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낯선 모임에서 자기소개할 일이 있었다. 글을 쓰는 것과 출간한 책과 관련된 일이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지만, 그와 관련하여 나를 소개하는 일이 쑥스럽고 민망하다. '음악치료사'라고 소개하는 것이 가장 간단하다. 물론 그렇게 소개해도 '어머, 그래요?' 하면서 질문 몇 개가 들어오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연애나 에니어그램에 관한 글을 쓴다거나 강의를 한다고 소개하고 나서 받아야 하는 질문보다 곤란하지는 않으니까. 몇 번의 만남이 거듭되면서 책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책을 내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니까 '아, 그러냐. 책을 내셨냐' 하는 리액션들이 나왔다. 그리고 '책 좀 하나씩 줘보라'고들 했다. 길게 얘기하기가 민망해서 '네, 네'하고 말았다.
다음 모임 하는 날이 되었다. 대답을 했고 약속이 되었으니 가져가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왠지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다.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가져가지 않았다. 모임에 가는 버스 안에서 생각해보았다. 책을 달라는 얘기가 나에 대한 호의라는 것을 모르지 않음에도 나는 좀 과하게 불편한 느낌을 붙들고 있으니 말이다. <인사이드 르윈>에서 골페인 교수 집의 저녁 식사 한 장면이 떠오른다. 르윈이 가수라는 것을 알고 그러면 노래 좀 해보라고 한다. 내키지 않은 르윈, 어쩔 수 없이 기타를 든다. 그리고 (자살한 친구) 마이크와 듀엣으로 불렀던 노래를 부른다. 음악을 좋아하는 교수 부인이 여기에 하모니를 넣으며 끼어드는데.... 노래하던 르윈 불같이 화를 내고는 판을 엎고 퇴장한다.
르윈에게는 마이크와 불렀던 노래, 영화 전반에 깔린 핵심적 트라우마 사건에 관련된 노래이기 때문일 것이다. 듀엣으로도 그닥 빛을 보지 못한 가수 르윈이 솔로로 살아내야 할 가수인생의 빈곤함 그 자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슬프다. 그 장면에서 판을 엎으면 내뱉는 르윈의 대사가 내겐 더 디테일한 의미로 와 닿는다. 좋은 분위기로 '노래해! 노래해!' 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던, 둘러앉은 교수들에게 퍼붓는다. 내가 밥을 먹다가 당신들한테 '교수니까 강의 좀 한 번 해주라고 말하면 좋겠냐?' 간단히 이런 내용이었다. 기분 좋게 저녁 먹고 기타 들고 흘러간 노래도 부르고, 마음 흘러가는 대로 찬양도 하고.... 얼마나 좋은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였다면 더더욱. 그런데 적어도 르윈에게 노래는 실존 그 자체이기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앉아서' 부를 수 있는, 싱어롱 타임에 소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에니어그램 강의를 하고 나서 마음이 힘들었던 두 번의 강의는 지인이라는 이유로, 좋은 마음으로, 저녁 먹다 노래 한 곡 부르듯 했던 강의였다. 나에게는 실존, 듣는 사람들에게는 껌 씹으면서 듣는 강의. '(듣보잡)애.니어그램인지 애니메이션이 뭔지 모르겠지만 어디 가서 강의 좀 한다니까 여기서도 한 번 해봐라. 듣겠다고 동원돼 준 걸 고맙다고 생각하고. 나나 모임에 불편한 얘기는 하자 말고. 자, 어디 한 번 해보시지' 이런 느낌으로 다가온 태도들이 강의 후에 나를 몹시 힘들게 하였다. 언감생심 르윈의 예술가적 자존심과 비교할 수 있을까마는. 이런 강의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껌 씹으면서 듣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아직 낮은 내 자존감이 미치는 영향이 크다.
신앙인으로서, 마음에 관한 강의를 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이 더욱 자라고 성숙해야 할 텐데.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해가는 중요한 지표가 '거칠 것 없는' 마음이라고 생각하는데. 전에는 긴 시간 걸리던 문제가 빨리 해결되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대견한 부분이 없지 않은데. 어떤 면에서는 더욱 완고해지기도 하는 것 같다. 말랑한 척이 아니라 진정 내면이 말랑한 사람이 되어 나 자신에게는 물론 타인에게도 안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 가끔 나의 안전과 타인의 요구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난다. 그때 내가 내 편이 되어주기 위해선 표면적으로 완고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세상에 내놓은 내 이름을 잘 지키는 것은 때로 터무니없는 완고함의 힘이 아닐까 하는 싶기도 하다. 아낌없이 내어주되 적어도 값싸게 나를 소비하진 않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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