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은 사람 풍경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풍경이라도 사람이 담겨야 내게는 비로소 의미가 된다. 내 평생 뉴질랜드 남섬 여행만큼 멋진 풍경을 몰아서 마주한 적이 없었는데. 그래도 결국 마음에 남는 것은 그 배경의 사람이다. 남편과 둘이 여행하면 좋은 풍경에 내 독사진, 몇 장 안 되는 JP 사진, 각도 참 안 좋은 셀카 정도인데. 이번 여행에선 커플 사진을 많이 건졌다. 그 모든 사진 중 참 좋은 사진은 넷 단체사진인데,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너무나 자랑하고 싶어서 여행이 끝나기도 전에 페이스북에 공개했었다. 사진마다 표정이 좋고, 표정보다 더 좋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 그중에서도 최애는 후커 밸리 트래킹 끝에서 만난 마운틴 쿡 배경의 빙하호수 배경의 네 인물이 담긴 사진이다.

 

고고씽 뉴질, 남섬 원정대 담당 업무 : JS 대장 / YS 회계 및 실세 / JP 총무 / SS 서기 및 유흥
 

남섬 여행을 위한 공식 첫 회의에서 업무분장이 있었다. 참으로 적절한 업무분장이었고, SS를 제외한 나머지 원정대는 정말 감동적으로 임무를 수행해 주셨다. 벌써 두어 달 전의 기억이 된 이 여행의 제목은 내게 "얹혀간 여행"이다. '기록'에 관한 한 각자의 방식으로 타고난 네 사람이라 내가 담당한 '서기'의 의무는 의미가 없었다. 여행 계획과 여정과 회계에 관한 정확한 기록, 여행 후 디테일한 기억의 기록에 얹혀서 여행을 누리고, 다녀와서는 힘들이지 않고 추억을 복기한다. 이렇게 여행하면 한 번쯤 싸워야 하는데... 우리 왜 안 싸워? 이런 심정. 심지어 돌아와 해단식 같은 지난 주일 모임에서도 한 번쯤 싸웠어야지, 우리 왜 안 싸웠어? 서로에게 물었다.  그러게요? 우리 왜 안 싸웠을까요?

 

(다 커서 찾아간 교회를 모교회라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모교회에서의 인연이다. 둘 다 이런저런 교회 경험과 환멸 속에 방황하다 찾은 교회였다. 그 청년부에서 만나 결혼했고, 거기서 두 아이를 낳았고, '한영동산'이라 불리던 교회 앞의 동산은 우리 아이들에겐 유년 시절 비밀의 숲이다. 좋았던 교회이다. 어느 순간 교회를 옮길까 고민하던 시점이 있었다. 뭔가 공허하고 채워지지 않는다는 느낌이었고, 교회 문제라기보단 우리 문제가 아닐까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형식적 교회에 만족하지 못했다. 진정한 공동체가 있을 것이고, 우리가 일궈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정말 '공동체'에 목을 매는 커플, 한쌍의 바퀴벌레이다. 공동체를 찾고 싶었다. 그때, 교회를 '가정교회 시스템'으로 전환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정교회로의 전환이 급진적이라 판단되었던 것일까. 여성들 위주의 구역모임을  '가정(또는) 부부 중심'의 소그룹으로  실험적으로 운영하는데 우리 구역이 뽑힌 게 신의 한 수(또는 악마의 한 수)였다. 그로부터 시작한 가정교회 시스템이 정말 좋았고, 교회를 옮길 마음이 싹 사라졌다.(아, 그러고보니 남편은 가정교회 주제로 논문을 썼었네!) 그리고 그때가 뉴질 원정대 JS, YS, JP, SS 드림팀 구성의 시작이었다.  

 

실은 이 처음의 이야기들을 잊고 있었다. 뉴질랜드 여행은 '뉴질랜드 펠로우십 교회'를 돕는 일로 시작되었다. JS 대장님의 오랜 Kosta 인연으로 개척부터 도운 교회이다. 개척 후 5년의 세월이 흘렀고, 꾸준히 성장하는 교회의 리더십을 새롭게 하는 일을 돕고자 하는 것이 여행의 주요한 목적이었다. 어... 어... 하다 얼떨결에 합류한 NFC 리더십 수련회를 비롯하여 주일 예배, 무엇보다 수시로 있던 모임에서 나는 적잖이 감동을 받았고, 많이 부러웠다. 인생 가장 치열한 시간을 사는 세대였는데, 교회를 향한 열정으로 그냥 시간과 마음을 내는 사람들이었다. 아, 나도 한때 그랬던 적이 있었지. 내 교회가 내 삶이었던 적이 있었지. 교회가 공동체였고, 공동체가 그냥 교회였지. 그때가 그때였다. 서재석 목짠님, 박영수 목녀님과 함께 했던 드림목장 시절이었다. 
 
수련회도 했고, 주일 예배도 함께 했고, 그리고도 모여서 저녁 먹으며 시간을 보냈는데... 월요일 밤에 이들은 또다시 모였다. 소그룹 리더들이 모였다. 바로 그 모임에서 지난 시절 우리의 드림, 교회와 공동체를 향한 꿈이 모두 소환되었던 것 같다. 모임이 좋았다. 와하하하 웃으며 질의응답을 하는 중 소그룹에서는 리더와 함께 리더를 돕는 헬퍼가 꼭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중, 남편이 "제가 부구역장이고, 대표님이 구역장이셨다니까요."라고 했는데. 아, 그랬었다. 실험적 부부구역에서 구역장과 부구역장이었었지! 그리고 시작된 가정교회인 '드림목장'에서 공동체의 꿈을 살아봤던 것 같다. 우리 부부로서는 청년부 리더로 살아온 세월이 있었지만, 앞선 세대들과 마음을 나누는 교회를 처음 경험해 본 것이다.

 

그땐 그랬지... 그런데 우리를 그렇게 뜨겁게 달구었던 공동체의 경험, '가정교회'는 '모' 교회로부터 떠나와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시기도 이유도 조금은 달랐지만 결국 두 분과 우리는 그 행복했던 시절을 뒤로하고 거기를 떠나왔다. 그리고 '드림목장'의 경험을 기쁘고 아프게 간직한 채 교회를 향한 '드림'을 일정 정도 접고, 접은 만큼의 실망감과 그만큼의 허허로워진 마음으로 각자 낯선 교회 공동체에 어정쩡하게 몸담고 있다. 그래도 만나면 여전히 대화의 주제는 '교회'이다. 뉴질랜드 펠로우십교회, 갈등과 반목으로 상처받아 피 흘리는 모교회, 그리고 여러 교회, 우리들의 교회 이야기들...
 
목짠님, 몽년님. 좀 보편적인 호칭으로 바꿔보고 싶은데 여전히 두 분을 이렇게 부르게 된다. 실험적 공동체, '부부구역' 시절의 구역장과 부구역장의 관계로 시작한 드림목장 시절의 호칭이다. 교회와 공동체가 내 안에서 하나였던, NFC 교회 형제자매들의 열정에서 보았던 그 시절의 호칭이구나 싶다. 좋은 경험일수록 카피되지 않는 것이다. 그 시절로 족하고, 오늘까지 이어지는 만남으로 족하고, 한 번쯤 있어줘야 할 싸움도 없이 풍성한 여행으로 족한 이 여행이 교회이고 공동체이다. 뉴질랜드, 펠로우십, 교회는 우리 넷 사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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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기도하러 와요."
수녀님들과 수사님들은 '우리 집'이란 말을 흔하게 쓰신다. 몸담고 살고 있는 수도공동체를 '우리 집'이라 부르신다. 대학원 졸업동기 수녀님이 "선생님, 우리 집에 기도하러 와요. 벚꽃 필 때 우리 집 참 예뻐요. 한 번 와요." 하셨었다. 빈말이 아니었던 게 이 봄에 연락을 주셨다. 남편 안식월이 내게는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쉬는 月'이 되어버려 도통 시간이 나지 않았는데... '꿈과 영성생활' 여러 그룹을 동시에 종강하고 틈이 생겼다. 저녁기도 시간에 맞춰서 방문했다. 건축하는 공동체 수녀님이 직접 설계를 하셨다는 수녀원의 작은 성당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저녁기도 시간이 20분인데, 그 시간에 대기 위해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2시간을 갔다. 시편으로 드리는 베네딕토 수녀원의 저녁기도는 20분으로 끝났지만, 그리로 가는 길 이미 기도였으니 내게는 2시간 20분의 기도이다. 해가 떨어지고 있고 지붕 위의 닭이 울고 있다. 새벽이든 저녁이든 밤이든 닭이 세 번 우는 소리가 들리면 그분이 말씀하신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부인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시고,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돌이킨 후에 내 양을 돌보라"라고 하셨다. 수녀원 여기저기 소개해 주시며 수녀님께서 "지붕 위의 저 닭은 깨어 있으라 뜻이에요."라고 하셨다.  20분, 2시간 20분, 오는 시간까지 4시간 20분... 기도는 모두 그분 앞에서 깨어있기 위한 시간이다. 

 

다음 주 수요일에 남편과 함께 베네딕도 수도원 순례 여행을 떠난다. 순례 준비를 위해 묵상하고 있는 '베네딕도 수도규칙'의 지혜와 통찰이 믿기지 않게 놀랍다. 부러 신경 쓴 것도 아닌데, 마침 오늘 여기를 다녀오게 되었으니 이끄심이 신비롭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라." 순례 여행을 통해 분별하고 결정할 일들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미 답을 주신 것인가 싶기도 하다. 여기서든 저기서든, 이것을 하든 저것을 하든, 떠나든 남든 뭘 하든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 

 
뉴질랜드 남섬에서 본 엄청나게 키가 큰 미류나무를 보았다. 아파트로 둘러싸인 수녀원 동산에 이런 나무가 있었다. 놀라서 탄성을 내지르니... 수녀님께서 "내 성소예요. 이 미루나무 때문에 이 집에 온다니까." 했다. 성소聖召란,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이란 뜻이고 성직자나 수도자로 부름을 받아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온전히 봉헌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이 커다란 미류나무를 보고 반해서 수녀님이 되셨다.... 는 것은 아니겠지만, 부르심을 확인하는 수녀님만의 무엇이었다는 것이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 표현에 의하면 이 미루나무는 수녀님의 '집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가 된 셈이다.


 나오는 길에 정원에서 본 붓꽃. 어릴 적 우리 집과 교회 사이의 둔덕에 흐드러졌던 것이 붓꽃인데... 어쩌면 내 마음의 성소!
 

 

엄마, 내가 어버이날 꽃을 사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알지? 내가 선물에 진심인 거. (알지! 우리 현승이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가족에게든 친구에게든 진심이지. 오직 그 사람에게 의미가 될 선물이라면 가격을 따지지 않지. 지나칠 정도로 따지지 않지!) 그래서 꽃을 사는 게 싫고 아까워서가 아니야. 나는 의미가 없는 것 같애. 어버이날이라고 다들 꽃을 하나씩 사는 게, 그게 똑같이 꽃을 받는 게 의미가 있어? 만약 엄마한테 의미가 있다면 괜찮고, 그거면 충분히 의미가 되는 거고! 그래서 묻는 거야. 엄마가 어버이날 꽃 받는 게 의미가 있어? 엄마도 남들 한다고 다 하는 거 안 좋아하잖아.

 

어, 의미가 있어. 당장 이제 오늘부터 친구들 카톡 프사가 어버이날 꽃으로 막 바뀌거든. 이게 그렇더라고. 그게 나만 못 받으면 좀 쓸쓸해. 그러니까 그냥 해 줘. 엄마한테 의미가 있어! 화려하고 큰 꽃다발 아니어도 돼. 

 

틀, 형식의 중요성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할까 하다 말았다. 리추얼과 상징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되지, 꼭 주일에 예배에 가야하는지에 대해서도. 진정성은 없고 형식만 남은 종교 행위가 문제이지, 우리는 보이지 않는 마음을 담는 형식, 제도, 리추얼을 필요로 하는 몸을 가진 인간이라는 얘기도... 막 하고 싶었는데 참았다. 

 

의미를 모르겠으면서도 이렇게 적절하게 마음에 드는 꽃다발을 준비했다. 분홍 카네이숀과 노란 장미에 냉이꽃이라니! "아무 꽃" 같은 들꽃이 제일 좋은데... 냉이꽃, 이 아름다운 아무 꽃이 들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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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산책에 실패했다. 비가 그쳤나 싶어 나가면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이대로 비 맞으며 걸을까, 들어가 우산을 챙겨 나올까 갈등하다 생각보다 차거운 비에 집으로 들어오기를 두세 번. 완전히 그친 것을 확인하고 밤산책에 나섰다. 길은 젖었으나 적당한 기온, 적당한 바람에 며칠의 결핍감이 싹 사라졌다. 아무도 없는 탄천 길 좋다. 아, 좋다.

 

향기로 존재감 뿜뿜하는 아카시아가 코와 눈과 마음을 잡아끌었다. "하나님, 아카시아 향기가..."로 시작했다는 어머니의 대표기도가 다시 생각난다. 아카시아 향에서 하나님을 느끼는 감성과 영성이 우리 어머니에게 있다는 것, 아는 사람이 있을까? 어머니 영혼의 아름다움을 나만큼 아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 어머니는 아카시아꽃이다.

 

탄천에 찔레꽃이 있었다고? 길 오른편에 흰꽃이 있어서 들여다보니 찔레꽃이다. 몇 년을 산책하며 처음 보는 것 같다. 찔레꽃은 우리 엄만데... 어릴 적 목사관 화단에 커다란 분홍 찔레꽃. 그 꽃을 꺾어 강단을 장식했던 엄마의 똥손이 기억난다. 어린 눈에도 참 볼품없이 꽂았던 것 같은데... 손이 똥손이라고 마음까지 그랬던 건 아닐 텐데. 꽃을 사랑하고, 꽃으로 강단을 장식하던 엄마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 나만 아는 엄마, 나만 기억하는 엄마이다. 분홍 찔레꽃의 기억에 더해 하얀 찔레꽃은 엄마 돌아가시고 울며 울며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노래이기도 하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 발목 아프게 내게 오시네

밤다다 보는 꿈은 하얀 엄마 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   

 

사실 내가 어렸을 적에 좋아하고, 동요대회 나가서 부르기도 했던 같은 멜로디의 '가을밤'이고.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길 어두워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우리 엄마는 찔레꽃이다.

 

그렇게 걷노라니 "아, 내일이 어버이날이구나!" 엄마는 안 계시고, 아픈 어머니의 어버이날을 제대로 챙길 수가 없는 형편이네. 그리운 찔레꽃 엄마, 그리운 아카시아꽃 어머니... 가슴이 둔탁하게 아프고 흐르지 않는 눈물이 몸 어딘가를 맴돈다. 고개를 떨구고... 그렇게 걷노라니 바닥에 한가득 비에 젖은 토끼풀이 싱그럽다. 땅바닥에 딱 붙어 비 젖은 모습이, 젖었으나 이제 비 그쳤으니 다시 뽀송해질 토끼풀이 꼭 나 같다. 찔레꽃 엄마를, 아카시아꽃 어머니를 그리워 목을 빼고 쳐다보는 나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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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물드는 시간> 에필로그는 "인생 후반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진짜 여행이고 여행지는 네팔이다. 독자들은 어쩌면 지나칠 이야기이겠으나, 가장 무게가 실린 내용은 이것이다. 네팔에서 지낼 1년 동안 머리 염색을 끊겠다는 결심이다. 30대부터 흰머리인지 새치가 나서 일찍이 뿌리염색을 시작했다. 그전까지 말총머리로 굵고 검고 빛나는 머리칼이었는데... 한두 달에 한 번 하는 염색을 건강한 모발이 견디지를 못했다. 언젠가 염색을 끊으려 했는데 현승이가 성인 될 때까지만 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했는데, 성인이 되었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꾸역꾸역 하고 있다. 
 
이래저래 시기를 놓쳤더니 뿌리 쪽이 또 하얗다. 동네 두피관리 샵 같은 게 생겼는데 "뿌리염색 25,000원"이라고 쓰여 있다. 가격도 좋고, 집 앞이니 산책 나가는 길에 예약을 하려고 들어가 보았다. 예약은 무슨 예약, 바로 지금 할 수 있다고 한다. 할 때가 한참 지났으니 이게 웬 횡재냐, 덥석 앉았다. 열심히 할 일을 하는 주인장에게는 미안한데 한 시간 반 정도 앉아 염색하는 동안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신상 캐기와 영업, 영업과 신상 캐기를 오가는 대화에 온갖 기를 다 빨리고 나왔다.
 
왜 이렇게 되도록 염색을 안 한 건지, 그러다 바빴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일을 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신상을 물어가며 조여 들어오는 대화. (직업을 묻는 질문에 답하는 게 어렵다. 심리치료사, 연구소 소장, 작가, 강사... 뭐라 소개해도 깔끔하게 끝나는 법이 없다.) 손톱 관리를 좀 해드릴까, 두피 케어는 이래서 좋다, 심지어 동충하초 술을 한 잔 마셔보겠느냐, 동충하초 술과 함께 두피 관리를 받으면 머리숱이 이렇게 많아진다, 동충하초가 몸에 이렇게 좋다, 비싼데 병원비 내는 것보다 낫다...  칼같이 자르지도 못하고 적극적으로 듣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친절함으로 에너지를 다 탈렸다.
 
배가 고프고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고... 뭔가 먹어야 하는데 집에 당장 먹을 것이 없다. 애들 뭘 먹일지는 생각도 안 나는데 다행히 현승이는 냉동실 고기 꺼내어 굽고 있고, 채윤이는 밥 생각이 없단다. 냉장고에 있는 건 야채... 샐러드만 먹을 수는 없는데... 탄수화물이 필요한데! 몸이 빠르게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파스타 면을 삶아서 파스타 샐러드를 만들었다. 정말 나를 위해서, 나만 위해서 만들었다. 생각 없다던 채윤이가 달라붙어 먹기에 포크질에 신경질을 담았더니 조금 먹다 나가떨어졌다.
 
좋아서 하는 요리, 진심으로 나를 위해서, 나만을 위해서 요리하는 행복도 찾아야겠다. 평생 요리해 놓고 "맛있어? 맛있어? 맛이 어때?" 반응과 피드백, 인정과 칭찬에 울고 웃는다. 좋아서 해놓고 내 방식의 반응을 강요한다. 이거 신혼 때 벌써 깨달았던 건데... 나는 남편을 위해 하는 요리가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요리는 당신이 좋아서 하는 거 아니야?"라고 천진한 T가 천진난폭하게 현타를 날렸었는데 말이다. 아, 사랑은 주는 사람이 정의하는 게 아니야. 받는 사람이 사랑으로 받아야 사랑이야! 이때 이후로, 이 큰 깨달음으로 강의에서 우려먹고 있지 않은가. 요구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배려를 선제적으로 투하하고 피해의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F짓은 (다시) 좀 자제하자.
 
좋아서 하는 요리를 나를 위해서 했더니 기분이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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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충신교회 사경회를 얼마 앞두고 목사님께 기도제목을 묻는 메시지가 왔다. 기도제목을 말하는 것이 조금 어렵다. 한두 줄 말로 정리하는 게 쉽지 않다. 뭐랄까, 하나님과 조금 사무적 관계가 되는 느낌이랄까. 남들이 모르는 은밀한 이야기를 다 털어놓는 사이인데, 에헴... 친하지 않은 척 공개적 대화를 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이다. 하지만 기도제목을 물어주는 질문은 대개는 좋다. 특히 이번 같은 경우는 더욱 그렇다. 말씀 준비를 위해 몇 번 통화하면서 언어 너머의 기도제목 알아차릴 분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경회를 준비하는 은밀한 하나님과의 속삭임을 있는 그대로 들려달라는 요청이었다. 기도제목을 정리하며 내 마음을 더 잘 알아차렸고, 목사님과 교우들이 기도로 준비하고 계시다는 확신에 힘이 나고 감사했다. 

 

<기도제목>
- 제가 전할 수 있는 만큼의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마음으로 진실하게 준비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인간적인 욕심이 되어 저를 도구로 쓰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을 방해하지 않도록,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메시지를 기쁨과 자유로움으로 준비하고 싶습니다.
- 4월에 일정이 많아서 몸이 좀 약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남은 며칠 동안 몸의 건강을 위해서도 더 기도하며 돌보겠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기도 부탁드립니다.
- 아직 한 번도 뵙지는 못했지만, 교우들이 마음과 저의 마음이 주파수가 잘 맞춰서 피차에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 함께 기도로 준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고 있는 모든 강의가 마음과 영성에 관한 것이기에 당당할 수가 없다. 마음과 영성은 '지어져 가는,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이다. 확신 있는 답을 내놓을 수 없고, 주로 내가 겪어온 이야기를, 겪어내며 기도하고 공부했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렇게 한 발 한 발 걸어가자고, 우리 모두 순례자이고 영적인 여정은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디 가나 비슷한 얘기를 하고 또 하게 된다. 강의가 내게 유익이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말하면서 확신이 든다. 말하면서 다시 결심하게 된다. 그래, 맞아! 이렇게 가는 거야. 앞선 영성의 선배들이 그러하셨어. 솔직히 내 강의에 내가 은혜받는다.

 

내 강의에 스스로 은혜받는 것까지는 해봤다. 그리고 마이크 내려놓고 내려와서는 부끄러움에 회개 기도도 많이 드렸다. 이번에 놀라운 경험을 했다. 신앙 사춘기와 영적 발달 얘기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떠올려야 하는 분(들)이 있다. 아이의 신앙에서 어른으로 가기 위해서 부모를 넘어서야 하듯이 한때 사랑하고 존경했던 지도자의 그림자를 마주해야 하고, 나의 여정은 거기서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많은 분들이 여전히 그 상처에서 나오는 피고름으로 괴로워하고 있으니까. 자꾸 말하고 쓰면서 나는 사실 내 영적 여정 최대의 빌런인 그분을 용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가 용서하고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과 만남을 주선하셨다. 믿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회개했다. 남편이 목사로 겪는 어려움을 보면서 내 원망과 분노의 죄를 남편이 받는 것 아닌가 싶어서. 거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분을 축복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더 훨씬 실망스러운 그분의 노년을 축복하는 기도를 드렸다. 진심으로 그분의 평화를 빌게 되었다. 그분의 행보로 인해 새롭게 피눈물 흘리는 양 같은 교인들이 있기에 더욱 아픈 요즘이기도 하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너머 가여움에 겨운 축복의 기도를 드렸다.
 
금, 토 저녁 집회 후 기도회 시간에 일어난 일이다. 말씀을 전하고 내려와 목사님이 인도하는 기도를 따랐다. 그냥 기도하게 되었다. 요란하지도 화려하지도, 감정적 선동을 하지도 않는 기도회 인도에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도가 올라왔다. 내가 했던 말을 요약하셨을 뿐인데, 자랑스럽지도 부끄럽지도 않고 기도하게 되었다. 첫날은 신앙 사춘기 주제였는데 내 인생의 빌런, 그 목사님을 축복하게 되었다. 둘째 날은 '여성의 하나님' 이야기를 나눴고 하나님의 모성성에 기대어 이땅의 여성들, 낮에 만나 식사했던 집사님들, 연구소의 벗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거의 2년 전, 말씀을 전하고 내려와 이어진 기도회의 충격으로 며칠 밤 잠을 이루지 못한 날이 있다. 몇 개월 준비한 말씀이었는데, 혹여 해석 상 오류가 있을까 하여 남편에게 신학적 검증을 받고 또 받고 했었다. 청중 가운데 내로라 하는 신학자, 목회자들이 여럿 있었기에 더욱 부담이 되었었다. 이어진 기도회는 내가 전한 본문에 대한 인도자의 해석으로 진행되었다. 실은 가볍게 흔히 겪는 일이다. 여성이며 비목회자로 겪어낼 몫인 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날은 소화가 되지 않았다. 그때 이후로 몸에 생긴 발진은 그해 12월이 되어서야 잦아들었다. 호된 시련의 시간이었다. 이후 내가 내 편이 되어주는 행동을 했고, 시간이 지났고, 그야말로 치유가 되었다. 그날 기도회 인도를 했던 분의 이름을 어디서 봐도 이제 심장이 쿵 떨어지거나 박동이 빨라지진 않는다.
 
이번 집회에서 두 번의 기도회는 정확히 그 일에 대한 치유였다. 나를 초대하고 기도회를 인도하신 목사님은 당신의 방식대로 하던 바를 하셨겠으나, 그것이 나를 치유했다. 성령께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시는 분이니 누군가의 존재로 누군가를 치유하신다. 좋은 치유자가 되고 싶다면, 늘 하는 방식이 치유적이어야 한다. '치유하는 현존'이 되어야 한다. 사경회의 주제가  "봄처럼 피어오르게 하소서"였는데, 처음에는 나와 좀 안 맞다는 생각을 했다. 내 메시지는 좀 무겁고 추운데... 삼일 시간 동안 적어도 내게는 새로운 생명이 불러일으켜졌다. 목사님께서 손글씨로 편지를 주셨는데, 사흘 치유와 소생의 정점이다. "안심이 됐답니다"라는 한 문장이 내 영혼을 얼마나 안심시키고 위로를 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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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비가 오고...
그칠 듯 그치지 않고...
그래서 전을 부쳐봤다.

꽃새우전을 부쳐봤다.
마침 잘 손질된 꽃새우를 선사받았고,
마침 꽃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계절이고,
마침 찬란한 슬픔의 아카시아향이 온 감각을 자극하는 시절이라
꽃, 새우, 傳을 만들어 보았다.

우리 어머니는 배우기만 하셨으면
시인이거나 학자가 되셨을 텐데.
언젠가 아카시아 향이 진동하던 어느 때
교회에서 대표기를 하셨었다.
"하나님, 아카시야 향기가..."로 기도를 시작하셨다고.
교회가 아카시아 나무 그득한 동산을 등지고 있었다.
그냥 기도가 그렇게 나왔다고.
기도에 은혜 받았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고...
어떻게 그런 기도를 하냐고
사람들이 다들 나 대학 나온 줄 안다고
자랑이 끝이 없으셨었다.
시인 같은 면모에 지적으로 탁월하신 분이다.
 
비가 오고,
그칠 기미 없이 종일 흐리고,
아카시아 향이 좋은 계절이고,
온통 어머니 생각이 떠나질 않고...
괜히 꽃새우전을 부쳐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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