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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이 이야기

김 노인의 4월 15일 하루

larinari 2017.04.15 20:40



토요일 오전, 강의가 있어 일찍 일어났다. 식구들 아침으로 꽁꽁 언 베이글을 꺼내다 밥과 미역국을 앉혔다. 고난주간 저녁 기도회로 긴장 풀 새 없는 일주일을 보낸 남편도 그렇고. 눈 떠 보면 엄마도 없을텐데 마른 베이글 조각 씹고 있을 아이들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짠해졌다. 시간 여유도 있고 불려놓은 미역도 있어서 화장하는 사이사이 아침 준비를 했다.




그 많던 아침 잠이 주말만 되면 다 어디로 달아나는, 노인병 걸린 중2가 기침을 하셨다. 미역국 간을 보고 있는데 와서 백허그를 한다. '졸립긴 졸린데 엄마가 혼자 일어나서 혼자 밥 먹고 강의 가면 얼마나 쓸쓸할까 싶어서 나와봤어. 엄마, 강의 잘 하고 와.' 원조 티슈남 본능이 가끔 이렇게 중2의 삐딱한 열정을 뚫고 살아온다. '고마워, 우리 아들!' 동그란 엉덩이 토다토닥.




방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에 배꼽을 잡고 낄낄거리며 튀어 나온다. '엄마, 엄마. 오늘이 누구 생일인 줄 알아? ***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오늘이 김일성 생일이래. 큭큭큭. 그 생각이 딱 났는데 엄마가 미역국 끓이는 냄새가 나는 거야. 큭큭큭' 소파에 누웠다 다시 혼자 킬킬킬. 혼잣말을 하다 다시 킬킬. 아침 잠 없는 노인네 하나가 누워 계시는 것 같다. '김 노인, 오늘 김일성 생일이라 들떠서 다시 잠을 못 주무시는 거야?'




일정 다 마치고 들어왔는데 날씨가 아깝다. 늦은 오후지만 집 앞의 불곡산이라고 갔다 와야지 싶어 준비하다 '같이 갈래?' 했더니 김 노인 선뜻 따라나선다. 등산 시작하고 5분 만에 후회가 되었다. 김 노인, 입을 잠시도 놔두지 않고 투덜투덜 쫑알쫑알. 정상이 어디냐, 음료수를 사올 걸 그랬지 않냐, 조금만 쉬었다 가자, 난 도저히 못 간다, 지팡이 하나 구해서 짚으니 좀 낫다...... 이렇게 말 많은 할아버지는 처음이다.




실은 이 아들, 분당으로 이사 와 전에 없던 학구열을 붙태우고 계시는 중이다. 여차저차 하여 영어를 제대로 배우게 되었다.  '세상에 공부가 이렇게 재밌는 거 였냐'고 하더니 수학 학원까지 보내달라고. 다시 여차저차 고마운 만남과 만남으로 수학 공부도 하고 있다. 지난 화요일 세월호 3주기 연주회에 아빠는 못 가고 엄마만 가네 어쩌네 하고 있는데 '아, 나는 못 가는 거 알지? 학원 가야해서. 나는 못 가.' 라고 하더니 '와와와! 드디어 나도 이 말을 해봤다!!!!' (초등 저학년 때문에 가장 해보고 싶은 말이 '나 지금 학원 가야해서 못 놀아'였으니)




그렇게 딱 한 달 공부 좀 해보더니 김 노인, 벌써부터 걱정이다. 중간고사에서 100점 맞을까 걱정이다. 처음부터 100점 맞으면 엄마가 기대가 너무 높아질 텐데, 걱정이다. (100점 그렇게 쉽게 나오지 않는단다. 큐큐큐) 별 걸 다 걱정하는 김 노인이다. 하여튼 이 노인네 정상까지 가는 동안 하도 옆에서 투덜거려 산의 고도와 함께 혈압도 같이 상승했으나 잘 참았다. 손잡고 내려오는 길 '오늘처럼 우리 함께 있음이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너는 아니 이런 나의 마음을' 노래가 생각났다. 마음 먹고 시작했으니 공부를 좀 잘 했으면 좋겠으나, 뭐 그저 이렇게 좋은 봄날 함께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과분한 행복이다.


3년 전 오늘, 단원고 2학년 아들 딸들은 수학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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