간 것.


착한데다 아프고, 아픈데다 내게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삼식이 남편을 미워 할 수도 없네 그려.

돌덩이 같은 수박 한 통이 싱크대 위에 오른 어느 날, 삼식이 남편에게 칼자루를 쥐어 주었다.

도저히 내 힘으로 칼을 꽂을 수 없으니 힘 좋은 삼식이 돌쇠께서 어떻게 좀 해보라고.

그날 이후로 삼식이는 수박 썰기에 취미를 붙였다.

크기와 두께 딱딱 맞춰서 썰어 내는 것이 나름 적성에 맞고 신나는 모양.

애들은 적응이 참으로 빠르다. '아빠, 우리 수박 먹으면 안돼?' 칼자루고 아빠 쪽으로 간 것에 금방 익숙해졌다.


저녁식사 마지막 숟가락들을 놓는데 삼식이 아빠가 뭔가 앞북 치는 느낌으로

'과일 뭐 먹을까? 살구 먹자. 살구! 수박은 내일 먹자'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데, 발연기 일인극 쩐다.

(어리숙한 꼼수쟁이 가트니라구!)

얕은 꼼수에 대한 응징으로 관객은 엊나간다. 나는 수박, 나도 수박, 아빠 수박 썰어줘.

발연기 꼼수 실패로 칼 잡은 김에 수박 예쁘게 썰더니 아티스트로 변신하여 작품을 내놓았다.

작품의 모티브는 현승이 얼굴,

제목은 [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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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시작마다 '지난 한 주를 지내며 지은 죄를 회개'하는 시간이 있다. 몇 주째 같은 내용의 기도이다. 그 시간, 회개의 자리에서면 비로소 생각나는 죄목이다. 지난 주에는 그 반복 패턴이 인식되어 화들짝 놀랐다. 반복하는 회개가 참 회개인가!  '다시 그러지 않겠습니다. 아니, 이러고도 다시 그럴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기도했다. 남편을 강압하려는 욕구, 남편을 통제하지 못해 안달하던 분노가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음을 인식한다. 맨 앞자리 앉은 남편의 뒷통수를 바라보는 것이 아프고도 슬프다. 기도의 자리에 서서 주님 얼굴 앞에 서면 차거운 분노로 딱딱해진 내 깊은 마음이 드러나고 만다.


매일 아침 남편은 큐티 본문에 따라 짧은 묵상글을 교우들에게 보내곤 한다. 지난 주 어느 날에는 이현주 목사님의 글을 인용하여  '슬프고 착하게 한세상 살다가고 싶다'고 했다. 허세 부릴 줄 모르고, 강압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이미 충분히 착하여 충분히 슬픈 그의 삶이 내겐 너무 아프다. 둘을 알면 하나 정도 안다 하고, 하나를 알면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며 자기를 감추고 또 감추는 이 사람을 자꾸 다그치게 된다. 목회자들 앞에서 '진실한 나'로 사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강의한 적이 있으면서 정작 남편의 진실함, 진실함의 댓가로 슬픔 가득한 얼굴을 보는 것은 힘겹다.


교인들은 설교 중 적절한 타이밍에 '아멘'을 외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남편은 설교의 논조를 우~ 몰고 가다 아멘이 나올 클라이막스에 몰고 힘을 탁 꺾어버린다. 분위기로 아멘을 조장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그러는 걸 안다. 토요일 저녁이면 여느 목사가 그렇듯 설교를 놓고 씨름 한다. 밥 먹고 하는 일이 마음 들여다 보는 일이라 아무 말 안 해도 그의 내면의 전쟁터가 보이는 것 같다. 아멘을 조장하지 않지만 깊은 곳의 아멘을 끌어내고자 하는 그의 높은 기준을 나는 안다. 남편은 사람들을 통제하지 않으려 하는데 나는 남편을 통제하려 한다. 치얼업 베이비, 치얼업 베이비. 좀 더 힘을 내!! 응원이 아니라 강압이다. 설교는 물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강압할 줄 모르는 남편에게 '강압하라'고 나는 강압한다.


그것을 회개한다. 진실해지려는 그를 진실하지 말고 허세를 부리라고 강요하는 내 못된 강압을 회개한다. 지난 주에 '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기도했다. 오늘 토요일, 남편이 채윤이에게 '서현역에 가서 책 하나 사다줘' 빌듯이 부탁을 한다. 채윤이는 지금 알바로 바쁜 아이. 설교준비에 필요한 책인가? 싶어 내가 사다주겠노라 했다. 그건 아니고 꼭 읽고 싶은 책이 있단다. 어차피 밤새 설교준비 해야 할 텐데 책 읽을 시간이 어딨어? 알라딘에 주문해줄게. 했는데 아니란다. 간절함이 마음으로 다가와서 기꺼이 책을 사러 나갔다. 도종환의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않는다>이다. 요즘 도통 책이 읽히질 않는데 이 책은 읽힐 것 같단다. 걸어서 걸어서 서현역에 다녀왔다. 오는 길에 하도 다리가 아파 중간에 마을버스를 탔다. 도대체 무슨 책이야? 책을 펼쳐 서문을 읽었다. 읽다가 눈물이 터져 교회 앞 공원을 울며 걸어왔다. 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서문 일부를 한 땀 한 땀 쳐보기로 한다.  남편을 향한 참회록이다. 내일 주일 예배에서 드릴 회개기도를 미리 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의 삶, 나의 시>   도종환


나는 권세 있고 유복하고 많이 배운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선한 심성을 불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마웠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와 떨어져 친척 집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 싶어 편지를 자주 썼습니다. 편지 앞에 계절 인사를 쓰기 위해 바람과 별과 구름과 계절의 변화를 민감하게 살폈고, 그래서 자연을 섬세하게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난해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참고서 한 권을 사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문제집을 풀고 있을 때 매일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책을 읽었습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을 때, 내가 원하는 대학을 가고 싶다고 말하면 보내줄 수 있는지 상의할 부모가 옆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등록금이 면제되는 지방 국립사범대학에 진학했고, 화가가 되고 싶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 좌절이 문학으로 방향을 틀게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내 문학을 밀고 가는 가장 큰 힘은 좌절입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틀 속으로 들어가기보다 새로운 것을 만들고, 도전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눈 밖에 나고 미움과 따돌림을 받았지만 도전하고 깨지고 다시 시작하던 열정이 있어서 청춘의 날들을 뜨겁게 보냈습니다.

나는 뛰어난 실력이나 재주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눈에 띄는 특별한 인물이나 앞서가는 사람도 아니어서 나를 눈여겨봐주는 이들도 없었습니다. 이른 봄에 피어 사랑받는 봄꽃은 아니지만, 가을 들판의 구절초처럼 늦게라도 혼자 꽃피고자 했습니다. 늦게 꽃피어도 오래오래 아름답고자 했습니다.

(중략)

아직도 내 시를 제대로 된 문학으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평론가와 문인이 많다는 걸 압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약점과 부족한 점이 내 시에 있다는 걸 나도 압니다. 그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입니다.

나라고 왜 흔들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꽃들이 그러하듯 흔들리면서 꽃을 피우는 겁니다. 흔들리다가 제자리로 돌아와 꽃 한 송이를 피우듯 그렇게 살았습니다. 
살면서 수많은 벽을 만났습니다. 어떤 벽도 나보다 강하지 않은 벽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벽에서 살게 되었다는 걸 받아들이고, 벽에서 시작하는 담쟁이. 원망만 하지 않고, 쉽게 포기하지 않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잎을 찾아가 손을 잡고 연대하고 협력하여 마침내 절망적인 환경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꾸는 담쟁이처럼 살기로 했습니다.
가난과 외로움과 좌절과 절망과 방황과 소외와 고난과 눈물과 고통과 두려움으로부터 내 문학은 시작되었고, 그것들과 함께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것들이 없었다면 나는 시인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 많은 아픔의 시간을. 거기서 우러난 문학을. 나의 삶, 나의 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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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전, 혼수로 마련한 그릇 세트가 있다. 신혼집 그릇으로는 조금 올드했으나 딴에는 멀리 내다본 선택이었다. 결혼 1, 2년 살 것도 아니고. 시간이 가도 질리지 않는 스타일이 좋겠다 생각했다. 아직도 질리지 않고 잘 쓰고 있으니 좋은 선택이었다. 신혼 때 반복되던 '끼임 사건'이 있었다. 무심코 설거지를 하다 보면 국그릇에 반찬그릇 하나가 끼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웬만하면 빠지지 않는 것이었다. 세 번 정도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처음 두 번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으나 결국 분리를 포기해야 했다. 국그릇을 깨고 반찬 그릇을 살렸던 것 같다. 세번 째는 경험으로 학습된 바가 있어서 둘 다 살렸다. 어설피 빼내려 애쓰다 결국 더 꼭 끼어버린다는 것을 알았기에 포개어 놓인 상태에서 바로 알아차렸고, 초동대처를 성공적으로 했다. 신혼 1년 안에 있었던 일이다. 그 이후로 18년 살림을 하면서 '끼임 사건'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남편이나 나나 설거지 때마다 저 둘을 따로 놓아두는 것을 거의 기계처럼 해냈다.


어느새 채윤, 현승이가 가사를 도울 정도로 자랐다. 필요에 따라 밥을 짓거나 설거지 하는 일을 맡아 해주곤 한다. 그러다 보니 18년 동안 잊었던 '끼임 사건'이 다시 발생했다. 채윤이가 설거지하며 벌어진 일인데 오랜만에 국그릇을 만난 반찬 그릇 녀석이 국그릇 안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나오질 않는 것이다. 강의 마치고 늦게 집에 왔더니 '엄마, 미안. 요즘 일일 일사건이야. 그릇 두 개가 끼었는데 빠지질 않아. 아빠가 그러는데 둘 중 하나를 깨야 한대." 으아, 진즉 설거지를 가르칠 때 알려둘걸! 신혼 때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채윤이도 여러 방법으로 분리를 시도한 것 같았다. 뜨거운 물 붓기, 깨끗하게 말려서 마른 천으로 감싸안아 빼 보기. 사실 그 사이 다른 애정하는 그릇들도 생겼고, 내게는 큰 미련이 없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한 놈을 포기해야지, 뭐! 이래저래 바빠서 망치로 한 놈 깨는 일을 미루고 있었다. 싱크대 앞을 얼쩡거리던 현승이에게 '끼인 애들'이 발견되었다. '엄마, 기름칠을 하면 안돼?' '어?! 기름칠생각 못 해봤는데.....  '굿 아이디어! 기름 줄 테니 니가 한 번 해 봐'


전에 안 해본 일을 참으로 좋아하는 현승이, 신나는 놀이 발견. 왠지 될 것도 같다 싶은 마음에 현승이 손에 넘기고 남편과 커피 마시며 수다수다 하고 있었다. 쏴아~ 물소리가 나서 보니 기름 떡칠을 해놓은 채로 물에 씻고 있는 것 아닌가. '야, 기름칠을 하랬더니 왜 물을 틀고 그래? 이게 모야?' 조금만 예민하게 반응해도 10배의 '짜증 나'로 반응하는 '중2 국가안보요원'이 그릇을 내팽개쳤고, 엄마는 품위를 내팽개쳤다. '잔소리잔소리 고래고래..... 니 방이나 정리해!' 엄마의 분노폭발은 턱도 없는 곳으로 튀어야 제맛이니까. '끼임 사건'은 그렇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 20여 분 후. 기적이 발생. 그릇 정리를 하며 쓱 밀었는데 끼어 있던 그릇이 쑥 빠지는 것이다.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글을 읽는 당신에겐 '웬일'이 글자일 뿐이겠지만 내겐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결혼 18년 만의 기적이다.


불현듯 가슴 콩닥거리던 1999년 봄의 노랑이 살아온다. 거실 겸 주방의 벽지가 파격적인 노란색이었던 하남시 낡은 상가 건물의 꼭대기의 신혼집. IMF 위기에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신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고자 들어간 집이었다. 신혼의 꿈을 담기에는 너무 낡고 지저분한 집이었지만 기꺼이 자발적으로 선택했다. 다만 벽지를 원하는 대로 해주시길 부탁드렸다. 예비신랑과 심사숙고 끝에 벽지를 골랐다. 띠 벽지를 두르고 위아래 다른 벽지를 하되 거실과 방 전체 아래쪽은 파랑이었다. 거실은 파랑에 노랑, 방은 파랑에 아이보리. 집이야 어쩔 수 없지만 아주 마음에 드는 벽지를 골랐으니 그 벽을 그려만 보아도 좋았다. 행복한 꿈은 며칠이었다. 어머님께서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전격, 이중벽지의 파랑 부분을 편집하신 것이다. 거실은 샛노랑, 방은 갈색에 가까운 아이보리. 꽝꽝꽝. 아니 척척척. 내 의견 따윈 묻지 않으시고 도배를 끝내 놓으셨다.


이 일로 남편은 난생처음 어머니와 언성을 높였다. 드라마에서 보던 그대로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점잖던, 착하고, 속 깊던 아들' 태도 변화에 분노하셨다. 샛노란 거실과 칙칙한 안방 벽보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어머니의 태도였다. 당신의 판단엔 1도 오류가 없으시다며. 꽃이 흐드러졌던 캠퍼스 벤치에 앉아 했던 어머니와의 전화 통화가 새롭게 살아온다. 눈 앞에 펼쳐진 봄 풍경, 마음에 그렸던 결혼 풍경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소리가 귀에 쟁쟁 울렸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샛노란 거실 겸 주방은 마치 의도된 파격처럼 신혼집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 신혼의 주방에서 국그릇과 반찬 그릇이 끼는 사고가 일어났고, 빼려고 애쓸수록 더 꽉 끼어버려 결국 둘 중 하나는 죽어 나가야 끝이 나곤 했었지. 가끔 그 일을 복기하며 우리의 관계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결혼 초, 어떤 지점이 서로의 취약한 지점인지도 몰랐다. 갈등이 생기면 풀겠다고 애쓰다 더 꼬이기도 했다. 결국 하나가 깨져야 끝이 나는 건데, 늘 남편이었다. 먼저 미안하다고 손을 내밀었고, 나를 살리고자 자기를 깨뜨리곤 했다.

 

그때 그 벽지 사건에서 남편의 태도가 내편에선 공평이었지만 어머니 입장에서는 배신이었고, 그 사이에서 남편이 감당해야 했던 아픔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내게 일종의 회심이 일어났다. 사랑의 회심이었고 마음의 치유이기도 했다. 일하며 아이들을 키우는 것, 어머님 또는 동서와의 갈등, 남편의 중대한 진로변경. 결혼생활에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시시각각 들이닥쳤다. 마음에 꼭 드는 이중 벽지 골라놓고 기다리는 부푼 마음에 마음대로 끼어든 어머님의 독선같은 틀어짐. 이런 일들은 어머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선같았다. 남편의 한결같은 태도와 성품이 있어 일상의 평화가 지켜졌다. 그 처음 벽지 사건에서 그랬던 것처럼,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판단하고 따뜻하게 편이 되어주는 남편이 있어 오늘의 내가 있다. 이 경험을 울궈먹으며 강의도 하고 글도 쓰지만 우리의 결혼은 동화가 아니니까. 그후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는 당연히 아니다. 때로 콱 막히는 답답한 지점에 서게 되고, 서로 취약한 지점을 건드려 상처를 내고, 얼음처럼 냉랭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여전히.


언제부턴가 '남편을 다 안다'고 하는 전제를 의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 마음 다 알아'가 아니라 '갈수록 당신을 모르겠어'로 바라보는 것이 이 시점의 사랑이 아닐까. 낯선 눈으로 바라보기. 주일 예배에 가 앉으면 남편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설교단 위에 오르기 전 남편의 고독한 뒷모습을 낯설게 바라본다. '당신 자신이 되어요. 당신 자신이 되어 설교하세요' 둘 중 하나를 깨버려야만 했던 그릇 끼임 사건의 놀라운 해결. 이런 것들을 예사롭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가 애쓰고 노력하며 안 되는 지점에서 알 수 없는 기름칠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인생의 숲엔 언제나 새로운 길이 있다는 것. 어제 남편의 설교처럼 '모든 절망 속엔 이미 희망이 배태되어 있다는 것'.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온갖 역설과 신비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두 그릇을 다 살린 기적이 그 믿음을 확인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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