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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藥이된冊] 내 맘 바꿔 넘의 맘 생각하기

larinari 2007.07.07 11:15
 


 

 

 

<남자 vs 남자> <사람 vs 사람>           -  정혜신, 개마고원



>>호감 vs 비호감


중학교 1학년 때 일기장에 그런 짓을 했었다. 일기장 한 페이지 가운데 줄을 그어 영역을 나누고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나를 좋아하는 사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분류해서 적었다. 막 자기 정체성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사춘기에 관계중심적인, 관계지향적인 기질에 어쩌면 그리도 충실한 놀이를 하였는지…. 호감이냐, 비호감이냐. 요즘 들어 많이 듣게 되는 이 용어는 자주 써 먹게 된다. 쓰면서 ‘아~ 참 쓰기 좋은 말이다’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누구는 좋아. 누구누구는 싫어’라고 말하는 것보다 ‘저런 스타일 완전 비호감이야’라고 표현하면 어쩐지 좀 덜 유아적으로, 보다 세련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딱 두 집단으로 나눠서 ‘호감, 비호감’으로 분류할 수는 없어도 성인이 된 나는 여전히 어느 정도의 ‘호감, 비호감’의 잣대로 사람들을 가른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아니 나 자신에게조차도 그 분류의 절차며 결과를 뚜렷하게 표명하지는 않는다. 특히 ‘호감’이라면 몰라도 어떤 사람을 ‘비호감이다. 싫다’고 단적으로 말하는 것은 인격적 미성숙을 드러내는 것이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알고 있다. 성인이 된 나는 알고 있다. ‘좋은 사람(good object)’ 과 ‘나쁜 사람(bad object)’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는 좋음과 그렇지 않음이 공존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여전히 내 마음 한 켠에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있어서 내게 비호감이면 ‘나쁜 사람’일 확률이 많다고 속삭이고 있는 것 같다.


 >> 보이지 않는 산등성이 건너편


몇 년에 한 번, 마음먹고 시작한 어떤 사람과의 대화에서 죽사발이 되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최근에 ‘대화로 죽사발 되기’를 다시 한 번 경험했다. 마음먹고 어떤 대화를 할 때는 ‘내가 이 정도 표현해 주면 이 정도 반응이 나오겠지’ 하는 식의 그림은 누구나 그릴 것이다.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밑그림을 그려놓고 대화를 시작했는데 상대방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지점에서 예상치 못하는 반응을 보일 때, 그 때의 당혹스러움이란…. 흔하지 않은 경험이지만 이런 당혹스러운 대화를 만들어낸 주범은 대부분 ‘나의 시나리오’ 상의 문제가 아닐까 추정해 본다. 상대방과 대화의 장에 나가기까지 내 머릿속에서 그려졌던 그림이 상당히 자기중심적이었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어떤 행동에 대한 ‘나 중심적인 해석’이 잘못된 시나리오를 제작하게 되고, 그 시나리오를 들고 대화를 시작하면 성공할 확률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대화의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는 ‘사람은 참으로 다르다. 내 맘 같은 사람이 없다’라며 무성의하게 자조 섞인 한탄을 내뱉는다. “내 맘 바꿔 넘(남) 맘 생각혀 봐라”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께 많이 들었던 얘기다. 내 맘을 바꿔서, 그대로 온전히 바꿔서 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산의 이쪽에 서 있는 내가 산등성이 저 쪽에서 이 산을 바라보며 산세를 그리고 있는 상대방과 같은 산모양을 본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말이다. 나는 나를 뛰어넘어 보다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바라본다고 하지만 ‘객관화’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이 아님을 관계나 대화의 실패를 통해서 인정할 수밖에 없다.


>> 서른여덟 명, 남의 속마음


나는 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대방의 행동 뒤에 숨은 동기를 추측한다. 추측하면서 대부분의 경우 ‘내 추측이 옳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지만 결정적인 상황에서 내 추측이 오답임이 밝혀질 때, 그리고 그 판단착오에 대한 벌을 고스란히 ‘관계의 삐걱거림, 관계의 틀어짐’으로 받아야 할 때 나는 정말 당혹스럽다.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의 <남자 vs 남자> <사람 vs 사람>, 두 권의 책을 읽으면 총 38명 남자와 여자들의 속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름 하여 ‘심리평전’이다. 저자 자신의 사람에 대한 ‘호감/비호감’의 취향을 온전히 뛰어 넘을 수는 없다 하여도 읽다보면 ‘전문가의 손길(눈길?)’에 절로 무릎을 치게 된다. 38명의 사람들, 대충 알지만 그렇다고 딱히 아는 사람이라 할 수도 없는 유명인사의 행동과 행동 뒤에 숨은 동기를 인식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내가 그렇게도 다다르고 싶었던 산등성이 저 쪽으로 다가가는 느낌이다. 서른여덟 명의 타인을 이렇게 저렇게 씹어(?)보면서 소화를 시키고 나니 완전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영양 덩어리가 남았다. 여전히 사람들을 향해서 자연스럽게 드는 호감, 비호감의 정서야 어쩔 수 없다지만 내게 비호감이면 더 생각해 볼 여지없이 ‘안 되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내 유아적인 버릇을 딱 짚어주고 있다. 저자는 ‘현실감각’이라고 정의하며 설명하는 이것이 내게는 ‘성숙한 관계 맺기를 위한 1단계 과제’라고 여겨진다.


‘감이 없다는 게 별거 아니다. 다른 현실이란 있을 수 없고 내가 알고 있고 좋아하는 것만 현실이라고 우기다 보면 필연적으로 현실감각을 잃게 된다. 현실감각을 유지하려면 타인의 행위 뒤의 동기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현상적 시각이 필요하다. 내가 보고 싶은 상황만 보지 말고 나와 타인의 전체적 현실을 동시에 인식해야 하는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으니 문제다’<사람vs사람>에서.


>> 참고서를 참고하고, 교과서 저자에게 가기


예수님은 우리를 관계 속으로 부르셨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라고 배웠다. 나날이 기도가 뜨거워지고, 전도에의 열정이 불타오르고, 믿음의 진보가 느껴지는데 ‘관계’는 제자리걸음이라면 한 번 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성숙한 관계는 정혜신의 말처럼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현상학적으로 볼 수 있는 눈, 그리고 타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행동 뒤의 동기를 인식할 수 있는 인지력’이 전제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내게 있어서) 이 책은 신앙과 아무 관련이 없는 정신과 의사의 심리비평에 그치지 않는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에 순종하고 싶지만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모를 때 첫 걸음을 떼기 위한 도입서의 역할을 해주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을 비교적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바로 사랑하게 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관계의 문제가 척척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사람이 다르다는 것도 알고 대충 나와 어떻게 다른 것도 알겠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고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최대한 ‘선의의 해석’을 하도록 하자. 이 책의 행간에서 건져 올린 또 하나의 처방이다. 선의의 해석을 해도 여전히 용납되지 않는 비호감의 문제는 우리를 ‘이렇게 다르게 만들어 놓으신’ 그 분께 가져간다. 나와 그 사람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그 산을 만드시고, 그 산 위에서 한 눈에 내려다보시는 그 분의 손에 궁극적 열쇠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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