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님, 커피 한 잔 주세요_에니어그램과 함께하는 내적 여정9
(새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 도움을 구합니다.
모님, 안녕하셨어요.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입니다. 온 우주에 저 혼자 깨어있는 듯 지금은 저의 불안한 호흡과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만이 이 공간을 채웁니다. 여름 끝자락의 타는 듯한 무더위와 함께 저는 이름 붙이기 어려운 이유들로 불면의 밤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모님을 뵙고 나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굳이 사람을 왜 유형으로 구분 지어야 하는지? 고유한 인격을 가진 하나의 존재로 봐야하는 것 아닐까 싶어요. 사실 인간이란 복잡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인데 아홉 유형 중 하나로 명확하게 구획을 지어버리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여기까지는 모님께서 자주 말씀하신 ‘머리’로 듣고 머리로 말하는 방식인지 모르겠네요. 한 달여 무더위와 싸우면서 또한 제 자신과 직면하며 싸워야 했던 것은 저의 ‘거리두기’와 ‘감정의 차단’이라는 문제였어요. 아직도 실은 썩 인정이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것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제 주변의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니 혼란스럽더군요. 어쩌면 이것이 제 마음의 소리입니다. 이런 것들이 올라올수록 에니어그램 자체를 좀 더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비평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모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이런 제게 추천하실 책이 있으신가 해서입니다.
이런 도움을 구하는 것이 망설여졌던 것은 결국 제가 또 다시 ‘지식’에 집착하는 제 유형의 한계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 아닐까 싶었던 거지요. 아니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모님께 그렇게 판단 받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저는 모님 표현대로라면 (아니 본회퍼의 표현이라고 하셨나요?) 결국 사유의 비상에서 자유를 찾으려는 존재인 것을요. 여기까지입니다. - 오필 드림 -
☆ RE : 도움을 구합니다.
오필에게.
먼저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겠구나. 오필이의 솔직한 이야기들로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어. 지난 번 오필이와 함께 마셨던 탄자니아AA를 마시면서 오필이의 메일을 다시 한 번 읽어본다. 아프리카의 야성을 담고 있지만 그 뒷맛은 부드러운 탄자니아 커피는 외유내강의 오필이를 많이 닮았네. 특유의 깔끔한 산미와 함께 부드러운 쓴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데 마지막에 남는 믿겨지지 않는 단맛이 오늘따라 참 신비롭게 느껴지는군.
먼저! 내가 뉘관데 정중하고 정직하게 도움을 구하는 오필이를 판단할 수 있겠나이까! 오필이의 ‘판단 받지는 않을까’ 두렵다는 표현을 읽으며 심장이 쿵했어. 여타 성격유형 도구가 그렇지만 에니어그램은 유난히 우리 안의 ‘하나님 놀이’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는 것 같아. 즉 유형으로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면 어느 정도 사람들의 행동과 동기가 정리되어 눈에 들어오거든. 그러다보면 늘 우리 맘 한 구석에서 기회를 엿보는 교만이 고개를 쳐들지. ‘내가 너의 동기와 속마음을 안다. 몇 번 유형인 너는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어’ 하면서 말이야. 그런 전제로 강의를 하거나 사람을 대하면 필연적으로 상대방에게 ‘넌 몇 유형이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라며 표딱지를 붙이게 되어있어. 단지 유형의 하나로만 이해되는 상대방이 어떻게 자신이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사랑받는다고 느낄 수 있겠어. 당연히 판단 받는다고 느끼겠지.ㅠㅠ 처음 에니어그램을 배우고 가르칠 때는 더 심했고, 지금도 애써 경계하지만 여전히 그런 우월의식이 나를 지배하는 것 같애. 오필이가 오필이의 유형으로 ‘판단받을까’ 염려하게 되었다는 게 그 반증이지. 혹여 나와의 대화가 ‘너의 모든 걸 알고 있다. 넌 네 틀에서 벗어나질 못해’ 라는 판단으로 느껴졌다면 그건 순전히 나의 불찰이니 용서하길 바래.
그래서 나 자신 뿐 아니라 나를 통해 에니어그램을 접하는 모든 이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하고 싶은 건 오직 ‘자신을 성찰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거야. 이것이 타인을 판단하는 도구가 될 때는 여지없이 독이 되어버려. 물론 그런 유혹이 늘 있어. 에니어그램을 배우고 나면 어느 순간 사람들의 얼굴이 다 번호로 보여. 또 그런 시각이 전적으로 무익하기만 한 것도 아니야. ‘같은 행동이라도 나와 저 사람의 동기는 이렇게나 다르구나.’를 진심으로 아는 것만으로도 성숙한 관계 맺기가 훨씬 수월해지니까. 다만, 타인을 향해서 쓸 때 판단하는 잣대가 아니라 이해의 수단으로만 들이대야 한다는 것! 허나, 우리가 아니 내가 그리 선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절감해. 내게 불편한 사람을 빼도 박도 못하게 비판하는 데만 이걸 쓰고 싶어지는 거야. 그래서 에니어그램을 통해 내적여정을 하겠다는 사람은 에니어그램에만 붙들려 있으면 안 돼. 반드시 정직한 마음의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필요해.
오필이가 말한 ‘감정의 차단과 거리두기’가 생각보다 더 누군가를 힘들게 할 수 있을 거란 통찰, 아프지만 귀한 깨달음인 것 같아. 유형을 이해해서 얻는 또 하나의 유익은 내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내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있음을 아는 거야. 예를 들어, 누군가 오필이에게 연예인의 사생활이나 개그프로의 유행어를 가지고 끊임없이 말을 걸어온다면 참아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지?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화의 방식이 각각 다르다는 걸 알기에 처음 한 두 번은 받아줄 수 있을거야. 그에게 있어선 나름대로 친밀함의 표현이라는 좋은 뜻임을 안다면 조금 더 빈번해져도 참아낼 수 있겠지. 그런데 문제는 이게 매일 봐야하는 사람이고 시도 때도 없이 (오필이 쪽에서 보기엔) 의미없어 공허한 말들로 개인적 시간과 공간을 침해하며 들어오면... 생각만 해도 죽음이겠지?^^ 그 정도 되면 친근감의 표현이라는 나쁘지 않은 동기를 안다해도 별 도움이 되질 않기 십상이야. 그냥 그 사람이 힘든거지. 너의 거리두기 역시 다른 사람에게 같은 맥락일거야.
'나’라는 고유하고 고귀한 인격을 유형의 틀에 집어넣어 이해하는 것, 참 위험하고 편협한 일처럼 보여. 오필이처럼 삶의 다양한 차원을 다면적으로 보려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럴 거야.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객관적이고 비정한 바로 그 잣대로 나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해. 브레넌 매닝은 『아바의 자녀』에서 ‘죄의 본질은 우리의 무시무시한 자기중심성에 있다’고 했어. 유형이라는 틀에 나를 넣어서 이해하는 겸손함이 때로 무시무시한 자기중심성을 발견하고 인정하게 해줘. 그러니까 나를 그 딴 유형 따위에 넣을 수도, 유형보다 말할 수 없이 큰 나의 존재도 볼 수 있어야지.
얘기가 여기까지 가면 오필이가 던진 질문보다 답이 더 복잡해진 듯하네. 에니어그램은 내적여정에 도움이 되는 안내자이고, 내적인 여정이란 영적인 여정과 맞닿아 있어. 영적여정의 지향인 ‘하나님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의 궁극은 신비일 수밖에 없지. 하나님 그 분이 신비이시니까. 마음의 여정에서 길을 잃었을 때 딱 떨어지는 모범답안이란 있을 수 없어. 진리는 신비야.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테레사 수녀를 만날 기회가 있었대. 많은 문제로 고민하시던 때라 충고를 들을 요량으로 만나자마자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하셨나봐. 장황하게 늘어놓고 입을 다물자 테레사수녀님이 조용히 말씀하셨대. “글쎄요. 하루 한 시간씩 주님을 사모하며 보내고, 잘못인 줄 아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없을 것입니다.” 하셨다는군. 난 내적여정을 가면서 길을 잃었다고 느끼는 순간에 이 말씀을 떠올려. 우리 마음의 여정은 단지 우리 마음에서 시작해서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 아래로 신비처럼 나아가는 것임이 분명해. 때문에 마음의 여정을 가면서 부대끼는 일이 생길 때, 뜻하지 않은 아픔을 느끼거나, 누군가에게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줄 때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돼. 예를 들면, 지난 번 오필이를 만났을 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대화했음에도 돌아보니 나는 어느 새 ‘내가 널 안다. 인간을 안다’며 교만하게 하나님 놀이를 했었더라구. 그럴 때 기도를 통해서 해독하지 않으면 내가 에니어그램 선생이 된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냐는 거지.
오필이가 물어온 것들은 지금 시점에서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질문들인 것 같아. 에니어그램을 통한 내적여정은 반드시 기도와 함께 해야 하는 것이고, 기도를 통해서 가야하는 길이야. 또 앞서 간 분들의 가르침을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지. 에니어그램 내적여정을 하면서 좋은 동반자가 될 책 몇 권을 소개할께.
<내 안에 접힌 날개> 리챠드 로, 바오로 딸
<나 주님의 사랑에 안기다> 데이비드 베너, 생명의 말씀사
<영적 가면을 벗어라> 래리 크랩, 복 있는 사람
<마음의 혁명> 클리포드 윌리암스, 그루터기 하우스
<아직도 가야할 길> 스캇 펙, 열음사
<마음의 혁신> 달라스 윌라드, 복 있는 사람
<영적 발돋움> 헨리 나우웬, 두란노
책을 자세히 설명하진 않을게. 난이도가 다르고, 저자의 스타일도 다르니까 서점에 직접 나가서 서문이나 목차 등을 보면서 잘 읽혀질 것 같은 책을 먼저 골라 읽어. 모든 책이 다 땡긴다면 순서대로 읽는 것도 좋고.
커피의 맛과 향을 구분하는 용어들이 있어. 바디감, 신맛, 와인맛, 과일향, 넛트향, 쵸콜릿향, 매운향... 사실 처음 커피를 배울 때는 도통 모르겠더라고. 한 모금의 커피에서 이런 것들을 느끼고 감별해내는 게 장난 같았어. 그저 쌉쌀한 커피향이면 됐지 너무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신기하게도 커피를 알아갈수록 막연하기만 했던 그 맛과 향의 미세한 차이가 느껴진다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알아가는 것들이 더 맛있게 마시는 데 도움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 신비한 존재야. 그런 우리를 유형의 언어로 이해한다는 것은 다분히 작위적이게도 느껴져. 유형이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도 못하지. 신맛, 쓴맛으로 불리는 언어의 수식이 커피가 아닌 것처럼 유형의 언어로 설명된 우리가 다가 아니야. 그러나 유형의 언어로 설명하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신묘막측하게 창조된 신비로운 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 되지. 자,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