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nternational Piano Korea> - 4월호 '음악치료의세계2'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만족감을 느끼면서 일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여기는 정말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이다’라는 확신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 말이다. 전공을 선택하고 나서 ‘이것은 바로 나를 위한 학문이다.’ 하고 주어진 시간을 ‘아깝다. 짧다’ 느끼면서 공부에 매진하는 그런 학생은 또 몇이나 되겠는가. 나는 이 모든 사람을 대학원 과정을 통해 만나보았다. 동료 학생들을 알아가며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건 뭐 종교단체의 간증집회를 방불케 하는 열정과 확신과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바로 음악치료사가 되겠다고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같은 확신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 일까?
우리나라에서 음악치료 전공은 대학원에만 개설되어 있다. 때문에 전혀 다른 전공을 가진 사람들이 음악치료 대학원에서 만나게 된다. 음악전공자들이 다수이고 그 밖에 다양한 전공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학부 전공에 상관없이 누구라도 음악치료 대학원의 문을 두드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음악전공, 비전공(편의상 음악 외의 전공을 가진 음악치료사를 ‘비전공’ 음악치료사로 부르기로 하자)과 상관없이 이들을 아우르는 단순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 공통점은 어쩌면 ‘전공 만족도 120%’의 기이한 현상을 설명하는 키가 될 지도 모른다. 모두들 전공을 바꿨다는 것이다. 진로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선택, 학부의 전공을 포기하고 모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특히 음악전공의 학생들에게는 어릴 적부터 피아노 앞에서, 또는 바이올린을 들고 연습에 매진하던 긴 시간이 아깝다 여겨지는 대목일 것이다. 모든 음악전공 음악치료사들이 그렇지는 않지만 음악을 하면서도 ‘연주가’의 길을 가는 것이 버거웠다는 고백들을 하곤 한다. 또 음악을 하되 단지 ‘음악을 위한 음악’이 아니라 ‘사람과 관련한 음악’일 때 더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하기도 한다. 반면 비전공 음악치료사들은 꼭 하고 싶었던 음악을 어떤 이유로 포기하고 다른 전공을 선택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회사를 다니거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고도 늘 음악에 대한 미련을 속에 품고 있었던 경험을 자주 듣는다. 바로 이것이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한 번 쯤 회의해 보고, 고민 끝에 내게 더 적합한 또는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을 위해서 낯선 땅을 밟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에게는 긴 세월 해왔던 음악을 일정 정도 포기하는 것이고, 또 다른 이에게는 긴 세월 선망해 왔던 음악을 붙드는 일이라 해도 가슴 뛰는 공부가 될 것임은 말할 것 없다. 나는 여기에서 또 다른 의미를 하나 찾는다. ‘치료사’라 이름 붙은 사람들은 사람의 변화를 도모하는 직업인이다. 뉘라서 사람을 변하게 할 수 있을까? 제 아무리 좋은 음악이 있고, 상담기술이 있다한들 발달이 지체되고, 몸은 퇴행하고, 마음이 다친 사람들이 절로 변화되질 않는다. 좋은 치료도구들은 제 스스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절대적으로 치료사와 환자의 신뢰하는 관계를 통해서 전해져야 한다. 가장 좋은 치료사를 일컫는 말로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말이 있다. 즉, 자신이 상처를 받아봤고, 실패해 봤고, 아픔을 겪어봤지만 그 고통으로부터 더 나은 나를 발견하고 변화를 경험해본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치료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치료 대학원에 모인 예비 치료사들은 한 번의 전공 포기, 음악에 대한 각각 다른 갈망이라는 ‘결핍’의 경험들로 인해 좋은 치료사로서 자질을 하나 따놓은 셈이 된다.
이렇듯 음악치료사를 비롯한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필요한 자질은 진정성을 가진 이해와 소통이다. 대략 마주보고 앉아 이해하는 정도의 sympathy가 아니라 고통 받는 사람의 자리에 앉아보고 느껴본다는 의미로의 empathy이다. 이것이면 족할까? 물론 아니다. 모든 악보가 맨 앞에 높은음자리표 낮은음자리표를 달고 시작하는 것처럼 음악치료사라면 당연히 음악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먼저, 음악활동 시에 반주악기로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피아노와 기타를 능숙하게 연주하는 것이 필요하다. 치료 세션에서 사용하는 노래와 반주의 형태는 치료사 자신이 계획하고 적용하게 된다. 그러나 클라이언트의 반응과 음악적 선호도가 항상 예측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음악적 임기응변 또한 필요하다. 준비한 노래의 키를 즉각적으로 높이거나 낮출 수 있는 반주 능력, 간단하게 리듬을 변주할 수 있는 능력 등을 말하는 것이다. 음악치료에서 사용하는 음악이 무엇일까? 하고 묻는다면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먼저 떠오를지 모르겠다. 헌데 의외로 음악치료 세션에 사용되는 음악은 클래식 음악이 주류를 이루지 않는다. 정신과 병동의 음악치료 세션을 위해서 치료사들이 들고 다니는 악보가 ‘흘러간 우리 가요’ 같은 류라는 것을 아실런지. 노인을 위한 음악치료를 위해서 ‘쾌지나 칭칭 나네’에 맞춰 소고리듬을 연구하고,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음악치료사는 ‘뽀롱뽀롱뽀로로’ 노래를 흥얼거리고 다니게 된다. 즉, 치료에 사용하는 음악의 장르와 스타일이 매우 폭넓다는 것이다. 때문에 음악치료사가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알고 있고, 노래할 수 있고, 반주할 수 있는 것이 큰 자산이다.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부르던 성악가 출신의 음악치료사는 치매 할머니들과 더불어 ‘쿵짝 쿵짝 쿵짜작 쿵짝 네 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다’며 송대관의 뽕짝을 노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간단한 멜로디를 작곡하고 익숙한 멜로디를 클라이언트에 맞게 편곡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이렇듯 음악을 포괄적으로 즐기고 다룰 줄 아는 능력에 더불어 그 음악을 가장 아름답게 연주하고 만들어낼 수도 있어야 한다. 정말 음악을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음악치료사가 될 때, 누구보다 음악 속에 자신을 던져 넣을 수 있는 사람이 음악치료사가 된다면 치료사와 클라이언트 모두 행복한 일일 것이다.
누군가 말하기를 직업 선택에서 최선의 지점은 ‘내 기쁨과 세상의 필요’가 만나는 곳이라고 하였다.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이 내게 기쁨을 주는 것이 분명하다. 또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로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많은 음악치료사들이 그러하듯 처음 음악치료 공부를 시작했을 때, 첫 환자를 만났을 때의 기쁨은 내 인생에서 결코 잊히지 않는 감격의 순간이다.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이 거기 있었다는 발견과 확신의 기쁨이었다. 물론 무슨 일에든 허니문기간의 끝은 있는 법. 음악치료사로 일한다는 것은 많은 노력으로 아주 작은 변화를 보는 일이다. 치료대상의 장애 정도가 중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때문에 가끔씩 burn out 되어 더 이상 치료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오기도 한다. 또 쏟아야 하는 정신적 신체적 에너지에 비해 급여로 받는 보상이 적은 직업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문제이다. 직업에서 얻는 행복감의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음악치료사에 대해 꿈꾸는 사람이라면 이 부분 역시 고려해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음악치료사들이 대체로 행복하게 일한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마찬가지이다. 음악과 사람 돕기를 동시에 좋아하는 이에게 이만한 직업이 없을 것이기에 말이다. 오늘도 어느 병원, 복지관, 재활센터 등에서 기타를 치고, 음악을 들려주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음악치료사는 그 세션이 끝나면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어휴, 몸살로 치료를 쉴까 했었는데 치료하다 내가 힐링이 됐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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