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를 보고 나오며 '다음 회 바로 한 번 더 볼까' 잠시 망설였다. 한 번 본 영화를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지만 그 자리에서 다시보기 충동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너무 감동적이어서가 아니라 곱씹어야 할 것만 같은 감정이 실스마리아의 구름처럼 서서히 나를 덮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화가 마친 시점, 마음 속 의문의 구름 한 점이 저 멀리서 안개처럼 형성되기 시작했고, 적어도 비라도 한 방울 뿌리려면 무르익어야 했다. 한 번 더 보고 비든 눈이든 뿌려볼 것인가, 굳이 8000원을 더 쓸 필요가 있을까 하면서 며칠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2.

즐겨 듣는 영화평론 팟캐스트를 듣다가 화딱지가 났다. 영화 얘기는 하나도 안 하고 캐스팅 얘기, 연기 얘기만 하고 끝나지 않는가. 헐. 영화평을 검색해 봐도 죄 세대가 다른 여배우들의 열연, 또 캐스팅 얘기였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와 무슨 상관!  2014와 함께 흘려 보내자. 하고 있던 참에 꿈나무 문화평론가 G를 만났다.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다가 내가 예를 들어 설명하기 위해서 이 영화 얘길 꺼냈다. (뭔 얘기에 뭔 설명을 위해서였더라?) 이 영화에 별 한 개를 줬단 얘기를 들으며 20대 인생 여배우인 G로서는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듣다가 빡쳤던 팟캐스트 역시 젊은 여배우와 남자 평론가 둘이었으니 비슷한 맥락이었을 것이고. 40대 여배우인 내가 느끼는 걸 느낄 수는 없겠구나 싶었다.

 

3.

결혼 전 내 방에도 영화 <세 가지 색 : 블루>의 포스터 판넬이 걸려 있었다. 영화보는 내내 젊은 날의 쥴리엣 비노쉬를 대변하는 그 이미지가 자꾸만 떠올랐다. 어떤 영화든 영화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 외에는 차단하고 관람하는 편이다. 20대에 주인공을 맡아 스타덤에 오르게 한 연극을 40대가 되어 다시 맡게 된 여배우의 이야기라고 했다. 당연히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의 대역, 주인공을 주인공 되게 하는 늙은 여자 역할이라니 견적 나오는 스토리 아닌가. 질투, 도발, 회한.... 이런 단어를 보고 나름 천박한 상상을 하며 극장을 찾았다. 나이브하게 상상했던 질투, 회한, 갈등은 전혀 없었다. 갈등이라면  마리아 앤더스(쥴리엣 비노쉬)의 내적갈등이 있고 그 내적갈등은 매니저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과의 대본연습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내가 감동받은 부분은 대본연습에서 오고가는 대사였다. 그리고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과하지 않은 표정에서 갈등의 기승전결을 읽어내는 재미였다.

 

4.

대본연습인지, 마리아 앤더스 본인의 말인지가 오락가락 하는 지점에서 매니저 발렌틴의 표정과 대사에 숨은 그림 찾기의 그림이 다 숨어 있는 듯. 영화 초반부 충실한 비서의 모습을 보여주다, 친구처럼 보이기도 하더니 결국 마리아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중요한 대사들은 다 그녀의 입을 통해 나왔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연기부문 1등 상은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것이다. 왜 그렇게 젊음의 특권에 집착하느냐, 당신의 현재 배역 헬레나가 훨씬더 인간적이다, 글은 물체와 같아서 보는 방향에 따라서 달라보인다. 주옥같은 대사를 쏟아냈는데 마리아는 다 흘려들었고, 덕분에 관객도 흘려들었고, 기억나는 대사가 저 정도이다. 인간은 가장 객관적인(것이 과연 있을까마는) 말, 내게 가장 필요한 말에 귀를 막게 되어있다. 비웃거나 화내거나 못 들은 척 하거나. 마리아가 발렌틴의 말에 반응했던 방식으로.

 

5. 

발렌틴이 계속해서 일깨우고 싶은 것은 쉽게 말하면 젊은 날의 당신 '시그리드'를 연기했던 당신으로부터 자유로와져라, 였던 것. 시그리드에 너무 동일화 되어 지금 맡은 헬레나 역을 거지같이 여기는 것을 안타까워 하면서 말이다. 그 역을 맡은 쥴리엣 비노쉬로 치자면 '블루'나 '퐁네프의 연인들'의 쥴리엣이 아닌 지금의 쥴리엣을 살으라는 것이다. 시그리드라는 이미지와의 동일시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한, 이번 연극의 헬레나 역을 제대로 연기하지 못할 뿐 아니라(말하자면 일도 제대로 못하고) 오늘을 행복하게 살 수도 없다는 것. 발렌틴이 여러 번 빡치고 또 빡친다. 마리아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저항하고 방어하는 지점이다. (마리아는 못 봤지만) 먹던 걸 집어 던지고 그랬다. 점점 더 비합리적이 되어가는 마리아를 견뎌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6.

엄밀하게 따지면 마리아는 마리아이다. 시그리드도 헬레나도 배역일 뿐이다. 배역과 자기를 분리해내지 못할 때, 다시 말해서 진정한 자기를 잃어갈 때 그 결과는 '자기함몰'에서 오는 비합리적 판단이다. 말로야 스네이크를 보러 가는 길. 마리아가 지금 이 길이 맞냐고 묻는다. 발렌틴은 아마 이 코너를 돌면 어떤 길이 나올 것이고 다 온 것 같다고 한다. 마리아가 '그걸 어떻게 알아?' 발렌틴이 '지도에서 보니 그렇다'면서 지도를 보여주며 설명한다. '지금 여기고 다음은 여기고.... 어쩌구 저쩌구'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아냐고?' 발렌틴 표정. '어이 엄습' 다음 장면에서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발렌틴은 떠나고 없다. 자기 이미지에 갇혀 귀가 막혀가는 마리아를 보며 빡치고 또 빡치던 발렌틴이 지도를 지도라 부르지 않는 비합리성 앞에서 터지고 말았던 것. 모르는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지도란 무엇인가?  그 이전 장면에선 마리아가 (전에 와봐서)아는 길을 감으로 찾아가다 결국 길을 잃은 적도 있다. 이렇듯 명백한 대비 속에서도 마리아는 점점 더 이성을 잃어가는 자신을 보지 못한다. 왜? 자기 이미지에 갇혀서. 시그리드도, 헬레나도 마리이가 아니다. 영화의 중첩되는 구조는 심지어 마리아 역시 쥴리엣 비노쉬 자신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7.

마리아를 이해한다. 한때, 젊은 한때 누구나 자기 삶의 여주인공이었다. 나도 그랬다. 나이가 50을 바라보는데도 솔까말 마음은 아직 청년부 같다. 게다가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나는 아직 44사이즈를 입는다. 거울을 얼굴 가까이 대고 보지 않는다면, 웃으면서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뽀샵 처리되지 않는 직찍 사진만 보지 않으면 내 나이 나를 인식할 수 없다. 아니,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마리아가 시그리드에 집착하는 것을 단순히 인기 여배우가 과거를 잊지 못하며 일으키는 분열 정도로 볼 수 없다. 비록 20대와 마찬가지로 44를 입는다 자랑하지만 의미없는 사이즈다.  볼에 있던 살이 다 흘러내려 복부에 모여 있는 이 우스꽝스러운 몸, 이 몸을 내 몸으로 수용하기란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지. 일시적인 현상이고 다시 돌아갈 거라고 믿고 싶지만 깊이 패인 눈가의 주름을 들여다보면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하물며 마리아 앤더스, 쥴리엣 비노쉬랴! 

 

8.

교훈적 결론.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필수 발달과업이다. 고집스런 꼰대 노인네가 되느냐, 속에서부터 포근하고 넉넉한 아줌마 (더 나아가 할머니)가 되느냐의 갈림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아의 늪에 빠져 나와 세상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각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불행하게 사느냐 마느냐의 기로이기도 하다. 다행히 마리아는 영화의 마지막에 한 번 더 몸부림을 쳐보다 어리디 어린 시그리드 역의 조앤에게 한 방 먹고는 더 좋은 길을 선택한 것 같다. 나도 역시 그러려고 한다. 영화 <은교>에서 늙은 소설가 이적요가 말했다. '너희 젊음이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내 잘못으로 얻은 벌이 아니다' 심금을 울렸었다.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책에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누구도 내게 상처줄 수 없다' 이런 비슷한 말이 나온다. 이 예문에 따라 각색해보자면, 내가 나를 늙었다고 조롱하지 않는 한 누구도 나의 늙음을 조롱할 수 없다. 내가 나의 늙음을 벌로 생각하고 부끄럽게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내 늙음은 부끄러움일 수밖에 없다.

 

9. 사족

영화를 본 이후에 영화 홍보 나레이션을 김희애가 했다는 걸 알았다. 쥴리엣 비노쉬에 버금가는 여배우라면서. 버금가는 건 모르겠지만 싱크로율은 매우 낮다. 주름 하나 없는 꿀광 피부, 20대 버금가는 몸매를 유지하며 스물 한 살 아인이와 정사를 나눠도 부끄럽지 않은 방부제 젊음의 김희애. 그 따위 김희애를 어디 감히 쥴리엣 비노쉬의 반열에! 영화에서 마리아와 발렌틴이 트레킹을 하다 호수를 만나 뜬금없이 옷을 홀딱 벗고 수영하는 장면이 나온다. 두 사람다 몸매가 현실적이지만 전라의 쥴리엣 비노쉬는 오메, 나 자신(나자연 아니고)이며, 내 친구!  반갑고 서글펐다. 그 몸매를 민망히 여기지 않고 심지어 아름답다 느낄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김희애는 땡 탈락! (물론 부러워서 이러는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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