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Lectio Divina와 함께 한 꿈여정 5주를 마쳤습니다.
제국의 포로였으나, 그 정체성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존귀한 백성이라는 영적 신분을 잊지 않았던,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노라 뜻을 정했던 다니엘. 그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뛰어난 지혜에 더하여 꿈을 해석하는 지혜까지 선물로 주셨습니다.
한 벗님의 말씀처럼 다니엘은 바벨론의 “책상은 받지만, 밥상은 거부하는” 선택으로 경계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에고의 포로로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우리도 꿈여정에 초대받았습니다. 꿈을 통해 모르는 내 마음을 알고, 내 마음에 거하시는 성령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려는 우리도 다니엘과 한마음이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밥상과 책상,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다 가지겠노라 애쓰며 꽉 쥔 손의 힘을 빼는 시간이었습니다.
다니엘서 묵상과 함께 벗들의 꿈을 나누는 특별한 5주간의 여정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마치면서 우리는... 임금의 법과 하나님의 법 사이에 끼어서, 조서에 임금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늘 하던 대로! 기도의 다락방으로 가는 다니엘처럼 내면의 방으로 들어가 기도함으로 내게 주어진 삶을 ‘잘 살겠다’ 가만히 다짐했습니다. 잘 사는 것은 나답게 꽃피우고, 하나님 형상의 거룩함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적여정은 기도의 여정입니다.
영성이란 언제나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사랑 안에서의 성장입니다.

 
 
라고 연구소 SNS에 후기를 올렸다. 꿈작업, 그 어떤 집단상담보다 좋고! 마음으로 읽고 새기는 하나님 말씀 Lectio Divina, 그 어느 때보다 달고 오묘한데! 꿈작업과 말씀 묵상을 함께 하니 말로 할 수 없이 좋았다. 심층심리학과 영성이 내 안에서 깊이 연결되고 하나 되는 느낌이다.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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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잊지 말고 살자는 것이 나름 정한 실천적 신앙 덕목이다. 주께로부터 온 모든 것은 사람을 경유한다는 것을 안다. 고마운 사람에게 고마워하는 것이 악을 이기는 능력임을 살수록 깨닫는다. 선한 힘이 이긴다.

 

논문 쓰느라 힘들었지만,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다. '감사의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이 논문은 기도에의 갈망에서 온 것이고, 기도는 엄마가 물려준 유산이다.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담은 감사의 마음이다. 어디 이 분들 뿐이랴... 어디 논문에 관한 일 뿐이랴... 지금 누리는 이 평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곁에 두신 사람들, 그 모든 이들을 인해 감사하는 새해 아침이다.  

 

감사의 글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어머니의 찬송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기도의 유산을 남겨주신 나의 어머니 이옥금 권사님의 영전에 이 논문을 바칩니다.

 

오래전, 향심기도와 함께 『영혼의 성』을 소개해주신 이대근 신부님 감사합니다. 그때 심긴 씨앗이 열매가 되었습니다. 기도하고 연구하는 여성의 본을 보여주시는 신소희 수녀님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정태영 신부님께서 지도 교수님이 아니셨다면 쓰지 못했을 논문입니다. 겸손하게 지적하시고, 고요하게 재촉해주셔서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무엇보다 기도하며 쓸 수 있도록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영적인 벗들, 최은경 선생님, 김하정 선생님, 민다슬 선생님. 학업과 연구가 벽에 부딪힐 때마다 한마음으로 기도해주고 때로 읽어주고 들어 주셔서 외롭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담을 넘어 가톨릭학교에서 영성을 공부하겠노라는 뜻을 기꺼이 수용하고 응원해준 남편 김종필, 좋은 남편이며 착한 목사인 당신 덕에 오늘의 제가 있습니다. 우리 채윤이 현승이, 공부하는 엄마를 좋아해 주고 배려해줘서 고마워. 너희가 너희답게 살아가는 게 엄마에게 가장 큰 힘이야.

 

사랑하는 나의 주님, 이 모든 이들로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셨습니다. 데레사 수녀님처럼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Sólo Dios Basta)’ 인생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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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 교회 청년부를 섬기던 목사님의 '고별설교'가 있었다. 예배 마치고 인사를 나누며 툭 나온 말이 "목사님, 부러워요."였다. 말을 내놓고도 조금 당황했는데. 설교 시간에 잠시 남편의 '고별설교'를 상상했던 것 같다. 늘 생각하기에, 아무 때나 상상이 된다. 고별설교를 하고 교회를 떠나는 목사님은 그나마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목회자들이 고별설교는커녕, 더는 없을 빌런이 되어 강단을 떠난다. 빌런 프레임이 씌워진 것인지, 자기 권력과 욕망을 위해 빌런 되기를 자처한 것인지, 그럭저럭 겉모양은 유지하며 빌런인듯 빌런 아닌 빌런 같은 애매한 빌런이 된 것인지. 목회자와 교인들 사이의 슬픈 이별이 남기는 상처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보이지 않게 깊다. 부교역자라 불리는 분들은 애초 없는 존재였기에 사라져도 관심 밖인 경우가 허다하고. 담임목사에게 조금이라도 불손했거나 마음에 들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변호할 기회 한 번 없이 최악의 목사로 낙인찍혀 쫓겨 나오기도 하고. 목사와 교회의 이별이 아름답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정황을 담고자 했는지, 월간 <기독교세계> 12월호가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주제의특집이라고. 여기 실린 글이다. 내가 요청받은 주제는 교회 관련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이별은 이별에 닥친 사람으로서는 해낼 수 없는 과제 같은 것이다. 이별 직전까지의 관계가 이별의 순간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아름답지 않은 관계가 끊어지는데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모든 이별의 순간은 이전 함께 했던 순간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절망적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절망만은 아닌 것이 이별을 애초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비록 아름답지 않은 이별을 만들어낸 동거였다 할찌라도, 헤어진 후의 과정이 이전의 관계와 이별의 순간을 다시 새롭게 한다. 이별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뿐이다. 돌아보고 배우는 것. 다른 말로는 애도와 함께 잘 떠나보내는 것. 이별을 통해 사랑을 배우는 것이 인간의 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음유시인 김창완의 노래가 젊을 적부터 참 좋았다.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가사 묵상의 글이 되고 말았다.
 
 

끝나지 않은 이별

 
단아하고 우아한 개량 한복을 입은 엄마가 좌식 책상 앞에 앉으셨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얼굴에 꼿꼿하게 세운 상체는 거의 움직임이 없다. 손가락만 움직여 타닥타닥 뭔가를 짓고 계시는데. 세상에나, 노트북을 펼쳐놓고 글을 쓰고 있다. 노트북이 아니라 재봉틀이 놓였다면 딱 좋을 자리이다. 아니, 엄마의 태도와 표정이라면 성경책이 놓여 있어도 괜찮겠다. 엄마에 대한 존경과 칭찬이 동네에 자자하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엄마를 신뢰하고 따른다는 말이, 나는 잘 믿기지 않는다. 내가 안 믿어진다고 진실이 아닌 건 아니니까. 엄마라면 그럴 수 있지, 싶다. 하지만 우리 엄마가 저런 사람은 아니었지 않나?
 
엄마 없는 날의 시작


“엄마라면 그럴 만하지! 하지만 우리 엄마는 아닌데….”하며 꿈에서 깼다. 돌아가시고 말 그대로 상(喪) 중일 때, 슬픔의 한복판에서 꾼 꿈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막 시작된 그 봄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코로나도, 엄마의 낙상도, 면회가 안 되는 입원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예고 없이 닥친 일이었다. 무엇보다 엄마와의 이별은 갑작스레 덮친 재난 같았다. 90을 훌쩍 넘기셨으니 언제 돌아가셔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으나 내겐 그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나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엄마의 죽음을 상상하지 않은 날이 없고, 그만큼 대비도 했으니 재난이란 표현은 과장이 아닌가. 바로 자기검열을 하게 되지만 이별의 고통이 그렇게 혹독할 줄은 정말 몰랐다.
장례식을 제대로 치르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삼일장을 치르며 조문객과 함께 엄마에 관한 얘기를 하고 또 하고 했다면 조금 나았을까. 거리두기 지침과 함께 하던 일을 멈추고 집에 콕 박혀 지내야 했기 때문일까도 생각했다. 일로 도피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적나라한 감정으로 마주하지 않아도 되었던 건 아닐까. 초유의 팬데믹 세상과 엄마 없는 세상이 함께 왔다. 엄마 없이 지내는 첫날, 둘째 날, 일주일… 한 달을 맨몸으로 마주하며 지냈다. 어머니와의 이별은 평범했던 일상과의 이별이 되었고, 일상 회복은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엄마 없이 보내는 첫 번째 부활주일, 첫 번째 어버이날, 첫 번째 엄마 생신은 얼굴을 바꿔가며 새로운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이별은 오늘 이야기 아니오”


대비할 수 있는 죽음은 없다. ‘미리 대비하고 있으면 걱정이 없다’는 유비무환의 이별은 없다. 존재가 사라져 비어버린 공간을 마주하고 몸으로 겪어내는 것이 이별이기 때문이다. 그전까지의 대비는 머리가 하는 일이고, 이별을 겪어내는 것은 몸과 마음의 일이다. “이별은 오늘 이야기 아니요 두고두고 긴 눈물이 내리리니” 산울림의 이 노래 가사가 프로이트의 상실과 애도, 멜랑콜리 이론보다 더 큰 울림을 준다. 그리움의 눈물, 죄책감의 눈물, 분노의 눈물, 흐르지 않으며 흐르는 눈물… 두고두고 새롭게 긴 눈물이 흐른다. 상실의 슬픔과 단둘이 꼼짝없이 집안에 갇혀 격리상태로 보냈던 몇 개월, 슬픔의 눈물을 글로 흘려보냈다. 글을 모아보니 ‘애도 일기’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책으로 묶어냈다. 책을 읽은 친구들이 허튼 결심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곁에 계신 어머니에게 잘해야겠다, 외롭지 않게 더 자주 찾아뵈어야겠다.”.” 질투 비슷한 느낌이 스쳤다. 나는 내 엄마께 그리하지 못하여 죄책감과 회한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저 친구는 후회할 바 없이 잘해드리면 어떡하지? 괜히 글을 써서 내놓았나 싶기도 하고. 하지만 불가능한 마음의 쇄신인 것을 안다.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하는 트로트가 괜히 인기가 있겠는가. 이별은 대비할 수 없다.
 
부재로 존재하는 것들


사라진 자리에서 그 존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신비이다. 사라져야 비로소 그 존재의 가치와 무게가 드러난다. 극한의 치통으로 밤을 보냈던 밤, 온몸이 어금니였다. 음식을 먹고 씹고 삼키지 않았던 날이 없는데, 어금니가 거기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 날도 없었다. 본연의 기능을 ‘잃은’ 그 밤, 어금니는 내 몸 자체였다. 심장도 어금니에 붙어 있는 듯, 욱신욱신 쿵쾅쿵쾅 거기서 뛰었다.
두어 달에 한 번이나 엄마를 찾아뵈었을까. 전화도 자주 드리지 못했다. 당신 방 침대와 볕 잘 드는 거실 소파 사이를 오가며 늘 거기 계실 엄마였다. 그리고 어금니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고도 삼시 세끼 꼭꼭 씹어 밥을 먹듯 내 일상은 잘 돌아갔다. 엄마가 돌아가시자 나의 24시간은 엄마의 것이 되었다. 나를 ‘엄마’라 부르는 딸이 제 블로그에 글을 썼다. “엄마 잃은 엄마를 위로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엄마’하고 불러야 할 텐데, 그 ‘엄마’라는 말이 지금 엄마에게 너무 아픈 말이라 ‘엄마’하고 부를 수가 없다”라고. 이렇듯 가족들도 알아챘다. 내게는 ‘엄마’ 밖에 없다는 것을. 엄마의 몸이 한 줌의 재로 사라지자 세상이 온통 엄마가 되었다. 엄마로 뒤덮인 세상은 끝날 것 같지 않았고, 무너진 내 일상도 회복될 것 같지 않았다.
 
잃어버리고 찾는 것들


사순(四旬)시기 딱 중간의 날에 엄마가 떠나셨다. 다음 해 사순시기, 그 봄은 참으로 신비로웠다. 거의 매일 한 시간 훌쩍 넘기는 긴 산책을 했다.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막 움트는 새순들이 그렇게 제각각 다른 채도를 띄고 고유하게 고왔던가. 봄의 색이 이렇듯 다채로웠던가. 난생처음 컬러로 보는 봄 같았다. 그 하루,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놓칠 수가 없었다. 문득 1년 전의 어느 봄밤이 떠올랐다. 가로등 옆으로 흰 목련이 피어 있었다. 분노와 서러움이 밀려왔다. “꽃이 피다니요!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아무렇지 않게 목련이 피다니요!” 생각해 보면 엄마를 잃었던 그 봄은 봄이 아니었다. 엄마와 함께 계절도 잃었다. 애도의 시간에 색은 없었다. 온통 흑백 세상이었다. 그러니 난생처음 봄을 빛깔로 마주하는 느낌도 틀리지는 않았다. 잃어버린 한 계절로 얻은 찬란함이었다.
 
나는 이별이 무엇인지 안다. 상실감을 안다. 일찍이 아버지와 사별했고, 그 이별의 후폭풍은 정든 집, 교회, 학교, 친구들과의 물리적 이별이었다. 생이별이었다. 연애하다 헤어져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고, 지도자의 영적 인격적 몰락을 보며 존경심을 상실한 자리에서 배신감으로 뒹굴어도 보았다. 단언컨대, 그 모든 이별이 나를 단단하게 했다. 아버지 없는 세상에서 아버지 없는 아이로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썼기에 이만큼의 예의 갖춘 인간이 되었는지 모른다. 갑자기 잃은 교회에 대한 그리움으로 교회를 포기하지 못하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 아무도 날 알아봐 주지 않는 학교로 전학 가서도 마찬가지이다. 옛 선생님, 옛 친구들에게 받았던 사랑과 신뢰를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좋은 성적이라는 생각에 열심히 공부했다. 이만하면 꽤 괜찮은 부부로 잘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남편과 종종 그런 얘기를 한다. 연애하다 헤어졌던 그 아픈 시간이 있었기에 보다 건강한 연애와 결혼일 수 있었다고. 시아버님이나 함께 했던 벗들을 죽음으로 잃은 자리에서 내 인생 그 어느 때보다 부활 신앙이 뜨거웠었다. 상실의 시간을 잘 겪어내기만 하면 좋은 삶과 신앙이 된다는 것을 나는 안다.
 
끝나지 않은 이별
이별과 상실로 점철된 인생에서 배울 만큼 배웠다. 그런데 엄마가 떠나신 자리에서 배우고 성장한다는 건 사치였다. 산다는 것은 그저 무의미한 고통이었고, 삶과 죽음은 새삼 부조리하게만 느껴졌었다. 그즈음 꾼 꿈이다. 가당치 않은 이미지이다. 이 땅에서의 엄마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스마트폰 시대를 길게 살았지만, 엄마의 소통수단은 유선 전화였다. 그런 엄마에게 노트북이라니. 무학에 가까운 엄마가 노트북으로 글을 쓰다니. 페미니스트 같은 젊은 여성들에게 신뢰를 얻고 여성들이 사는 동네의 존경받는 원로라니... 꿈이라서 가능한 설정과 이미지인데 희한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곁에 있는 남편에게 꿈 얘기를 하자 “어머님 천국에서 글 쓰고 계시나 보네. 어머니 살아오신 얘기 쓰시는 거 아냐?” 하며 웃었는데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싶었고, 스르르 마음에서 무엇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천국이니까, 이 세상과는 다른 곳이니까 엄마는 무엇이든 될 수 있지 않을까. 평생 품었던 못 배운 한 따위는 풀 필요도 없는 천국이겠으나, 딸에게는 그렇게 소식 전하고 싶었을까? 그 꿈 이후로 부활한 엄마의 몸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육신의 장막을 벗은 엄마의 영혼은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울까. 엄마 몸이 사라진 자리에서 엄마의 존재가 그렇게나 크더니만, 지금 여기의 일상을 무너뜨릴 만큼 큰 그것은 엄마의 영혼이었다. 영혼의 크기이고 무게였다. 엄마 몸과 이별한 자리에서 진짜 엄마와의 만남, 영적인 연결이 시작되었다.


3년 하고도 수개월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지는 노을이 아름다워 바라보고 있노라면 “엄마…” 하는 소리가 깊은 어디서 울린다. 새롭게 그리움의 눈물이 솟구친다. 3년이면 탈상이라지만 끝날 것 같지 않은 이별의 슬픔이다. 아니 이별에는 끝이 없다. “애도는 끝이 없다, 성공한 애도는 실패한 애도다.”라는 자크 데리다의 말처럼 좋은 이별은 끝나지 않는 이별이다. ‘몸’이라는 육신의 장막에 살던 진짜 엄마, 빛나는 영혼으로 존재할 엄마와의 새로운 사랑 고백과 화해는 내가 살아 있는 날까지 이어질 터이다. 이별은 끝나지 않는 만남의 새로운 시작이니, 어쩌면 산울림의 저 노래처럼 우리 인생은 “처음부터 긴 이별”이었는지 모른다.
 

월간 <기독교세계> 2023년 12월호

 

 

크리스마스는 선물이지! 크리스마스는 선물의 시간이다. 크리스마스에는 "선물 교환"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올해에는 연구소 5주년 특강에 마치고 [상처 입은 치유자 과정] 1, 2, 3기 선생님들 송년 모임에서 선물교환을 도모했다. 연결이 끈끈해진 선생님 몇 분에게 진행을 일임을 했더니 사랑과 센스가 반짝반짝 빛나는 선물교환을 기획해 주었다. 모든 선물은 "연결"이었다. 올 한해, 홀로 외로울 때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연결이었다. 선물은 가지각색이지만 뜻은 오직 연결! 별 걸 다 '연결'로 연결하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이 사랑스러운 "상처 입은 치유자"들을 어쩔 것인가!
 

 

선물의 맛은 서프라이즈이다. 예상치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것이 갑자기 들이닥칠 때,  선물의 선물다움은 빛을 발한다. 작년 12월 마지막 날에 보이스톡으로 전화가 한 통 왔고. 그 전화는 작년 2022년 통틀어 가장 반가운 선물이었다. 잘 지내고 있다는... 일도 하고 있다는 그 말 밖에는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고맙다는, 정말 과분한 말도 들었다. 전화를 끊고 그 편안한 목소리에 한참 눈물이 났다. 나라면 잘 지낼 수 있을까? 어쩌면 잘 지낼 수밖에 없는 사람일지 모른다. 무한 '피해자'가 아니라 '살아 남은 자, 생존자'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러 왔고, 그보다 솔직하고 굳건할 수 없는 글을 써냈으니 결국 잘 지낼 사람이었을 것이다. 처음 만남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다. 별칭을 '반짝이'라고 지었었다. 자신이 얼마나 반짝이는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그런 이름을 지었다.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 1기였는데. 모임을 동반하는 나도 처음이라 많이 긴장했었다. 그 긴장된 첫 모임에서 반짝이가 우리를 웃겼다 울렸다 그랬었다. 맞다. 결국 잘 지낼 사람이었다. 벌써부터 반짝이고 있었다. 잠시 어둠이 그를 둘러쌌으나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었다. 반짝이가 카카오톡으로 김을 보내왔다. 맨 김 참 좋아하는데.... 굽고 자르다 보면 가스레인지 주변이 난리가 나니까 아예 먹을 생각을 안 하는데. 구워서 딱 잘라진 김을 보내와서 간편하게 먹고 있다. "작가님 식사준비 편하게 하셨으면..."이라고. 작년 편안해진 목소리처럼 다시 눈물 나는 고마움이다. 누군가의 식사준비, 누군가의 일상을 챙기는 여유는 자기를 돌보고 지키는 내면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이 소중한 사람, 소중한 선물, 반짝이를 어쩔 것인가!
 
만남도 그렇다. 좋은 만남은 선물처럼 오고, 선물의 맛처럼 서프라이즈로 온다. 대학원 종강피정이 있었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긴 했는데, 논문발표 명목으로 참석했다. 타과로 진학하여 박사논문 쓴 선배 한 분이 먼저 발표를 했다. 논문 주제나 내용과 상관없이 "저 사람 좋은 사람이네" 감이 왔다. 논문이 아니라 논문 쓴 사람의 마음이 느껴졌달까. (아니! 논문에서 마음이 느껴져서야 되겠는가?) 내게 좋은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으니, 이유 불문 내가 느끼는 '좋은 감각'을 거침없이 지지하는 편이다. 이런 감각이 소중하고 신비인 것이,  내 논문발표 이후 이분은 또 "눈물이 났다"는 평을 내놓는 것 아닌가? (이게 논문을 사이에 두고 오고 갈 말이고 감정인가?) 선물 같은 만남이 되었고, 모든 순서 마치고 새벽 2시에 숙소로 함께 걷는 길에 믿을 수 없는 하늘을 보았다.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 별이... 그 짧은 순간 "실은 오늘 저희 아버지 42주기 추도식이에요." 누군가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꼭 하고 싶었던 그 말을 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그 산속에 아침부터 문을 연 베이커리 카페가 동화처럼 서 있어서 깜짝 모닝커피도 했다. 괜한 끌림이 아니라, 기도하며 쓴 논문인 것을 서로 알아본 것이다. 집에 돌아와 책 선물을 주고받았는데 보내주신 책 안쪽에 "반짝반짝"이라는 단어가 쓰여있다. 이 신비로운, 반짝이는 만남을 어쩔 것인가!
  

 

자신이 얼마나 반짝이는지 모르는 이들이 반짝반짝 누군가의 삶에 침투한다. 침투하여 생명을 불러일으킨다. 자기를 인식하지 못한 어둠이 자기와 자기 사람들의 생명을 갉아먹는 것처럼... 2023년 성탄절, 예기치 못한 반짝임이 선물로 왔다. 크리스마스는 선물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어 선물로 왔다. 믿을 수 없는 사건이다. 전무후무한 선물이다. 
 
손수 만든 피조물인 사람을 얻고 싶어서,
사람이 되어버린!
신의 영광을 버리고 신의 광휘를 버리고...
신적인 반짝임을 모르기로 작정하고!!

오늘 말씀 묵상 본문이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요 1:3-5) 반짝이는 존재들이 자기 반짝임을 모르는 것처럼, 어둠은 제 어둠을 모른다. 자기를 모르는 어둠들은 필연 확신을 장착하고 빛을 거부한다. 밤하늘은 그래서 더욱 어두워진다. 하지만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 하늘이 까맣고 어두울수록 별빛은 더욱 빛나 동방의 세 사람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하니...
 
이 성탄의 신비를, 이 선물을 어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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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얼마든지 걸을 수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빛이 부드러워지는 시간부터 노을이 물드는 시간을 걷다

달빛이 비칠 때쯤 집으로 돌아오는 그런 산책을.

 

 

봄가을로 좋은 날이 아니어도 괜찮다.

타고난 '좋음'으로 놓치기 아까운 날씨의 날들이 있지만,

요 며칠의 칼바람 날씨도 산책하며 생각하고 기도하기에 손색이 없다.

꽁꽁 입고 싸매고,

비무장지대 얼굴만 잘 버텨내면 된다.

이런 날도 '좋은' 날이다.

 

걸었다. 

두어 시간을 천천히 걸었다.

12월엔 가끔씩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으로 마음을 잃곤 하는데

걷다 보니 잃어버린 마음을 찾게 된다.

사람 하나 없는 산책 길을 혼자 걷는 시간,

슬픔과 그리움의 빛깔이 바뀌고 

벌써 마음이 따뜻한 집의 공기로 바뀌어 있었다.

 

 

다리는 아프고 꽁꽁 언 얼굴엔 감각이 사라졌는데

아파트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는 박새 한 마리.

대단한 일을 치르고 온 것도 아닌데, 

짹짹짹 귀여운 팡파르를 울려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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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부터 <청소년매일성경>에 연재합니다. 독자가 청소년인 것도, 주제가 너도 나도 전문가인 MBTI라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지만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MBTI 과몰입 친구들의 '자기만의 MBTI' 때문에 답답해 죽겠는 딸 아들의 도움을 받아 한 번 써보기로요. MBTI 지표 설명보다는 사용법, 태도에 대해 다루려고요. MBTI의 이론적 배경이 되는 Carl Jung의 심리유형론의 관점을 피력하고자 하는데... 이 깊은 영성심리를 청소년들 눈높이에 맞추는 게 관건이네요. 그래서 이름도 Jung 쌤으로 갑니다.  정 쌤이기도 융 쌤이기도. 첫 번째 글입니다. 

 

너, MBTI가 뭐야?

 

안녕. 나는 Jung 쌤이라고 해. 앞으로 여기서 MBTI를 좀 가르쳐줄 거야. 아, 그런데 QT와 MBTI가 무슨 상관? 그러니까 말이야. 나는 MBTI를 무척 좋아하고, MBTI에 진심인 편이긴 한데, 그냥 MBTI는 아니야. 성격과 성경, 말씀 묵상과 기질, 성격과 하나님 형상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에 지대한 관심이 있지. 너는 MBTI가 뭐야? 나는 ESFP야. 유형만 들어도 딱 알겠지? 이 글은 일단 무조건 재미있을 예정이야. ESFP는 재미에 죽고 살거든.

 

나는 MBTI를 좋아하는 만큼 내 유형인 ESFP를 좋아해. 물론 내 유형을 거침없이 좋아하기까지 사연은 좀 있고. 일단 소개를 좀 더 할게. 내 본래 직업은 음악심리치료사야. 음악치료를 잘하기 위해 MBTI를 배웠는데, 이게 너무 재밌는 거야. 세상에나! 모르던 내 마음을 알려주는가 하면, 이해 안 되는 사람들이 막막 이해되니까. 본업인 음악치료보다 MBTI 같은 성격심리학 공부가 더 재밌어서(나, ESFP...) 신나게 매진했지. 한 20년쯤 됐어. 하아, 그러니까 너네들 태어나기 전부터!

 

생각해 보면 음악치료를 전공하게 된 것도 다 사람 마음에 대한 관심이었어. 어렸을 적부터 사람 마음이 궁금했거든. 아니, 내 마음이 궁금했어. 분명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왜 이리 싫은 사람이 많은 거야. 학년마다 반에 싫은 애가 꼭 한두 명 있더라고. 학년이 바뀌고 반이 갈라져서 쟤랑만 헤어지면 모든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지 싶어서 일 년 참아보건만, 그런 애는 꼭 다시 생기고. 게다가 왜 그리 마음은 쉽게 이랬다저랬다 하는지. 내 마음 나도 몰라, 라는 말이 있듯이 내 마음이 너무 어려운 거야.

 

시편 기자가 이렇게 기도했어.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시 139:13-14a) 기묘하다고 하네. 우리를 만드신 것이 기묘하다고 하니 어려운 게 맞아. 인간을 기묘하게 만드셨으니, 기묘한 마음을 안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거지. 그 앞에는 대놓고 이렇게 기도했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6절)

 

도통 모르겠는 마음의 모양을 대략 구분하여 알려주는 것이 성격유형 도구야. MBTI도 그중 하나인데. MBTI 유형으로 내가 설명되고 친구의 마음을 알아지는 게 놀랍잖아. 내 발로 다 밟을 수 없는 넓고 복잡한 땅을 지도로 볼 때 느낌일 거야. 눈에 확 들어오는 느낌. 이제 내가 내 유형을 찾게 된 사연을 조금만 들려줄게. 처음 MBTI와의 만남은 교회 청년부에서였어. 소문은 들어서 이름만 알고 있던 MBTI였어. 아무것도 모르고 일단 검사를 당했지. 검사결과는 INFP였어.

 

INFP라니!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결과였는데, 웃긴 건 그때 “맞아, 맞아. 나 완전 이래!” 했다는 거지. 이런 경우는 INFP는 ‘검사 유형’이라고 해. 다시 말하면 검사결과와 내 진짜 유형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거지. 사실 INFP가 나온 이유가 있었어. 당시 썸타는 남자애가 있었거든. 그 애가 INTJ였어. 내향형에 직관형인 그 친구가 그렇게 좋아 보이는 거야. 나도 모르게 그 친구와 비슷한 점을 찾게 되고, 그 마음이 체크 리스트에 반영된 거지.

 

그러니까 분명한 건 말하자면, 내 진짜 유형(true type)과 MBTI 검사로 얻은 결과는 다를 수 있다는 거야. 검사할 때마다 다르게 나온다는 얘기도 많이 듣는데, 같은 이유야. 내 진짜 유형이 무엇인지 결론 내리는 사람은 나 자신이야. 사실 나에 대한 전문가는 나거든. 검사는 어쩔 수 없이 그때그때 내 바람과 스트레스를 반영하게 돼. 나도 모르게 내가 좋아하고 닮고 싶은 사람의 성향이나, 엄마가 되라고 하는 모습을 체크할 수 있다는 거지.

 

물론 MBTI는 통계학적으로 신뢰도 타당도를 인정받은 검사 도구야. 단, 전문기관과 전문가에 의한 것이라면! 인터넷에 떠도는 무료 검사들은 신뢰하지 않는 게 좋아. 아무튼 자기 진짜 유형을 찾고, 그 유형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유로워져. 심지어 매력적인 사람이 돼. 그게 MBTI가 주는 선물이라니까. 나만의 장점, 나만의 약점, 나만의 사랑법, 나만의 말씀 묵상 방법을 찾는데 도움이 되고, 그렇게 자신을 아는 사람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지.

 

자기 유형을 정확하게 알고, 진심으로 좋아해야 MBTI를 통해 가장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어. 주변에 그런 친구 없어? 누가 봐도 E(외향형)인데 자기 I(내향형)이라고 우기는 애 말야. 그런 게 제일 문제다. 자기 유형을 잘못 알고 엉뚱한 하게 우기면 좀 난해한 상황이 돼. 매력이 없고, 가까이하기 싫고 그런 친구가 될 수도 있어. 내가 그런 애를 딱 알거든. 어, 음, 아... 실은 그게 나였어. 그 얘긴 다음에 들려줄게. 아무튼, 오늘은 이걸 묻고 싶었어. 너 MBTI가 뭐야? 음, 네가 알고 있는 너의 MBTI 유형은 정말 너의 것일까?

 

<청소년매일성경> 2024년 1,2월 호

 

Jung 쌤은 이렇게 생기신 모양...

 

* 전에 방송에서 했던 MBTI 얘기도 한 번!

 

 

 

 

우울해서 하는 포스팅이다. 논문을 썼다. 다 썼다. 다 쓴 지가 한참이다. 쓴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논문심사를 필두로 여전히 논문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사연은 구구절절이다. 탓을 하려면 나를 탓해야 한다. 영성 공부를 위해 굳이 가톨릭학교로 가야 하는 나, 내 탓을 해야지. 책임전가를 할 곳은 언제나 있다. 굳이 거기까지 보내시는 그분.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끼워둔 그분을 탓하면 딱 좋은데...  "니가 갔잖아??!!" 하시면 딱히 할 말도 없고.

 

지금은 제출, 반송, 재제출, 반송, 재제출... 논문 온라인 제출 단순노동 놀이를 하고 있는데. 할수록 우울해지는 놀이이다.

 

논문 탓이 아닐 수도 있다. 해마다 이때면 아무 일 없어도 우울해지고, 억울해지고, 슬퍼지고, 텅 비고... 좀 그런 때니까. 12월 16일은 아버지 추도식 날이다. 인생 "치명적 잃어버림의 날". 42년 전 놓친 아버지의 손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 그 잃어버림이 이제 낯설지도 않고... 심지어 그리 나쁜 것 같지도 않다. 오늘의 나를 만들고 만 '상실'이니까. 아버지 손을 찾다, 기도의 길을 찾다 여기 이 끼인 자리까지 왔으니까. 

 

논문 초록 붙여본다. 우울해서. 이거 읽고 누가 "논문 기대된다!"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사진은 논문을 가지고 했던 연구소 5주년 특강 장면이다. 진행 상시간이 부족해서 하려던 말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그것도 우울한 이유 중 하나. 아빌라의 데레사와 내가 닮았다고, 남편이 논문 쓰는 내내 말했다. 이 사진은 뭔가 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초록

 

‘탈종교’라는 시대적 물결과 함께 교회 ‘안 나가’기로 작정한 그리스도인, 일명 ‘가나안’ 교인이라는 언표가 통용된 지 10여 년이 되었다. ‘영적이긴 하지만 종교적이진 않다’는 뜻의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은 2023년의 한국 기독교를 진단하고 전망하는 주요 용어 중 하나이다. 가나안 교인 현상의 내적인 면을 드러내는 말일 것이다. 외적으로는 부패한 교회와 타락한 목회자에 대한 실망으로 교회를 떠나지만, 내적으로는 제도 교회 너머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으로 ‘영적인 감각’에 민감해진 상태라는 것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시대적 영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영성의 전통 안에서 기도의 길을 찾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아빌라의 데레사가 쓴 『영혼의 성』을 영적 위기의 시대를 살았던 ‘한 여성의 기도체험 기록’으로 바라보고, 기도 안에서 일어나는 자아의 변화, 그로 인한 영성생활의 변화를 탐구하였다. 『영혼의 성』에서의 기도는 내면 중심에 계신 하나님을 향한 여정이며 동시에 내적 자아를 만나가는 과정이다. 『영혼의 성』의 일곱 개의 궁방에서 기도하는 자아는 여러 어려움과 고통을 겪는다. 이 고통과 어려움은 극적 신비체험으로 일거에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합일에 이르는 7 궁방에 이르기까지, 기도하는 사람 데레사는 자아 인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즉, 기도 안에서 겪는 어려움을 그대로 마주하고 기록한다. 그 여정에서 자아 인식은 변화되고 새로워지는데, 궁극적으로 삶의 정향이 달라지는 회개(metanoia)의 체험이다. 『영혼의 성』의 기도가 오늘에 주는 교훈은 첫째, 기도의 내면성과 자기인식의 중요성이다. 통성기도, 즉 밖으로 크게 소리 내어 드리는 기도는 개신교의 자랑이며 동시에 한계이다. 시대의 영적 요청을 받는 개신교회의 기도는 『영혼의 성』을 통해서 밖을 향해 부르짖는 기도에서 침묵을 통한 내면성의 기도로 안내받을 수 있다. 또 기도를 통한 영적 성장은 투명한 자기인식의 길과 함께 가야 한다는 점이다.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지금 여기서 마주하는 고통과 인간적 욕망이 영혼을 어디로 이끌어가는지 명확하게 바라보고 성찰하는 것 또한 오늘에 필요한 기도라 할 수 있다. 둘째, 내면을 향하여 깊어진 기도는 도덕적 영적 삶의 열매로 드러나고, 기도 안에서 내내 놓치지 않은 자기인식은 자기함몰이 아니라 이타적 사랑이 되어 이웃을 향한 자기 개방이 된다. 셋째, 기도하는 사람들의 교회 일치에 대한 소명에의 확인이다. 데레사가 살았던 16세기 스페인의 시대적·영적 상황은 오늘의 시대, 특히 개신교의 영적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와 종교권력자들은 타락했고, 그럴수록 대중의 영적 갈망은 깊어져 간다. 30여 년 차이로 동시대를 살았던 마틴 루터와 아빌라의 데레사, 이 두 사람의 외적 행보는 달랐다. 하지만 무너져가는 교회와 혼탁한 영성의 시대에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영성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선조들의 기도로부터 배울 때, 오늘 여기의 기도는 교회 일치라는 자연스러운 열매로 맺히게 될 것이다.

 

논문 제목 : 기도 안에서의 자기인식과 영적 변화에 대한 연구:『영혼의 성』을 중심으로

 

그리고 데레사 성녀의 자작 기도문, Sólo Dios basta

 

그 무엇에도 너 마음 설레지 말라(Nada te turbe)
그 무엇에도 너 무서워하지 말라(nada te espante)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todo se pasa)
님만이 가시지 않나니(Dios no se muda)
인내함이 모두를 얻느니라(la paciencia todo lo alcanza)
님을 모시는 이(Quien a Dios tiene)
아쉬울 무엇이 없나니(nada le falta)
님 하나시면 흐뭇할 따름이니라(Sólo Dios ba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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