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사랑꾼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사귀기 직전, 썸이 한창이던 여름이었다. JP 포함 교회 청년 몇 명이 지리산 종주를 했다. 그 멤버에는 내 베프 둘이 끼어 있었고, 나는 시간도 안 되었지만 하루 등산도 아니고 지리산 종주라니,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가장 친한 내 친구들과 썸남이 가는 산행에 끼지 못하는 마음이 어땠을꼬? 아쉬움을 뿜뿜 했을 것이다. 그때 (인생에서 아주 잠깐 사랑꾼이었던) JP가 했던 말이다.
누나도 같이 지리산 가시는 거잖아요. 제 마음에 담아서 가니까 같이 가시는 거예요.
(이 달달한 세레나데를 평생 들을 줄 알고 결혼했긔) 그런데 나는 그 말을 안다. 어떤 사람을 마음에 담는 것, 사람이 마음에 담기는 것을 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흔한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누가 누구의 마음에 담겼는지 쉽게 알 수 없지만, 사람의 마음에는 사람이 담긴다. 내 마음에도 사람이 담겨 있다. 남몰래 담아 둔 사람이 많다.
내 마음에 담긴 사람으로 기쁘고 행복하거나 아프다. 내 마음에 담긴 사람을 내가 잘 알지만, 내가 누구의 마음에 담겨 있는지는 잘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에게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가끔 내가 누군가의 마음이 담겨 있었구나... 확인할 때가 있다. 남편과 내가 같은 날, 다른 자리에서 각각 자기 벗과 식사를 하고 들어왔는데. 각각 그 사람의 마음을 손에 들고 왔다. 각각 들고 온 것이 한 사람에게서 온 것 같은 느낌이어서 신기하고 놀라웠다.
사람을 마음에 담고 기도하고 동반하는 일을 하면서... 어떤 때, 거룩한 부담감이 임계치에 가까워 찰랑거리는 때가 있다. 그런 날, 바로 그 시간에 "언니, 소중한 언니, 언니를 위해 기도해. 함께 하는 분들을 위해 기도해." "언니, 기도로 언니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소장님께 힘주시길! 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하는 메시지가 날아들기도 한다. 내가 그 마음에 담겨 있구나! 그 마음에 기도로 담겨 있구나, 깨닫고 알게 된다. 기억한다는 것, 마음에 담는다는 것...
같은 책 네 권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나침반’에서 나온 1999년 판, ‘복 있는 사람’에서 나온 2010년 판, 이번에 출간 36주년에 맞춰 개정증보판으로 출간된 『영적 가면을 벗어라』 입니다. 2010년 판은 두 권입니다. 네 권을 가지고 있지만, 읽은 횟수로 치면... 몇 번인지 헤아려지지 않습니다. 마음 맞는 친구나 공동체와 여러 번 함께 읽는 경험을 했습니다. 돌아보면, 책을 좋아하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나 후배에게 ‘너를 좋아해‘라는 말 대신 이 책을 함께 읽자고 했던 것은 아닌가 싶네요. 아, 2010년 판의 하나는 남편의 것인데, 남편 역시 청년 리더 교육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책의 추천사를 쓰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책을 받아 펼쳐 ‘25주년 기념 개정증보판 서문’을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한 장 한 장 꼼꼼히 다시 읽는 저를 발견합니다. 이러다 책에 실린 추천사보다 더 긴 글을 쓰게 될 것 같네요. ‘노을이 물드는 시간’, 밖을 향하던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야 하는 때입니다. 그런 시간에 읽기 딱 좋은, 입에는 조금 쓰지만 몸에 좋은 약 같은 책입니다.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추천사]
“영적 가면을 벗어라!” 이 문장은 내게 책 제목 그 이상이다. 젊은 날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그때, 내 심장에 화살처럼 꽂힌 사랑의 메시지였다. 벌써 30여 년 전의 일인데, 흐릿해질지언정 사라진 적은 없는 불화살의 흔적이다. 그 시절을 떠올리자 바로 얼굴에 열감이 느껴지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보니 나의 회심 체험이었지 싶다.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 빠르게 신앙의 행위들을 배우고 내면화하며 자랐다. 태어나 보니 한국 사람이었던 것처럼, 태어나 보니 기독교인이었고 목사의 딸이었다. 나의 첫 번째 정체성이었고 자부심이었다. 자부심은 열정을 낳았다. 교회 공동체와 후배들을 위해 시키지 않는 희생과 헌신을 자처하며 열정을 냈다. 그렇게 젊음을 불태우던 시절에 래리 크랩의 『영적 가면을 벗어라』를 읽었다. 아니, 그 책에 나를 읽혀 버렸다. 자부심이었던 그것들이 영적 포장지라는 진단을 받았고, 부끄러움과 충격으로 책을 읽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영적 포장지가 벗겨진 실체는 ‘이만하면 됐지, 나만큼만 해라’는 바리새적인 자부심과 특권 의식이었다. 공동체를 위해,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열정을 다하는 나이건만, 왜 자꾸만 크고 작은 갈등에 휘말리며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지도 설명이 되었다. 입에 쓴 책이었다. 써도 보통 쓴맛이 아니었다.
그러나 쓴맛에 그치지는 않았다. 가면 너머의 초라한 민낯을 마주하는 일은 말할 수 없이 수치스러웠고 고통스러웠지만, 끝은 아니었다. 열심히 한 신앙생활의 대가로 잘되고, 복 받고, 이름을 얻고 싶은 죄된 욕망이 전부는 아니었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었다. 사랑의 예수님을 흉내 내는 것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예수님처럼 될 때만 행복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래리 크랩이 일깨우려 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거룩한 행동이 아니라 거룩한 존재가 되고 싶은 내 안의 갈망이 깨어났다. 그러니 “영적 가면을 벗어라!”는 책 제목에 그칠 수가 없다. 내 안의 빛과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수용하는 영적 여정을 안내하는 이정표 같은 문장이다.
그렇게 오래전 이 화살을 맞았건만 나는 또 래리 크랩이 책에서 예언한 그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충격적 경험과 회심 체험으로 단번에 변화되지 못했다. 태어나자마자 그리스도인이 된 운명인지, 일찍 만들어 쓰고 오래도록 썼기에 이 가면은 거의 피부에 달라붙어 있다. 가면이 나인지 내가 가면인지 구분이 쉽지 않다. 가면 뒤에 숨어 밖을 바라보며 외적인 행위에 매인 습관을 당장 떨쳐 버리지 못하고, 어느 순간 더욱 세련된 영적 가면을 개발하고 살았던 것 같다. 래리 크랩의 책이 번역될 때마다 가장 먼저 찾아 읽고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는데, 그 첫 만남 이후 십수 년이 지나 나는 ‘신앙 사춘기’ 또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길게 겪었다. 내적인 삶을 돌아보지 않으면 삶과 신앙이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래리 크랩이 경고하는 바로 그 일을 겪었다. 신앙 사춘기를 통해 다시금 “영적 가면을 벗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롭게 들어야 한다.
영성 생활은 ‘과정’이다. 영적 ‘여정’이라 부를 수밖에 없음이다. 영적 가면을 인식하고 벗기 위해 정직한 기도로 나아가는 것은 한 번 체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이번 개정판의 출간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심지어 내게는 마땅한 일이다. 언젠가 이 책으로 영성 생활에 도움받았던 이들이라면, 오늘 이 자리의 삶을 개정판으로 쓰는 의미의 일독이 되었으면 좋겠다. 열정을 다하는 신앙생활이지만 뭔가 빠진 것 같은 헛헛함이나 삶과 유리된 분열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뒤통수를 때리는 망치가 될 것이다. 얻어맞아 아플수록 더 큰 사랑에 안기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영적 가면을 벗어라』는 이 책이 처음 출간된 36년 전보다 오늘 더욱 필요한 책이다.
지난 목요일 동반자과정 1학기 종강 날이었다. 모임 장소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읽고 있었다. 한 학기 내적 여정을 돌아보는 것으로 이보다 좋은 주제가 없다. 강의 대신 책 나눔으로 한 학기를 정리한다. 동반자과정 4기가 되니 벌써 네 번의 책 나눔을 한 것이고, 그때마다 새롭게 다시 읽고, 가끔 꺼내 읽은 것으로 치면 족히 열 번은 넘게 읽은 것 같다. 그래도 또 새로운 것이, 지하철에 앉아 아무 데나 딱 펼쳤는데 바로 빠져들어 읽게 되는 것이다.
옆에서 뭔가 뜨끈한 기운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맑은 초로의 여자 분이 환히 웃으며 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책 읽는 분 오랜만에 봐서요… 좋네요. 행복하시겠어요…"란다. 한참 쳐다본 모양이다. "(행복한 걸) 어떻게 아셨어요!" 했더니 "좋아하는 책 읽으시는 것 같아서요. 이미 보신 책을 또 보는 거 아니에요? 좋아하는 걸 하시니 행복하시겠죠." 하고 잘 가라며 내리셨다.
행복합니다
행복하다. 이 소중한 책을 가슴으로 읽고 나눌 벗들이 있어서… 가르치는 모임이 아니라 서로 배우는 과정이라 더 그렇다. 무엇보다 이 책을 처음 만나서 읽던 그때를 떠올리면 꿈만 같은 오늘이다. 내면이 무너지고 신앙이 무너지고 몸도 함께 무너졌던 그 시절. 이전의 방식으로는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던 시절이다. 가톨릭의 에니어그램 연구소에서 만난 영성이 한 줄기 빛이었는데, 놀랍게도 거기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고 행복한 1년을 지내고 떠나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다시 혼자가 되어 작은 아파트 카타콤 같은 거실에서 처절하게 읽었던 책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한 발을 내디디면 바로 낭떠러지일 것 같고, 그대로 지옥행일 것 같은 시절이었다. "책만 보는 바보"가 되어 읽던 시절이었는데, 돌아보면 책으로 다가온 영적 스승들과의 만남으로 말할 수 없이 풍성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혼자 읽던 책 중 하나가 <아래로부터의 영성>이었는데 마음으로 같이 읽고 나눌 벗들이 이리 많이 생겼다.
지난 수도원 순례 여정 중에 안셀름 그륀 신부님이 살고 있는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 잠시 머물렀다. 마침 방문하는 날에 수도원 행사가 있어서 개별 순례 외에는 가능한 것이 없었고, 수사님 한 분 마주할 수도 없었다. 언감생신 사인 받는 기회는 못 얻어도 인증샷이라도 남겨 와야지 싶어 책을 들고 갔다. 그렇게 얻은 사진이 소중하네! 오래 머무르고 싶은 수도원이었는데 아쉬움이 컸다. 성당과 경당에 앉아 기도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여기저기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다시 가서 오래 머물며 기도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어쩌면 안셀름 신부님도 오래 앉아서 기도했을 지하 경당에서의 기도는 잊지 못할 것 같다. 하남의 작은 아파트, 카타콤 같은 거실의 기도가 십수 년의 세월 끝에 뮌스터슈바르작으로 이어지고, 그 사이 소중한 영적 벗들을 얻었다. 행복하다.
갑자기 날아든 새 한 마리의 지저귐 같은 짧은 대화 끝데 지하철 아주머니는 떠나시고. 다시 아무렇게나 펼쳐든 책엔 이런 문구가 형관펜으로 칠해져 있었다. 은총으로 여기까지 온 내게 들려주는 저자의 말이다. 높은 이상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내 마음, 가장 낮은 곳을 꿰뚫는 한 마디이다.
필자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논하는 이 순간에도 이 아래로부터의 영성 안에 공명심이 파고드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아래로부터의 영성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내가 스스로를 구제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언제나 다시 반복하여 다음과 같이 주지시켜야 한다. "너의 모든 영성적 노력들, 네가 저술한 수많은 책들에도 불구하고, 너는 변덕스럽고 괴팍한 감정들과 명예욕에서 해방될 수 없을 것이다. "
드라마 <멜로가 체질>이 내 머릿속에 '미역국 라면' 칩을 넣었다. 미역국을 보면 꼭 한 번은 거기에 라면을 끓이게 됨. 손감독과 진주작가의 꽁냥꽁냥 장면에 '파 많이 넣은 떡볶이' '평양냉면' '미역국 라면' '사골국' 등 음식이 등장하는데 희한하게 모두 내 취향이다. 영화나 드라마로 보는 이병헌 감독 개그가 진짜 마음에 드는데... 개그 취향과 함께 음식 취향도 나랑 비슷한 것 아닐까 생각하게 됨. (아, 미역국은 내 '최애 국'이다. 현승이 낳고 산후조리원에 갔는데 끼니마다 다른 미역국이 나와서 행복했던 기억이다. 한 달 내내 미역국, 질린다며 억지로 먹는 산모가 대부분이었음. 그래서 식사 때마다 미역국 때문에 설레던 내 마음이 조금 부끄러웠던 기억... 미역국 라면을 끓이며 그 얘기를 현승에게 들려주었다.)
이 더운 날에 양지머리를 덩어리 째로 넣어 미역국을 한솥 끓이고 거기에 다시 라면을 끓였다. 당연히 맛있지!
글쓰기를 좋아하고 재능이 좀 있다고 모두 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책 출간으로 북 토크와 저자 인터뷰가 몰린 지난주를 보냈습니다. 글쓰기에 관한 질문이 쏟아져, 글 쓰는 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작가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냐는 질문을 받고 생각해보니, 단 한 번도 꾸어보지 않은 꿈입니다. 차라리 어린 시절 내내 음악가의 꿈이 있었습니다. 작가가 된 것은 어떤 행운이 작용한 것입니다. 돌아가신 엄마의 목소리가 자꾸 들리는 것 같은데 “야야, 니가 잘나서 된 것은 옶어. 교만하지 말어. 다~~아, 하나님 은혜여.” 평생 듣기 싫었던 말인데... 고까웠던 심정 빠지고 새롭게 들리네요. 하나님 은혜 맞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있었던 북토크 자랑을 하고 싶습니다. 특별한 북토크였습니다. 교회 홈페이지에서 댓글 놀이나 하던 저를 발견하시고 공적 글쓰기의 장으로 이끄신 서 대표님과의 대담으로 진행했습니다. <복음과 상황>이라는,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자리였습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새로운 주제로 글쓰기에 도전하도록 격려해 주셨습니다.
좋은 글은 독자가 명확한 글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늘 구체적 독자를 염두에 둡니다. 구체적이라지만 상상 속의 독자이기에 막연한 얼굴이긴 한데. 어디서들 오셨는지 얼굴을 가지고 찾아와주신 독자들이 계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의 일상과 글쓰기에 가장 큰 힘이 되는 영적 여정의 벗들인 연구소 동반자 선생님들이 대거 함께 해주셨습니다. 멀리 해외에 있는 후배는 제 친구를 대신 보냈습니다. 후배와 꼭 닮은 아름다운 귀와 표정을 지닌 친구를 보니 그리움과 감동이 밀려 왔습니다.
책을 디자인하고 편집하고 홍보하시는 출판사 간사님들께서 진행을 돕고 오신 분들을 환대하시니... 저를 계속 쓰게 하고 ‘저자’ 되게 하신 모든 분들이 한 자리에 모인 셈입니다. 아름다운 사진으로 자랑해 봅니다.
저녁 먹으며 남편이 "현승아, 너는 어떤 때 만족감을 느껴? 만족감을 자주 느껴?"라고 했다. 내게 물은 건 아닌데 답을 찾게 된다. 흠... 나는... 끙끙거리며 쓰던 글을 완성했을 때! 그리고 갑자기 요리의 신이 임해서 전에 해보지 않았던 요리를 뚝딱 만들고 났을 때.
끙끙거리던 글을 마치자마자 냉동실에 있던 갈치 몇 조각과 야채 박스에서 뒹굴던 무 한 토막을 꺼내서 우다다다 갈치조림을 하는데, 마침 고사리 불린 것이 한 줌 남아서 마지막에 넣고 졸였는데, 식구들이 "대애~박!"이라며 어떻게 여기 고사리 넣을 생각을 했냐며, 엄지 척 처묵처묵 해주실 때. 만족감이 열 배였다.
또 뭐 갑자기 닭다리살에 소금 후추 등으로 최소 양념을 해서 파와 함께 구웠는데, 이거 당신이 양념한 거냐, 양념된 걸 산 거냐 하며 믿을 수 없는 맛있는 맛이라는 표정의 JP, 엄마가 한 거지! 그냥 생고기였는데 엄마가 양념한 거야, 엄마 간이 진짜 딱 맞아! 하는 아들, 처묵처묵하는 아빠와 아들을 볼 때. 만족감이란 것이 차오른다.
셋이 먹고 입 싹 닦으려고 했는데... 퇴근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한 딸이 못내 눈에 밟혀서 퇴근 시간에 맞춰 1인분 용으로 한 번 더 해서 내놓았는데... 아, 이건 무슨 고기이고, 어디서 샀냐며 행복하게 드실 때... 참으로 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