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유한 유일한 명함이 'Ruah루아영성심리연구소'의 것이고, 직함이 소장이지만. 연구소를 직장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직장이면 최소한의 생계 보장이 되어야 하건만 그렇지 못하고. 신앙, 기도, 사랑, 소명 같은... 오늘의 나를 지탱하는 의미 공동체이니 남편의 말처럼 '교회'라 부르는 것이 그나마 가장 적절하지 않은가 싶다.


5, 6년 해온 연구소를 리뉴얼하면서 연구소 이름에서 '정신실'을 뺀 것이 얼마나 홀가분한지. 살 것 같다. 내가 한 것 맞다. 혼자 걸어온 외로운 기도의 길이 있어서 가능했던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였다. 하지만 혼자 기도하던 내게 다가와 준 벗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공동체였다. 선물 같은 사람들이다. 연구소 이름에서 정신실을 빼고, 동시에 연구소 실무에서 한 발 물러났다. 연구원 모임이나 스터디에 참여하지 않고,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의 기본 강의에서도 물러났다. 그래야 할 때라고 마음이 말했고, 어쩌면 마음의 주인이신 성령님의 메시지인지도 몰라서 그렇게 했다. 그리 괜찮지는 않다. 나는 상실감에 과하게 집착하는 편이라서... 연구원 모임 시간에는 마음이 잡히지 않는다. 나 없이도 잘 돌아가는 연구소가 좋고, 감사하고, 조금 쓸쓸하다.
그런데 내가 지난 5, 6년의 시간을 얼마나 잘 보냈는지 말이다. 성격유형 같은 걸로 따지만 나랑 정반대 성향인 부소장 H이는 자신을 거슬러 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이 친구가 보여주는 리더십은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에 MBTI, NT의 합리성을, 에니어그램 5번의 객관성의 절제를 더한다. 그런데 또 어떤 면에서는 영락없이 나다. 내 빈자리에 구멍이 생겨야 하는데, 생겨야 할 구멍을 너무나 잘 막는 것이다. 급기야 "야, 너 정신실이야?" 하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H만이 아니라 지난 시간 오롯이 함께 하며 하나의 '정신'을 만들어 온 우리들의 연결이라는 것을 안다.
물러나고자 했더니, 정말 제대로 물러나도록... 복숭아뼈를 톡 부러뜨려 도와주시니 눈물나게 감사... (하네요, 주님) 5월의 어느 날, 벌써 예정되었던 워크숍 취소하고 연구소 식구들이 우리 동네, 우리 아파트로 달려와 주었다. 마음에 큰 숙제였던 강의 영상 촬영을 돕고(촬영은 물론 '아침 마당' 청중 같은 호응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수다! 본격 수다 타임 시작하려는데, "아, 잠깐! 다 꺼내세요!" 하더니 오병이어 같은 기적이 각자 가방들에서 줄줄 나왔다. 이보다 더 정겨울 수 없는 반찬들이다. 개성 찬란한 밑반찬, 윗반찬, 김치들. 이런 거라니까! 연구소는 소소하여 진귀한 손맛의 선물을 나누는 곳이라니까.

중세에 ‘베긴(Beguine)회’ 라는 여성 공동체가 있었다.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분처럼 살고 싶은 여인들이 모인 곳이다. 당시 여성들 앞에 놓인 두 선택지는 결혼이나 수도원이었다. 그 둘 중 하나가 아니라, 그 둘을 통합한... 아니 그렇게 가르고 나누어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저 신앙과 기도, 사랑과 소명을 살고자 모인 여성들이었다. 세상 한복판 가장 낮은 곳으로 모여, 가장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 한센병 환자 같은 이들을 도우며 특별한 봉헌의 삶을 살았던 분들이다. 공동체이긴 하지만 창립자도 없고, 예규도 없고, 수도원 공간도 없는 자발적 공동체였다. 이충범 교수는 <중세 신비주의와 영성>에서 베긴 공동체의 특이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계급과 젠더 차이를 해소하고, 제도적 종교를 뛰어넘었으며, 관상적 삶과 사도적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신비주의 영성을 창조했다.'
언감생심 연구소를 통해 꿈이라도 꿔보는 모습이다. 연구소 막내 D가 도쿄 여행에서 사 온 쿠키를 꺼내면서 "벨기에 쿠키라고 쓰여 있던데, 혹시 베긴과 연관이 있나 해서요..."라고 했다. 케이스에 그려진 이미지가 베기나쥐라 불리는 베긴 수도원의 건물이 아닌가! 직장 같지만 직장은 되지 못하는 연구소이다. 직장은 아니지만 영혼의 벗이 되어 삶과 신앙적 목마름을 깊이 채워주는 보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피라미드 조직이라는 농담도 가끔 하는데. 연구원 각자 사랑과 기도로 돌보는 내담자와 벗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본 곳까지만 안내할 수 있다, 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상담자이며 내담자이고, 가르치지만 동시에 배우는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고. '정신실' 이름은 뗐지만, 피라미드의 정점에 내가 있다는 거룩한 책임감도 인정하고 잊지 않는다. 친구이며 동료, 동료이며 스승인 우리들이다. 베긴 공동체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오래되고 새로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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