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옥금 권사님이 지난 3월11일 새벽 4시45분 소천하셨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여러 어려움 감안하여 간소한 가족장으로 장례를 마쳤습니다. 아주 짧은 장례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엄마의 장례식만큼 긴 장례식은세상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중학교 1학년 때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재난처럼 밀려든 아버지의 죽음이 삶을 뿌리째 흔들었고, 그때로부터 죽음은 늘 가까이 있는 살아 있는 공포였습니다. 엄마의 귀가가 조금만 늦어도 죽음을 상상하고 마음에 장례식을 꾸렸습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엄마의 죽음을 대비하는 삶이었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은 저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이 더했습니다. 저는 엄마의 죽음을 떠올릴 때마다 두 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 동생을 키우고 교육시킬 책임감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곤 했으니. 어릴 적부터 죽음을 짊어진 삶이었습니다. 평생 마음에 상복을 준비하고 사는 셈이었으니 얼마나 긴 장례식인지.

80세가 되기 몇 년 전부터 엄마는 ‘하나님이 나를 80에 불러 가실 것이다. 기도 응답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0세가 되는 해, 하루 전날 12월 31일에는 동생과 함께 “엄마, 내일 천국 가네. 잘 가 엄마, 송구영신 예배드리고 늦잠 잘 수도 있으니까 지금 인사할게.” 놀리기도 했지요. 엄마의 죽음을 웃으며 말할 수 있을 만큼 저도 동생도 단단해졌습니다. 80세, 85세, 87세 천국 가는 기도 응답이 자꾸 연기 되더니 엄마의 인사에 관용구가 하나 생겼습니다. “오래 살어서 미안허다. 고맙다. 복 받어라.” 80세 천국행 기도응답은 노구의 엄마가 짐이 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편으론 워낙 기도가 센 분이라 엄마가 정해놓은 시간마다 혹시, 하며 마음을 졸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엄마는 80세부터 16년 간 또 다른 장례를 준비시켰습니다.

지난 2월 초에 사고로 응급실로 가신 이후 엄마는 다시 집으로 되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노인요양병원에 한 달여 계셨는데, 생애 가장 애달픈 한 달이었습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면회를 할 수 없어 외롭게 홀로 누워있는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쪼여드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직 말씀을 잘 하시던 입원 후 20여 일, 매일 동생이 전화하여 시편23편을 외우시도록 하는 것이 유일한 연결이었습니다. 또렷이 끝까지 외우셨습니다. 3월2일, 상태가 안 좋아져 응급실로 나오셨는데 그날 잠깐 엄마를 만났습니다. 숨 쉴 기력 밖에 없는 엄마에게 “엄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해 줘.” 한 마디에 가쁜 숨과 함께 또 외웠습니다. 엄마 목소리로 듣는 마지막 시편 23편이 되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삼일 전, 병원에서 면회를 허락했습니다. 마지막 인사였습니다. “엄마, 신실이 왔어. 엄마, 엄마” 말씀도 어떤 반응도 없었습니다. 집에 오는 차안에서 엄마 곁에 있는 동생이 전화 연결을 해주었습니다. 말이 나오지 않아 울기만 하다 저도 모르게 찬송을 불러드렸습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먼저 가신 이모들.... 엄마는 임종 전문가였습니다. “숨넘어가는 순간이 옆이서 울지 말고 찬송 불러드려야혀.” 하시던 말씀이 마음에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찬송하니 엄마가 눈을 뜨고 반응하며 심지어 입을 달싹거리셨습니다.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동생이 가서 전화하고 제가 찬송하고 엄마는 호흡으로 함께 하고. 셋이 그렇게 엄마가 사랑하던 찬송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날 오후에는 입을 달싹달싹 하며 따라 부르시고 찬송을 마친 후에 주르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해요.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 조용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엄마에게 불러드린 마지막 찬송은 ‘예수 사랑하심은’입니다. 어린 손주들에게 마르고 닳도록 불러주신 노래입니다. 졸저 『신앙 사춘기』를 탈고하고 남편과 함께 노래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예수 사랑, 떠나서 다다른 사랑’이란 곡이고. 엄마의 찬송과 시편 암송하셨던 육성을 담아 영결예배에 불러드렸습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엄마는 의식의 끈을 놓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맑은 정신, 총기를 끝까지 유지하고 계셨지요. 그 이유를 저는 압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 며느리에게 늘 물으셨다고 합니다. 거의 침대에서 생활하시는 일상 속에서 스스로 ‘지남력’을 유지하는 방법을 아셨지요. 요일은 오직 주일 11시 예배를 향한 정신이었지요. 그 지향이 엄마의 정신을 건강하게 했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과 함께 하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루지 못했지만 엄마가 그렇게 사모하던 목사님을 모시고, 엄마가 사랑하시던 두 동생, 그리고 엄마를 좋아하던 조카들과 조촐한 예배 드렸습니다.

 

 

39년 전, 아버지 장례식, 목회하던 교회 예배당에서 드렸던 영결예배를 떠올립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 일이 우리 인생을 어떻게 끌고 갈지 상상도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던 남매였습니다. 엄마의 영결예배에선 슬픔에 압도되지 않고 영예롭게 엄마를 보내드렸습니다. 어른이 되어 엄마의 죽음을 마주했습니다. 저는 노래했고, 동생은 엄마의 96년 인생과 마지막 시간을 들려주었습니다. 엄마에게 물려받은 유머감각과 따스한 연민을 잃지 않고, 엄마가 남긴 모든 이들을 영예롭게 함으로 엄마를 영예롭게 했습니다. 평생 예배만 사모하던 엄마에게 걸맞은 마지막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짧은 장례식은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기나긴 장례식이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오지도 않은 엄마의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온 삶. 제 인생 가장 벗어나고 싶었고 극복하고 싶었던 것이 결국 저를 만들고 지켜내었습니다. 엄마와 함께 했던 아름다운 순간들을 떠올리며 울고 또 울어야 할 장례식이 아직 남아 있고, 이제 그 누구도 아닌 저 자신의 죽음을 짊어진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엄마의 부재 속에서, 계속 이어질 마음의 애도와 장례식 속에서 천국을 향한 실존적 소망을 살게 될까요.

 

 

39년 전 아버지 영결예배 사진입니다. 엄마도 아니고, 단발머리 저 자신도 아니고 제 옆에서 우는 동생 얼굴, 카메라 초점에서도 빗나가 흐릿한 동생 얼굴이 평생 가장 크게 가슴에 남아 있었습니다. 저보다 더 단단해진 동생에 대한 책임감도 이제는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상복 언제 다시 입을까, 평생 두려워했던 건데. 장례식 마치고 동생과 얘기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우리에게 상복을 안 입혔다.” 상복도 못 입어서 안타까운 이별이지만 더는 상복을 입히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마음이려니 생각해봅니다. 불멸의 다이아몬드 같이 찬란한 영혼을 가진 엄마는 오래 써서 망가진 육신에서 드디어 해방되었습니다.

함께 하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들 전해주셔서,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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