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이 독서 모임에서 읽은 책들이다. 니체와 스피노자를 원문으로 읽었다. 책은 어려웠고, 이해되지 않는 책을 읽어가는 숙제가 늘 고역이었다.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을까, 하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모임에 갔다 알 수 없는 충만함을 장착하고 돌아왔다. 시니컬한 아이가 시니컬한 선생님과 함께 니체와 스피노자를 읽으며 거침없는 발설로 안티크리스트를 논한 것 같다. 이 모임 후로 청년은 한결 순해졌다. 청년이 독서모임에 참여한 것은 사람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매력 때문이다. 자신과 비슷한 모양의 영혼을 가진 한 어른이 정직하게 자신과 삶을 마주하는 모습을 보고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닮고 싶은 어른을 만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독서모임은 '교회' 청년부실에서 진행되었다. 심지어 목사의 제안으로 성사되었다. 교회는 참 좋은 곳이다. 교회가 아니라면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고, 만나서 마음을 열어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는 곳. 끼리끼리의 장벽을 넘어 큰 연결을 맛볼 수 있는 곳. 교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교회에 감사한다. 자기 다운 삶을 지난하게 살아오신 한 사람, 의심과 흔들림을 진실하게 내보여 방황하는 청년의 마음을 얻어버린 선생님께 감사한다. 청년의 마음에 하나님의 자비가 흘러들어 갈 통로를 마련해 주심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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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끼어 1박 2일, 대부도에서 강의로 불태웠다. 작은 교회 청년부 두 곳을 달렸다. 두 교회 수련회 장소가 4분 거리에 있었으니 달렸다고 하기는 좀 뭐 하네. 여하튼 조금 세게 말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불태우고, 그리고 달렸다. 펜션 수련회에 앉았노라니 청년 시절 수련회 생각이 새록새록 났다. 30여 년이 지났는데, 그 느낌이 그대로 살아왔다.  

8월 15일은 일 년 중 가장 인기 있는 날이다. 전국의 교회 청년부 수련회가 몰려 있어서 그렇다. 당첨은 늘 선착순이다. 제일 먼저 연락온 곳과 약속을 잡고, 이후에 오는 섭외 전화가 몇 통이 되었든 거절해야 한다. 인기가 아무리 좋아도 한 번의 강의만 가능한 것이다. 여러 상황이 교차하여  달리는 1박 2일, 세 번의 강의를 하게 되었다. 한 교회와는 내가 저녁 집회 말씀을 전하고, 다음 날 오전 연구소 은경샘이 에니어그램 강의를 하기로 했었다. 이 콜라보가 마음에 들어 설레고 있었는데... 은경샘이 갑자기 수술을 하시게 되었네! 청년 에니어그램 강의는 은경샘에게 죄다 토스하고, 끊은 지 오래되었는데 할 수 없었다. 저녁 집회 말씀 전하고 일박하고 오전에 강의까지 맡기로 했다. 임박해서 강의 문의가 또 와서 "안 됩니다..." 하려고 했더니. 장소가 대부도라 하고, 또 작은 교회라 한다. "작은 교회"는 못 참지! 게다가 장소가 4분 거리에 있으니 말이다.

이튿날 밤 강의를 기다리며 오후 내내 바다뷰 카페에 있었다. 읽어야 할 자료도 있고 하니 잘 됐다 싶었는데. 무리는 무리였다. 한없이 쳐지는 몸을 "괜찮아, 피곤할 뿐이야! 조금만 견디면 돼." 어르고 달랬다. 밤 강의까지 마치고 11시가 훌쩍 넘어 집에 도착.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가뿐한 몸을 기대하고 다음 날 눈을 떴는데 가뿐은커녕 심히 고장 난 몸이 되었다.  

병원에 가 코로나 확진을 받고, 링거를 맞고는 된통 앓아버렸다. 토요일 주일, 꼬박 누워 자다 앓다 자다 앓다 했다. 엎어진 김에 제대로 쉬게 되었다. 그 전주 교회 전교인 수련회 이후로 푹 쉬었어야 했다. 아픈 건 아픈 거고, 이렇게 쉬는 거다! 하면서 받아들이고 뒹굴었다.

오늘 아침, 가벼운 몸으로 눈을 떴다. 늘 하듯 베란다로 가서 하늘을 보았다. 하늘을 보려면 먼저 십자가를 봐야 한다. 벌써 올라온 해는 구름에 가렸고, 살살 부는 바람에 서늘함이 묻어 있다. "감사합니다" 기도가 나왔다. 팔다리에 기운은 없지만, 푹 쉬어 피로를 푼 몸 구석구석의 생기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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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더위에 창작활동을 하였다.
시원하고 간이 딱 맞는 오이미역냉국이다.
냉동 볶음밥과 함께 점심 도시락을 싸주었다.
이 더위에, 이렇게나 정성스러운 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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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학기를 마친 7월 둘째 주에는 요셉수도원 피정에 가는 것이 루틴이 되었다. 배나무밭이 드넓은 요셉수도원의 7월 밤은 달빛이 환하고 배나무 잎이 무성하다. 배꽃은 없지만,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시조를 읊게 되는 밤이다. 끝기도를 마치고 나와 조금 걷다 보면 이런 풍경이다.

 수도원에 도착하여 안내실 앞에서 순례객을 환대하는 친구들은 멍멍이들이다. 어쩌면 이렇게 순둥순둥 하게 생겼는지... 기도하고 일하는 수사님들을 꼭 닮았다는 생각에 쓰다듬어주고 놀았다. 유독 눈에 띄는 친구 이름이 '성탄이'이다. 등에 이름표를 달고 있다. 

둘째 날 아침기도를 마치고 나왔는데 성탄이가 혼자 놀고 있다. 어이쿠, 반가워서 또 한참을 쓰다듬고 놀았다. 어쩐지 이 녀석 내게는 딱히 관심이 없는 듯하다. 뭐랄까, "위로가 필요하면 쓰다듬든지, 말든지" 등을 빌려주는 느낌?

다음 날 산책길에 또 만났다. 눈이 어쩌면 그렇게 순하고 착한지... 성탄이랑 놀다 보면 잠시 후에 나타나는 수사님 한 분이 있는데, 마르코 수사님이다. 트럭을 타고 어딘가로 가시기도 하고, 밀짚모자에 장화 신고 소시지 공장 쪽으로 걸어 가시기도, 땀 뻘뻘 흘리며 전지 작업을 하시기도 한다. 아, 성탄이는 마르코 수사님 껌딱지였구나!

예수님 상 앞에서 저러고 수도원 입구를 바라보고 있는 성탄이는 트럭 타고 밖으로 나가신 마르코 수사님을 기다리는 거였다!

성탄이와 함께 마르코 수사님을 자꾸 마주치게 되었다. 들어간 첫날에 저녁 기도하고 돌아왔는데 방문 열쇠가 열리지 않았다. 안내 수사님이 오셨는데, 고장으로 확인되자 이걸 고칠 수 있는 분이 따로 있다며  전화를 걸더니 '마르코 수사님'을 찾았다. 금세 달려오셔서는 달그락달그락 몇 번 하셨는데 딸칵 문이 열렸다. 늘 이렇지! 해도 해도 안 되던 것이, 전문가가 와서 터치! 하면 해결된다니까. 조금 억울해 가지고 "저도 그렇게 했는데요..." 하고 안내 수사님도 "거 참, 여태 안 됐는데..." 하니까 마르코 수사님이 사람 좋은 웃음을 하시며 "성령님이 여신 거예요" 했다. 그리고 통째로 손잡이를 갈아야 하겠다며, 조금 이따 와서 고쳐 주시겠다고 하셨다. 전에 왔을 때부터 벌써 얼굴은 익히 아는 분이다. 기도 때마다 선창 하시는 노래 잘하는 수사님으로 알고 있었는데, 맥가이버시네! 성탄이가 마르코 수사님 껌딱지인 덕에 4박 5일 지내는 동안 마르코 수사님을 여러 번 마주하게 되었다.
 
모기 물린 곳이 부풀어 올라서 약을 사러 나가는 길이었다. 해가 아주 뜨거운데 수도원 입구 안쪽에서 수사님 한 분이 전지작업을 하고 계셨다. 열사병 걸리시겠네... 걱정스러운 마음이었다. 약을 사고 시원한 이온 음료 한 병을 샀다. 들어가는 길에 아직 작업 중이시면 드려야지 했지만, 내가 돌아갔을 때는 다 끝내고 들어가셔야지, 이 더위에... 했는데. 아직도 계시네. "수사님, 이거 드세요" 하고 봤더니 또 마르코 수사님이시다! 어느새 무성했던 풀과 나무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저러고 농부이시다, 기도 시간이 되면 어느 새 검은 수도복을 입고 기도를 선창하고 계시니 "기도하고 일하라(Ors et Labora)를 몸소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요하게 기도하고 요란할 것 없이 일하는 수도자들의 삶의 리듬이 일으키는 파동이 영혼을 울린다. 할 수 있다면 일상의 수도자로 저렇게 살고 싶다. 기도하고 일하고, 일하고 기도하는 단순한 리듬을 반복하면서... 아니 뙤약볕의 전지작업이나 문고리를 고치는 일과 그레고리안 선율의 기도가 다르게 들이고 보이지 않는 삶 말이다.

 수십 번을 기도하며 걸었던 저 큰 나무 사잇길은 이제 내 마음에 난 길이 되었다.  

4박5일 내가 먹을 식사를 챙겨가야 하고, 가 본 모든 피정집 중에 가장 열악한 곳이다. 수도원 피정을 이끄시는 신부님은 그래서 '사막체험'이라 부르는데. 이제 밥 챙겨가는 것도 어렵지 않다. 노동 봉사 하시는 분이 고추를 따주시고, 마르코 수사님이 지나가다 자두도 주시고 입맛 돋우는 일이 있다. 불편한 잠자리 견디고 일어나 새벽공기 헤치고 기도하러 걷는 기분도 좋다. 그리스도인에게 편안한 세상이 도래했는데, 부러 불편하고자 사막으로 물러난 분들이 수도원의 아버지들 아닌가. 내 마음에도 사막으로 가는 길이 나면 좋겠다.   

성탄이처럼, 마르코 수사님처럼, 예수님처럼 순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살자고 다짐한다. 다짐해서 되는 일이 아닌 줄 알기에... 기도한다. 마르코 수사님과 여러 수사님들,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기도로 이 세상을 지탱해 주시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기도 찾아 삼만 리, 수도원 찾아 삼만 리

두어 달쯤 전인가. 연구소 선생님들과 내 꿈을 가지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었다. 가족들이 기차 타고 어딘가로 떠나고 나만 기차역에 남겨진 꿈이었다. 하룻밤을 어딘가에서 보내야 하는데,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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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리 마음에 힘이 들어가질 않고 자꾸 푹푹 꺼지는가 했다. 밥도 뭣도 하기 싫고, 장도 보지 않고, 꾸역꾸역 최소한의 일만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고보니 해마다 엄마가 우리집에 와 지내시던 7말8초 동생 휴가 기간이다. 늘 마음 어느 구석에서 맴도는 그리움과 슬픔이 새롭게 불러 일으켜지는 이유였구나 싶다. 그것만도 아닌데... 가만히 귀기울이니 어떤 노래 또한 마음에서 오토리버스로 재생되고 있다. 눈 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무궁화 꽃을 피우는 아이... 가자 천리길 굽이굽이 쳐가자... 내가 아주 어릴 때였나 우리집에 살던 백구...  김민기 님을 그냥 떠나보낼 수 없는 슬픔이던 것 같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기사에서 강론 하나를 접했다. 아름다운 강론이라 깊이 위로가 된다. 읽다 보니,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셨을 적에 남편이 청년부에서 이 비슷한 내용의 설교를 했던 기억이 난다. 설교 안에서 아주 짧은 언급했었던 것 기억이다. 그 일로 당회에 불려가 사과를 해야 했었다. 예수님 닮은 아름다운 사람들의 죽음이 슬프고, 그립고, 새롭게 마음이 아프다. 괴물이거나 괴물과 싸우느라 괴물을 닮아가거나... 그 둘만 보이는 조국교회와 거기 담겨 크게 다를 것 없는 나의 처지에 무력하고 자괴감만 든다. 괴물과 싸우면서도 괴물을 닮지 않고, 유순한 소년의 마음을 유지한 사람... 
 



지난 주일, 7월 21일에 돌아가신 김민기 님은 오늘 아침 8시에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장례식을 끝으로 우리 눈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어디로 가셨을까요? 그분처럼 살다 간 모든 분, 그 맨앞에 계신 우리의 주님이 가신 곳으로 가셨지요. 바로 우리 가슴,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수녀원에서 장례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저로서나 수녀님들로서나 이런 장례 미사는 처음입니다. 어떤 수녀님이 물으셨습니다. “그분 신자셨던가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보통 신자보다 훨씬 더 신자이셨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속에는 이방인 백인대장을 두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어떤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

김민기 님의 한평생은 자신이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그분이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분과의 대담에서 사담처럼 한 이야기한 토막을 들어 봅시다.


“서소문에 범진사라고 있었어. 보안사 취조실. 들어가니까 하사관들이 딱 들고 오는 게 사각형 각목이었는데 걔네는 베테랑들이지. (패는 시늉) 다다다닥.... 그때 아, 내가 죽는구나. 그런 느낌을 처음 받았어. 한참 맞다 보니까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패는 놈들 모습이 슬로우비디오로 보이는 거야. 나 죽는 거, 아픈 거는 감각이 멀어지고. 근데 걔네들한테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구.”
“미안했다고?”
“한없이 미안해지는 게, ‘나 때문에 이들이 죄를 짓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어.”
“그게, 몇 살 때인가?”
“스물서너 살? 그러고 풀려났는데 그때 한참 해방신학이 뜰 때였지. 누가 그러대.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는 총으로 쏴서 죽여야 된다’고 했다고. 근데 나는, 죽어 가면서 나를 고문한 놈들한테 미안하고 죄송했다고 했어. 그래서 본회퍼 식의 해방신학은 아닌 것 같다 그랬지. 나중에 운동권 애들한테도 그랬어. ‘너무 미워하지 마라. 미워하게 되면 걔 닮아 간다.’ 나중에 보니까 박정희 무지하게 미워하던 놈들이 박정희 비슷하게 되더라고. 내 참, 별 얘기까지 다 하네.(웃음)”

그거였을까? 괴물과 싸우면서도 괴물을 닮지 않고, 유순한 소년의 마음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문득 가슴에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올라 얼른 막걸리 잔을 비웠다. ('한겨레와의 대담'에서)

 


김민기 님은 서울 대학로에 ‘학전(學田)’이라는 소극장을 열었는데, 그분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말 그대로 인재를 키워 내는 ‘못자리’를 만들고 싶어서였습니다. 과연, 오늘 <JTBC> ‘사건 반장’의 표현을 빌자면, 음악계는 물론, “송강호, 최민식, 황정민 등, 요즈음 영화계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 다 학전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양희은 씨를 비롯해서 대구에 가면 큰 거리에 그 동상이 서 있는 김광석 등 수많은 가수와 다른 연예인들 또한 학전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김민기 님은 그런 인물들을 ‘앞것’들이라 하고, 자신은 ‘뒷것’이라고 했답니다. 사람들 앞에 화려하게 나타나는 일은 그들이 할 수 있게 하고, 자신은 뒤에서 그들을 키우고 돕는 역을 하는 것이 사명이라는 뜻이랍니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며 생각나는 성서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점점 더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 요한복음 3장 30절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의 말입니다.

이런 요한을 두고 우리는 선구자(先驅者)라고 하지요. ‘선구자’라는 노래도 있지만, 이 말은 본래 하느님의 아들, 인류의 구원자 ‘앞에’ 와서, 그분의 길을 닦아 놓을 사명을 띤 세례자 요한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었지요. 옛날 임금님의 행차 때, “물렀거라!” 하고 외치며 사람들에게 길을 비키게 하는 이를 생각나게 하는 말로, ‘앞에서 달리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대부분의 사람이 남을 제치고라도 자신이 앞에 나서고 싶어 하고, 남이 이룬 공적까지 제 것으로 돌리려는 경향을 보이는 세상에, 자신이 양성한 사람들을 앞에 내세우고 자신은 뒤로 물러서 있는 삶을 끝까지 살아 내신 이분은, 어떤 분의 표현대로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세례자 요한이 선구자였다면, 이분은 후구자(後軀者)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 ‘앞에’ 온 이가 선구자라면, 그분 ‘뒤에’ 온 김민기 님은 후구자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기 때문입니다.

후구자가 왜 필요한가? 김지하 씨가 쓴 연극 '금관의 예수'에 김민기 씨가 작사 작곡한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선, '금관을 쓴 예수'라니 무슨 뜻이겠습니까? 가시로 엮은 관을 쓰고 거기에 찔려 피를 철철 흘리는 것이 본래 예수님의 참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누가 그분의 머리에 금관을 씌워, 옛날 로마 군사들보다도 더 지독하게 그분을 모욕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가시관을 못 견뎌 하는 내가, 금관을 씌워야 마음이 편해지는 모든 이가 한 일입니다. ‘준주성범’, ‘주님을 닮는다’라는 뜻이지요.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 13,15)  당시 동족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비록 그가 종이라 해도 시킬 수 없을 만큼 비천한 일을 하시는 스승의 행동을 보고, 베드로가 깜짝 놀라 “안 됩니다.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하십니다” 하며 보인 반응은 너무 당연했지만, 바로 다음 날, 그분은 대야에 담긴 물이 아니라, 당신 몸속에 있었던 피와 물을 모두 쏟아 그들과 우리를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이 아니라, 당신의 살점으로 닦아 주셨지요.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분을 닮고 싶지 않은 우리는, 황금을 좋아하는 우리의 모습에 따라 그분의 머리 위에 황금관을 씌우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분의 모습에 따라 자신을 바꾸는 대신, 내 모습을 따라 그분을 바꾼 것입니다. 하느님과 황금은 한꺼번에 섬길 수는 없는 일이어서, 한쪽을 종으로 섬기면 다른 쪽은 종으로 부려 먹게 되는 것은, 천 길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면 죽을 수밖에 없는 중력 법칙만큼이나 확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가시관을 쓰고 사는 무지렁이들에게로 가시려는 그분의 발길을 막아서 있는 형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다시 가시관을 쓰고, 보실 때마다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루가 15,20)을 느끼셨던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 ‘얼굴 여윈 이들’에게로 언제나 다시 오셔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김민기님이 작사 작곡한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의 노랫말을 들어 봅시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하소서
고향도 없다네 지쳐 몸 눕힐 무덤도 없이
겨울 한복판 버림받았네 버림받았네

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여
거절당한 손길들의 아 캄캄한 저 곤욕의 거리
어디에 있을까 천국은 어디에
죽음 저편 푸른 숲에 아 거기에 있을까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하소서

가리라 죽어 그리로 가리라
고된 삶을 버리고 죽어 그리로 가리라
끝없는 겨울, 밑 모를 어둠 못 견디겠네
이 서러운 세월 못 견디겠네
이 기나긴 가난 못 견디겠네
이 차디찬 세상 더는 못 견디겠네
어디 계실까 주님은 어디
우리 구원하실 그분
어디 계실까 어디 계실까
어디 계실까?



사람들이 이렇게 간절히 찾는 그분은 정말 어디 계시는 것일까?

우리 믿는 이들에게 이보다 더 뼈아픈 말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머리에 금관을 씌웠고, 금관을 쓴 예수는 이미 하느님의 아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가신 그분이 아닙니다.

첫 자리, 사람들의 박수와 각광을 받는 곳만 좋아하는 우리의 비뚤어진 경향에 김민기 님은 앞으로도 계속 외칠 것입니다.

"어디 계실까 주님은 어디
우리 구원하실 그 분
어디 계실까"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에 젊었을 때부터 놀랍도록 충실하셨던 김민기 님은 우리 마음속에 오래 남아 우리와 온 세상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메아리를 일으킬 것입니다.

인간 세상과 모든 생명의 어머니 지구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 듯한 오늘날, 후구자로서 놀라운 모습을 보여 주신 김민기 님을 주께서 “나를 참으로 닮았구나!” 하며 안아 주시고, 이 뒷것의 목소리와 모습이 우리 가슴에 언제까지나 남아 메아리를 일으키게 해 주시라고 구합시다.

이병호 주교(빈첸시오)
전 전주교구장
 
출처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후구자의 목소리와 모습, 언제까지나 남아 있길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이 글은 이병호 주교가 지난 24일 전주 인보성체수도회 총원에서 봉헌한 김민기 장례 미사 강론 전문입니다. 지난 주일, 7월 21일에 돌아가신 김민기 님은 오늘 아침 8시에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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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처럼 달콤한 신학자라 불리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사랑의 네 단계를 말합니다.

첫 번째, “나를 위하여 나 자신을 사랑한다.”
두 번째,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세 번째,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네 번째, “하나님을 위하여 나 자신을 사랑한다.”

많은 경우 ‘나를 사랑하는 이기적 동기’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돕고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누구시고 내가 누구인지, 체험이 깊어질 때 우리의 사랑은 자랍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 때문이 아니라 그분 그 자체로 사랑합니다. 하나님 사랑에 눈을 떠서 다시 나를 바라볼 때, 내 안의 빛과 그림자를 두려움 없이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어떠함’에 있지 않음을 알고, 그 사랑을 신뢰하기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합니다.

에니어그램은 ‘사랑 안의 성장’에 관한 것입니다. 자기 사랑이 자기 함몰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 사랑에 닿아 자기 개방과 자기 증여로 이어지는 여정이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입니다. 2024년도 하반기 내적 여정에 초대합니다. (하반기에는 대면으로만 진행합니다.)


✔ 장소 : 경기 하남시 미사대로 410 미사강변오벨리스크 4층
✔ 인원 : 12명
✔ 비용 : 13만 원(점심과 커피 제공) / 단계별
✔ 문의 : 010-6209-0635
✔ 기본1 과정부터 영성과정까지 전 과정 수강 시 10% 할인해 드립니다.
  (영성과정 이후 환급)

✔ 일정 및 신청 :

기본 1 : 8월 30일(금) 10:00-17:30
신청 http://bit.ly/47hVPoY

내적여정 기본 1단계(대면)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기본 1단계 신청양식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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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2 : 9월 27일(금) 10:00-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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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종합비타민 먹어. 

엄마, 진짜 종합비타민 먹을 거지?

엄마, 종합비타민 먹어.... 내가 주문했어.

 

<노을이 물드는 시간>을 출간하고 났더니 갱년기 증상이 몸으로 제대로 오는 느낌이다. 글을 쓸 때와 달리 사람들을 만나 중년의 몸과 영성에 대해 '말'을 하고 보니, 역시나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었네, 싶은 것이다. 정말 잠을 잘 자는데... 남편 안식월 여행으로 시차로 인한 불면증이라 생각했었다. 생각해 보니, 이거 갱년기 증상이네! 다른 증상으로 병원에 갔는데 "갱년기 증상이에요. 갱년기는 아무거나 갖다 붙여도 다 설명돼요. 종합비타민 드세요? 잘 챙겨 드세요." 했다. 이제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노라, 종합비타민이든 뭐든 잘 챙겨 먹고 몸을 잘 돌보겠노라 공표했다. 그 말을 들은 현승이가 눈만 마주치면 종합비타민 타령을 하더니, 제가 알아보고 주문한 것이다. 

 

세심한 아들, 마음 따뜻한 아들 자랑은 아니다. 물론 남다른 따스한 성품이긴 하지만, 저 행동에 담긴 '분노'도 나는 안다. 몸이 자꾸 아프다는 엄마 걱정이 되어 죽겠는데... 병원도 잘 안 가, 꼭 필요한 것 챙겨 먹는 거도 잘 안 해. 말로는 늘 하겠다 하고 가겠다 하면서 실행은 안 해. 머리로 사는 엄마를 보는 답답한 아들의 마음이다. 그래서 부끄럽다. 고집스럽게 살던 방식을 고집하는, 말 안 듣는 노인 같은 엄마인 나다. 이런 것 챙겨 먹는 것이 내게는 사소해서 더 힘든데, 사소한 이 일을 성실하게 하기로 했다. 종합비타민 두 알 먹는 것을 기도처럼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현승이는 내게 내게 비타민 같은 아들이다. 아이가, 아니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마음이 깊고 따스할 수가 있지? 싶다. 자칭 엄마 중독자(https://larinari.tistory.com/2835)였던 아들이라 내게 유난하지만, 내게만 그렇지 않다. 현승이는 아빠나 누나, 친구들, 심지어 제게는 싫은 어른들에게도 기본적으로 연민의 마음을 거두지 않는다. 이 아이의 이 아름다운 존재의 빛깔을 비타민 정도로 소비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엄마의 기쁨이 되기보다 자기 자신이 되기를 바란다. 착한 아들보다 자기 존재를 먼저 돌보고 '되어야 할 자기'가 되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나는 종합비타민 두 알을 성실하게 먹을 예정이다.

 

 

지난 달 말에 모처럼 가족 여행을 했는데,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독특한 커피에 독특한 사장님을 만났다. 핸드드립 훈제 커피를 내리더니 어느새 기타를 잡고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니, 부르는 모든 노래가 현승이 음악 저장함을 턴 것처럼, 김현승을 위한 플레이 리스트였다. 엄마 아빠 누나가 서로 "대박, 대박" 하면서 눈빛 교환하는데, 당사자는 고개도 들지 않고 읽던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지만 귀와 온 정신은 음악에 가 있었음)다. 까딱까딱하는 다리를 나는 보았지! 

 

현승아, 누구의 비타민이 되려 하지 말고 너 자신이 되어 살길. 그러면 그냥 너는 존재 자체가 세상의 비타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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